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2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세례의 상징이라고?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대그룹 장가 아들을 참교육하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아버지까지
죽게 된 박새로이가 3년간의 감옥생활에서 아버지의 꿈을 이룰 15년 목표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꿈은 작은 가게 하나 갖는 것이었습니다.
박새로이는 장가 그룹을 파괴하고 자신에게 오히려 무릎 꿇게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마음의 문을 열어서 동료들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위해 헌신한 한 사람을 사랑하게까지 됩니다.
이 드라마는 복수의 이름으로 박새로이의 성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아를 복종시키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란 결론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에 도전하게 만드는 힘은 누군가의 죽음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박새로이는 대기업을 무너뜨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이전의 객기만 있던 청소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계속 무너지는 것만으로는 자존심만 강해질 뿐입니다.
자존심은 성장하며 자존감으로 바뀝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성장의 시험대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의 사람들이
먹지 못하고 배고파하는 것을 보시며 필립보를 시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시험하는 것일까요?
“나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널 위해 죽을 거야. 그러면 넌 나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겠니?”
그러나 제자들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들을 먹일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믿어도 그럴까요? 그분은 우리에게 다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면 이제 이러한 사람이 됩니다.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그곳에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보육원 건축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데레사 수녀님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테레사 수녀님은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표정과 말은 진지했습니다.
“이 3실링과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느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3실링으로 고아원과 병원 등을 전 세계에 수백 개 지었습니다.
무언가를 이뤄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벌어지는 나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그것 아니면 이기지 못할 자아와의 싸움이 중요합니다.
참 자유는 주님과 함께 꿈을 이뤄나가는 데서 얻어집니다.
얼마 전에 『더 높은 기도』 책 홍보 행사를 했습니다. 북콘서트라고도 하고 출판기념회라고도 합니다.
많은 분이 오셔서 그 짧은 시간에 1,300권의 책을 사 주셨습니다.
저는 행사의 모든 과정을 기획하고 홍보하고 주인공 역할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유튜브 생방송을 하는 중에 노래도 세 곡씩이나 했습니다.
그러면서 느꼈습니다.
‘많이 성장했구나!’
잘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긴장도 했습니다.
아침에 고춧가루를 팍팍 넣고 끓여 먹은 라면 때문인지 속이 쓰려왔습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친구들 앞에서도 노래를 못 하던 저였습니다.
자아가 강했기에 실수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봉사자분들과 함께 세 시간 동안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습니다.
노래를 잘하지 못해도 그냥 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은 어렸을 때는 상상도 못 할 모습입니다.
그러며 주님과 함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겠다는 꿈이 저의 자아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감이 ‘세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례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음을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배고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꿈속에서 살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례의 결단이 있은 다음의 삶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삶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주님과 함께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십시오.
진짜 성공은 그 과정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나의 성장과 자유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2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요한 6,1-15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초라한 우리 삶의 결실이라 할지라도
오늘 아침 저는 안드레아 사도의 언행을 두고 묵상해보았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몇몇 안드레아와 관련된 기사들에 비추어볼 때 그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말보다는 행동을 중요시 여기던 실천가, 머리로 오래 생각하기보다는 발로 뛰던 사람, 민첩하게 움직이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안드레아였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필립보와 ‘굶주린 군중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대화하고 있을 때, 그는 성급하게 대화에 끼어듭니다.
그는 이미 직면한 문제에 앞에서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미 굶주린 군중들의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 여기저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면서 음식을 찾아보았습니다.
안드레아는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고, 생명수처럼 시원하다할지라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가 찾아낸 것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남자 장정만 해도 오천 명, 총인원은 줄잡아 이만명이상인데, 확보된 비상식량은 겨우 한 소년이 들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이는 갈릴래아 호숫가 가난한 백성들이 겨우 끼니를 때우기 위해 즐겨먹던 초라한 식사였습니다.
준비성, 계획성이 투철했던 그는 최우선적으로 당면한 문제인 ‘식사’ 문제에는 전혀 관심도 계획도 없이 말씀만 선포하시던 스승 예수님이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아는 볼멘 목소리로, 실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보잘 것 없는 결과 앞에 실망과 회의, 분노로 가득 찬 안드레아의 목소리는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외침 역시 자주 안드레아의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주님, 정말 야속합니다.
제 인생,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이것 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주님, 하는데 까지 노력했지만 보시다시피 결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쥔 게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비참합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손때 묻은 한 소년이 지니고 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셨듯이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인생, 초라한 우리 삶의 결실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는 결실을 통해서도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이 비록 지극히 구차스러워 보이고, 엄청 하찮아보일지라도 힘내십시오.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십시오.
일어서십시오.
주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강론>
(2024. 4. 12. 금)(요한 6,1-15)
<빵의 기적>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5-7)”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2-15).”
1) 공관복음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계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분”이라는 계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사람들이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계획하고 실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을 걱정한 제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일으키신 기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모두 합해서 생각하면 ‘빵의 기적’은, “예수님은 목마름도 배고픔도 없는(묵시 22,1-2)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잔치’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 55,1).”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
‘빵의 기적’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체험한 일”입니다.>
2) ‘빵의 기적’ 이야기를 대할 때, 어떤 아이가 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9절)
너무 많이 시선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고, 어떤 조건이나 제한 없이 순전히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으로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다.” 라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그 빵과 물고기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건의 제약을 받아야 한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빵과 물고기가 없었어도
예수님은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비록 예수님께서 기적의 재료로 사용하시긴 했지만, 기적의 본질적인 요소도 아니고, 이야기의 핵심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일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려고 하는 기적에,
또는 일으키신 기적에 ‘응답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그 빵과 물고기를 내놓은 어떤 아이의 마음과 태도는 훌륭한 것이고, 그 행동은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봉헌한 일과(마르 12,41-44) 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3) 요한복음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은, 결코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뒤의 22절부터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면(추대하면) 예수님께서 날마다 배불리 먹여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이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께 ‘땅에 속한 것’을(요한 3,31) 청하려는 생각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치를 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누구에게나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긴 한데,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행의 과정일 뿐이고,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배불리 먹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뒤의 27절에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에 관심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는 정치인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종교가) 세속의 정치를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