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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레임이 없다. 너한테는.
졸업을 앞둔 4학년 어느 가을.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처음으로 고백이라는 것을 했었던 그 날의 내가 그에게 들어야했던 대답이
었다. 마치 리포트를 써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볍게, 언제나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그는 잘도 그런 말을 내게
했다. 왜냐하면 우린 친구였으니까. 성별이 다른 개인에게서 느끼는 떨림, 조심스러움, 애틋함.. 그런 것들을 내게선 느낄 수 없다
는 뜻이었다. 그건 분명한 거절이었음에도 마음은 솜사탕처럼 부피를 키워갔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그러고도 전
과 다름없이 나를 대해준 그의 태도와, 그 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발설치 않은 그의 배려. 심지어는 선주에게 조차.
내 마음은 일방적인 것이었으니 발전 따위 있을 리가 만무했다. 졸졸졸 흐르는 냇물처럼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어 온 시간이 이토
록 긴데 아직도 강줄기를 만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바다를 꿈꾸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워졌다. 언젠가는 내가 그에게 그렇게 자
연스럽게 흡수되는 날이 올까.
“콜록콜록-”
“약을 먹었어야지.”
“아냐 이거. 가짜 기침이야.”
“가짜 기침은 뭐야.”
“그런 거 있잖아. 며칠 계속 기침으로 앓아서, 다 떨어지고 나서도 버릇처럼 괜히 나오는 거.”
운전대를 잡은 그가, 내 억지스런 이론에 피식 웃었다. 우리는 디자인 페어가 열리는 장소를 향해 가고 있었고 도로 위에는 어제
까지 내린 눈이 시커먼 먹빛 샤벳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겨울이라지만 차 안으로 쏟아져 내리는 한낮의 햇살은 마치 봄 같았다.
아직 다 가시지 않은 감기 기운이 뜨뜻한 공기를 만나 노곤함을 만든다. 시트에 조금 몸을 묻고서 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눈
에 드는 것은 창에 비친, 그의 운전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마일드한 운전에, 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가로수를 스쳤다.
“선주랑, 통화해봤는데-”
“응, 뭐래.”
“새 계획안 때문에 많이 바쁜가봐.”
혹시라도 짬이 생기면 전화 한 통쯤은 직접 하겠다던 말- 까지는 전하지 않았다. 그래- 하는 그의 목소리가, 오랜만에 만나는 계
기를 놓쳐버린 아쉬움 때문인지 길게 여운을 남기고 늘어졌다. 선주가 입국한 지 일 년, 그 안에 우리가 얼굴을 마주한 횟수는 손
에 꼽힐 정도이고 셋이 함께 한자리였던 적은 단 한 번뿐일 정도로 제각기 시간에 쫒기는 생활을 해왔다. 그런 것들을 감안하고서
라도 그의 이런 반응이 눈에 띄게 나를 서운케 만드는 것은 역시 내 뒤틀린 마음 때문일까.
“연우야.”
“..응?”
“우리 커피 마시자.”
시선이 닿은 곳에는 take out 커피 전문점이 있었다. 싸늘한 날씨 탓에 한 눈에 보아도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처럼 보였고,
우리 역시 길이 바빴기에 한가롭게 커피를 즐길 시간은 부족했다. 그가 적당히 차를 주차하기에 내릴 요량으로 벨트를 풀자, 기
다리고 있으라며 그가 지갑을 들고 훌쩍 차에서 내려버렸다. 뒤따라갈 타이밍도 놓친 채, 나는 그의 펄럭이는 감색 트렌치코트 자
락을 지켜보았다.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은 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것과 다른 느낌이 났다. 연우야- 마치 유럽의, 굳이 덧대자면 프랑스의 파리지앵에
게서 들을법한 샹송의 감미로움처럼. 혹은 치즈 퐁듀의 은근하면서도 오래가는 부드러움처럼. 하긴, 그가 날 부르는 것이라면 어
떤 호칭이든 달콤하지 않겠냐마는. 연우야. 이연우. 야. 너. 등등. 우리가 아직 친해지기 전이었던 대학 입학 초기에는 종종 풀네
임을 부르곤 했었다. 강진언. 강진언. 저기서 날 위한 커피를 들고 강진언이 걸어오고 있다.
“어, 내껀 커피 아닌데?”
“얼그레이.”
입김을 불어 언 손을 녹이며 그가 대답했다. 그가 내려놓은 그의 컵에선 분명 커피향이 나는데. 가뜩이나 커피홀릭으로 잔뜩 기대
에 부풀었던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나도 커피 마실래.”
“감기도 아직 안 떨어졌으면서, 그냥 주는거 마셔. 커피가 뭐 좋다고.”
“되게 걱정해주네.”
그가 엷게 웃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도로로 접어들었다.
“나 아프면, 걱정돼?”
