'Love', 'Give Peace A Chance', 'Working Class Hero' 존 레논하면 떠오르는 노래들이다.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와 함께 팝 역사상 가장 성공한 그룹 비틀즈를 이끌었던 그는 그러나 비틀즈 시절부터 정치적인 가수였다. 1966년 한 인터뷰에서 “기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말해 살해 위협까지 받았고, 베트남전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해 미국 정부로부터 찍혔다. 오노 요코를 만나면서 레논의 정치 의식은 더욱 성장했다. 방송을 할 때면 언제나 정숙한 자세를 취했던 그는 이제 검을 짝짝 씹으면서 삐딱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9년 말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받은 MBE 훈장을 반납했고, 1970년엔 살인죄 누명으로 사형당한 제임스 헨러티를 위해 '영국 정부가 헨러티를 죽였다'라고 쓰인 가방을 들고 행진했다. 강도죄 혐의로 사형당한 흑인 인권 지도자의 게토 설립을 돕기 위해 요코와 함께 머리카락을 잘라 경매에 붙이기도 했다. 비틀즈가 해산하고 그는 정치 활동에 더욱 불을 붙였고, 신좌파와 과격 정치적 집단 이피, 그리고 흑인 무장 그룹인 블랙 팬더의 인물들인 타리크 알리, 로빈 블랙번, 제리 루빈 등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존 레논은 이들에 동조하고 실천적으로 연대했다. 1972년 6월 2장 짜리 앨범 [Sometimes In New York City]를 내놓았고, 이 앨범은 그때까지 나온 대중 음악 레코드를 통틀어 가장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서 존은 1971년 뉴욕시 애티카 형무소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주방위군이 발포해 43명의 사망자를 낸 사태를 성토했고('Attica State'), 영국 정부의 북아일랜드 식민정책에 대해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Sunday, Bloody Sunday'). 폴 매카트니가 열심히 음반을 만들고 순회 공연을 펼쳐 나갈 때, 존 레논은 거리에 나가 반전, 평화 운동을 하고 다닌 것이다. 국내 청취자들이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 흔히들 즐겨 듣고 감동하는 'Imagine'은 실상 존 레논 노래 중 가장 과격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곡이다. 나라도 없고, 종교도 없는 곳을 상상하다니...아무튼 바로 지금 세계적으로 1000만 명이 참여한 반전시위 현장에서도 그의 노래 'Imagine'과 'Give Peace A Chance'가 구호로 흘러나온다.
사망한 지 벌써 2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존 레논을 그리워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팬들은 계속해서 생겨난다.그가 이처럼 후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레논의 음악은 가수들을 포함, 수많은 예술가와 일반 대중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때론 섬뜩하리 만치 솔직한 가사를 쓸 수 있는 작사 능력, 화려하진 않지만 가슴에 직접 와 닿는 선율을 뽑아낼 줄 아는 작곡 실력, 그리고 심드렁한 듯 하면서도 로큰롤의 원초적 감흥을 끌어올리는 건조한 보컬 능력...존은 그런 음악적 능력만 가지고도 충분히 청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보다 깊은 감동을 주고 마음을 이끌었던 것은 결코 꺾이지 않는 그의 정치적, 사상적 신념과 행동이었다. 레논의 솔로 행보는 비틀즈 시절의 업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처져 보이는 게 사실이며, 그 때문에 그와 동시대를 살지 않은 후대의 레논 팬들은 비틀즈 멤버로서만 그를 알뿐 솔로 아티스트 존 레논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비틀즈 신화를 안고 간게 아니라 스스로 해체하면서 솔로 뮤지션으로 그가 보여줬던 신념과 행동이야말로 지금의 '전설'이 있게끔 한 동력이었다. 존 레논은 비틀즈라는 대그룹의 일원으로 정상의 위치에 있을 때에도 좀처럼 만족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다른 활로를 개척해나갔다. 어떻게 보면 그의 노래 'Imagine'의 노랫말처럼 존은 불가능한 낙원을 꿈꾸었던 몽상가였다. 그는 음악에만 열중했던 다른 '비틀'들과는 달랐다. 비틀즈가 미국에 진출했던 1964년에 이미 [In His Own Write]라는 책을 내놓는 등 저술 활동까지 병행했다. 그리고 1968년에는 밴드활동과는 별개로 새로운 연인이며 전위 예술가였던 오노 요코와 [Unfinished Music, No. 1: Two Virgins]와 같은 실험적인 노이즈 콜라주를 녹음하기도 했다. 