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배 다니엘이 바벨론 땅에 포로되어 가서 그 나라 왕의 특별 교육과 관리 대상이 된 때에 아래의 본문에서와 같이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기 않기로 결단한 이유는 그 이방 왕이 하사하는 음식 가운데에는 우상들에게 경배한 것들, 율법에 부정하다고 정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왕이 정한 음식을 회피하기로 한 것은 포로의 신분으로서, 아니 설령 포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사안이었던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다니엘은 그 정도까지의 말씀의 신앙, 다시 말해 한 두 구절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을 정도의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다니엘이었기에 현실적, 상식적으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화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오히려 반대가 되었고, 죽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래 본문과 뒤이어 지는 말씀들을 보면 그때의 담당 환관장에게 하나님 외에는 세상적으로 다른 특별한 이유들이 없었음에도 은혜와 긍휼을 얻게 되었고, 채식과 물만으로도 왕의 진미를 먹었던 자들보다 더욱 더 얼굴이 윤택케 되었으며, 게다가 학문과 지혜, 환상과 해몽의 은사들까지 받게 되는 등과 같은 기적들을 생생하고도 강렬하게 누리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에 있어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다 실행하시고, 특히 그 한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한 실질적인 권능과 경험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성령님께서는 단적으로 말해 말씀의 영이신 것이기에 진정 그 정도까지의 말씀의 신앙이었던 다니엘에게 그렇게까지 생생하고도 강렬하게 역사하시고 경험케 해 주신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금만 더 통찰해 봐도 그 정도까지 말씀의 신앙이었던 다니엘은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근본적으로는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전부터 계획, 약속, 준비,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경험케 하시며 성취해 나가시는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에도 합당하고 또 합당했던 것이고..
더 나아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공의와 형평과 질서의 하나님 또한 아니실 수 없는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일반 은총들 뿐 아니라 특히 믿음으로 인한 값없는 은혜들, 공짜와 같은 선물인 역사들을 위해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생들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께서도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어 말씀대로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분인 것이기에 그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에도 시간과 공간들을 뛰어 넘어 합당하고 또 합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근원적으로는 그와 같이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일 뿐 아니라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렇듯 그 자체가 말씀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에 있어서야 말로 합당하고 또 합당함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정도까지의 말씀의 신앙이었던 다니엘에 있어 그 자체가 결코 쉬울 수 있는 일임이 아닌 것일 뿐더러 결코 인간적인 힘이나 의, 세상적인 능력이나 방법들로는 원론적으로는 아예 불가능인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고, 전체적으로 잘 통찰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데..
그에 있어서는 다니엘 6장 10절에서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을 통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다니엘은 사실상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며 소망할 수 있었던 여러 모양의 방법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는 성전 신앙, 곧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져 죽임 당하는 상황이 됨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하던 대로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변함없이 기도했을 정도로 평상 시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하며 기도에 힘썼던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의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에 있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면서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은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주야로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미들로 무기 삼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있도록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아담과 하와 때의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를 위시해서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올려 드린 희생 제사, 유월절 어린 양과 모세를 통한 놋 뱀, 여러 모양의 피 제사와 희생 제물들, 제사장과 선지자들 등과 같은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인해 구원에 참예케 되고, 오늘날 우리들이 날마다 순간마다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가 될 수 있게 하신 것인데..
바로 그러한 구주 예수님에 대한 예표와 모형들, 약속과 계시들 등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가 바로 회막이나 성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곧 다니엘은 오늘날 우리들로 치면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어 죄악들과 싸울 수 있었고 치열한 말씀의 신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와 함께 가면 갈수록 더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을 생생하고도 강렬하게 누릴 수 있었고,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과 풍성하심들이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그러면서 더더욱 죄악들과 싸우고 더욱 더 말씀의 열정들이 되어 최고의 믿음의 선배들 중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장성하고도 견고한 믿음의 반열에 올라 오늘날 우리들에 이르기까지도 깊은 도전과 영향력들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다니엘1:8~9)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3년 11월 28일(화)1/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