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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리 아낙네들
고은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칫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릿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 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어느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
-<만인보>-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감각적(청각과 시각), 긍정적
◆ 표현
* 고단한 인생에 대한 시인의 긍정적 관점
* 청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활용(개 짖는 소리, 기러기 울음소리, 아낙네들의 마소리)
* 시상의 전개 방식(청각 → 시각, 시끄러움 → 잠잠해짐, 힘들고 고됨 → 정겨움)
* 선제리 아낙네들 = 못난 백성
→ 어둠의 역사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먹밤중 → 먹을 칠한 듯 캄캄한 밤중(시간적 배경)
* 새터, 중뜸, 갈뫼 → 토속적 지명
*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 종결어미만으로 아낙네들의 대화 장면을 표현한 것임.
'보이지 않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말의 내용을 드러내지 않고 종결어미만으로 제시함.
*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 자연과 아낙네의 일체감(조화)
기러기들의 울음소리와 아낙네들의 말소리를 조응시킴으로써 기러기들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모습과 아낙네들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대응시키고 있다. 자연물과 인간의
조화로운 풍경을 제시한다.
*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 아낙네들의 가난하고 고달픈 삶의 모습
* 빈 배 요기도 못 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장사하는 가난하고 고달픈 아낙네들의 삶의 모습을
반어적으로 표현
* 그래도 이 고생 ~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 주제의식의 내포
민중의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
고달픈 삶을 사는 민중들의 공동체적 정서와 유대감이 나타남.
* 어느 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
→ 시끄러운 개 짖는 소리로 시작했던 시가 그 소리가 잠잠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는 시에서 포착한 삶의 양상이 '힘들고 고됨'에서 '정겨움'으로 변화되는 것과
어울린다. 이미지가 청각에서 시각으로 전환되는 양상 또한 나타나 있다.
*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 → 어둠 속에서 별이 빛을 발하는 모습(활유법)
◆ 주제 : 고단하면서도 정겨운 선제리 아낙네들(=민중)의 삶
고달픈 생활이지만 의좋게 살아가는 민중의 삶
[시상의 흐름(짜임)]
◆ 1~8행 : 선제리 아낙네들이 밤에 장에서 돌아오는 장면
◆ 9~20행 : 선제리 아낙네들의 고단한 삶과 정겨운 마음씨
◆ 21~23행 : 아낙네들의 정겨운 모습 위에 깔리는 밤길의 정경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자연 풍경에 어우러진 인간의 모습을 묘사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선제리 아낙네들이 밤에 장에서 돌아오는 장면을 개 짖는 소리, 기러기 울음소리, 아낙네들의 말소리 등을 통해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아낙네들은 비록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살고 있지만,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며 고생을 '끼리끼리' 나누면서 의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난하고 고달픈 생활 가운데서도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아낙네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 시인은 이를 긍정하며 신뢰를 보내고 있다.
이 시에 나오는 선제리는 시인의 고향인 전북 군산시 옥구읍 미룡리와 읍을 같이 하고 있는 이웃이다. 시인은 고향의 아낙네들과도 같은 정겨운 인물들의 삶을 관찰하고 이를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 더 읽을거리
이 시에서는 민중의 꾸밈없는 생활의 한 부분인,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서민적인 삶의 모습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즉 중소 도시의 변두리에서 근대화의 혜택보다는 피해만 입으며 살아온 인생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시인은 유연한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런 민중적 삶의 모습은 우리들과 가장 친근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어두운 밤길을 걸으면서 무서움과 지루함을 쫓으려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아낙들과 그들을 마중 가는 남정네들의 모습마저도 눈에 선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물건을 다 팔고 난 텅 빈 바구니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텅 빈 배를 냉수로 채우면서 길을 재촉하는 아낙의 모습이 어머니의 얼굴과 겹쳐 서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짖어대는 개와 기러기 '어둠의 눈(별)'들은 이들에게 적의와 친근감을 동시에 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아울러 이런 장치를 통하여 민중의 삶이 외로운 것만은 아님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시에 형상화된 생활의 진실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주변의 삶에 대한 또 다른 애정을 확인하고, 그들과 같은 삶 속에 우리 자신을 다시 위치시키는 행위를 반복한다.