“말이라고 하냐.”
무심한 듯 그의 목소리가, 말이, 소름 돋게 좋으면서도 아련하게 아프다.
§
전시장 안은 첫날이라는 메리트 때문인지 방금 개점한 할인마트처럼 숱한 사람들로 붐볐다. 입구에서 받은 브로슈어를 부채 대용
으로 사용해야 할 정도로 후끈한 열기에 그와 나는 벌써부터 살짝 기진한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창조의 열기가 이
만큼 뜨거웠구나-를 몸소 실감하며 우리는 더 깊숙한 곳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주거 공간을 주제로 한 대회라 창의성도 물론이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배움의 자세로 눈을
빛냈다. 참가자들의 부스를 지나치는 그는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선 오래도록 멈춰서 제목이나 주제, 기획의도 등이 적힌 설치 판
넬을 유심히 읽어나갔다. 늘 그렇게 워크홀릭처럼 일에 관한 것이라면 순식간에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의 열정이 좋았다. 그리고
그의 열정을 앞으로도 꾸준히 어시스트하기 위해서 나 역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꽤 넓은 전시장 안을 겨우 한 바퀴 다 돌았을 즈음에 나는 드디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아무래도 체력소모가 심한 감기를
얻었는지 식은땀도 나고, 무엇보다도 후끈한 이 열기가 자꾸 무릎이 꺾이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찜통 안에서 푹 삶아진 야채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한보 두보 뒤로 쳐지는 내 걸음을 그가 기어이 의식하고야 만다.
“힘들구나 너.”
“미안, 둘러보고 있어. 나 좀 나갔다올게.”
“그만 갈까.”
“아냐. 바깥 공기 좀 쐬면 나아질 것 같아.”
그리고 곧 몸을 돌려 입구쪽으로 향하는데 채 몇 걸음 때지도 못해 그의 걸음이 곁에 따라붙었다. 물음을 담은 눈으로 그를 올려
다보지만 이렇다 할 얘기 없이 그냥 함께 해주는 것을 택한다. 이것이 그의 방식이다. 내 뒤에 섰음에도 먼저 손을 뻗어 유리문을
밀어주는 그런. 먼저 문을 빠져나온 내가 그를 위해 열린 문을 잡아주는 동안 맞은편의 한 곳에 시선이 집중된 그에게서, 어어- 하
는 탄식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따라간 그의 시선 끝에는 어렴풋한 얼굴 하나가 멈춰서고 있었다.
“도헌이형..?”
그의 목소리로 불려진 이름이 아니었다면 내겐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았을 타인이었던 사람이 금세 반가운 얼굴이 되어버렸다.
까마득한 선배였던 그리고, 까마득한 후배였던 우리는 이렇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조우한다. 반가운 인사와 가벼운 안부가 오갔
다.
“어쩐일이예요, 형 계속 외국에 나가있다고 들었는데.”
“일 때문에. 한 달쯤 있다 다시 나갈 것 같다.”
졸업 후에도 가끔 소식을 듣고 지내던 몇 안 되는 선배 중 한 사람이었다. 외국계 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들어오던 그대로, 모
습은 너무나 남자답고 곳곳에서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넌 잘 지냈냐? 하고 물으며 내 머리를 흩뜨려 놓는 커다란 손.
“와, 용 됐다 선배. 못 알아보겠어요.”
그 정돈가, 하며 더 이상의 객쩍은 말없이 유연하게 웃어넘기는 멋스러움까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친한 선배’의 이미지로 대하기
엔 어딘가 달라보이는 단단함이 느껴져 나는 자꾸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그 사이 진언이의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고, 전화
를 받으려 그가 몇 발자국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선배가 그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나에게 묻는다.
“유명한 삼총사였잖아, 한 녀석은 어디가고.”
“선주 바쁘죠, 요즘. 내로라하는 대기업 전속 디자이너잖아요.”
“자주 못 보겠네.”
“가끔, 연락은 해요.”
“너흰, 아직도 같이 살아?”
아직도- 라는 단어는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나는 그저 긍정의 의미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그 때부터 계속 진언이 어시스트?”
“어시스트가 아니라 ‘뮤즈’라고들 하죠. 선배 소식통 후지다.”
“뮤즈라..”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늘이며 선배는 부드럽게 웃었다. 농담반 진담반인 말을 던져놓고 너털웃음을 짓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선배
의 눈빛이 사뭇 진지한 바람에 내 웃음도 곧 잦아들었다. 다시 그에게 시선을 던지는 선배를 보며 나도 눈으로 그 뒤를 쫒는다.
“오늘 시간 어때.”
“아- 괜찮을거예요. 진언이도 별 약속 없을거구.”
“넌.”
“저야..”
