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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
살전 1:1-10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살전 1:1-10 / [인사]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보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2)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서 늘 기도하며 3) 언제나 잊지 않고 여러분의 사랑에 넘치는 수고와 강한 신앙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태도를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4)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가려 뽑으시어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5) 그러기에 여러분은 우리가 전한 복음을 무의미하게 흘려 보내지 않고 큰 관심을 가지고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진리라는 강한 확신을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부어 주시어 여러분은 중대한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복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의 생활로도 여실히 증명하였습니다. 6)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를 따르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많은 시련과 슬픔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신 기쁨으로 우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7)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8) 이제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온 지방에 여러분이 전한 주님의 말씀이 퍼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소문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들려 옵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 이상 구구하게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9) 우리가 찾아갔을 때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환대했으며, 또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이제는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는지를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말해 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10)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다시 오실 날을 여러분이 열렬히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장차 우리를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서 구원하여 주실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실라의 제 2차 선교여행 중에 세워진 교회입니다(행 17장).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 몇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곳 유대인들의 심한 반대와 방해로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를 급히 떠나야 했습니다. 그 이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보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자 디모데를 대신 보냈습니다.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1)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발신자의 이름을 자신만이 아니라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함께 적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사역은 바울 혼자의 사역이 아니라 공동의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세 사람의 이름을 모두 인사말에 기록한 것은 동역자들에 대한 깊은 존중을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2-5)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그리움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교회를 위해서 늘 기도드린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격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많은 신앙적 위기를 극복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의 토대에 올라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삶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참된 신앙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감격합니다.
주를 본받은 자(6-10) 바울은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된 성도들을 칭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보듬어 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그런 삶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그런 경계를 넘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적용: “신앙생활이란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신앙고백은 당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나 번역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규모가 있는 교회에만 성령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교회라 하더라도 성령께서 인도하시면 능히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으며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든 규모나 시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설 교 >
데살로니가전서 1:1-10
살전 1:1-10 / 이대은
오늘부터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을 시작합니다. 이 서신서는 특히 바울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하며 은혜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입니다. 성경에서는 현재 그리스의 북부 지역을 마게도냐라 하고, 그리스 남부 지역을 아가야라고 하는데,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역에서 천혜의 항구이자 로마와 동방을 잇는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하며 이곳을 방문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게도냐 지역에 온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여기에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는데,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많은 회심자를 얻었지만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혐의를 쓰고 곧 쫓겨납니다. 이후 베뢰아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간 바울은 일년 육개월간 그곳에 머물며 데살로니가 교회에 디모데를 보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신들의 본을 따라 믿음 가운데 행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신이 미처 충분히 가르치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정확하게 전하고, 그에 따른 합당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하는 내용을 담아 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의 인사(1-4) ]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이 초기 편지에서 여타 서신서와 달리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사도인지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데,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관계가 굉장히 돈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두 인물도 같이 소개합니다. 2차 전도 여행의 신실한 동역자인 실라가 실루아노로 기록되어 있으며, 루스드라에서부터 전도 여행에 동참했고 데살로니가를 오가며 소식을 전한 디모데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를 설명하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하며, 그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돌이켜 보게 됩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집회를 뜻하는 단어로서, 당시에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두고 사용한 말은 아닙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근원을 두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교회라고 한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곧 특유의 인사를 전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는 말인데, 바울은 여러 서신서에서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평강은 샬롬에 해당하는 말로서 유대인의 일반적인 인사였습니다. 또 은혜란 카리스라고 하는데 당시 헬라식 인사를 변형하여 사용한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인사말을 건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복음에 따르는 환난 가운데도 평안함을 누리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2-3)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감사와 기도와 기억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며 기억하는 일이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감사가 터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행하신 일과 그들의 반응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특히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믿음 소망 사랑이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인 안에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행했던 여러 가지 일을 기억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감내했던 온갖 수고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소망하며 인내했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른 이에게 기억되기를 원하는지, 어떤 존재로 다른 믿는 자의 기도에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부와 명예, 또는 세련되고 교양 있는 언행을 자랑삼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환난을 당해도 믿음으로 반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하고, 예수님의 약속을 기대하며 인내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할 삶입니다. 