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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생. 런던 인스티튜트, 첼시 예술디자인대학에서 공간디자인으로 학사학위를 받고 북 런던대학 건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 스튜디오 디렉터를 맡고 있으며 숭실대 건축학부와 대학원에 출강중이다. 건축비평가포럼 DAZ의 위원 등으로 건축평론 활동을 하고 있고 ,문화 공간 연구소 Sein을 개설하여 종합 문화예술 계간지 창간 등을 준비하고 있다. |
들어가는 말 - 서평 연재를 시작 하면서
실내건축이라는 신종어가 일반적으로 쓰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정확한 가늠을 하기가 어렵다. 단지 과거 인테리어 디자인의 자괴감을 보다 폼생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러면 도대체 ‘실내건축’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어서 유포를 하는가?
실내건축가협회의 회장님?
아니면, 과거, 인테리어 디자인 분야의 지존이라 할 수 있는 누구 아무개님?
당치도 않는 소리이다.
그것은 그 어느 누구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와는 달리 변모된 인테리어 디자인의 모습에 반하여 걸맞은 말을 찾아 붙인 것일테다.
즉, 소위 ‘실내+건축’이라는 말은 그 어떤 특정한 인물이 만든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 시대가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직업적 명칭이라는 것이 누가 작위적으로 명명 한다고 해서 탄생되는 것이던가?
영어에서도 그 어떤 사조주의들을 처음으로 호칭 할 때, made 라는 단어가 아닌 coined 라는 단어를 쓴다.
즉, 마치 화폐의 계약적 성질처럼 그 어떤 새로운 사회현상에 대해 이렇게 부르자는 약속 같은 것을 주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실내건축이라는 신어가 필요하게 되었고, 또한 그것이 어떤 연유에서 일종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시대가 만든 것이 실내건축이라면 지금의 시대를 가늠하는 당대 행사 한 켠만을 엿보고 그것의 속내를 읽을 수가 있을까?
얼마 전 광주 비엔날레에선 PAUSE라는 주제로 현대미술의 신선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차를 뒤집어 놓은 것들, 그리고 운동화를 과장 되게 크게 늘려 전시한 것들...
그야말로 비엔날레의 ‘멈춤’이라는 전시 주제를 흡족할 만큼, 지나가다 잠시 우뚝 멈춰 보고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현대미술이란게 과거에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이것도 미술일 수 있다.” 라는 메시지를 강렬히 전달해 주고자 하는 요즘의 모습이 이번 비엔날레에서도 뚜렷이 나타나져 있다.
예를 들어, 차를 뒤집어 놓은 작품이 미술일 수 있으면 차후에는 뒤집어지는 일상의 차량도 미술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다만, 차량이 뒤집혀진 그것을 보며 움직이지 못하는 자동차의 불완전한 그 어떤 것도 하나의 가치를 가질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장애자와 같이 불완전한 사람도 그런 동일한 존중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그것을 통해 읽으면 그것은 미술이다, 아니다가 문제가 아니라 연구적 가치를 통해 현재의 진리를 전달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여기에서 과거 인테리어 디자인과 현재 실내건축의 진위에 있어서도 동일한 고민을 할 수도 있다. 한번 쯤 원고 읽기를 잠시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른바, 요즘에는 미술뿐만 아니라, 여타의 모든 매체나 사회현상에서도 그것의 개별적 보수 경계를 없애는 Merging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세계화가 그렇고 Fusion이라는 병합 현상들이 그것이다.
분명히 지금 일고 있는 시대현상의 한 조각을 엿볼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면, 이제 다시 실내건축이라는 신어의 주조의 문제로 돌아가, 구태여 그것의 정의를 분석하여 논하기 보다는(왜냐하면 이미 그것의 등장이 지금의 시대가 일구어냈다고 정의하고 있으므로 그것의 등장 논의를 한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지금 평가하는 작위적 도출 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의 흐름에 있는 실내건축의 자리정도를 가늠해 보는 것이 보다 실사구시적인 소고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감히 필자는 본 협회지의 지면을 통해 지금 시대의 실내건축이란 것이 과거의 인테리어 디자인의 인식과는 다른 자리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실내건축인들이 그동안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들, 혹은 우리가 이미 그것을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미처 감지하고 있지 못하는 것들을 모아 짧은 식견의 노력을 해보고자 한다.
