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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2. 연중 제 25주간 화요일. 묵상글 ( 0310 ~ 04:50, 05:05, 05:37,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03:10 ~ 04:50, )
*** 2차분 올리기 위해서 1차분 확인을 하다보니 늦게 03:10분 올린 것이 등록이 안되여서 더 늦어졌다.
이젠 몸 ,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하지 못하니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절감하는 씁슬함과 일찍 클릭하셨던 분들께 미안함이 함께 ~~~
@ 1차 공유를 등록을 아니한 것이 아니고 아래 댓글 1처럼 다른 곳 < 트락. 9-2. 1 -도올 ( 동양철학) 등> 에 올렸던
것임( 11:05분 발견)
2차 공유할 묵상글< 04 ~ 05시,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05:37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05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아직.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11/29) 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까지, 안되면 07시쯤(이후)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2026. 09.04. 추기>
*** 1차, 2차로 나누어 프란치스칸 수도자 몇 분의 글만을 올리면서도 어느 땐 글이 제가 예측한 시간에 올라오지가 아니하여
어느 땐 저의 몸상태로 수면 시간이 들쭉날쭉하여 "1차공유 전일 22시 이전, 2차 공유 04-05시 " 지켜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9월 22일)도 김찬선 신부님 강론글은 어떤 사정과 형편인지 05:25 현재 올라오지 아니하고 있다,
어제는 새벽녁 잠이 들었다가 새벽미사를 놓쳤고, 오늘은 위 1차공유 밑 글 이유로 새벽미사 참례를 포기하였는데
제가 접하는 강론글, 묵상글을 올리려고 새벽미사 참례를 포기하였는데 ???!!! 아직이다. (05:30)
**** 공지 (H 260707) 에 따라, 위 3) 나)로 정하고 ' * * ' 로 하고자 했으나
제가 더 자유스럽고 가능하면 새벽미사 참례를 여유롭게 하기위하여
전일 22이전에 1차분 올리는 것도 못올릴 수도 있고 그럴경우 댱일 4 ~ 5시까지 1,2차분 함께 올릴 수도 있고,
아니면 당일 7시 이후 시간대에도 자유롭게 올릴 수도 있아오니 ,
저의 글 올리는 시간이 들쭉날쭉함에 신경을 쓰시지 마시고 , 제가 올리는 글을 다른 분들에게 전파하시는 분은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신 곳에
들어가 공유를 하시기 바랍니다. ( - 요약, 제가 올리는 몇 분글도 정해진 시간 없이자유롭게 올림)
이해하여 주시고 이 카페를 인수받아 잘 운영할 분들에게 권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2026.09. 22. 06:0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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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여러 가지 교훈>(잠언21,1-6.10-13)
1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2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3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4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5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6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10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11 빈정꾼이 벌 받으면 어수룩한 자가 지혜로워지고 지혜로운 이가 지도를 받으면 지식을 얻는다.
12 의인은 악인의 집을 살피고 악인을 불행에 빠지게 한다.
13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복음<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다.>(루카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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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2. 연중 제 25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9.21 20:33
2026년 9월 22일 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8,19-21
짧지만 마음을 흔드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그분을 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다.”
얼핏 성모님을 밀어내시는 듯 들리지만, 정반대입니다.
성모님이야말로 ‘말씀을 듣고 실행한’ 첫 번째,
가장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천사에게서 말씀을 들으시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하고 응답하셨으며,
평생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간직하며’ 살아 내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성모님을 비롯한 모든 참된 가족의 ‘조건’을 밝히신 것입니다.
바로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가 강조했듯,
말씀은 ‘귀’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들은 말씀이 손과 발에까지 이르러 ‘행동’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가족이 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신앙은 열매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화 주간’을 위한 소중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문화 ― 음악·미술·시·독서 ― 는 자칫
‘감상하고 소비하는 것’에 그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좋은 책을 읽고, 명화를 보고도
삶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족처럼 문 ‘밖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읽기만’ 하고 ‘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고 읽은 그 말씀과 아름다움이 삶으로 옮겨질 때,
우리는 문 ‘안으로’ 들어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머리에 머무는 문화는 메마르고,
삶이 되는 문화는 열매를 맺습니다.
성시간의 ‘고요한 들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페테리스 바스크스가 노래하듯,
‘침묵의 열매는 기도… 마침내 봉사와 평화’입니다.
고요히 ‘듣는’ 데서 시작해 ‘실행(봉사·평화)’으로 여물어야
그 들음이 참된 열매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문 밖에 서 있지 않은가?
나는 감상한 아름다움을 ‘삶(실행)’으로 옮기는가?
나는 성모님처럼 ‘듣고 그대로 사는’ 사람인가?
나의 신앙과 문화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
주님,
말씀을 귀로 듣는 데 그치지 않게 하소서.
들은 말씀을 손과 발로 실행하게 하시어,
성모님처럼 당신의 참된 가족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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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2. 연중 제 25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비폭력: 사랑의 넘침!
