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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묵상글 ( 9/23. 20:40, 04:45, 05:15 ~:25.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9/23. 20:40, )
2차 공유할 묵상글< 04시 ~ 05시반,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05:1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25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04:45 추가.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11/29) 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까지, 안되면 07시쯤(이후)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2026. 09.04. 추기>
*** 1차, 2차로 나누어 프란치스칸 수도자 몇 분의 글만을 올리면서도 어느 땐 글이 제가 예측한 시간에 올라오지가 아니하여
어느 땐 저의 몸상태로 수면 시간이 들쭉날쭉하여 "1차공유 전일 22시 이전, 2차 공유 04-05시 " 지켜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9월 22일은 김찬선 신부님 강론글은 어떤 사정과 형편인지 05:25 까지 올라오지 아니하였다,
9/21은 새벽녁 잠이 들었다가 새벽미사를 놓쳤고, 9/22은 제가 접하는 강론글, 묵상글을 올리려고 새벽미사 참례를
포기하였는데 그렇게 까지 할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2026. 09. 22. 추기)
**** 공지 (H 260707) 에 따라, 위 3) 나)로 정하고 ' * * ' 로 하고자 했으나
제가 더 자유스럽고 가능하면 새벽미사 참례를 여유롭게 하기위하여
전일 22이전에 1차분 올리는 것도 못올릴 수도 있고 그럴경우 댱일 4 ~ 5시반 까지 1,2차분 함께 올릴 수도 있고,
아니면 당일 7시 이후 시간대에도 자유롭게 올릴 수도 있아오니 ,
저의 글 올리는 시간이 들쭉날쭉함에 신경을 쓰시지 마시고 , 제가 올리는 글을 다른 분들에게 전파하시는 분은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신 곳에
들어가 공유를 하시기 바랍니다. ( - 요약, 제가 올리는 몇 분글도 정해진 시간 없이자유롭게 올림)
이해하여 주시고 이 카페를 인수받아 잘 운영할 분들에게 권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2026.09. 22.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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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1,2-11)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복음<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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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9.23 20:28
2026년 9월 24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9,7-9
짧지만 서늘한 장면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말합니다.
‘요한이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가 살아났다.’
헤로데는 묻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물음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묻느냐’가 모든 것을 가릅니다.
헤로데의 물음은 ‘찔린 양심과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덧붙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만나 보려는 마음’만 있었지,
정작 그분께 다가가지는 않았습니다.
먼 훗날 재판정에서야 예수님을 보게 된 헤로데는,
‘기적이나 구경할까’ 기대했다가, 침묵하시는 그분을 조롱합니다.
헤로데의 ‘봄’은 늘 ‘구경꾼의 봄’이었지,
결코 ‘제자의 봄’이 아니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즐겨 짚었듯,
호기심은 사람을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가지 못합니다.
‘신기해서 보고 싶다’는 마음과
‘믿어서 만나 뵙고 따르겠다’는 마음은 전혀 다릅니다.
헤로데는 끝까지 앞의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눈여겨볼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헤로데가 궁금해한 것은 ‘복음을 전한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어제 파견된 제자들은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은 물러나고 예수님만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악한 통치자마저 ‘예수가 누구인지’ 궁금해했습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그분만 드러내는 것 ―
이것이 참된 제자의 표지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화 주간’을 위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름다움도, 진리도, 복음도
‘구경거리’로 소비될 수 있습니다.
잠깐 신기해하고, 흥미로워하고, 이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문화와 신앙은 ‘구경’이 아니라 ‘만남’입니다.
마음을 열어 다가갈 때, 그 만남이 우리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찬가’가 그 답을 줍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십자가 죽음에까지 순종하시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드높이 올리신 분”(필리 2장)입니다.
호기심으로는 결코 볼 수 없고, 사랑으로만 뵐 수 있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구경거리(호기심)’로 대하지 않는가?
나는 ‘만나 보려고만’ 하고 다가가기를 미루지(망설이지) 않는가?
나는 나를 내세우는가, 물러나 ‘그분만’ 드러나게 하는가?
나는 아름다움과 복음을 ‘구경’이 아니라 ‘만남’으로 대하는가?