제 1편 : 도시(都市)와 실내건축
건축과 도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실내건축과 도시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면 생경하게 느끼는 것은, 아마도 그것들이 가지는 원격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근대 건축의 태동이 산업혁명이후 대량생산물로서의 건축이, 보다 사회 보편화 되면서 가치화 되었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실내건축이 도시 속에서 자리하는 지금의 역할을 주시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문제일 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우리는 그저 먼 거리라는 이격성 속에서 간과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닐 성 싶다.
사실, 실내디자인이라는 것이, 과거 아르누보 건축과도 같이 보편적 정체성 속에서 강조하고 드러내고 싶은 각자성의 반출이라는 점은 충분히 공감가는 말이다. 대량생산화 되어있는 보편적 공간에서 개인마다의 자아 정체성을 나타내고 싶은 게 인간의 계층적 욕구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헤게모니론 속에서 그동안 실내디자인은 아주 잘 안주해왔으며 순탄한 비호와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른바 개성의 시대가 곧 또 다른 보편성을 가지게 되는 이른바, 개인 인본주의가 전체 사회성을 나타내는 ‘글로칼리즘’이라는 새로운 경향의 흐름 속에서 무조건적인 헤게모니의 역학 속에서만 안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과거의 모더니즘으로 회기하듯, 실내건축이 하나의 대량생산적인 산물로서 자리잡는 것 또한 시대 역행적인 발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도시 문제 또한 그런 세계성 속에 충돌되는 지역성의 문제가 아니던가?
사회학자 프리이드는 지금의 시대는 불평등의 효용가치의 시대라 일컫는다.
이른바, 비싼 컬러TV가 고가로서 시판 되었을 때 일부 특수계층의 소비 욕구가 그것의 가격을 상대적으로 인하하여 컬러 TV의 보편화를 이루었다는 논리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평등주의가 현실 속에서 무너진 지금, 그것의 논리는 어느 정도 실효의 가치를 찾는다고 볼 수 있을 법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는 그런 시대적 발상에서 실내건축의 해법을 찾을 법도 하다.
그럼 여기에서 그러한 실내건축의 방법론을 어디서 구체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일면 실내건축이 물리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도시의 흐름’ 속에서 찾을 수도 있다. 사실, 실내건축의 방법론이 지금까지는 그저 작가의 개인적 정체성과 직관에 의존해 왔던 게 고작이었다. 소위, 아무개식 스타일이나 외국의 경향을 수입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작가 개인의 작품적 정체성을 도시에서 찾은 일례를 들어보자.
