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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을까.
선배와의 저녁 식사 내내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맞은편의 상대에게는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화 중간중간 틈이 생길
때마다 머릿속은 그와 선주가 우리같은 모양으로 마주하고 있을거란 상상으로 가득했다. 마음은 허공에 붕 떠 있는데 즐거운 척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내 태도를 눈치 빠른 선배가 캐치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뭔가, 인형이랑 얘기하는 기분이 드는데.”
“아- 미안, 선배. 뭐라구요?”
“다른 일 있는거면 말해.”
“아뇨, 다른 일은 무슨.”
못내 미안하기도 하고 무안해진 나는 열심히 내 몫의 음식에 집중했다. 그리고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도 애썼다. 내가 집중
하지 못할 때의 대화는 선배의 외국 생활이라던지 나의 근황이라던지 하는 내용으로 겉도는 것들뿐이었지만, 주의를 기울이기 시
작하자 주제는 선배와 나를 공통분모로 한 이야기들로 옮겨진다. 그러려면 자연히 주제는 대학 때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로 채워
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애들이 그 때부터 선배만 보면 개과천선이라고 불렀다니까요.”
“개과천선?”
“선배, 듣고 기분 나빠지기 없기.”
“뭔데.”
“군대 갔다와서 사람됐다고.”
선배는 차분히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목넘김을 하자마자 피식- 장난스레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웃긴 모양이다. 하
긴, 선배가 우리 동기들과 같은 학년으로 복학하고 나서부터 얼마나 열을 올렸던지, 성적에 있어서든 디자인 실기에 있어서든 선
두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교수님들조차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으니. 군대가기 전후의 선배의 성적 대조는 아직도 우리
학부의 전설로 남아있을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하면서 조금 선배에게 시간상의 거리감을 느꼈던 것들
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대체로 꽤 괜찮은 시간들이었다.
“선배 결혼해야죠. 국수 언제 먹여줄거예요.”
“결혼은 혼자 하냐, 임마.”
“왜? 선배 정도면 모아둔 돈도 꽤 될거고, 앞으로도 탄탄대로에, 생긴 것도 뭐- 그 정도면 봐줄만 하잖아요.”
“봐줄만? 임마, 너한테 평가 받기엔 내가 좀 더 고급이지.”
“어으, 저 고질병. 남자들은 다 그래?”
내가 혀를 내두르듯 웃자, 또 큰 손으로 내 머릴 잔뜩 흩뜨려 놓는다. 그건 오래된 버릇이다. 예전엔 날더러 ‘꼬맹이’라 부르면서
눈에 띌 때마다 놀려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늘 붙어다니던 선주와 함께 우린 늘 선배들의 놀림대상이었다.
“다음엔 선주랑 진언이도, 다 같이 한번 보자.”
“그래요. 선배 언제 다시 나간다구?”
“한 달쯤 뒤에.”
“그럼 많이도 못 보겠네. 선주한테 얼른 날짜 잡으라고 해야겠다.”
“다 같이 보는건 다 같이 보는거고.”
“........”
“너랑 난, 자주 보는데 지장 없잖아.”
아냐? 하고 묻듯이 선배가 눈썹을 껑충 올리며 물을 마셨다. 난 그냥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선배만큼만 따라 웃었을 뿐, 긍정도 부
정도 하진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그 곳에서 나온 뒤에 선배는 가볍게 맥주라도 하길 권했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뤄둬야 다시 만
날 계기가 생긴다는 말로 회유하며 가볍게 거절했다. 그러나 굳이 나를 바래다주겠다는 제안까지는 거절할 수 없어 승낙하고 말
았다.
선배의 차 안에서는 은은한 카푸치노 향이 났다.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레 배어있는 듯한 향기에 내가 묻자 선배도 나처럼
커피홀릭이라 차 안에서 즐겨 마신다고 했다.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졸음을 쫒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고. 시트에 적당히 몸을
기대자 편안함이 몰려왔다. 그의 차에 오래도록 길들여진 나라서 다른 사람의 차를 타면 으레 불편함을 느끼곤 했었는데 희한한
일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어두운 거리를 내다보며 카푸치노 향과 함께 그를 떠올렸다. ‘늦지마’라는 말을 담아내던 그의 입술이
생각나자 곧 시계를 찾게 된다. 선배의 차 안, 디지털시계는 조금 있으면 열 시를 가리킬 터였다.
“고마워요 선배. 다음에 만나면 빚 갚을게.”
“약속 지켜라.”
오피스텔 앞. 내리기 전 벨트를 푸르려는 내 손을 잡아챈 선배가 손바닥 위로 뭔가를 적어 내렸다. 한국에 있을 동안의 연락처. 열
한자리 숫자가 내 손 안에 낙인처럼 들어앉았다.
“내 번호, 적어줘요?”
“기다릴게. 연락해라.”