내 삶에 그러한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지, 또 다른 이를 어떤 기준에 따라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은 담대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고 택하심을 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택하심이라는 주제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영역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서 멈춰야 합니다. 성경이 그 이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를 안다고 한 표현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택하셨는지 택하지 않으셨는지를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앞뒤 구절을 살펴볼 때 데살로니가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선택된 존재에 합당한 믿음과 삶을 견지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바라보며 저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선택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저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감사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의 경과(5-10)]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복음이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입만 살았다는 말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말의 사람이 아니라 삶의 사람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실망하는 큰 이유는 말을 잘하지 못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말은 너무 잘하는데 그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은 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해질 때 거기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능력이 나타나며, 큰 확신이 있습니다. 이는 결국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은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들은 우리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힘을 주셔서 그 말과 행동에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고 큰 확신을 주셔서 지금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덧붙여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직접 우리 가운데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경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 가운데 살아가심으로써 자신의 말씀을 다 실천하셨습니다. 인간 가운데서, 인간과 살을 맞대고, 혐오스러운 인간을 위하여 같은 모습을 취하신 것은 참으로 위대한 겸손의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도, 시혜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누리지 못한 것을 제공해 주겠다는 식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본받은 선교사님들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한국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 사람같이 되기 위해 힘쓰고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던 그 마음과 삶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삶의 영역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감사하고 감격한 바는 그들이 많은 환난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에 따르는 기쁨과 박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 역시 바울이 떠난 이후에도 줄곧 박해를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박해를 극복할 만한 기쁨을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바울 일행을 본받아 그 모습대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계속 주를 본받고, 그리스도인을 본받으며, 또 나를 본받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계속하게 됩니다. 본받다는 말은 모범을 따라 흉내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작이시고 주님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본받는 일과 그 본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7-8)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마게도냐와 아가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그리스 전체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리스 반도의 모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온 세상에 그들의 믿음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말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임하여 믿음의 반응을 일으키고, 그 신선한 반향을 목격한 사람들의 연쇄적인 결단을 낳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국가적으로 경험했습니다. 복음을 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가 증가했고 그리스도인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여 모든 믿는 나라의 본이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들렸고 믿음의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감사합니다. 다음 말씀을 살펴보고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9-10)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새번역 성경은 9절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부분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영접했는지”라고 옮깁니다.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인들이 바울 일행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우상을 버리며 하나님께 돌아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9절과 10절은 복음의 핵심 주제를 다룹니다. 복음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또 복음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 또 복음은 예수님을 기다리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소망의 인내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복음을 받들어 이 세 가지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더 좋은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수동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것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완전히 임하지는 않은 현시대를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긴장 관계를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지기 쉽습니다. 한국교회와 우리는 특별히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행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오히려 장래의 노하심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찬양하는 믿음의 소문은 사라지고 흉문만 넘쳐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노하심으로 인해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의식하며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소망의 인내란 하나님과 함께할 영원한 세상을 바라며 이 세상의 핍박을 견디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피해 이 세상의 유혹을 절제하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복음의 본을 보여주신 선교사님들의 흔적을 지근거리에 간직하고 있다는 특권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이어온 이 본을 따라 믿음의 사역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감내하는 모든 주님의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이 쓰는 애정어린 편지를 봅니다. 이 편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편지임을 또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달되고 믿음의 소문이 퍼져나가게 하옵소서. 나와 한국교회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일을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말이 아닌 삶으로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뻐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지 또 나는 다른 이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2. 내게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는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3. 나에게 복음이 말뿐만이 아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임하였던 기억을 살려 보십시오. 나는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있습니까?
4. 나와 한국교회의 상황을 생각하고 회개하고 돌이킬 것이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보십시오.
회심한 성도의 세가지 특징
살전1:1-10 / 이광은 목사
1. 데살로니가 전서 배경
(1) 데살로니가 교회
① 마게도냐의 수도 데살로니가
- 1세기 그리스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는 그리스를 크게 두 개의 행정지역으로 나 누고 그리스 북부는 마게도냐로, 그리스 중남부를 아가야로 불렀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고,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이다. 데살로니가는 항구도시지 만 육로로도 로마와 비잔티움으로 연결해주는 이그나티아 대로가 지나가는 대단히 번 성한 도시였다.
② 테러의 위협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급히 떠남
- 바울의 선교여행은 그 지역에서 회심한 사람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세우는 것이 특 징이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회심한 야손과 그 가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한편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테러를 가하려는 유대인들로 인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
③ 후에 디모데를 통해 얻게 된 교회 소식
- 디모데가 전해준 소식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유대인의 핍박 속에서도, 교회가 복음의 진리를 잘 지키고 있다는 좋은 소식이었다. 둘째는 일부이기는 하지 만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대적자들이 생겨났다는 것과 셋째로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오해로 성도 중 일부가 일을 하지 않는 등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 울은 이 세가지를 대답하며 특히 오해된 종말론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으로 데살로니 가 전서를 쓰게 된다.