주님,
호기심으로 구경만 하지 않게 하소서.
망설임을 떨치고 믿음으로 당신께 다가가 만나 뵙게 하시고,
저를 내세우지 않고 당신만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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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9.23. 17:09
집단적 폭력은 함께하는 선, 즉 공동선(公共善)으로 맞서야 합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복음은 개인적으로만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내야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비폭력: 그리스도인 소명
집단적 폭력은 함께하는 선, 즉 공동선(公共善)으로 맞서야 합니다.
2026년 9월 23일 수요일
리처드 신부는 우리에게 비폭력을 몸으로 살아낸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태도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와 교회, 그리고 세상 안에 자리 잡은 폭력의 구조와 맞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집단적 악은 오직 함께하는 선, 즉 공동선으로만 맞설 수 있습니다. 폭력의 체계와 구조 앞에서 우리는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함께 의식을 성장시켜, 불의에 항거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달아 왔습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거대한 악 앞에서 여전히 무력감을 느끼곤 합니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겪는 심리적 마비를 설명해 줍니다. 겉으로는 수동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마비 상태이며, 이는 악의 의지라기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독일어권에서 오랫동안 사목 활동을 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주교들이 히틀러에 맞서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교들은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체제에 굴복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그들은 사실 나치 정권 교회를 박해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박해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그 안에서 당신께서 함께하시며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개인이 복음을 살아내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교회 공동체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온 듯합니다. 신자들에게는 가난을 요구하면서도 제도적 교회는 부유하게 남아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복음은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저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가르치는 동안, 미국이 지닌 아름다운 면모들을 많이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자유, 교육, 자원 면에서 많은 특권을 누려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그늘도 보았습니다. 특히 지나치게 개인주의를 고집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기도 여정이 공동체적 봉사와 세상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폭력에 맞서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세계 많은 이들이 우리를 억압적 체제의 일부로 바라보는 한, 폭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들의 시각은 틀리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아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것은 집단적 자아입니다. 그것은 대개 더 교묘하게 숨겨지고, 보호받으며, 부인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치유와 정의가 아니라 분노와 증오, 폭력의 악순환에 계속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1]
리처드는 폭력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가, 예수님의 폭력적인 죽음이 하느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우리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속죄 구속 이론, 특히 예수님의 삶과 수난, 죽음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론은 사실상 협소한 보복적 정의 개념을 강화하고, "선하고도 불가피한 폭력"이라는 생각을 정당화해 왔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를 보복적 관점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고유한 그리스도교적 메시지를 잃고,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차갑고 냉혹한 정의에 머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역사에 대한 구원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바오로 사도가 말한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와 권력"(에페소서 3,9–10; 6,12)을 거룩한 것으로 둔갑시키는 꼴이 됩니다. 결국 우리는 많은 이들이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라 부르는 틀 안에 머물게 되며, 그것은 어쩌면 역사의 지배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비폭력은 우리가 동정심을 갖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시작됩니다. 저는 내면을 성찰하고 그림자 작업을 시작하면서 오래된 상처를 치유하고, 건강한 경계와 사고의 방식들을 다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변화의 걸음을 내디딘 뒤 우리가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모든 것 안에서 흐르게 됩니다.
—Susan C.
Reference
[1] Adapted from Richard Rohr, Healing Our Violence through the Journey of Centering Prayer, Richard Rohr, Thomas Keating (St. Anthony Messenger Press, 2002).Unavailable.
[2]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Universal Christ: How a Forgotten Reality Can Change Everything We See, Hope for, and Believe (Convergent Books, 2021), 140, 141–14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분열을 드러내는 벽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다양한 색과 아름다움을 품은 벽처럼, 우리는 한쪽을 고르지 않고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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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24 04:58
-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Vanity of vanities, says Qoheleth, vanity of vanities! All things are vanity!”
오늘 저는 굳이 영어 성서의 말씀을 같이 들여다봤습니다.
‘Vanity’란 말을 가지고 오늘 얘기를 시작하고 싶어서입니다.