물론, 수도 없이 많은 예가 있겠으나 가장 상업성이 짙은 한 다국적 건축 그룹의 작품을 살펴보도록 해보자. 그것이 한편으로는 지금껏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극적 요소가 되리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일전에 필자는 모 건축 잡지의 기획에서 삼성 로댕갤러리에 대한 대담을 한적이 있었다. 실제 한국측에서 그 설계를 담당하신 분과 그이야기를 풀어나갔었는데, 소위 상업건축의 귀재(?)라는 KPF의 삼성사옥의 리노베이션 문제를 주된 이야기 거리로 삼고 있는지라, 기업과 작품의 개인적 정체성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주요 사안이었다. 사실 KPF는 일부 건축 평론가로부터 지나친 상업성의 추구로 평판이 그다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건축적 당대성에 대한 예리함은 언제나 건축주들을 만족시켜 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태평로에 세워진 로댕갤러리에 대한 해법과 삼성사옥에 대한 리노베이션의 모습은 일말의 긍정을 가져다준다. 소위, 태평로를 단지 남대문이 있는 역사적 맥락의 정체성 읽기를 벗어나 서울의 다운타운이라는 도시 읽기에서 그 해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삼성 사옥이 위치한 인도와 하층구조의 리노베이션만으로 그 다운타운을 거니는 도시민들에게 구태여 삼성 사옥 전체를 바꾸지 않았어도 삼성의 이미지 변화를 그 이상으로 이루어 냈던 것이다. 삼성의 기업주로 봐서는 꽤나 만족할 일이다. 결국 그들은 그런 삼성 사옥 개조의 방법론을 도시에서 찾아낸 것이다. 신촌에 세워진 모포시스의 선 타워의 실패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소위 투자자라는 건축주의 만족을 가장 중요시 하는 상업건축에 있어서도 요즘의 도시 모습에서 그 해법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인적 정체성인 각자성을 강조해야 하는 실내건축에 있어서도 그 방법론이 도시 속에서 찾아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우리 주변 대부분의 유명 실내건축가의 작업 속에서는 그런 도시의 흐름을 연구 하여 제안하는 방법론을 찾기에는 드문 게 사실이다.
어쩌면, 도시의 현재 네트워크를 파악하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실내건축의 프로그램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실내의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도시의 현재 모습을 되읽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반면에 개인적인 작가성이 전혀 가치 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도시의 모습에 비추어 보아, 소위 실내건축가의 리더들이 제안하고 있는 안들이 그저 막연한 경향과 작가개인적인 정체성에 안주해 있다면, 그들이 과연 실내건축가의 리더들이라 자칭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혹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건축의 모든 개념들이 작가의 정체성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에는 아무런 가치가 존재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정체성으로 현재 도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반응할 때, 그것은 비로소 리딩(leading)이라는 진보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연구적 가치인 셈이다.
하지만, 실내건축가들의 작품 전부를 그런 식으로 연구 가치화 하기에는 현실상 무리수가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작품들 중에 몇 편수 정도만이라도 그런 가치를 기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성 싶다.
기업도 보다 나은 가치 창출을 위해 소위 연구비라는 것을 투자하지 않는가?
아직은 안타깝게도 수 없이 발표되는 우리 주변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 속에 그런 도시와 시대에 대해 대안하는 이야기를 하는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이 한결 더하다.
그것의 연구적 가치가 결국에는 나무젓가락 디자인의 성공(가끔 필자는 학생들에게 나무젓가락의 성공을 대처 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있는가를 반문하곤 한다)과 붙박이장의 위대함을 같이 공유할 수 있을 법도 하기 때문이다.
도시와 실내건축.
그것은 절대 아주 먼 거리에 있는 친척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아주 가까운 이웃사촌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가장 도움이 될 법도 한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는 실내건축가의 위상이 사회적으로 별반 없음을 곧잘 개탄 하곤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강남권의 도시문제를 논하는데에 실내건축가 집단이 빠져있음에 한탄을 금하지 못했다.
강남의 거의 모든 공간의 문제를 우리 실내 건축가들이 마주 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내건축가들의 의견은 그들로부터 빠져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인식들을 공표하지 않았음에 연유된 것일테다.
이른바, 무식(無識)이 아니라 무식(誣識)인 것이다.
모르는 것과 도외시 하는 것은 그 차이가 질적으로 다르다.
얼마 전, 필자는 개미를 연구하는 한 교수님의 강연회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분이 강연회 끝자락에 남기는 말씀이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 이라 했다.
최소한, 개미를 아는 자들은 개미들을 함부로 밟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일면, 조금은 순진한 이상주의의 논조가 없지는 않지만 그 분의 말씀이 여기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개미를 여태껏 모르고 있는 게 아니라, 구태여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쌀을 주식으로 먹으면서 자연과 공생하고 있다는 것을 못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도시와 실내건축에서 혹시 우리는 서로의 알레고리에서만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 한번쯤은 골똘히 생각해봄직도 하다.