특히 이 시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어느 측면에서는 일상적인 삶의 형상화를 통하여,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단계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역사적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한밤중을 저주하기보다는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들이 모여서 함께 나누는 '의좋은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 형상화된 민중은 확실한 역사의 전망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눈(별)의 멀뚱거림을 위안 삼아 길을 가고 있다. 자신들의 생활에 대하여 막연하나마 '밤은 내가 밤이다'라는 새로운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도중에서 그만둘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선제리의 아낙네 이야기가 주는 객관적인 정서와 그들의 이야기가 객관화된 시적 대상으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이런 시적 서술 구조는 서정 장르가 주로 의존하는 주관성과 주관의 진술이 주는 서정의 순간성이 어느 정도 극복되면서, 나름의 서술적인 구조가 주는 서사적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객관성을, 시라는 장르를 통하여 구현한다. 이런 경우에 독자의 감흥도 직접적으로 시인의 정서에 동화되지 않고, 시 자체가 주는 객관의 정서에 독자가 감흥을 하는 방식을 보인다. 즉 시에 서술된 사건이나 이야기에 대하여 독자가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받아들이는 형태를 취한다.
[작가소개]
고은 : 고은태 시인, 전 대학교수
출생 : 1933. 전라북도 군산
데뷔 : 1958년 시 '폐결핵'
수상 : 2017년 제4회 이탈리아 로마재단 국제시인상
2015년 제2회 심훈문학대상
경력 : 2015.07 세계한인지식재산전문가협회 회장
2014.09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평화친선대사
작품 : 도서, 공연, 영화, 기타
본명은 고은태(高銀泰)로 1933년 8월 1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한국의
전직 시인이다.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부터는
문예창작과 석좌교수로 재직했으나 #, 2017년-2018년 미투 운동 때 수십년간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자행해 왔다는게 밝혀져 모든 분야에서 제명되었다.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설하여
활동하였으며 또한 1987년 음악, 미술, 공연, 문학 등 진보적 문화예술계 전체를
아우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창설하여 초대 공동의장을 맡았다.
1982년, 그의 나이 49세에 이상화와 결혼해 화제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983년, 그의 나이 50세에 딸 차령을 얻었다.
2018년 미투 운동 때 최영미 시인에 의해 과거 상습적인 성추행 행각이 폭로되면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서울시는 2월 28일 고은을 기리기 위해 3억 원을 들여
서울시청사에 조성한 만인의 방을 즉시 철거했으며, 기타 다른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기념 사업도 모두 취소되었다. 국내 대표 문인단체인 한국작가회의의
상임고문직에서도 사퇴하고 탈퇴했다. 다만 이미 수여된 은관 문화훈장 및 한신대학교의
문학 명예박사 학위 등은 박탈되지 않았다.
고은은 성추행 의혹을 부인하며 2018년 7월 25일에 최영미 시인을 상대로
10억 7,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1심 및 2심 소송에서 모두
패소하였다. 그는 2019년 11월 8일에 내려진 2심 판결 이후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간간히 글을 발표하고 있다.[3]
3. 생애[편집]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3년[4] 군산 미룡동 용둔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은 '타카바야시 토라스케(高林虎助)'였다.
훗날 고은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아야겠어요.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작가들이 대부분 조선 이름을
썼던 게 아닌가 하는데요?"라는 질문을 받자 최남선, 이광수의 예를 들며 반박하기도 했다.
군산고등보통학교(군산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때 고은의 일가친척들은 대부분 좌익 활동을 했으며 당숙은 인민위원장이었다.
고은 일가는 6.25 당시 용둔리 일대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고,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원수 사이가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자 고은은 군산에서 도피하여 선유도로 피신했다.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여 1.4 후퇴로 국군과 UN군이 밀려나자 선유도에서 나와
군산으로 돌아왔다. 당시 무성영화의 변사(당시의 성우 겸 나레이터)를 하려고 했으나
처음 상영회에서 너무 떨어서 잘린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인맥을 통해
군산북중학교에서 잠깐 교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과 UN군이 다시
재반격을 시작하여 치고 올라가자 다시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6.25 도중에 '고은'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51년 봄에는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 고막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5]에 군산 동국사에서 기승(奇僧) 혜초(慧超)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승려 생활을 하면서 참선과
수양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았다고 거리낌없이 말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혜초 스님에게 소개받아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를 찾아가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고승 효봉 스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고은의 삶에서 '효봉 스님의 제자'란
칭호는 두고 두고 이름값이 되었다.
