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6. 큐티
마태복음 26:47 ~ 56
예수님의 잡히심
관찰 :
1) 예수님을 잡으려 예수님께 온 가룟 유다
- 47절.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뭉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깊고 슬픈 번뇌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 결국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을 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각각 한 시간씩 세 시간을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고, 그 간절하신 간구는 핏방울이 땀방울이 떨어지듯이 붉게 물들어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깊고 애절한 간구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게 되는 결정을 내리게 되고, 주님은 자신을 팔 자 가룟 유다가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 기도를 마무리 하시고 제자들에게 내려 오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열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가룟 유다와 더불어 나아왔습니다.
- 48절.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 가룟 유다는 무리들과 군호를 짰습니다. 어둠 속에서 식별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입 맞추는 자가 예수니까 그를 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악하고 나쁜 의도로 잔꾀를 부리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만큼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49절.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면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습니다. 가증스럽고, 뱀같이 요사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입으로 어찌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를 수 있겠으며, 그 어찌 예수님께 입을 맞추는 행위를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2) 예수님의 반응
-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주님은 이 일이 있어야 함을 아셨기에,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통해 이런 부분에 대한 감정적인 마무리를 끝내셨기에 담담하게 이 일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라 적극적으로 반응하셨습니다.
- 51절. “예수와 함께 있던 자 둥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 제자 베드로는 품에 품고 있던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말고)을 쳐 그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귀를 집어들어 붙여주셨습니다.
-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 주님의 구원은 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53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 요한계시록에 2억 이상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숫자를 우리는 다 알 수 없고, 대단히 많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천사들 중에서 열 두 군단, 군단은 레기온의 번역으로 로마의 군대에서 가장 큰 부대 단위입니다. 1군단은 약 3000 ~ 6000명으로 이루어졌었습니다. 그렇다면 12군단은 적게 잡아도 36000명의 천사로 이루어진 부대를 의미합니다. 산헤립과의 전투에서 한 명의 천사가 하룻밤에 18만 5000명을 죽인 일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약 66억 6천만 명을 하룻밤 새에 죽여 버릴 수 있는 전력이 됩니다. 그렇다면 로마 군단 전체가 수십, 수백 개가 다 동원되어도 예수님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잡혀주시는 것이지, 결코 힘이 없어서 잡혀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 54절.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 만일 예수님이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군단들이 와서 호위를 하게 된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수 없는 것이고,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겟세마네에서도 해결을 하신 듯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하나님 아버지와 상의하는 예수님을 기도로 중보하지 못하고 졸아버린 제자들, 베드로에게 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무리들의 불법을 지적하신다.
- 5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잡지 않는 이들은 이렇게 무리들이 없을 때, 불법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잡고자 한 것입니다.
- 56절a.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 예수님은 이들의 불법한 행동을 그냥 용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분명히 불법한 일이고,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라고 가르쳐주신다. 수없이 많은 유대인들이 오해한 말씀들에 대해 이렇게 자신의 몸을 드려서 증거하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바르게 알아야 한다.
4)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하는 제자들
- 56절b.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왜 이 제자들은 이렇게 황망하게 도망을 했을까? 무리들이 하도 흉용하게 이들을 잡아가려하고 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두려움이 임해서? 예수님이 하도 무력하게 잡히셔서? 원인은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아직 예수님의 진짜 사역과 그 십자가의 길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이 향후에 죽기까지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의 복음을 증거했다는 것이 반전이고 성도에게는 소망이 되는 일이 됩니다.
가르침 :
1) 최소한 예수님께 가까기 다가가 입을 맞출 수 있을 정도의 수제자 그룹에 속하는 가룟 유다가 자신의 꾀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만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도, 심지어 가룟 유다 마저도 자신이 예수님을 이렇게 비열한 방식으로 팔아넘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하나님의 허용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이것을 알리시고자 가룟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동일하게 대하시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하라고 채근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의 궤계대로 무리와 떨어진 예수님을 속여서 무리들에게 팔아넘기게 되었습니다. 최소한 가룟 유다는 이 때 예수님이 진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겠나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진짜 죽으심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상황에서 가룟 유다에게 다시 한 번의 살길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 길을 마다하고 나무에 자신의 목을 맵니다. 자신의 판단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그렇게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가 그것이 무너지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자였습니다.
2) 예수님은 이 모든 일들을 위하여 겟네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이고 이 모든 일들이 세상 군왕의 힘의 논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예수님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곧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지만 그것이 힘이 없거나 약해서가 아닌 오히려 너무 힘이 강하신 존재가 그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이기는 길을 걸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말씀을 증거하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적용 :
1)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자신의 욕구와 생각대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스승을 팔아먹고, 칼을 빼어 대적의 귀를 자르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본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힘을 풀어버리고, 온전함으로 순수하심으로 섬기는 길을 그렇게 묵묵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힘이셨습니다. 허튼 소리를 하시지 않으시는 주님을 볼 때, 주님은 진짜로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 모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단순한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power를 그렇게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힘을 사용하지 않고 나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진짜 능력이요, 예수님을 본받는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2)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끝내 자신을 드리는 예수님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이루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본을 좇는 존재. 자신의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 멀고 험한 길이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가능한 사건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3)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뜨겁던 햇살도 따뜻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루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참으로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