그리고 우리 실내건축이 또 다른 무엇은 도외하고 있지는 않은가와 함께...
실내건축가의 무식(誣識) II 인문학(人文學)과 실내건축
두 번째의 크로스 오버(Cross Over)를 소고하며
지난번 저널에서 밝힌 바 있듯이 실내건축과 다른 분야의 만남에 대한 무시(無視)된 견해와 새로운 접목 점을 모색하리라는 평론 연재의 의미를 밝히고 (제1편 도시와 실내건축) 이제 그 두 번째의 화두를 찾아 나섰다. 그것에는 사실 과연 “한국에서 포스트 모던은 있는가?”에 대한 저의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질문에 단번에 “있다” 며 확답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단지 연대구분만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1970년대까지는 모더니즘 그리고 그 이후에는 포스터모던…….』
무언가 석연치 않다. 마치 군대에서 국사 교과서를 암기하는 강독력(講讀歷) 같다. 항상 그랬듯이 처음과는 달리 나중은 시간이 갈수록 헐고, 벗겨지고, 처음에 없던 티도 점점 크게 드러나게 되듯, 그저 대단하게만 보이던 모더니즘이라는 처음의 거물도 나중에는 네 탓 ,내 탓에 오그라들어 생긴 상처에 포스트 모던이라 반창고를 붙여 가야 했던 게 사실이다. 이것이 모더니즘이 발기된 서양의 사람들이 치유하는 조루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발기된 모양의 모더니즘을마냥 닮고 싶거나 아니면 도리어 그것에 결국에는 맞대응 해야만 하는 의무감적 비수의 품은 날이 아직은 제대로 서지도 않았는데, 그러한 흠집이 생길 리가 만무하다. 그런대도 그들이 덧대인 반창고조차도 무작정 빌어 왔던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이른바 상처 없는 처방이다. 몸살도 없는데 감기약부터 먹는 형국이다. 아직은 우리에게는 모더니즘의 빗발이 거세다. 사람들의 생각이 다분히 생산적인 모던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다. ‘결국은 그거지 뭐....’ ‘그거 해서 뭐해? 돈 되는 거야?’ ‘ 의사가 병이나 잘 고치지 그런걸 뭐 하러 해?’ 사람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들이 아직은 근대성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다.
하지만 이창동이가, 소설 쓰는 국어 선생님이 영화를 영화인보다 더 잘 만들었단다. 영화인이 되어서 소설가의 전력이 요즘의 시대 코드를 더 잘 볼 수 있는 거름의 역할을 했단다. 이제는 도리어 전문가가 되려면 탈 전문해야하고 비분업화를 해야 하는 건가? 그래서 지난번 도시를 알아야 인테리어도 더욱 더 잘할 수 있다고 했는가. 하지만 그것은 과거처럼, 그걸 알면 모르는 것 보다 한결 나아 그것을 더욱더 잘 할 수 있다는 근대적인 발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인테리어’도 ‘도시’라는 발상이다. 일면, 그것에는 오래전 원래 그랬던 것인데 모더니즘이란 칼날로 그것을 나누고 구분 했던 것에 대한 상처를 복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거기에는 엄연히 오래전부터 원래 다른 흉터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원래는 오래전의 원래와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어져간 원래 그것들이 숨어있는 모습, 즉, 은폐 되어져 왔던 것들을 벗겨 내는 기술이 ‘포스터 모던’의 한 단편적인 모습이 아닐까? 그러므로 그러한 ‘탈 은폐’의 구조가 크로스 오버의 한 양태라면 탈 전문화, 탈근대성, 비구분화란 것이 암시하는 포스터 모던이란 게 전혀 다른 살갗을 내 살에 이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그것은 내 살밑에 도사리고 있는 숨은 세포조직이 새 살로 돋을 수 있게 도와주는, 반창고가 아니라 한사발의 정성들여 달인 탕약이며, 내 살에 부딪치는 공기이며 바람인 것이다. 그래서 본 논고의 화두가 “무식(無識)”이 아니라 “무식(誣識)”인 것이다. 즉, 모르고 있는 것을 탓하며 제발 공부하고 알자는 강독(講讀)이 아니라 충분히 알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발견 하자는 의도인 것이다. 그래서 크로스 오버는 ‘퓨전(Fusion)’이라든가 ‘하이브리드(Hybrid)’ 같은 이(異) 물질의 다시 만듦이 아니라, 은폐된 본질을 드러내는 현상적 이해를 이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시를 통해 본 인테리어가 아니라 도리어 인테리어를 통해 보아지는 도시를 이야기하며, 인문학의 고결함을 닮고 싶은 현학으로서의 인테리어가 아니라 오히려 인테리어가 주는 인문학적인 가치를 해석하자는 발심의 노력이 이 연재의 다시금 짚어보는 의미이다. 즉, 계몽의식의 발칙한 진보가 아니라 도리어 일상 보편으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겸사의 아주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실내건축으로 해석하는 인문학(人文學)
