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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종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규진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고후1:3-7)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무척 피곤하고 지쳐있습니다. 모두가 외롭고 힘든 사람들입니다. 마치 살벌한 생존경쟁을 통해 서바이벌 게임을 하듯이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평안이 없고 스트레스만 가중되어갑니다. 그것은 애어른 할 것 없습니다. 모두가 힘들고 지친 영혼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혹시 “가면 우울증”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요즘 젊은 대학생들사이에서 주로 통용되는 말입니다. “우울한 기분이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별로 드러나지 않는 우울증”을 말합니다. 다들 어쩔 수 없어 웃고는 다니지만 집에 들어가 혼자만 있게 되면 머리를 박고 싶을 정도로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가면 우울증”은 우울감과 무력감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식욕부진, 가슴 두근거림, 피로감 따위의 신체적인 증상이나 지나친 명랑함, 약물, 알콜중독, 도박, 과잉행동, 가성치매 등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런 가면 우울증은 속마음은 우울하기 그지없는데 한국사회가 우울한 이들을 마치 경쟁력이 없는 무능한 사람들로 무시하거나 차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울하지 않은 척하는 사회의 병적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면 우울증이 일반적인 우울증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면 우울증 환자들에게는 겉친은 많지만 절친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겉친은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할 정도의 친구가 아니고 겉으로만 친한 척하는 친구를 줄인 신조어를 말합니다.
익히 알려진대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가운데 1위입니다. OECD국가들의 평균자살률이 인구 10만명당 11.2명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28.4명으로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이것은 하루 평균 43명, 평균 34분마다 1명이 아까운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지위고하, 남녀노소, 계급계층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행복전도사라고 하며 인기를 누리던 최윤희씨마저 자살을 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한국인의 자살이유가 단순히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한국인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자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진정한 파트너가 없다는 점을 꼽습니다. 얼마 전에 자살한 한 연예인은 자기가 남긴 메모장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백번을 생각해보아도 세상에는 나 혼자 뿐이다”라는 글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이른바 마음을 터놓을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문가들은 자살을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대화의 상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즉, 진심으로 자기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았더니 지금 우리 시대는 가장 똑똑한 젊은이들이 밥벌이 걱정을 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비참한 기사입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아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슬픈 이야기를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 이 땅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세상엔 위로가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비록 한쪽이 풍성하게 채워졌다해도, 다른 한쪽이 비워져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수중에 돈은 좀 채워졌는데 건강이 채워지지 않아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이는 건강은 채워져 있는데 물질이 비워져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이는 물질이나 건강은 채워져 있는데 사랑이 채워지지 않아 외로운 인생을 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육신적으로는 아무 부족함없이 채워져 있다하지만 영적으로 곤고하고 공허하다고 탄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연세 드신 어르신들의 위로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입니다. 그분들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황혼의 자살률이 높아만 갑니다. 이제 조금만 사시면 안가고 싶어도 가야할 것인데 아까운 생명을 포기하고 맙니다.
또한 젊은이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심지어는 어린이들도 위로가 필요하고 청소년들의 위로는 더욱 심각합니다. 부모님들도 위로가 필요하고 자식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목사도 위로가 필요하고 성도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심지어는 대통령도 위로가 필요하고 국민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경기중 히딩크 감독은 골을 넣지 못하고 지쳐 있는 설기현 선수에게 "너는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될 수 있어. 힘을 내!" 하고 격려했습니다. 설기현은 동점골을 터트립니다.
이번에는 페널티 킥을 실축한 안정환 선수를 붙들고 "나는 다시 너를 믿을 거야. 너는 다시 골을 넣어서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 하고 격려했다 합니다. 안정환은 연장전에서 시원하게 헤딩슛으로 역전골을 터트립니다. 안정환 선수는 히딩크 감독이 자신을 믿고 격려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내 머리 위에 골을 얹어 놓는 것 같았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지친 현대인들에게 책망하기 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은 격려입니다. 격려는 부족해도, 잘못했어도 그것을 탓하지 않고 용기나 의욕이 솟아나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격려를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잘 되고 성공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힘내십시오. 모든 일들이 다 잘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애완용 동물이나 식물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할 수만 있거든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로를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이제는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기가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위로는 무엇일까요? 위로는 칭찬과 격려입니다. 위로는 관심과 배려입니다. 위로는 사랑과 축복입니다. 위로는 이해와 용서입니다. 위로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무엇보다도 참된 위로는 누군가를 인정을 해주고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로가 모든 이에게 종합비타민처럼 다 들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무언가는 들어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가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하지도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의 위로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가 우리를 위로한들 나의 속사정을 정확히 알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위로한들 어찌 내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우리 인생에 변하지 않는 위로자 한 분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세상은 변해도 그분은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없어져도 그분은 없어지지 않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배반해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 곁을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친구이시며, 영원한 동반자이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리 주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사람들의 위로는 받으면 받을수록 감질만 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위로를 요구합니다. 채워지지 않으면 크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한번만 받으면 한방에 모든 것이 다 치료됩니다.