(2) 데살로니가 전서의 중요성
① 구원을 오해할 때 생기는 결과 - 현실 방종 vs 현실 도피
- 고린도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오해할 때 어떤 현상이 벌어 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린도교회는 구원을 이미 얻었다고 함으로 현실을 방종하게 하고, 데살로니가교회는 구원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함으로 긴박한 종말을 기다리며 현실을 도피하게 했다.
② 구원받은 우리는 오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 고린도 전서는 우리에게 도덕폐기론의 위험성을 보여주고, 데살로니가 전서는 불건전 한 시한부 종말론이 가져오는 피해를 보여준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상태”임을 기억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를 통해서 우리는 종말과 오 늘의 삶을 배움으로 하나님 나라 구원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배워 야겠다.
2. 회심한 성도의 세가지 특징
(1) 데살로니가 교회는 회심자 야손으로부터 시작되었다.(행17:1-9)
① 회심이란 무엇인가?
- 회심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을 때 오는 전인격적인 변화를 말한다. 회심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십자가 앞에 나와 자신이 어떤 죄인이었음을 통곡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를 붙잡는 이는 성령의 도우심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② 회심은 가치관의 변화, 주권전이, 전인격적 의탁을 가져온다.
- 회심은 자기중심적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뀌는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는 지금까지 자기가 주인되어 살아왔던 모든 것이 죄임을 깨닫고, 이제 부터는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다는 근본적인 변화이다. 이는 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이양하는 주권전이와 그리고 내 삶을 그분께 의탁하는 전 인격적인 의탁을 동반한다.
(2) 회심한 성도의 세가지 특징(3절)
① 믿음의 역사
- 교회 일은 담대한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교회일은 세상일과 다르다. 세상일은 이윤여부를 보며 회사 경제원리에 따라 해나간다. 그러나 교회일은 언제나 재정이 모자라고, 불가능해 보이기에 믿음이 없이는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 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② 사랑의 수고
- 교회 일은 눈물의 수고를 요구하기도 한다. 보상 없이 이웃에 대한 희생과 헌신적 수 고를 요구한다. 우리가 이러한 수고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는 어떠한 희생과 아픔에도 수고하며 헌신한다. 십자가 사랑을 아는 자는 모든 것 을 희생하고 수고한다.
③ 소망의 인내
- 교회 일은 고난이 있기에 인내가 필요하다. 현실은 어렵고 응답은 아직 오지 않는다. 때로는 너무 힘들고 어렵기에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미 래에 이루실 일들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진 자만 인내할 수 있다. 주의 재림과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자는 오늘의 고난을 이길 수 있다. 인내는 소망에서 나온다.
(3) 회심한 성도들의 신앙 내용(9-10절)
① 우상을 버리고 죄악된 삶에서 돌이켰다.
- 가나안과 헬라지역에서 우상은 음란과 타락의 대명사였다. 우상은 인간 내면의 죄악 된 욕구가 밖으로 투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비인격 우상은 숭배자에게 죄에서 돌이 킬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를 자극하고 강화시켜준다. 우상숭배자의 복종과 헌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이지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다. 우리 를 죄에서 돌이키도록 요구하시고, 성경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도록 순종과 복 종을 요구하시는 분은 인격이신 하나님 밖에 없다.
②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다.
- 사시고 참되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우상과 대조시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우상은 죽 어 있으며, 거짓되고 헛되다.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고, 우리가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못하는 죽어있는 헛된 도구이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참되시 다. 참된 회심을 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섬겼다.
③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소망하며 기다렸다.
- 재림은 십자가 복음의 완성이다. 그리스도는 초림의 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 를 대속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함께하셔서 우리가 죄를 이기게 하시 고, 재림하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우리 몸의 부활케 하시고, 죄와 사단, 사망을 멸하시며 마지막 심판을 하실 것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였다.
<적용>믿음의 본을 보이는 교회가 되자.(7절)
(1) 우리교회를 통하여 회심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도록 기도하자.
- 데살로니가 교회는 회심한 야손 한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자. 회심의 고백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이다. 우리교회를 통하여 멸망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키 는 회심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사역하자.
(2) 인내를 가지고 교회 일을 계속 해나가자.