‘인문학(人文學)이 무엇이냐 ’라는 이야기는 생략하고자 한다. 단 몇 줄로 그것을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현학일 터. 그리고 흔히들 인문학에 관한 강연이나 이야기들을 대하면 대뜸 ‘어렵네’라며 고개부터 돌린다. 어떤 이는 한술 더 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뭐야, 순 말장난이지,뭐’나 아예 ‘관심 없어’라는 태도가 여실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거야 말로 진짜 무식(無識)주의 아니던가? 하지만 필자가 그들을 애써 감싸 본다면, 그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현재 그런 것들이 출세나 승진을 위해서는 별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모더니즘과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런 그들의 생각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들은 진정한 제도권 자이며 보수파임에 틀림없다. 현 제도에 충실한 사람들을 단지 폼 나지 않다고 무작정 돌을 던질 수는 없다. 도리어 현실을 무시한 현학자들만이 우리 사회의 대부분이라면, 그것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다. 그것을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철인(哲人)의 정치를 꿈꾸던 플라톤의 시대에는 그것이(철학) 바로 이데올로기이며 절실한 제도의 관심이었으므로 결코 한눈 팔 수 없는 출세나 승진을 위한 보수였을 게다. 도리어 생산성만 추구하는 이가 있었다면 그는 그때의 진보로 간주되었을 것이므로 당연히 외면당했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요즘은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한 시대의 현상이리라. (필자 개인의 입장에서는 워낙에 성향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볼 때 그것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극단적 이기적인 생각에 내심은 다행이다. 내가 건축을 하고 있음에 그런 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오히려 그것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혹여나 실내 건축이 그런 위기감을 극복 할 수는 없는지 꿈꿔 본적도 있다.)
인문학을 어렵게 여기는 것은 이상스런 일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신(自信)하지 못해야 인문(人文)이며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나’하나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말이다.) 난해해야 그것의 학(學)을 하는 사람이지 않는가? 인문학자가 사유(思惟) 하지 않는 것은 실내건축가가 설계하지 않는 것이나 진배없다. 하지만 나는 실내건축가이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할 수 있다. 인문학자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 그냥의 교양 일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지금의 제도가 철인정치가 아니므로 내가 그것을 조금 다르게 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제도적이거나, 반사회적일만큼 가공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어려운(?) 철학책을 읽을 때 굳이 책 속에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을 벗어나는 게 주의 목적이다. 처음 플라톤의 “국가론”을 접할 때(철학인문서적을 처음 읽을 때 항상 먼저 대하는 고전 같은 것) 플라톤이 처한 짜증난 시대를 먼저 보려 했다. (대부분이 그 시대의 처한 고민이 담론으로 등장하는 것은 인문학의 기본일 터) 궤변론자의 웅변들만이 유일하게 진리의 근거가 되었던 시절, 말 잘하는 자가 재판에도 이겼던 시대다. 진정한 민주주의라고들 일컫는 당시대는 아버지를 구타한 패륜도 적당한 논리를 펼치어 다른 사람을 설득하면 사면이 되었던 시대였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화술, 즉 말 잘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을 게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저서가 없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의 저서를 통해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플라톤이 처한 소피스트들이 난무하던 시대. 