2026.09.21. 16:37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께서는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구원하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비폭력: 그리스도인 소명
비폭력: 사랑의 넘침!
2026년 9월 21일 월요일
국제 평화의 날
사제이자 신학자인 엠마누엘 카통골레(Emmanuel Kathongole)는, 비폭력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지를 성찰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 안에서 본받고 체험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폭력에 중독된 세상 안에서, 비폭력에 대한 헌신은 어리석은 생각이자 위험한 유토피아적 환상처럼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믿음으로 무뎌져 왔습니다. 우리는 오직 폭력만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거나, 악인들이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해치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거짓입니다…. 저는 이를 몸소 경험했습니다. 저는 우간다에서 이디 아민(Idi Amin:1925–2003)의 잔혹한 독재 아래에서 성장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저는 이디 아민과 싸우기 위해 '해방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폭력을 통한 해방이라는 거짓에서 저를 구해주신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실제로 그 해방 전쟁은 아민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곧 '해방자들'이 도리어 살인적인 독재자로 변했고, 우리는 다시금 그 '해방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또 다른 해방 전쟁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싸움을 끝내기 위해 싸우는 역사가 이어져 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명 안에서 당신에 관해 드러내신 독특한 모습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 위에서 폭력적인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악에 대해 사랑의 넘침으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곧 하느님의 길이며, 복음의 낯선 논리입니다. 엠마누엘 카탈리코 대주교(Emmanuel Kataliko:1932–2000)는 2000년 사순 시기 메시지에서 부카부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복음의 논리는 권력의 논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논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이들을 택하시어 강한 자들을 무너뜨리십니다. 악의 넘침에 대한 유일한 응답은 사랑의 넘침입니다." [1]
사랑의 넘침이야말로 혁명을 빚어내는 힘입니다. 그것은 비폭력적 사랑의 혁명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그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일깨워 주신 것처럼,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온유의 혁명으로 부르셨습니다." [2]…
이 비폭력적 사랑의 혁명은 허황된 유토피아적 환상이 아닙니다. 실제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그 온유의 혁명에 대한 증언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 비폭력의 길이 요구하는 바를 배울 수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문지히르와(Christopher Munzihirwa) 대주교는, 암살되기 직전 부카부의 신자들에게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길"로 들어가도록 초대받았음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문지히르와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길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한 경건한 권고가 아니라,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건설하는" 사회적 비전과 참여로의 초대였습니다. [3]…
수많은 증인들의 구름에 둘러싸여, 우리 또한 폭력에 '아니오'라고 말할 뿐 아니라, 폭력에 사랑의 넘침으로 응답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온유의 혁명 안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점점 더 용서가 두려움, 수치, 분노, 증오, 고립,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모든 것을 포괄하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Martin K.
Reference
[1] Emmanuel Katongole, Born from Lament: The Theology and Politics of Hope in Africa (William B. Eerdmans, 2017), 126.
[2] Pope Francis, Evangelii Gaudium, 88.
[3] Katongole, Born from Lament, 168.
Emmanuel Katongole, “As If from Another Planet: Nonviolent Witnesses from Africa,” ONEING 10, no. 2, Nonviolence (Fall, 2022), 87–88, 89, 91, 93. Available in print and PDF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분열을 드러내는 벽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다양한 색과 아름다움을 품은 벽처럼, 우리는 한쪽을 고르지 않고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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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2. 연중 제 2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5479
2026.09.22 05:33
- 예수님의 참 가족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공관복음에서 공생활 중 성모님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오늘 이 사건 때문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어머니가 나타나시고 나서신 걸 주님께서 싫어하셔서
이후에는 나타나시지 않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어머니가 당신을 찾아오신 것을 홀대하거나 냉대하신 걸까요?
성모님께서 오늘 주님을 찾아오신 것은 진정 부적절한 것이었을까요?
그래서 홀대나 냉대를 하신 것일까요?
어제 늘 듣는 음악 방송을 들을 때 저는 혀를 끌끌 찼습니다.
아들이 군대에 가 훈련을 마치고 갓 자대배치 받았나 봅니다.
그런데 아들이 새로운 환경과 선임 사병들 때문에 불안해하였고
그것을 들은 엄마 역시 불안해 공중파에서 그 사연을 나누는 거였습니다.
제가 혀를 끌끌 찬 것은 그것을 엄마에게 얘기하는 그 아들이나
그것을 듣고 공중파를 통해서 위로받으려고 하는 그 어머니나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나 딱하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아들이나 엄마나 불안을 자기 안에 품고 혼자 견디거나 혼자 해소하지 못하고
꼭 바깥에 표출해야만 하고 그래서 아들은 엄마가 걱정할 것 생각지 않고
엄마에게 얘기하고 엄마도 그걸 공중파에까지 얘기해 위로받으려 드는 것인가?