잘자 꼬맹이, 라고 인사한 선배는 나를 내려놓고 빠알간 불빛으로 꼬리를 남기며 멀어졌다. 눈을 깜빡여도 그 안에 남는 붉은 잔
상이 서서히 사라질 즈음 들여다 본 손바닥 위에는 아직 선배의 번호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곧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저
장시키고 바로 문자를 보냈다. 난 오래 기다리게 안해요, 오늘 고마웠어요.
§
삑.삑.삑.삑. 삐리릭-
네 번의 차가운 기계음보다 더 싫은 건, 아무도 없는 새카만 집에 홀로 들어서는 일이다. 철컹, 삐리릭- 내 등 뒤로 현관문은 의미
없이 닫혀 잠겨버렸다. 스포트라이트처럼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현관 센서등은 마치 혼자 된 나를 조롱하듯 어둠 속에 철저
히 홀로인 날 비췄다. 집엔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늦지 말라던 그의 말에 속은 기분과 함께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안고 거칠게
신발을 벗어냈다.
방으로 들어와 옷도 갈아입기 전에 핸드폰을 다시 꺼내들어 그의 단축번호를 눌렀다가, 신호가 한번 울리기도 전에 플립을 닫아
버렸다. 내겐 이런 행동을 할 정당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린 부부도, 심지어는 연인도 아닌 그저 함께 사는 동거인일 뿐이다.
지금이 몇 시인데 안 오냐는 둥, 왜 이렇게 늦냐는 둥의 잔소리를 해댈 처지는 더더욱 못 된다. 허허- 입을 벌려 소리 나게 웃으며
그 안에 내 허무감을 담았다. 이럴 땐 정말 아닌 게 아니라, 뮤즈는커녕 그저 어시스트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아니, 그것조차
안 되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아직도, 선주는 아직도, 서로 함께인 걸까.
가만히 있으면 또 이런저런 생각에 참을 수 없이 초라해 질것 같아서 커피라도 마실 겸 전기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욕실로 들어가
가벼운 샤워를 했다. 뜨뜻한 물에 몸을 씻어내면 뭔가 개운한 기분이 될 줄 알았는데, 물소리 자욱하던 욕실에서 나와보니 적막하
기만 한 집안이 유난히 오늘따라 더 그래보인다. 일단 오디오를 켜 평소엔 잘 듣지도 않는 유명한 남자 가수의 심야 라디오를 틀
어두고 커피 한잔과 함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나완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그렇게나마 떠들어대는 소리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말리지 않은 젖은 머리가 등을 적시는지 입은 옷이 등에 닫는 느낌이 선뜻하다. 나는 소파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이마를 댄 채 라
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연우야, 오늘이 아니었나봐. 하하. 나 울어야 될지 웃어야 될지.
잔뜩 가라앉았던 기분에 선주에게서 온 뜻밖의 문자는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표면상으로도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는
문자는 아무리 밝게 해석하려해도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선주는 오늘 그에게 마음을 고백했을 것이다. 분명 열에 아홉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미심장한 문자는 나를 쥐고 흔든다. 잘 되지 않았다는 뜻일까. 단지 내 마음
이 꽁꽁 싸매어져 뒤틀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만 해석되는 것일까. 답장하는 것도 잊은 채 한참 그 문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말 강진언다워.
두 번째 문자의 도착. 그걸로 난 더욱 미궁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떤 답장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서 그가 돌
아와 그에게 물어서라도 모든 것이 명확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통화버튼을 눌러 선주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
을 수 있었지만, 그건 차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가만히 폴더를 접어 내리는 동시에, 다시 세 번째 문자가 왔다.
기다려보자- 라는데. 어떻게 해석해야하니.
그 다웠구나. 부정은 아닌데 뚜렷한 긍정도 아닌. 모호한 그 대답 앞에서 나조차 혼란스러웠지만 간단히 답장을 보내기로 마음먹
었다. 쉽네. 한번 기다려보자. 라고. 그건 그가 대답을 미뤘다는 증거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는 뜻이다. 발송 완료창
이 뜨자마자 현관에서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접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핑크빛 고백을 받아서인지, 바
깥이 제법 추운 탓인지, 그의 뺨이 적당히 붉은 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늦었네.”
“미안, 일찍 오려고 했는데 대리가 꾸물거려서.”
“술 마셨어?”
“조금. 선주랑. 칵테일.”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뒤를 좆았다. 그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열려있는 문지방에 엉거주춤 서서, 코트를 벗고 머플러를 풀러
내며 내 질문에 대답하는 그를 보았다. 내가 묻기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가만히 내
눈을 본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보았다. 다시 나와 눈을 맞추며 내 표정을 읽는다.
“아는구나.”
“응.”
“깜짝 놀랬다.”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행복해보여서 나도 놀랐다. 내가 그에게 고백했을 때도 저런 표정을 보았던가. 기억하려 애썼지만 내가
지었던 표정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벗은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머플러를 정리하고 셔츠 위에 겹쳐 입은 니트 베스트를 벗으
며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엔 놀랬고, 그 다음엔-”
“.........”