(1) 환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기회입니다(4-5)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해라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통스런 바다 가운데 외로운 돛단배 한척같이 떠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환난의 연속인지도 모릅니다. 환난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환난은 얼굴보고 찾아오지 않습니다. 학벌보고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환난은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 인간에게 환난이 없다면 인간은 기고만장하여 모두가 바벨탑의 꼭대기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인간에게 환난이 있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환난은 우리를 경건하게 합니다.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을 시인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도 환난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니 환난의 때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절대적 타이밍입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내가 힘 있고 잘나갈 때 다가옵니다. 그리고 힘없고 얻어먹을 것이 없으면 떠나버립니다. 하지만 우리 주 하나님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환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찾아오십니다. 그때 인간이 가장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환난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믿는다는 한가지 조건 때문에 엄청난 환난을 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부터 27절까지 보시면 우리는 바울 사도가 당한 환난의 종류를 알게 됩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수없는 매를 맞기도 했으며, 욕을 당하고, 태장과 돌로 맞기도 하고, 굶주림과 목마름과 각종 위험한 고비를 숱하게 당했던 인물입니다. 애매한 모함도 엄청나게 받았으며,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를 믿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목사인 저는 바울이 당한 고난을 한가지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올만한 인물이 사도 바울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환난을 당하고 살았다는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살을 해도 수없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이 엄청난 환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환난을 당하면 찾아와서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응답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난은 인생의 위기입니다. 급한 위기가 생기면 사람들은 누구를 가장 먼저 찾을까요? 119를 찾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당하시면 하늘나라 119에 전화를 거세요. 누가 그런 말을 하대요. 천국 전화번호는 66국에 3927번이라고.
하나님의 위로는 환난의 고통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만하면 세상의 그 어떤 환난이라도 이기고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없어질 것으로 위로를 기대하지 마시고 영원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시편기자는 말씀합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9).
(2) 하나님의 위로는 참된 소망을 가져다줍니다(6-7)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에게 참된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세상이 주는 위로도 우리에게 약간의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원하지도 못합니다. 항상 부족하고 굶주립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위로를 무시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살면서 사람들의 위로가 필요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많은 위로를 받으십시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진짜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아보십시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듯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보면 세상이 주는 위로가 얼마나 싱거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가 얼마나 값싼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으면 정말 세상이 살맛납니다. 왜 자살을 합니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위로를 제대로 받아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에게 참된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짜증내거나 남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항상 기쁩니다. 무엇을 하든지 감사가 넘쳐납니다. 이유는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땅의 것으로는 만족이 없습니다. 참된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소망을 둔자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즐거워합니다. 하늘에 소망을 가진 자는 절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겁낼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지 못하면 세상적인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과 염려로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하늘에 대한 소망입니다.
(3) 하나님의 위로를 모든 이에게 유통시켜야 합니다(6)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만 하지말고 유통시키며 살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위로를 받기만 하시렵니까? 이제는 당신도 누군가를 위로하며 사십시오. 위로의 수급자로만 살지 말고 위로의 공급자가 되십시오. 위로는 받는 것도 중요하나 위로를 직접 실천할 때 정말 행복해집니다.
우리 주변에는 은근히 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든지 마음을 열어보면 위로할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들 중에는 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분명히 나같은 사람이 무슨 위로를 하겠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착각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로한다는 것이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지식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세상적인 직함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위로할 마음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위로의 대상이 다양하고 계층도 다양합니다. 때문에 위로의 방법도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모든 이를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비록 내게 가진 것은 없을지라도 우리안에 있는 고운 심성과 고운 말로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진심어린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운명을 바꾸는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위로를 특정인만 한다는 생각부터 버리십시오.
우리는 모두를 위로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다만 내 것으로 위로하려들지 마십시오.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위로해 주십시오. 그런 믿음이 없으시다면 사랑과 진심으로 하십시오. 분명히 전달될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미국의 코넬 의과대학 교수가 말하기를 환자들이 회복기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은 회복을 빨리 하고 퇴원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회복이 무척 더디게 진행되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 위로를 많이 받는 사람은 회복이 빨리 되고 새살이 돋아나고 아물어 퇴원을 하고, 위로를 받지 못한 사람은 회복이 늦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위로하게 되면 내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의 위로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교만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위로를 가지고 남을 위로할 때에 상처가 빨리 아물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듯이 우리 모두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야 합니다. 위로는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로할 때에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로함으로 구원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는 본문 6절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위로하며 사십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당신에게 어떤 위로가 필요하신가요? 삶이 너무 힘들고 곤고하여 아무런 즐거움 없이 하루하루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요? 예기치 못한 환난이나 고통이 당신을 짓눌러서 지금 누군가의 위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을 위로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사모하십시오. 그분의 위로를 받으십시오.
무엇보다도 서로서로 위로하며 사십시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의 좋은 동역자들이 되어 주십시오. 좋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에게 여러분을 통하여 각별하신 위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2011.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