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14](금) [동녘이야기]
[동녘글밭] 사람을 바르게 읽는 법2
- 욕심은 사익이요, 양심은 공익이므로 -
오늘도 어제와 같은 제목으로 글밭을 한 번 더 다룰 생각입니다. 그만큼 이 문제는 중요하고, 복잡합니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제목 밑에 한말씀을 덧붙여 보았읍니다. 그러니까 ’욕심은 사익이요, 양심은 공익이므로‘라는 부제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바르게 읽자는 것은 사람을 바르게 이해하자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핵심이 다름 아닌 ’사람의 이해‘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차원에서 사람의 본질을 뜯어 보자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얻은 것이 ’욕심과 양심‘입니다. ’욕심은 존재를 위한 작동 원리‘로, ’양심은 사람다움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렀읍니다.
이러한 이해는 일체 유심조(一切 唯心造)라고 했던 ’원효의 깨달음‘에도 그대로 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의 움직임에 있다‘고요. 따라서 마음 먹기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흐르는 것이 사람 누리의 이치입니다. 여기서 사람 누리는 인간 세상을 말합니다.
인간(人間)이라는 사람과 사람 사이는 참으로 변화무쌍합니다. 너무도 복잡하기에 한마디로 던진 것이 바로 이 ’마음‘이요, ’마음먹기‘입니다. 그 시작이 바로 ’나‘입니다. 더 넓히면 ’나에 대한 이해‘이기도 합니다. 나는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를 그려 보는 일입니다.
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문제는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에서 온 것이니까요. 존재의 작동 원리인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쉽게 간파할 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됩니다. 살다가 가는 ’삶과 죽음‘에 이르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 집니다. 따로 구분하자니 삶과 죽음이지 통으로 보면 하나의 삶입니다. 이 삶은 시작과 끝을 함께 가지고 있읍니다. 그것은 똑같이 붙어있는 ’동시성‘을 갖기도 합니다.
여기에 끝없는 욕심과 양심으로 사익과 공익을 넘나들게 됩니다. 너무도 복잡미묘하기에 도덕과 상식을 먼저 따지고, 때로는 법률과 제도로 굳혀 바른 틀을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겨우 자리를 잡은 것이 욕심은 사익으로, 양심은 공익으로 그 자리를 잡고 있게 된 것일 테지요. 그래서 나온 것이 사사의 삶과 공공의 삶입니다. 적어도 이런 구분을 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더 욕심을 낸다면 온통 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마치 그것은 그 예전의 ’성인들의 삶‘처럼요. 그렇긴 하지만 그것을 꼭 고집할 필요는 없는 듯이 생각됩니다.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하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내가 끼어 있는 ’우리들‘이 그런 사람인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우리들 모두가 느끼게 되는 ’행복‘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면 ’욕심‘을 줄일 수 있게 되고, 줄인 만큼 ’양심‘을 키울 수가 있으니까요. 그 과정에 우리들 마음이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는 말자고 힘주어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오늘도 고마움으로 ’우리들‘을 이해를 하면서 ’우리들‘ 마음을 봅니다. 고마워요.
첫댓글 오늘도 어제와 같은 제목으로 글밭을 일구었읍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이하고자 한번 더 다루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욕심과 양심의 문제를 다시 환기시키고,
욕심은 사익으로, 양심은 공익으로 향하고 있는 점을 가져 왔읍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것을 구분하고,
욕심을 줄이고 양심을 늘이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읍니다.
그래서 부제로 '욕심은 사익이요, 양심은 공익이므로'를 달기도 했읍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