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두 가지 길로 살 수 있다. 자연적인 본연적인 길과 인위적인 길로.
인위적인 길은 엄청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새롭고 신기하고 모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아이들은 자연성을 떠나 인위적인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그러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그 유혹을 뿌리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낙원은 상실될 수밖에 없다. 본래부터 상실되게 되어 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다. 필연적이다.
그리고 물론,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희열이자 고뇌이며, 특권인 동시에 자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타락이다.
장폴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옳다.
왜 '형벌'인가? 그것은 자유에 관련해서 선택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인위적으로 존재하느냐의 선택. 자유가 없다면 선택도 없다.
동물들은 지금껏 낙원에 살고 있다. 동물들은 절대 그것을 잃을 수 없다.
하지만 잃은 적이 없기에 그들은 그것을 자각할 수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면 먼저 그것을 잃어야 할 것이다. 상실에 의해서 알게 되는 법이다.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그대는 상황을 안다. 만일 그것을 잃은 적이 없다면, 항상 거기에 있어 왔다면 그대는 당연하게 여긴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기에 쉽게 잊어버린다.
나무들은 지금껏 낙원에 살고 있다. 산과 별들도 그렇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오직 인간만이 알 수 있다. 나무는 붓다가 될 수 없다.
붓다와 나무의 본성에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무는 붓다가 될 수 없다.
나무는 이미 붓다인 것이다! 붓다가 되려면 먼저 나무의 본성을 잃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떨어져야만 한다.
그대는 오직 일정한 원근법에 의해 사물을 볼 수 있다. 너무 가까우면 그들을 볼 수 없다.
붓다가 본 것을 나무는 도무지 본 적이 없다.
나무도 동물들도 볼 수는 있지만 붓다만 그것을 자각하게 된다, 낙원을 되찾는다.
낙원은 오직 되찾음으로써 존재한다. 자연성의 아름다움과 신비는 그대가 집에 돌아올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그대가 자연성을 거슬러 갈 때, 그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갈 때, 그 어느 순간 비로소 귀로의 여행은 시작된다.
그대가 자연성에 목마르게 될 때, 그것의 부재로 인해 죽어 갈 때 그대는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본래의 타락이다. 인간의 의식은 본래의 타락이며 원죄이다.
하지만 원죄 없이는 붓다나 그리스도가 될 가망성도 없다.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계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본연적이지 않은 것을 할 수 있고 해서는 안 될 것을 할 수 있고
자기 자신과 신을 거역할 수 있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온갖 축복을 망가뜨릴 수 있는,
지옥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지옥을 창조함으로써 대비(對比)를 창조했다.
그리고 나서야 인간은 천국을 볼 수 있다. 오직 대비를 통해서만 알 가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억하라. 인간은 자연적으로 살 수도 있고 인위적으로 살 수도 있는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자연적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은 아무튼 자신을 진보시키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신뢰 속에서 살 수 있다. 그것을 자연성이라 한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살 수 있다.
행위자가 되지 않고 살 수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
그것이 도인이 말하는 무위(無爲), 즉 함이 없는 함이다.
자연성이란 그대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이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강물이 흐른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다. 나무가 자란다. 그들은 그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자라기 위해 무슨 지도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나무들은 꽃을 활짝 피워낸다.
그들은 무슨 색깔로 필까, 무슨 모양으로 필까 계획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모두 자연발생적이다.
나무는 아무런 걱정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 계획 없이, 어떤 청사진도 없이 수천 송이의 꽃을 피운다.
그저 피워 낼 뿐이다! 마치 불이 뜨겁듯이, 나무는 자란다. 그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바로 사물의 본성이다.
씨앗은 싹이 되고 싹은 식물이 되고 식물은 나무가 되고 나무는 어느 날 잎으로 무성해진다.
그러다 어느 날 봉오리가 생기고 꽃이 피고 열매가...... 이 일체가 순전히 자연발생적이다!
아이는 엄마의 자궁에서 자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무위 속에 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게 아니다.
실제로는 인생에서 다시는 그만큼 일어나지 못할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엄마 자궁 속에서의 그 아홉 달은 그대가 90년을 살아도 그만큼 담지 못할 어마어마한 일들을 담고 있다.
수만 가지 일들이 벌어진다.
아이는 오로지 하나의 불가시적인 세포로서 임신되었는데 그 다음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일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거기 마치 조그만 사람처럼 작은 세포 속에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걱정하며 불면증에 시달리며 아이가 앉아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엔 아무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면 붓다를 이해한다. 그대가 전연 염려하지 않아도 상황은 이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황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비록 그대가 행위자가 될 때라도 오직 표면상에서만 행위자가 될 뿐,
내면 깊숙이에서 상황은 저절로 계속 일어나고 있다.
푹 잠들어 있을 때 그대는 숨쉬려고 노력하는가? 그것은 자연발생적이다.
만일 사람이 숨을 일부러 쉬어야 한다면, 끊임없이 숨쉬는 것을 지각해야 한다면 도대체 아무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단 하루도.
한 순간 잊어버린다면 그걸로 끝이다. 숨 들이마시는 걸 잊어버리면 그대는 끝이다.
그러면 어떻게 잠들 것인가? 그대는 계속해서 깨어 있어야만 한다.
밤에도 계속 숨쉬고 있는지 어떤지 보기 위해 여러 번 깨어나야 할 것이다.
또 그대는 음식을 먹는다. 그런 다음 그대는 까마득히 잊어버리지만 수만 가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음식은 소화되고 부서지고 깨뜨려지고 변화되고 화학적인 탈바꿈을 한다.
그것은 그대의 피가 되고 뼈가 되고 근육이 될 것이다. 엄청난 작업이 진행된다.
피는 끊임없이 순환되면서 죽은 세포들을 전부 몸 밖으로 내보낸다.
그대가 아무 일 안해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행위는 표면에 머물러 있다.
인간은 인위적인 길로 표면적으로 살 수도 있지만
심층의 가장 중심에서는 항상 자연적이다.
법의 연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