왜소한 일본 여자, 그것도 자신보다 7살이나 많은 오노 요코였지만 레논은 그녀에게서 자신의 어머니 줄리아를 봤고 샘 솟는 듯한 예술적 영감을 떠올렸다. 때문에 폴 매카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커플은 1969년 3월 20일 지브롤터에서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여행지였던 암스테르담의 힐튼호텔에서 그들의 첫 정치적 시위였던 '평화를 위한 드러눕기 운동(Bed-In For Peace)'을 전개했다. 그 운동기간에 녹음된 싱글 'Give Peace A Chance'는 한동안 반전집회나 평화를 위한 시위에 단골 캠페인송으로 쓰였다. 1969년 10월 에릭 클랩튼(기타), 클라우스 보어만(베이스), 앨런 화이트(드럼), 그리고 오노 요코를 멤버로 한 자신의 백 밴드 '플라스틱 오노 밴드'와 함께 레논은 헤로인에 반대하는 노래인 'Cold Turkey'를 발표했고, 곧 이어 영국의 비하프라 침공과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대한 항의로 여왕으로부터 받은 MBE 훈장을 반납했다. 1970년 초반까지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War Is Over! (If You Want It)'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평화 캠페인을 계속했다. 1970년 4월 폴 매카트니가 일방적으로 비틀즈의 해산을 공식 선언한 후부터 존 레논은 비틀즈의 신화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솔로 첫 작품이자 지극히 자전적인 앨범이었던 [John Lennon/Plastic Ono Band]가 신호탄이었다. 예수도 엘비스 프레슬리도 밥 딜런도 비틀즈도 믿지 않는다는 'God'은 명백히 비틀즈의 위업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곡이었다. 1971년 존 레논은 또 다른 저항 노래 'Power To The People'과 그의 최고 걸작 음반 [Imagine]을 발표했다. 동시에 비자 발급을 둘러싸고 반미 투쟁이 시작된다. 미 이민국은 베트남 전에 반대하고 공공연히 당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존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이에 존과 요코는 애비 호프만, 제리 루빈, 존 싱클레어 같은 신좌파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정치적 행동을 벌여나갔다. 그 같은 레논의 발언은 모두 정치적인 곡들로 채워진 더블 앨범 [Sometime in New York City](1972)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1973년 그는 급기야 이민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을받기까지 했지만 끝까지 치열하게 투쟁해나갔으며, 마침내 1975년 10월 7일 미국 항소 법정이 추방명령을 뒤집었고, 레논은 1976년 여름 그린 카드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간의 이민 전쟁 때문에 지쳤는지 존 레논은 데이빗 보위의 [Young Americans] 앨범에 'Fame'을 공동 작곡한 후 갓 태어난 션과 아내 요코와 함께 전업 남편의 길을 선택해 음악계에서 조용히 은퇴했다. 그리고 1980년 정력적으로 음악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을 때 마크 채프먼의 총에 맞고 숨지면서 영원한 신화가 되었다.
비틀즈의 가장 중요한 두 인물 중 하나. '40년 10월 9일 태어나 '80년 12월 8일 사망했다. 레논은 '50년대 초반 고교얄개시절부터 밴드를 결성했는데 그 쿼리맨(Quarrymen)이라는 밴드에 기타리스트 폴 매카트니가 들어오면서 위대한 출발이 예고되었다. 쿼리맨이 실버 비틀즈(Silver Beatles)가, 또 비틀즈가 되었기 때문이다. '63년 'Please Please Me'가 영국 차트에서 톱을 차지하면서 시작되었던 '비틀즈 현상'은 세대를 넘어 수많은 비틀매니아를 낳았다. 비틀즈는 아이들(idol) 스타였지만 그들의 음악적 비전에 어울리기만 한다면 어떤 음악적 요소도 가져와 자기 것으로 만드는, 유연한 절충주의자들이었고 늘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려 애쓰는 실험주의자들이었다. '60년대 말 제반 비즈니스에 관련된 사항으로 멤버들 간 불화가 끊이지 않던 시절 레논은 이미 플라스틱 오노 밴드의 이름으로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그는 비틀즈 해산 이후 정치 운동에서부터 텔레비전 토크쇼까지 가장 파란만장한 역사를 쌓은 인물이었다. 레논은 '80년 마크 데이빗 채프먼(Mark David Chapman)에 의해 뉴욕에 있는 그의 아파트 앞에서 저격을 당했고 영원한 반문화의 상징적 존재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