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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5. 큐티
마태복음 26:36 ~ 46
기도의 최고봉
관찰 :
1) 겟세마네 동산에서
- 3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 예수님은 9명의 제자들에게 여기 앉아 있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호시탐탐 예수님과 무리가 분리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한적한 곳에, 그것도 밤에 제자 열 둘 만을 데리고 기도하는 이런 순간을 그는 기다렸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 때 예수님을 잡고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검과 몽치로 무장된 큰 무리를 데리고 나아오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하심은 기도에 동참하라는 것이었지만 이들은 자거나 졸거나 스승을 팔기위해 무장된 무리들을 데려오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려가심
- 37절.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과거에도 변화산에 같이 데려가신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핵심중의 핵심 멤버들로서 최소한 이들은 예수님을 위해 중보하는 흉내라도 내어주실 바란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믿고 신뢰하는 자들이었건만, 이들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고통스러운 길을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 홀로 지셔야만 했던 고통의 십자가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죽음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상태
- 38절.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 예수님은 이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향후에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죽음 앞에서 의연하고, 검투사의 칼이나 사자와 같은 맹수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고 떨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심지어 땀방울이 핏방울이 떨어지듯이 심하게 애곡하며 기도함으로 붉은 땀방울이 흐르도록 간구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이제까지 의연하게 두려움 없이 휘적휘적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오셨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이렇듯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다 뒤집어쓰고 죄인으로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의인으로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죄를 뒤집어 쓴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음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의 고통은 예수님을 고민하게 만들거나 죽게 만들 수 없습니다. 물 한 모금 없이 40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신 시간을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질병을 고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육체적인 고통으로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인간과 동일한 고통을 당하시고, 그 통증을 똑같이 느낀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능히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렇듯 심히 번민하여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시는 이유는 삼위일체, 에하드(하나라는 뜻의 히브리어.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실 때 사용)이신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단 한 번도 분리되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이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죄인으로 죽어서 지옥에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눈 앞에 닥친 것입니다. 이것 만큼은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경험해보지 못한 분리의 고통이요, 번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육신의 고통이나 수치에 대해서는 의연하게 대치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분리를 경험해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서 고민하고 죽으리만치 슬퍼하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분리된 채 지옥에 들어가는 모든 심령들의 상황을 경험하시면서 또한 슬퍼하시고 번민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주님의 이 기도는 기도의 최고봉입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자신의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든 상황의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자신을 제물로 드려서라도 그 길을 걷는 위대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반응을 올려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최고봉은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5)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 40절.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 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 42절.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43절.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 44절.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 예수님은 세 번 동일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즉, 세 번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통곡하며 애곡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만치 에하드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분리를 경험해야 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 각 각 한 시간씩, 총 세 시간의 기도. 이 시간 동안 가룟 유다는 무리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횃불을 밝히며, 검과 몽치를 들고 숨죽인 채 예수님을 잡으러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 45절.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리라” => 세 번의 기도가 끝난 후 예수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고 명하십니다. 때가 다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늦었습니다. 기도할 때가 있고,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게 되는 때가 되었기에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 46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예수님은 자고 있던 제자들을 깨워서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뭐, 꼭,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주님은 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반응에 대하여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교회가 발생하고 성장하면서, 이 장면을 마태는 얼마나 설교했을까요? 그러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을 자신들이 증거하면서 얼마나 부끄럽고, 자신들의 완악함을 수없이 발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심히 번민하여 죽게 되었었지만,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변화하십니다. 제자들을 깨워서 이 일에서 피신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만들어 주십니다. 만일 군병들이 들이닥쳤을 때, 제자들이 다 자고 있었다면 이들은 붙잡혔을 것이고,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이 응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내주고 혼비백산하여 다들 자기 살길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주님은 제자들의 안전을 확보하십니다. 자신의 사후에 일어나야할 교회의 시작을 위해서 하나님은 꼭 필요한 사람들을 이렇게 눈동자처럼 보호하신 것입니다.
가르침 :
1) 제자들이 철없이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는 고백을 하는 상황에서 주님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제자들을 책망하거나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예수님은 잠시 후면 잡히실 것이고, 그들은 보호되어야 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한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가시는 것이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2) 겟세마네의 기도는 정말 기도의 최고봉입니다. 나의 욕념을 내려두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위한 것이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또한 참된 기도의 자세입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에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기도하는 기회마저도 날려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에게 떨어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의 감투에 눈이 먼 자들은 예수님을 위한 중보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수제자들도 예수님을 위한 그러한 중보자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4) 겟세마네의 기도 중에 가룟 유다는 무리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잡고자 기세 등등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고 망한 기도인가요? 최소한 이들 무리들이 걸어오다가 거꾸로 가거나 해야 했던 것 아닌가요? 그래야 예수님이 영험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기도를 하셨어도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하속들에 의해 잡히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내 원대로 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내 원이 하나님의 원이 되어서 응답되면 얼마나 기쁘고 좋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나라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다 헌신한다 해도 부족할 따름이 될 것입니다.
적용 :
1) 언제나 내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포기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 십자가이고, 십자가로 인해서 나는 나를 죽이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B.C.와 A.D.를 나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B.C.에 속한 사람도, A.D.에 속한 사람도 모두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문설주의 문이 된다. 내가 죽어 그 십자가를 통과하는 순간, 나는 현재의 시공간에 존재하되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끝끝내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했듯이 나의 욕념을 포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름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분리되기를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시는 주님과 달리 나는 어찌도 하나님과 분리되어 죄짓기를 손쉽게 생각하는지요? 하나님 안에 거하면 죄지을 수 없기에 도망나오고 빠져나와서 하나님 나라를 탈출하듯이 나와서 나의 옛 자아를 다시 되살려 죄짓는 즐거움에 다시 빠져들곤 합니다. 주님과의 연합의 깊은 누림이 이 뒤틀려진 구조를 벗어날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듯이, 그것을 나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나도 예수님 안에 온전히 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죽기보다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고 번민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시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분리되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덩달아 나 자신도 주님과 분리될 근거가 존재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결국 주님과 분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께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3) 예수로 충만한 존재가 되기를 다시금 간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