“싫진 않더라.”
‘싫지, 않다’라는 것은 ‘좋다’인 것을. 어째서 돌려 말하는거지. 내가 신경 쓰여서? 덜 아프라고? 그런거라면 하나도 소용없어.
“..그런데 왜 ‘기다려보자’고 했어?”
내가 그의 대답까지 알고 있다는 것엔 조금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다시 부드럽게 표정을 고쳤다. 그가 입고 있는 미색의 셔츠
만큼이나 은근한, 그러나 숨 막히게 감도는 공기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기 힘들게 만들었다.
“내 맘을 알 수 없어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그가 자못 진지하게 답했다. 나는 여전히 문지방 바깥에 선 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딱 지금만큼의 거
리감이 내 마음 속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싫지 않았다는 말. 맘을 알 수 없었다는 말. 내게는 분명 긍정의 뜻으로만 들렸다.
아까 내가 선배의 곁에서 그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그도 내게 무슨 허락을 구하듯 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분명 그의 딴에는 나를 배려한다는 물음이다. 지난 일에 대한 트라우마를 내가 아직도 갖고 있을까봐. 미안해서. 그래서 그게 날
더 아프게 하고 비참하게 할 거란 것까진 생각지 못했나보다. 그만큼이나마 날 배려한 그의 마음씀에 고마워서라도 나는 그의 등
을 떠밀어 줄 수밖에. 미련하게 웃어줄 수밖에.
“사랑에, 제 3자가 끼어드는 법이 어딨니.”
“.........”
“..마음이 향하는대로 가.”
선주랑, 너. 잘 어울려.
그 말은 차마 못하고, 피곤하단 핑계로 돌아섰다. 그건 거짓이 아니라서. 벌써부터 그려지는 둘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거기까지만
밀어주고 손을 땠다.
첫댓글 재미있어요. 튀는 부분없이 잔잔한 묘사가 마음에 드네요^^ 글정말 잘쓰세요.
감사합니다^^ 혹 묘사가 너무 길어서 지루하지 않을까 신경쓰였는데 걱정을 덜어주시네요. 날씨가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괜찮네요. 드라마 보는 느낌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분위기 잘 이어갈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연우 어떡해요 ㅠㅜ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보는내내 너무 몰입해서 그런지 제가 다 마음이 찡해요 ㅠㅜ 아 그리구 볼 때 마다 느끼는거지만 문체가 너무 이뻐요~ 다음편도 기대할께요!
하하, 파닥파닥님 예쁜 덧글 덕분에 막 힘이 나요^^ 좋아하시는 문체, 분위기 앞으로도 잃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지켜봐주세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참 이상하죠? 왜 이글을 보면 맘이 뭉클해 지는지 모르겠네;;;주책맞게 코까지 시큼거려요~아 몰라, 아로님. 암튼 사람 감정 이입 제대로 시키셔~ㅋㅋ.이번편은 좀 늦었어요~음, 토.일요일. 할일없이 그냥 정신없이 바빴던거 같아요~글도 한편 못 쓰고 뭘 했는지, 진언이. 참 애매한데요? 이건 뭐. 좋다고 볼수도 없고, 싫다고 볼수도 없고. 여기서 확실한건. 연우가 아직 진언이에게 맘이 남아있다는걸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선주와의 관계에 좀 조심스러워 하는거 같은데, 연우. 얘 참 딱하다는. 뭐랄까? 이글 보면서, 짝사랑에 대한 고충?이런걸 확실히 공감하게 되는듯 합니다. 오늘의 bgm은 캇툰이라는 일본 그룹의
'White X'mas'입니다. 노래가 잔잔한게 뭔가 잘 매치되네요~전 그럼 다음편을 향해 빨리 올라가 볼게요♡이번편도 감사하게 잘 읽었어요~^^
제가 겨울을 타서 일까요, 왜 자꾸 글이 분위기를 타서 아래로만 가라앉으려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그래서 치에님이 줄곧 뭉클해진다고 하시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분위기 개선을 좀 해야겠는데 이거 처음부터 너무 촥 가라앉은 텐션으로 시작한 바람에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을 해야겠어요^^ㅎㅎ 아, 늘 더도덜도말고 딱 제가 생각하고 의도하는 만큼으로 이해해주시는 치에님 덕분에 오늘도 감동 한 트럭 실었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은 진언일 밉게 보시는 것 같아 조금 속상하기도 해요. 실은 좀 더 진중한 이미지로 생각하고 대사나 행동을 고쳐나갔었는데, 재미있는 건, 얄밉다 얄밉다들 해주시니까 저도 덩달아
진언이가 얄밉게 보이더라구요^^;;; 귀가 너무 얇은 탓인가봐요ㅎㅎ 중심을 잘 잡아야하는데 그런 점에선 제가 치에님 만큼 능숙하지 못한 이유도 있는 것 같구요. 어쨌든 늘 좋은 말씀으로 응원해주셔서 무한 감사해요. 제맘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