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가 쓴 책
자동차왕 정몽구 오디세이아
(입력: 월간현대경영 2023년 3월호)
현대경영사史의 ‘큰 바위 얼굴’들이 쓴 책을 모아 한국경영의 대하 시리즈를 올린다.
MBN 대표이사, YTN 사장 등을 지낸 백인호 언론인이 쓴
자동차왕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 이야기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2021년 세계 자동차산업 최고 권위의
‘자동차 명예의 전당(Automotive Hall of Fame)’에 한국인 최초로 헌액됐다.
이는 정 명예회장 개인의 명예이자 한국의 국격을 높여준 쾌거였다고,
백인호 언론인은 평가하고 있다.
다음은 백인호 언론인이 쓴 ‘자동차왕 정몽구 오디세이아’에서
‘정몽구와 헨리포드’라는 흥미로운 글을 간추린 것이다.
가장 뛰어난 자동차 엔지니어 헨리포드
헨리 포드(Henry Ford)는 세계자동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자동차 엔지니어다. 정몽구 명예회장과 헨리 포드는 공통점이 많다. 자동차 품질 향상, 생산성을 높인 점도 공통이고 자동차에 대한 철학도 동일하다.
헨리 포드는 1863년 7월 30일 디트로이트 서쪽의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왜 자동차 즉 물체를 빠르게 이동시키는 기계(편집자 주: mobility)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가에 대한 흥미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가 12세 되던 해이다. 평소에 지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상태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말馬을 타고 달려갔지만 거리는 줄지 않고 시간만 가는 것에 애를 태웠다. 그가 어머니 곁에 갔을 때는 어머니는 숨을 거둔 뒤였다는 것이다, 어린 헨리 포드는 그때 사람, 물체가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헨리 포드는 15세 때 학교 공부를 접고 기계공이 되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발명가 에디슨이 세운 에디슨 조명회사로 초청되어 근무하던 중 내연기관을 완성하여 1892년에 자동차를 만들었다. 헨리 포드는 에디슨 회사 기술자로 근무하면서 자동차 제작에 몰두했다. 포드가 에디슨 앞에서 가솔린 자동차 개발계획을 발표하자 에디슨은 테이블을 쾅 치면서 “자네는 듣던 대로 현명하다”며 생각대로 가솔린 자동차를 만들어보게”라고 격려했다. 헨리 포드는 존경하는 에디슨의 격려에 크게 감명받았다. 하지만 전기 연구에 몰두하던 에디슨은 자동차 개발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결국 헨리 포드는 1894년 경주용 자동차를 제작하기 위해 에디슨 회사를 그만두었다.
1903년 헨리 포드는 석탄 딜러렸던 알렉산더 멜컴슨((Alexandef Malcomson)과 함께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미국이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 ‘포드’의 시작이다. 헨리 포드는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대중차인 모델 ‘T’를 생산했다. 1903년 8월 포드의 첫 차인 모델 'A'가 출시 되었다. 850달러의 소형차로 출시된지 1년만에 2천대 가량의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판매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포드 A는 한국과도 역사상 기억할 만한 인연이 있다. 대한 제국 고종황제는 탁지부에서 사두마차四頭馬車 대신 자동차를 사용할 것을 주청하자 주한 미국공사 앨런에게 차량을 의뢰했다. 1903년 고종이 즉위한 지 40주년을 맞아 포드 모델 A 자동차가 청경식의 전용차로 들어온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포드 모델 A 리무진은 청경식이 끝난 뒤 몇 달이 지나 인천항에 들어오게 되었고 황제가 타기에는 그 크기가 작아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제로 운영되지 못했다.
자동차왕 정몽구
대학(한양대)을 졸업한 정몽구는 처음 현대자동차 과장으로 입사했다. 재벌 2세로서는 드물게 밑바닥부터 기업인 생애를 시작했다.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시절에 컨테이너 사업을 성공시켜 아버지인 정주영 현대 창업회장으로부터 경영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양궁에도 조예가 있고 관심이 커 대한양궁협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재미있게도 현 대한양궁협회 회장은 그의 아들 정이선 현대 자동차그룹 회장이 맡고 있다.
경복고 재학시절 정몽구 회장이 별명은 ‘시베리아 바람’이었다. 럭비시합을 할 때 달리는 속도가 바람처럼 빨랐기 때문에 붙은 닉네임이다. 그는 럭비부 주장이었다. 또래 중에 가장 힘이 셌다. 손병두 삼성그룹 호암재단 전 이사장과 동기로, 공부에만 열중한 약한 체구의 손병두를 불량서클 학생들로부터 지켜준 일화가 있다.
모교인 한양대학교에 그의 이름을 딴 정몽구 미래자동차연구센터 건물이 2015년 들어섰다. 이름 그대로 정몽구 회장이 건설을 후원했으며 미래 자동차공학과 등이 입주했다. 정몽구 회장의 ‘경영능력’은 긍정적 평가가 부정적 평가보다 훨씬 높다. 현대정공을 성공적으로 키워 아버지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인정받기도 했고, 갈기갈기 찢어진 현대그룹을 다시금 재계 서열 2위로 끌어올린 공적만 봐도 그의 능력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에 미투(MeToo)운동이 2018년 들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정몽구 회장에 대한 2010년도 기사가 주목을 받고 있다. 부인과 사별한 이후 자택 가사도우미까지 모두 남자로 교체했다는 내용이다. 부인과 사별한 상태에서 주변에 여자를 두면 혹시 이혹이나 구설수가 날 수 있어이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차단시켜버렸다고 한다. 정몽구 회장은 4대 숙원사업으로 ① 세계자동차업계 5위 진입 ② 현대차 적통 계승 ③ 고로 제철소 준공 ④ 통합사옥 건립이었는데 ①, ②, ③ 목표는달성했고 통합사옥 건립은 구 한전(강남구) 사옥 부지에 건립이 진행 중이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창업자 정주영 회장의 맏아들이면서도 ‘황태자’ 예우를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밑바닥부터 시작했으며 눈물 젖은 빵을 많이 먹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자동차를 이해했으며 자동차 전문가가 되었다. 세계자동차사史에 남는 카를 벤츠, 페레르디난트 포르쉐, 헨리 포드 등과 동등한 자동차 엔지니어가 되었다.
세계 5위 자동차그룹인 현대자동착그룹의 창업과 성장, 발전에는 이처럼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음을 세계자동차사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