고은이 승려 시절에 법명을 받은 과정이 불확실하다. 어디에서는 고은이 처음
은사로 모신 혜초 스님으로부터 중장(中藏)이란 법명을 받았는데,
나중에 효봉 스님의 제자가 된 뒤 일초(一超)란 법명을 다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는 혜초 스님이 처음부터 '일초'란 법명을 주었고,
'중장'은 혜초 스님의 법호[6]였다고 한다.
1957년 효봉 스님이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자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이 되었다.
1958년 11월 〈현대시〉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폐결핵〉이,
서정주의 추천으로〈천은사운〉 〈봄밤의 말씀〉, 〈눈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냈다.
1962년 종단의 징계를 받아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 징계 사유는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훗날 고은은 4.19 혁명 정신에 자극을 받아 승단의 개혁을
주장했다가 종단의 정치보복성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고은의 환속은 성추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종단의 최고 어른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효봉 스님이었기 때문에
고은이 정치적인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높지 않다.
환속 이후 1963년 봄 고은은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에서 그의 생애에서
세 번째로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자신을 물속에 수장시킬 큰 돌과
로프를 가방 속에 숨기고 제주행 배를 탔다가 술을 마시고 잠든 후 깨어보니
제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고은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4년여 동안
제주도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68년 제주도에서
가짜 고은 사건이 터졌다. 고은을 사칭한 '가짜 고은'이 지역 유력자의 딸과
사기 결혼을 했다는 것.
1968년 수필집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를 냈는데, 수필집에서 자기 스스로를
'성(聖) 고은'이라고 신격화하여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1970년 짧은 시집 〈세노야〉를 펴낸 뒤, 한동안 작품을 내지 않고 번역가로 활동했다.
이무렵 고은은 북한산 계곡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했다가 근처에서
훈련하던 예비군들이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등단 이후 1970년까지 발표된 그의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그를 두고 흔히 허무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 뒤 1974년부터 그의 시는 경향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 이후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적극적으로 담는 저항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70년대 중반부터 갑자기 성향이
완전히 바뀐 것에 대해 고은 본인은 "이쪽으로 흐르던 물이 다른 쪽으로 급격하게
돌아서 흐르기 시작한 것"에 비유했다. 이후 그는 70년대 최고의 저항시인으로
꼽히게 되면서 반독재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아래 항목 참조)
1983년 중앙대학교 영어과 이상화 교수와 결혼한 뒤 부인의 직장이 있는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안성 대림동산 전원주택 단지에서 살았다.
2013년 수원시의 구애로 안성을 떠나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이주했다.
이에 광교산 일대 주민들이 특혜 및 혈세 낭비라는 이유로 시위를 하며 논란이 되었다.
아마 본인들 거주지 주변의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위해 애먼 고은을 타겟으로 삼은 듯
한데 성격 상 수원을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수원시 측에선 난감하게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 떠나게 되면서 주민들은 욕을 엄청 먹는 중이었다. 참고로
저 구역은 장안구 상, 하 광교동으로 영통구에 속한 광교신도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4. 정치적 행보[편집]
1958년 등단 이후 고은은 1970년대 초반까지 쭉 순수문학만을 지향해왔다.
그러다가 1974년을 기점으로 갑자기 저항시인으로 변모하여 반독재 투쟁에
앞장 서게 된다. 일부 문헌에는 1971년 3선 개헌 반대 때부터 고은이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고 쓰여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에 대해 고은 본인은
훗날 3선 개헌 당시 자신은 '허무'에 빠져 '무각성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1974년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이후 고은의 행적을 보면 반미, 친북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정작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민주화,
반독재 활동은 생각보다 비중이 크지 않다. 사실 고은의 반독재
민주화 활동을 보면 반미, 친북, 친미성향 정부에 대한 반정부 활동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운동권 반미주의 측면에서 고은은 독재자인 카다피,
김정일에게 찬사를 보낸 바 있기 때문에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라고 부르기에는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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