말로만 모든 사람들이 지배하는 논리에 플라톤은 그 무언가에 염증을 느꼈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철인, 소위 제대로 된 철학자만이 진리를 가늠하는 정치인이 되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을 게다.(후에 그의 사상은 지금의 독재와 우종 정치가들을 낳았을 수도 있다.) 소위 그 어떤 교양이나 고전을 접할 때 그 시대를 읽는 것부터 항상 나는 먼저 한다. 그러고 나서 나만의 논리를 강립하는 버릇이 있다. 아마도 정통 인문학자가 그런 내 논리를 들으면 경을 칠일게다. 하지만 필자는 인문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자유롭다. 그렇다고 내가 실내 건축을 작위적으로 재미삼아 그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폭넓은 나만의 사유를 지니는데 도움이 될 법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교양이다. 그런 시대를 읽는 버릇은 곧잘 실내건축의 기획 단계를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렇다. 역설적으로 아마도 하이데거를 운운하며 현학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폼생이 오히려 경을 칠 노릇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것은 일면, 산학(産學)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될 수 도 있다.)그것은 마치 남이 모르는 소리를 해야만 심오한 깊이가 있을 것 같은 묘한 열등의식의 발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실내건축은 이미 인문학일 수도 있다. (인문학이 꼭 형이상학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실내 건축이 사람의 공간을 다루는 것이라고 회자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실내건축은 이 시대, 이 제도권 내의 인문학이다. 고전이라기보다는 제도적 인문학이며 실용적 인문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푸코같은 철학자도 건축공간을 예로 들어 일상적 권력구조로 비판 한 바가 있지 않은가?) 이른 바 하나의 보편적 인문 보급의 수단인 것이다. 그것이 단지 인문의 도구로만 여러진다면 실내건축의 본질인 ‘시대’와 ‘일상’을 도외시 하는 게 된다. 수단과 도구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실내건축으로 인문의 고전을 연주하고 해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실내건축가가 지녀야 할 인문학적 소양의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런 인문학적 교양이 우리 실내건축가에 주고 있는, 하지만 우리가 잘 인식 하고는 있지 않는 이(利)점들을 몇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1. 흥미로운 디자인을 위한 인문학
“Interesting 하다.”
필자가 유학 때 어쩌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나 작업을 해갔을 때 흔히 들었던 이야기이다. 솔직히 필자는 당시 그냥 잘했으면 좋은 디자인이라고 말해줄 것이지 ‘흥미롭다.’라고 하니 일말 내심 서운했었다. 인색하기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그것이 가장 큰 칭찬이란 걸 몰랐으니 말이다. “좋은 디자인”이란 것, 우리는 별 괘념치 않고 내뱉는 말이지만 지극히 모호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과연 절대적으로 좋은 디자인이란 게 존재 할 수 있는 것 인가? 단박에 답하기가 어렵다. 최근에 지식(知識) 사무실 선정 시상이 열렸다. 어느 일간지에 ‘사무실이 지식(知識)을 창조한다.’ 라는 메인 타이틀이 눈에 들어온다.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사무실이 지식(知識)을 창조(創造) 한다니...., 뜨악스러움이 단박에 느껴진다. 지식(知識)의 주체는 인간(人間)인데...., 아마도 사무실이 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하게 한다는 작용(作用(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 그런 사무실이 절대적으로 좋은 사무실인가? 아닐 것이다. 지식을 창조 해야만 한다는 강요 스러움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것이 내게 합당해야만 좋은 것이 아니던가?