그러면서 어머니 걱정하실까 봐 얘기도 하지 않고 군대에 갔던 저,
그것이 오히려 어머니에게 불효인 것을 몰랐던 제가 생각났습니다.
아무튼 오늘 성모님이 주님을 찾아오신 것도 이런 면에서
부적절하게 찾아오신 것이고 그래서 주님은 냉대하셨을까요?
사실 공관복음 중에서 마르코복음은 오늘 얘기 바로 전에
예수님이 베엘제불이 들렸다는 소문이 돌고 그래서 소문을 들은
주님의 친척들이 주님을 붙잡으러 찾아 나섰다는 식으로 얘기를 전하지요.
이것이 사실일 수 있고 설득력도 있지만 마르코복음이 아닌
마태오나 오늘 루카 복음은 성모님이 찾아온 이유를 얘기하지 않고,
주님께서 혈육의 가족이 아닌 영적인 가족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전하며,
그래서일까 공관복음 모두 이 얘기에 <예수님의 참 가족>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왔다고 했을 때 참 가족에 대해 얘기했다고 하니
성모님을 비롯하여 주님을 찾아온 가족들은 거짓 가족인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아니 아닙니다.
성모님이 찾아오신 것도 부적절하지 않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냉대하신 표시가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주님의 참 가족이 되라고 초대받은 것이라고,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여 어머니들이 되도록
초대받은 거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고 믿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우리도 성모님처럼
신실한 사랑으로 주님을 모시고 순종으로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면
성모님처럼 주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어머니들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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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2. 연중 제 25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41?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22. 05:00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께서 거져 주시는 선물인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믿으며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조건처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하고 말씀하실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시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산상설교의 결론으로서 하신 말씀의 맨 끝에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루카 복음을 통해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은총이 거져 주어지는 선물이라면 왜 이런 모순적인 어려움이 생기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애를 써야만 생명으로 이끄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저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 은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좁은 문, 좁은 길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좁은 문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조건 없이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겸손한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없는 부족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주님을 만났던 복음서의 죄인들과 병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어제는 갑자기 제가 뭔가 허전하고 공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안 되는데... 주님을 더 진실되게 만나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어떤 확신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이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제가 주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묵상을 더 하다 보니, 제가 주님께로부터 사랑받을 어떤 자격을 갖추고 나야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저의 세상적 논리가 문제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진복팔단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면서 권고하시는 것처럼 '주님 사랑 때문에 우리 삶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어떤 시련 속에서도 그 사랑을 굳게 믿으며 기쁨과 긍정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복팔단 맨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주님의 그 크나큰 사랑을 믿기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복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주님 사랑의 힘을 믿는 사람의 삶의 자세를 아주 명확하게 표현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삶의 허전함과 공허함을 무의시적으로 느끼는 것도 어쩌면 의식적으로 그 사랑의 주님과 함께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하는 노력(수양)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또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도 받고 있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은 깨어 의식하며 주님 사랑을 새기는 것이고,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저는 밭일이든 집안일이든 이런 저런 일들을 힘들게 하면서 이런 저의 노력이 주님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갖추는 어떤 조건이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이런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절대적으로 먼저 하느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미쳐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14; 21).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순전히 우리를 위해 온전히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374–444)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가치를 제자들의 가치보다 낮추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을 그들과 같은 지위로 높이셨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머니께 드려야 할 존경을 경멸하거나 형제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사랑을 무시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하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신 분께서, 어떻게 형제들에게 드려야 할 사랑을 거부하실 수 있겠습니까? 가장 큰 존경과 가장 온전한 애정은 우리가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 곧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다'라고 하신 것은, 그분의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철저하고 합당한 사랑을 베푸신다는 뜻임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제자직의 의미를 강조하셨지만, 동시에 가족 관계에 대한 암시도 담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모든 이는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그렇다면 왜 더 넓게 이 가족의 테두리를 확장할 수 없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가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가 다 우리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가 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의식이 영혼 깊숙이 자리 잡는다면, 우리는 결코 어떤 가족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인간 관계가 열려 우리 자신이 바로 그 그리스도의 은총을 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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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2. 연중 제 25주간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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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 2026.08.28. 03:0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207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 2026.08.29. 03:3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12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 2026.08.30. 05:42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42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2026.09.02. 06:35 )
http://www.ofmkorea.org/ofmkfb/584513
가난과 기도 7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 2026.09.04. 19:57 )
http://www.ofmkorea.org/ofmkfb/58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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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두에게 길을 묻다.
9-2. 도움될 다른 자료
1. -- 도올 (동양철학) 등 125번
260922. 연중 제 25주간 화요일. 묵상글 ( 03:10, )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ULKx/125
김 루도비꼬 조회 27 26.09.22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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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2. 연중 제 25주간 화요일. 묵상글 ( 03:1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 03:10 )
2차 공유할 묵상글< 04 ~ 05시,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아직. 호명환 신부님: 아직.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아직. >
< 이하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