Vanity란 말에는 우리의 허무와 같이 공허함, 무가치, 하찮음, 알맹이 없음,
덧없음, 헛됨, 쓸데없음의 뜻도 있지만 허영심이나 자만심의 뜻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한데 허영심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허무함을 가중할 뿐이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 코헬렛을 묵상하며 또한 <Dust in the wind>도 떠올립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I close my eyes, Only for a moment, and the moment's gone
All my dreams pass before my eyes, a curiosity, Dust in the wind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
Same old song, Just a drop of water in an endless sea
All we do crumbles to the ground though we refuse to see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Don't hang on, Nothing lasts forever, but the earth and sky
It slips away. And all your money won't another minute buy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Dust in the wind,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Dust in the wind”
이 가을에 코헬렛을 읽고 묵상하며 이 곡을 들으면 잘 어울리지요.
여러분도 오래간만에 저처럼 코헬렛과 함께 이 곡을 들어보세요.
모든 것이 바람 속의 먼지처럼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무감은 어떤 면에서 부정적인 느낌입니다.
그러나 허무 관상은 제 생각에 아주 좋은 것입니다.
있던 것이 없음,
있어야 할 것이 없음,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음,
허무나 허무함을 직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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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46?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24. 05:20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품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모상들입니다!
루카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해 마르코 복음이나 마태오 복음처럼 자세히 전하지 않습니다. 루카는 요한의 처형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기보다, 헤로데가 요한을 두려워하면서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점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루카 복음 저자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자체보다, 헤로데의 내적 갈등과 예수님을 향한 호기심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루카 복음 저자는 사건의 외적인 상보다 영적 의미—곧 권력자조차 예수님의 존재 앞에서 흔들리고, 진리를 향한 갈망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 저자는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고 전합니다.
저는 이 장면 속에서 성령께서 헤로데의 양심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찌르며 일깨우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그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음을 드러내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여전히 진정한 것을 갈망하고 있었으며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느님 은총을 갈망하고 있었음을 드러내 줍니다.
만일 그가 이런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였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익숙한 삶, 즉 세속적인 야망과 갈망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신 낯선 길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헤로데는 허영에 사로잡힌 인간의 전형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낯선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삶을 마감합니다.
코헬렛서에서 "태양 아래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라는 외침이 떠오릅니다! 그는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체면을 잃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다른 로마 영주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지위와 집, 종들과 자신의 그 거짓 정체성을 잃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코헬렛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요....
저 역시 인간으로서 헤로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헤로데만큼 큰 권력을 지닌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처럼 잔혹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지만... '내'가 가진 것에 집착하며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또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보거나 듣기를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나'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의존하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삶의 역학을 바꾸어 '나'를 변모하게 하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데... 사실 우리 힘만으로는 우리 이전 사람들이 반복했던 패턴을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무언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현실 속으로 들어오시어 십자가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끊임없이 이끌어 주시는 변호자, 곧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헤로데의 마음을 찌르셨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깨우십니다.
우리가 잘 의식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하는 이 은총은 우리에게 두려움 속에 머무르지 말고 하느님 사랑의 자유로 나아오라고 초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어 의식하며 주님께 주도권을 온전히 넘겨 드리겠다는 결단을 내릴 때, 두려워했던 그 길이 바로 생명을 주는 길임을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이 변모를 우리 안에서 촉발시켜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주님을 우리 존재 안에 모시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의식하고 믿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한없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느님의 사랑과 그 진리를 품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모상들입니다!