- 교회 일은 어렵고 힘이 든다. 교회 일은 수고와 인내가 필요하다. 이는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과 주를 사랑하는 자만 할 수 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어떠한 어려 움도 참고 인내하며 나아가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사역을 부탁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전천후 교회
살전 1:1-10
<바울 사도의 자랑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후 50년대 초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 디모데 일행이 제 2차 전도 여행 중 빌립보에서 풀려난 직후 처음 마게도냐의 수도이며 항구 도시인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유럽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고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데살로니가 전서는 신약 성경 안에 들어가 있는 바울 서신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책입니다. 이 첫 번째 서신의 첫머리에서부터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극구 칭찬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실 바울의 편지들중에는 처음부터 그 교회의 잘못을 책망하고 있는 서신도 있습니다.
예컨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대표적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관심은 도대체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떤 교회였기에 바울 사도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을까요?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황제 숭배를 비롯하여 많은 이방신들이 창궐하는 도시로써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 많은 동시에 반대와 박해도 심한 곳이었습니다. 바울 선생은 본문에서 이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 복음을 힘써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5절에 보면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말로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했습니다.
교회가 일어나는 것은 말이나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요. 인간적인 잔재주만 가지고서는 되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과 성령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큰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할 때 인간적인 재주로 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며 전했습니다.
그 결과 6절에 보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바울 일행과 주님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훌륭한 믿음의 본보기인 바울 일행을 본받다 보니 7절에 보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 역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
8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울 사도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는 말씀이지요.
<믿음의 역사⟶사랑의 수고⟶소망의 인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 선생의 칭찬들 중에서 오늘 우리는 특별히 3절 말씀을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이 말씀이야말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핵심적으로 요약해 줄뿐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믿음, 소망, 사랑은 기독교의 세 가지 주덕(主德)이지요. 초대 교회에서는 이 세 가지 덕이 이단 종파나 타종교, 혹은 로마 정부에 의해서 쉽게 훼손될 수 있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덕들을 잘 지켜 나간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설명할 때 그냥 추상적인 “믿음”만 쓰지 않고 “믿음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일어나고 생동감 있게 일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성도들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 사랑의 노동과 희생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말로만 사랑, 사랑한 것이 아니라 봉사와 희생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그냥 소망이 아닌 “소망의 인내”, 즉 예수 안에서 산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고난과 시련도 잘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소망, 소망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미래의 소망을 확실히 붙들고 있었으므로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인내심이 저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역사”를 말할 때 과거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므로 과거적인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그 예수님 때문에 오늘 봉사하고 희생할 수 있는 것이므로 현재적인 것이지요. “소망의 인내”는 예수님 때문에 찾아올 미래의 영광을 바라며 오늘을 참을 수 있기 때문에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전천후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우리 교회는 단지 믿음이 있다는 시늉만 가지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이 우리의 모든 삶속에서 역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전자 제품이나 기계가 고장이 나서 작동하지 않을 때 영어로 “It doesn't work.”라고 말합니다.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우리 교인들의 믿음도 고장이 나서 작동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부지런히 일하고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교회와 우리의 가정과 우리 자신의 삶 한가운데에서 주인이 되시고 중심이 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찰스 스펄젼은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목회했을 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설교가들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매주일 예배에 장년만 6천여 명이 모이는 메가 처치에서 목회했는데 그 비결은 스펄젼 목사님의 영감 넘치는 설교에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 교회에 다니는 한 청년이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고는 이 친구를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초대해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 원했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가 이 청년이 다니는 교회를 방문해서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를 한 번 들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들은 청년은 너무 기뻐서 1주일 내내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우리 교회 스펄젼 목사님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제 친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친구보다는 목사님을 위해서 더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주일 아침 그 친구가 예배에 참석해서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목사님의 설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청년이 교회에 처음 온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우리 목사님 설교가 어땠니?” “솔직히 말해서 나는 스펄젼 목사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네. 나는 오로지 목사님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네.”
오늘 우리 교회의 예배도 말씀도 장로님의 기도도 찬양대의 찬양도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나 예전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때 우리 교회는 믿음이 역사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는 말로만 “사랑, 사랑”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사랑에는 구체적인 봉사와 희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닙니다, 동사입니다. 사랑을 해보고 사랑을 받아보기 전까지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어느 가정에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일곱 살 된 아들과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빠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등산을 가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들이심하게 다쳤습니다. 응급 수술을 받던 중 수혈이 필요했는데 아들과 똑같은 혈액형은 딸 뿐이었습니다. 다급한 아빠가 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얘야, 오빠가 네 피를 필요로 하는데 오빠에게 피를 좀 줄 수 있겠니?” 딸아이는 잠시 동안 무얼 생각하는 것 같더니만 머리를 끄떡였습니다.