다만 그것은 흥미로운 생각의 한 단편 일 뿐인 것이다. 인문학의 담론적사유(談論的思惟)와 많이 닮아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무실의 디자인은 인간이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을 해석하여 밖으로 드러내어 준다는 포에이시스(주)의 기술 구조와도 유사하다. 창의(創意)적인 디자인이라는 것이 없는 것을 창조(創造)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도리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준다는 의미에서 인간을 해석하는 관점의 새로움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파편적(破片的) 단절이라기보다는 맥락(脈絡context)과 유기(有機organic)의, 인간(人間)과도 같은 상대적 수용이 담겨져 있다. 다만, 그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흥미로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문학서(人文學書)를 읽을 때 감회를 받거나, 느끼거나, 혹은 ‘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라는 경탄을 되풀이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숨어있는 내성(內性)의 발동(發動)인 것이다. 그래서 실내건축이 창의(創意)적이라는 말은 곧 흥미로움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이미 숨어있는 본질을 문(文, 채색할 문)으로 드러내는 이른바 인문(人文)의 한 단편 인 것이다.
2. 실내 건축의 탈 이데올로기를 위한 인문학
“탈 이데올로기?”
어렵게 느껴질 법한 주제어이다. 도대체 필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먼저 알아듣기 쉽게 단언하자면 그것은 곧 실내건축이 공론(公論)적인 , 누구나 보아도 좋은 디자인을 만들고자 시도하는 인문의 본질적인 사유를 말하는 것이다. 앞서 미리 언급한바 같이 그 어떤 제언을 할 때 항상 반론과 부딪침이 있는 게 마련이다. 그것은 각자의 이념, 즉 이데올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민주주의자, 인간은 그들의 유토피아를 위해서 선택한 이념 안에서 그들의 삶을 계획하고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심지어는 같은 이념의 체제에서고차 살아가는 상황마다 제각기 다른 이념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소위 수많은 진위가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흔히 , 실내건축은 건축주라는 한 사람의 이념과 진위에 맞추어 계획되기 십상이다. 그런 반면에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사용자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이념적 가치를 수용해야하는 고민도 함께 한다. 항상 겪게 되는 어려움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만일 그것을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떠난 본질의 문제로 접근을 한다면 혹여 그것이 가능할는지도 모른다. 주(住)라는 것이 항상 이념을 떠나 우리에게 존재되어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세습 되어왔던 거주의 버릇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보다 깊게 사유하여, 이른바 공론의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앞서 이야기한 충돌을 완충할 수도 있을 법하다.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조주의(-ism)와 이데올로기(Ideology)들.... 그것 모두가 결국은 그것들을 통한 인간 본질의 탐구에 있다. 다만 그런 것들은 시대에 걸맞은 하나의 방법론 뿐 일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이 절대적 진리로 믿고 있는 것일 뿐이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모름의 소치가 아니라 무식(誣識)의 외눈인 것이다.
흔히 우리가 실내건축을 할 때 평이한 것들에 대한 의심을 곧잘 하곤 한다. ‘왜 이런 것은 이렇게 해야 하지? 학교 선생님들은 “Why” 라는 디자인 프로세스를 신처럼 받들어라며 강론하곤 한다..... 그런 것들이 바로 이데올로기를 떠난 우리의 내면적 본질이다. 이번에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Next라는 주제로 그 서막을 알렸다. 건축가 세드릭 프라이스(C. Price)는 “이미 건축가가 건축을 구상하고 설계에 돌입한 순간부터 그 건축물의 완공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라며 격변하는 유행성 속에 살아남고 적응해야 하는 건축의 위기감에 대해 역설했다. 공감이 가고도 남음이 있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탈 이데올로기, 즉 공론의 디자인은 더욱더 절실하다. 누구에게나 편중 되지 않는 실내건축디자인. 한편으로는 다분히 이상적인 발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최소한 우리 실내건축가가 가져야 하는 우리 직능의 이데올로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사유로서 가져야 하는 직업소명정도가 아닐 성 싶다. 그리고 그것은 인문의 초기 궁금증과도 같은 것이다. 즉, 의문과 이유를 물어보는 실내 건축, 그리고 묻지 않아도 답해야 하는 예술적 행위, 바로 그것이 실내 건축이 갖고 있는 의문의 인문학적 소치이다. (인문학의 본질은 끝임 없는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이다.)
