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
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산 모양이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 처음 놀란 기러기가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도리어 근심이 되는 것은 노포(老圃, 농사일에 경험이 많은 농부)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향해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
윗글은 권문해(權文海)의 《초간선생문집(草澗先生文集)》에
나오는 상강 무렵을 아름답게 표현한 내용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여덟째 절기 ‘상강(霜降)으로
말처럼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벌써 하루해의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습니다.
9월 하순까지도 언제 더위가 가시냐고 아우성쳤지만,
어느덧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노랗고 붉은 물감으로 범벅을 만든 듯 겨울을 재촉합니다.
이때는 추수도 마무리되고 겨울 채비에 들어가야 하지요.
▲ 서리를 맞은 단풍, 겨울을 재촉한다(출처, 크라우드픽)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진 날 한 스님이 운문(雲門·864~949)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바람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운문 선사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니라.
나무는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고,
천지엔 가을바람만 가득하겠지.”라도 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은 서릿발의 차가움으로 삭막한 풍경이 됩니다.
하지만 국화뿐 아니라 모과도 상강이 지나 서리를 맞아야 향이 더 진하다고 하지요.
꽃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향기는 느끼는 사람의 몫이며,
상강을 맞아 그 진한 국화 향을 맡을 수 있는 것도 각자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