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열풍이라고 한다. 신입사원을 채용하면서 인문학적 소양을 보겠다고 공언하는 기업들의 채용공고나 유명한 인문학자의 강연장이 청중들로 가득 채워진 영상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인문학을 진흥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하지만 역사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은 사정이 어려워져만 간다고 한탄한다. 인문학은 열풍이라지만 학계에는 찬바람만 분다. 연구 예산이 깎였다는 걱정부터 학과를 통폐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마뜩찮은 생존전략까지 떠돈다. 인문학 열풍 속에서 박근혜 정부는 한국학의 융성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역사학계는 오히려 예산 감축으로 생존을 위협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근혜 정권이 한국학을 강조하면서 예산을 집중시키고 있는 분야가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국사교과서의 국정화고, 다른 하나는 상고사 프로젝트다. 다만 역사학계가 격렬히 반발하고 있고,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에 상당히 벗어나기 때문에 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노골적으로 내세우기가 어려웠다. 당 대표를 맡았던 인물을 교육부 장관으로 앉혔지만 최대한 파열음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진행하려고 있다. 반면 상고사 프로젝트의 경우는 중국의 동북아공정에 맞서야한다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3국에 방문했던 일정도 상고사 프로젝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까지도 한민족의 활동 영역이었다고 주장하며 한국 자본의 진출을 촉진시키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방문 내내 ‘실크로드’를 강조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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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오후(현지시간) 캐나다 오타와 한 호텔에서 열린 한-캐나다 비즈니스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일본의 근대 역사학계에서는 실크로드의 최종점을 교토로 주장하였는데, 박근혜판 상고사 프로젝트는 이를 경주로 변경하고자 한다. 일례로 상고사 프로젝트에 들어간 예산의 상당수(1조 6000억)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서라벌 복원사업에 투입되었다. 정부와 함께 이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경상북도는 지난 12일부터 22일까지 '이스탄불 인(in) 경주 2014'를 개최하여 서라벌 복원사업을 지원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축사를 통해 "고대 실크로드의 서쪽 끝 이스탄불이 동쪽 끝 경주에 와서 문화진수를 선보인 것은 인류 문명사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말하여 서라벌 복원사업이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는 점을 밝혔다. 또한 이 행사에서는 터키, 우즈베키스탄, 몽골, 중국, 한국 등 실크로드 5개국을 대표하는 민속 악기를 연주하며 실크로드 재현을 강조했다.
사정이 이러니 역사학계에서는 상고사가 아니면 가뭄인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산을 절감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정작 상고사에는 예산을 몰아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예산을 깎아내고 회수하면서 상고사에 '몰빵'하는 박근혜식 인문학 지원사업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상고사를 통한 대통합?
박근혜 정부의 상고사 프로젝트는 기존의 역사학계를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다. 이러한 상고사 프로젝트는 이전부터 학계와 거리가 있던 고위 관료들에 의해서 강조되어왔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김석동은 오랜 공직생활을 마치고 농협경제연구소 대표로 재직하던 때부터 강연자를 자처하면서 ‘고조선은 동아시아 최고 강대국’이었다는 등의 주장을 퍼뜨리고자 애써왔다. 그의 상고사 강연은 “기마유목민족인 동이족은 밖으로 나갈 때 늘 성공했다”는 결론에 항상 방점이 찍혔다. 학계에서 ‘위서’로 취급받는 『환단고기』 식의 역사관을 통해 한국 자본의 진출에 불을 지피려는 노력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김석동 전 위원장의 강연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상고사 관련 주장에 의해 힘을 받는다는 것이다. 김석동과 이덕일은 정치적인 현안에 관해 발언을 할 때면 정반대에 서있는 듯이 보인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담당했던 김석동과 달리, 이덕일은 여러 칼럼들을 통해 이명박 정부와 현 정부를 비판해왔다. 특히 이덕일은 현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뉴라이트 역사관에 대항하는 역사 전문가로 소개되고 있다. <한겨레>, <경향신문>은 단독 인터뷰를 실었으며, 최근 <시사IN>은 아예 ‘이 주의 저자’로 선정하여 집중 조명하였다. 이들 매체는 현 정부가 뉴라이트 역사관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대항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덕일을 현 정부와 싸우고 있는 비주류 전문가로 소개했다. 그러나 『환단고기』 식의 상고사 인식에서는 이덕일과 김석동이 서로의 근거가 되어주는 짬짜미가 진행중이다.