사실 요한의 죽음은 헤로데라는 잔혹한 폭군의 술판에서 어처구니없이 희생된 하나의 사건으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진리와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갈망을 일깨우는 자명종과 같은 주님의 초대이고, 또 우리 존재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도록 해 주는 하느님의 초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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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5549
2026.09.24 01:38
제5장 그리스도와의 우정 1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삶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그분에 대하여 많이 알고 그분을 자주 생각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그분과 결합하여 그분이 사랑하신 방식으로 사랑하고, 그분이 내려가신 길을 따라 내려가며, 마침내 우리의 몸과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이 다시 살아나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데서 완성됩니다. 프란치스칸 기도의 길에서 우정은 하나의 신심이나 특별한 기도 방법이 아니라 삶 전체를 그리스도에게 내어놓는 관계이며,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마침내 우리가 사랑하는 분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보나벤투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향하여 온몸을 열어놓으신 친구의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입 맞추시려고 머리를 숙이시고, 우리를 끌어안으시려고 두 팔을 펼치시며,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손을 여시고,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시려고 몸을 내미시며, 우리가 당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옆구리까지 열어놓으십니다. 십자가는 멀리 계신 하느님의 형상이 아니라 우리와 친구가 되기 위하여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우리가 먼저 그분을 찾아간 결과라기보다 우리를 향하여 이미 온몸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느님의 갈망에 대한 응답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갈망하기 이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갈망하셨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기를 결심하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우정의 가시적인 표지이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맹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한 우리의 기술이나 노력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사랑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클라라는 이 신비를 십자가라는 ‘거울’의 상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녀가 아녜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며 관상하라고 권고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그림처럼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의 사랑을 맛보고, 그분이 사랑하신 방식에 자신을 내어맡기며, 마침내 자신이 바라보는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관상은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변형으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라는 거울 앞에 서면 우리는 하느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보게 됩니다. 그 거울에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가 드러나는 동시에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진실도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이시며, 인간은 바로 그 사랑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깊이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통을 바라보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존재가 되도록 창조되었는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움켜쥐고 보호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선물할 때 비로소 자기 존재의 진실에 도달하는 존재입니다.
클라라에게 십자가라는 거울의 테두리는 가난이며, 그 표면은 겸손이고, 그 가장 깊은 중심은 사랑입니다. 말구유에서 시작된 가난, 나자렛과 갈릴래아의 일상에서 드러난 겸손, 그리고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 자기 내어줌의 사랑이 하나의 길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가난과 겸손과 사랑이라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그리스도에 대해 감탄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내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매우 아름답고도 놀라운 관계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주님의 영을 받아 그 거룩한 활동을 행하고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정배이며 형제이고 어머니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세 표현은 단순한 경건한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결합된 삶의 전체 여정을 보여줍니다. 정배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는 사람이며, 형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자신이 받아들인 그리스도를 거룩한 행실과 관계를 통하여 세상에 낳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정배와 형제와 어머니는 서로 분리된 세 가지 신분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움직이는 세 방향입니다. 우리는 먼저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와 결합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고, 마침내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줌으로써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낳습니다. 받아들임에서 결합으로, 결합에서 순종으로, 순종에서 자기 내어줌으로, 자기 내어줌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이 프란치스칸 관계성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정배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받는 것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복음의 시작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먼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따라서 정배의 첫 번째 자세는 성취가 아니라 수용이고, 소유가 아니라 가난이며, 자기 증명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받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위로를 경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오래 머물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붙잡고 살아가는지가 드러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옳아야 한다는 집착,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바꾸고 싶은 통제 욕구,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기 가치를 확인하려는 마음,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방어벽과 체면이 드러납니다. 십자가의 거울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이러한 거짓 자아를 비춥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자기 인식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 진실하게 보게 되고, 자신의 가난을 알수록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를 끌어안았던 사건은 바로 이 신비를 보여줍니다. 그가 나환자의 손에 입을 맞추었을 때 그는 단순히 자신 밖에 있는 한 사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 안에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가난과 약함과 두려움까지 함께 끌어안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안의 나환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밖에 있는 나환자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 안에서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만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고집 센 사람에게 지나치게 화가 나는 것은 내 안의 고집을 건드리기 때문일 수 있고, 인정받으려는 사람을 못 견디는 것은 내 안에도 같은 갈망이 있기 때문일 수 있으며, 통제적인 사람에게 강하게 반응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통제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는 때로 우리의 일상적인 거울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거울이라면, 형제는 내가 아직 그리스도처럼 변화되지 못한 부분을 보여주는 가까운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관계의 갈등은 언제나 제거해야 할 장애물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인식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러는가?”라는 질문에서 “나는 왜 저 사람에게 이렇게 흔들리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갈 때 관계는 영적 여정이 됩니다. 상대를 바꾸는 데 몰두하던 시선이 자기 내면으로 돌아오고,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작음과 가난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난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다른 사람의 가난도 조금씩 품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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