3. 작은 사유(思惟)로서의 실내건축을 위한 인문학
건축 평론이나 이론서를 읽고 나서 제각기 한마디씩을 한다.
“너무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말처럼 실제로 그러한가?”
사실 글을 쓰는 필자조차도 가끔은 건축 일상과 텍스트(Text)에 대한 괴리감에 젖어들 때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너무나도 깊은 사유(思惟)에 비롯된 것이 아닐까? 깊은 사유(思惟)?, 바꾸어 말해 그것도 인간이 가진 허구성과 욕심이 아닐까?
물론 인문학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인문학은 일종의 기초적 학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실내건축은 검박하고 절제된 우리의 일상을 담는 그릇이다.
그것은 보다 우리에게는 한층 더 가까운 생활적(生活的) 사유(思惟)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에서 실내건축을 함에 인문의 작은 사유(思惟)를 도리어 크게 생각하자는 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크면서도 결코 얕지 않은 사유(思惟)말이다. 실내건축이 밀도 있는 우리의 생활에 대한 고민을 담보로 한다는 것에는 누구도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실내건축의 공간 시나리오가 인문서의 “텍스트(Text)”와도 같은 모습이라면 곤란하다. 도리어 그것을 바탕으로 한 “말”(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바람직한 인문의 방법일 것이다.
현학적인 것 보다는 흔쾌한 것.
심오한 것보다는 검박한 것.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인문학이 가지는 사회성에 해당하며 실내건축의 방법론은 결코 인문의 “텍스트(Text)”가 아니라 “말”(언어) 과 같은 구조로 풀이 되어져야 할 것이다.
끝내지 못해야 끝맺는 말 인문학과 실내건축
지면의 여건과 시간의 한계를 고려할 때, 본 소고의 주제인 “인문학과 실내건축” 이라는 광활한 영역에 대해 과히 수박의 겉핥기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우리가 인문학이라는 분야가 더욱더 매혹스럽다. 끝없이 펼쳐진 기초로서의 참고 자료가 무한하니 말이다.
간헐적으로 우리 실내건축은 아이디어의 궁색과 매너리즘에 곧잘 빠지곤 한다.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어…….” “이제는 한계인가 봐…….”
이러한 탄식의 말들을 자주 하곤 한다. 마치 내 직업의 한계에 종지부를 찍어가고 있는 듯한 안타까움이다.
아마도 그들은 실내건축 자체에만 너무 충실하였던 것은 아닐까?
아이디어를 찾아 헤매는 굶주림……. 아마도 끝내지 못하는 아쉬움에 목말라 있을 법하다.
단 몇 장의 지면에서 이번의 소고를 끝내야 하는 필자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석연(의문)이 나중의 이야기를 남겨두는 장(暲)이 될 법도 하다.
“끝내지 못해야 끝내는 말”. 그것이 인문학과 실내건축이 관계를 맺고 가야할 방법론이 아닐까 궁금해본다.
주 : 플라톤의 향연 205b를 출발점으로 하여 기술(techne)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술의 근원적 의미는 포이에시스(poiesis)로 발굴된다. 포이에시스는 원래 앞으로 드러내 놓음. (Hervorbringen)이란 “탈 은폐” 사건이다. 자연(Physis)도 그 피어오름에 있어서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과정이기에 포이에시스인 것이다. 이렇게 포이에시스의 관점에서 이해된 테크네는 어떤 상위의 목적에 기능적으로 부속되도록 존재자를 가공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존재자의 숨겨진 모습을 ‘앞으로 드러내 놓는’(Her-vor-bringen) 탈 은폐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기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자기성을 공동화시킴과 아울러 존재자를 그의 존재를 누리는 터로부터 강제 이주시켜 상위 목적에 사용되는 가공재료로서만 존재하게 가공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