식민지기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썼던 이덕일은 영·정조 시기 전문가로 자처하고 나서더니 이내 상고사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시대를 넘나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노론이 식민지 시기 친일파를 구성한 중심 세력이다. 또한 이들 노론 출신 친일파들은 아직도 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주류 역사학계가 ‘식민사관’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과 『환단고기』 식의 상고사 서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는 역사학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증이라는 방법론 또한 주류가 비주류를 탄압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학계에서 배척받는 비주류라고 내세우며 동시에 현 정부의 역사인식도 가장 근본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가 일면 매력적일 수도 있다. 배척과 탄압은 때론 음모론을 진실로 만들어내는 가장 좋은 근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칭 비주류의 주장은 아이러니하게도 현 정부의 상고사 프로젝트와 가장 밀접하게 공명하고 있다. 이덕일이 역사학계가 ‘식민사관’에 사로잡혀 자신의 상고사 주장을 배척한다고 비판하는 동안, 박근혜 정부는 기존의 역사학이 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며 예산을 깎아 상고사 프로젝트에 몰아주고 있다.
공론장이 사라진 사회, 역사학의 위기
역사학계는 양쪽에서 몰아붙이는 상고사 프로젝트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지만, 현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대학구조조정 하에서는 안정된 월급을 받는다는 교수들도 연구재단 눈치를 보기 마련이다. 먹고 살기 위한 월급으로는 자료조사 등을 보조하기가 어렵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 쪽에서는 돈이 나오는 몇 군데 단체들 입맛에 맞는 계획서를 써내야 하는 분위기가 있다.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정부의 상고사 프로젝트를 소극적인 사보타주로 지연시키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는 어렵다. 반대편에서는 진보언론들을 통해 이덕일 같은 자칭 비주류가 현 정부의 상고사 프로젝트를 밀어붙일 것을 요구하고 있기까지 하다. 사면초가와 같은 형국이다.
이러한 고립은 넓게 보면 역사학계의 인식론적 한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민족주의를 비롯한 근대성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왔다. 근대성 비판은 기존에 민족이나 계급이라는 중심에서 탈피하여 역사적 행위자에 따라 다양한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젠더사·일상사 등의 분야를 개척했다. 또한 역사서술이 이야기라는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역사적 자료의 맥락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시도들도 나타났다.
이러한 기획들은 기존의 역사학이 실증주의라는 방법 밑에 숨겨두었던 해석자의 존재를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역사학자는 더이상 객관의 가면 뒤에 숨을 수 없게 되었고, 역사서술은 서술자에 따라 여러 중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었다. 또한 역사서술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반성도 이끌어냈다. 역사적 자료를 발굴하여 이를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과정 동안 역사학자는 소설가의 역할도 함께 해내야만 한다는 성찰이었다.
그러나 다중심성과 이야기성에 대한 인정은 상고사 프로젝트라는 괴물을 대면하면서 중요한 시험대에 놓였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쓰듯이 과거를 이야기해도 역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학계는 공론장에서 역사적 자료를 두고 타당성을 검토하면 합리적인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은 정반대다. 타당성을 두고 비판을 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진실에 대한 탄압과 배척의 근거라고 주장하고 마는 상황이다. 마치 주류가 숨기려는 은페된 사실을 밝히려는 투사처럼 보일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예언자로 추앙받기도 한다. 차이를 두고 타당성을 검토하는 공론장에 대한 믿음은 신기루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현 정부는 한국 자본의 성장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실크로드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자 애쓰고 있다. 기존의 역사학이 해오던 연구들에 대한 예산을 깎아서 상고사 프로젝트에 몰아주려는 권력의 의지는 대단히 거세다. 그들은 역사학이 과연 돈이 되냐고 묻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식민사관'이라는 불쏘시개로 정부를 비판할 동력을 얻으려는 이들이 역사학계를 주류라고 비판하고 있다. 주류 역사학이 '식민사관'에 빠져 『환단고기』 식의 상고사를 배척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역사학이 과연 실증주의로 현 정부와 싸울 수 있냐고 묻고 있다. 각기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양쪽 모두 역사학계를 상고사로 밀어붙이고 있다.
양 갈래의 공세 앞에서 역사학계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역사학이 돈을 버는 데에 도움이 되냐고, 역사학은 정치권력과 싸울 수 있냐고 묻는 질문들을 무시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이비라며 주변화하고 외면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외면과 배척이 오히려 『환단고기』 식의 상고사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현 정부의 상고사 프로젝트는 역사학적 주장이 학계를 우회하여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줬다.
그렇다고 실증주의로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역사서술이 여러 중심을 지닐 수 있다는 자각은 경제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젠더 등의 문화적인 것을 통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역사서술이 지닌 이야기라는 성격을 재조명하면서 공식적인 자료가 담지 못한 주변화된 사람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을 모두 버리고 객관의 가면 뒤로 후퇴할 수는 없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역사학계는 과연 어떠한 답을 내놓을 것인가? 상고사 프로젝트의 거센 공세 앞에 놓인 역사학의 과제가 참으로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