직설적으로 내리꽂는 것 같은 선배의 물음에 잠시 대답을 늦추는 사이 그가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곧 우리 곁에 돌아와 무슨 얘
기 중이었냐고 묻는다. 선배가 오늘 시간 되냐는데? 라고 대답을 구하는 나의 말에 그는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난색을 표했다.
“형이 한 박자 느렸어요. 방금 약속이 잡혀버렸는데.”
“누구 전화였는데?”
“선주.”
선주의 안부를 묻는 선배에게 웃으며 답하는 그. 그러고도 몇 번 더 오가는 대화가 내 귀엔 다 걸러져, 분명 듣고서도 두 사람이
무슨 대활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형 얘기 했더니 되게 반가워하던데요-
“그런데도 둘만 약속?”
“그러게요. 할 얘기가 있다는데.”
“할 수 없지. 그럼 연우는 내가 데려간다.”
생각지 못해 멍해 있던 순간, 내 한 쪽 어깨를 감싼 손에 의해 의도치 않게 선배에게로 바싹 끌어당겨졌다. 그가 선배의 눈을 바라
보고, 선배의 눈은 다정하게 휘어진 채로 나를 응시하고, 나는, 나는- 진언이가 안된다고 너도 안 되는 건 아니잖아, 라는 선배의
말에 멍청이처럼 그의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내가 다시 생각해도 그건 마치 허락을 구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것이
다. 바보 같아, 이연우.
“좋을대로 해.”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가보다. 나는 선주에게서의 전화가,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는 그 말이 이렇게도
신경 쓰이는데. 선배에게 달싹 안긴 꼴이 된 지금 내가, 그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코트의 소매를 슬쩍 걷어 시간을 확인하는
그의 무신경한 모습이 이토록 비수 같다. 약속 시간이 언제인지, 장소는 어디인지 궁금하다 못해 미치겠는 마음을 누르고 선배에
게로 고갤 돌려 웃었다.
“나 오늘 되게 재미있게 해줘요, 선배.”
그리고 그 자리서 우린 헤어졌다. 그는 차로, 선배와 나는 다시 전시장 안으로. 뒤돌아보는 내게 그가 짧게 손을 들어 보이며 입모
양으로만 ‘늦지마’하고 여운을 남겼다.
첫댓글 아.. 연우는 진언이를 좋게 생각해주고 있는건가요? 아직 2편인데도 저는 벌써 진언이가 미운데요...ㅠㅠ 저기 위에 도헌이의 사진이 너무 잘어울리는 것 같아요! 다음편도 기대할께요~
제목처럼, 연우의 상사병은 진언이에게 비롯된 것임을 염두하시고 계속 읽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마음 아파하는 연우의 입장에서라면 진언이가 밉다시는 말씀도 이해가 되네요. 앞으로 좀 더 두고 지켜봐주셔도 될 듯 합니다. 덧글 감사합니다^^
친애하는 아로님♡흐흐,사랑하는-이 아니라?뭐랄까?이번편을 보면서는 좀더 존경의 의미를 담아야 할듯?해 첫머리를 그렇게 달았습니다. 말그대로 희망고문이네요, 짝사랑하는 이에겐 치명적이라는, 그...그...젠장할.ㅋㅋ.글에 잔뜩 몰입을 해 읽었더니, 그냥 이유없이 연우에 대한 마음과 동화되어가는 느낌이랄까요? 원체 한번 몰입하면 깊이 빠져드는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이번편은. 뭐랄까. 뭉클해요. 그러면서도 막 기대감 같은게 생기네요, 음. 아직 진언에 대해 정확히 어떤면이 드러나 있다고 볼수 없어,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그는 알고 있는거 같아요. 연우가 자신에게 어떤마음인지, 뭐 어디까지나 치에 추측입니다만. 역시 이
이 글을 볼때는 겨울에 걸맞는 BGM한곡 정도 깔고보면 더욱 자연스럽게 어울러지는듯 합니다. 부디 시린 겨울이 아닌, 포근한 겨울로 남겨지길...그럼 다음편도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 독촉도 함께요!!
하하. 저 역시나 친애하는 치에님^^ 존경의 의미라니요, 고건 살짝 접어서 잘 담아뒀다가 치에님께 되돌려드려야 할 말씀인 듯 하네요. 몰입해서 읽어주셨다는 그 한마디 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마음이 꽉 차는 기분이 들어요. 물론 언제나 치에님께서 남겨주시는 덧글 하나하나가 다 의미있는 것들이었지만, 날씨 때문인지, 그래서 더 작아진 마음 때문인지 오늘따라 감동의 물결입니다^^ 저도 글 작업할 때는 늘 조용한 bgm을 깔아두곤 해요. 되도록 다른 소음 없는 조용한 시간에 분위기 잔뜩 잡고서 말이죠ㅎㅎ 글로 소통하고, 글 이외의 것으로 또 소통할 수 있다는게 새삼 기쁜 날이네요.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