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야부운(月夜浮雲)
달밤의 뜬 구름
혜초(慧超, 704~787)
고향길 바라보는 달밤, 뜬구름만 급히 가네
저 구름 편에 부친 편지, 바람 급해 흩어졌어라
고향은 북쪽 하늘 끝, 내 몸은 서역 땅 모서리
남국엔 기러기도 없으니, 누구를 계림에 보낼까나
月夜瞻鄕路 浮雲颯颯歸(월야첨향로 부운삽삽귀)
緘書參去便 風急不聽廻(함서참거편 풍급부청회)
我國天涯北 他邦地角西(아국천애북 타방지각서)
日南無有雁 誰爲向林飛(일남무유안 수위향림비)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 다녀와 《왕오천국국전(往五天竺國傳)》을 쓴 신라
출신 당나라 유학승 혜초의 시다. 수만 리 머나먼 인도까지 가서 성지를
순례하고 불도를 닦는 고승인 혜초 역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외로운 타향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 심정은 평
범한 사람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거센 바람을 타고 고향인 신라 쪽
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저 구름 편에 소식이라도 함께 날려 보내고
싶은데 바람 소리가 요란하니 스님의 외침이 구름까지 닿지 못한다. 남
쪽 나라 천축국(天竺國)에는 기러기도 오지 않으니 소식을 전할 방법이
전혀 없다. 소통의 끈이 끊어진 절대적인 단절은 외로움이 아니라 차라
리 막막함이다.
[작가소개]
혜초[ 慧超 ]
시대 : 고대/남북국
출생 – 사망 : 704년(성덕왕 3) ~ 787년(원성왕 3)
성격 : 승려
성별 : 남
저서(작품) : 왕오천축국전
<정의>
704(성덕왕 3)∼787(원성왕 3).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밀교(密敎)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719년(성덕왕 18) 중국의 광주(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금강지는 남인도 출신으로 제자인 불공(不空)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서 밀교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금강지는 당시 장안(長安)·낙양(洛陽) 등지에서 밀교를 가르쳤는데, 이 때 혜초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로 가는 여행도 해로였는지 육로였는지 불분명하다. 그는 만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였고, 카슈미르(Kashmir)·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하였다.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였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도량을 열고 스승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경전을 연구하였다.
이 때 금강지는 이 경전의 한역(漢譯)을 시작하였는데, 혜초는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에 금강지가 죽었으므로 이 사업은 중단되었고,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다시 인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금강지가 죽은 이후 혜초는 금강지의 제자였던 불공삼장으로부터 다시 이 경전의 강의를 받고, 774년 가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다시 역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공은 이보다 수개월 전인 6월에 죽었기 때문에 이 연대에는 다소간의 문제가 있다.
오늘날 불교학계에서는 혜초와 불공의 경전번역을 1년 앞당겨서 단정하고 있다. 이 때 그는 불공의 6대제자 가운데 제2인자로 유촉(遺囑)을 받았다. 또, 그에 관해서는 ‘신라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 밀교의 법맥을 금강지―불공―혜초로 손꼽을 수 있다. 불공이 죽은 직후 동문·제자들과 함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그 내용은 스승의 장례에 대하여 황제가 베풀어준 하사(下賜)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또 스승이 세웠던 이 사찰을 존속시켜 달라는 청원이었다. 그 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러 있다가 780년 불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오대산은 불공이 오래 머무르던 곳이며, 첫번째 제자인 함광(含光)도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노년을 오대산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보내면서, 전에 필수를 맡았던 ≪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하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787년에 입적하였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신라로 귀국한 흔적은 없다. 이미 신라에는 명랑(明朗)을 중심으로 하는 신인종(神印宗)이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혜초가 공부한 것은 그와는 별도의 밀교였던 것으로 보이며, 불공과의 관련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정통밀교를 표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중국 유학승들이 인도에 간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나란다(Nálanda)라는 불교대학에서 수학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 나란다에서 공부한 흔적도 없다.
따라서, 단순히 불적지(佛蹟地)를 참배하고 밀교를 공부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에 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밀교와 신라의 밀교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는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며, 그에 관한 기록이나 저술에서 언제나 ‘신라인’임이 강조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고국과 관련을 맺었으리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혜초」(고병익, 『삼국의 고승』, 신구문화사, 1976)
「慧超傳考」(高楠順次郞, 『大日本佛敎全書遊方傳叢書』 1, 1915)
[네이버 지식백과] 혜초 [慧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