수술이 끝난 뒤 의사가 수술이 잘되어서 아들에게 아무 이상이 없을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까지 딸은 침대위에 쥐 죽은 듯이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네 덕분에 오빠가 살아나게 되었단다.” 아빠의 말을 들은 딸은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와! 아빠, 정말 너무 기뻐요. 그런데 저는 이제 언제 죽게 되나요?” “아니, 죽다니? 네가 왜 죽는단 말이냐?” 아빠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제 피를 뽑으면 금방 죽게 되는 것 아닌가요?”
다섯 살 먹은 딸은 자기의 피를 뽑아서 오빠에게 주면 자기는 곧 죽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죽을 줄 알면서 오빠에게 피를 주었단 말이냐?” “예, 그럼요. 전 오빠를 사랑하거든요.”
우리 교회도 이런 사랑이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를 찾는 이들 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성도간의 사랑을 피부로 체험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확고히 붙들고 모든 것을 참고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좋은 일이 생길 때나 나쁜 일이 생길 때나 항상 여러분들이 찾을 수 있는 전천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참 소망을 확고히 붙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 교인들 가운데에는 질병이나 경제적 사정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의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중병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교인들, 가정불화로 고통당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저는 이런 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소망을 굳게 붙들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런 산 소망을 굳게 붙들었기 때문에 오래 참을 수 있었습니다. 순교를 당할 때에도 평온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나라 말 중에 어제와 오늘과 같은 말은 순 우리말인데 “내일”(來日)이란 말은 한문이지 우리말이 아니지요. 왜 “어제”와 “오늘”은 우리말이 있는데 “내일”에 해당되는 우리말은 없을까요? 참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너무 많은 전쟁과 배고픔 속에 살다보니까 오직 어제와 오늘만 걱정할 뿐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미래의 소망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절망에 빠진 분들이라도 우리 교회에 찾아 나와 산 소망을 얻고, 바로 그 소망으로 인하여 모든 어려움을 잘 참아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유충이 나비가 되는 교회를 바라며>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한 말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뱃속 깊은 곳에는, 성스러운 고행자도 있고, 무섭고 더러운 유충도 잠들어 있습니다. 몸을 굽히고 이 유충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그 유충은 날개가 돋아나서 나비가 됩니다.”
유충은 징그럽고 더럽지요. 하지만 그것이 나비로 바뀌면 아름다워집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그 마음속에 징그럽고 더러운 유충을 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다가가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유충이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유충을 품은 이들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서 아름다운 나비가 되도록 도와주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본받아 유충이 나비가 되도록 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의 입을 통해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어서 그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허허벌판 사막, 하지만 그 어디엔가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숨겨진 우물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믿음이 없는 불신의 세계 어디엔가 믿음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사랑이 없는 살벌한 세상 어느 곳에 사랑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소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시대에 소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한 기억
살전 1:1-10 / 지성래 목사
사람은 기억하는 동물이다. 동물은 본능적인 습관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사람은 과거를 바탕으로 하여 오늘을 살아간다. 부모가 아들딸을 낳아 기를 때에 저들을 원만한 부모의 사랑으로 먹이고 입히고 감싸고 보듬어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모의 마음에 안정이 없고 기쁨과 감사가 없이 애들을 키우면 그 아들딸들이 온갖 상처 속에서 자라나게 된다. 그러므로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는 아기에게 젖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먹이는 것이다. 엄마의 모든 것을 먹이는 것이다. 엄마의 성품, 엄마의 기질, 엄마의 됨됨이, 엄마의 모든 것이 품 안의 아기에게 내려 흐르는 것이다. 이미 한 아기의 인격은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관계 속에 자라나는 것이다. 태어나서도 엄마와 아빠와 가까운 가족들 속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성장해 간다. 그 모든 관계들이 한 사람의 기억 상자 속에 입력되게 되어 있다. 사람은 기억의 상자 속에 담긴 자기의 경험들을 사랑과 용서와 은혜와 평화와 화목과 관용 등으로 덮어 두지 않으면 언제 그 기억들이 어떤 모습으로 되살아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기억 속에 입력되는 수많은 크고 작은 경험들을 감사라는 여과장치를 통하여 저장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가 자주 생각하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 같은 은혜를 체험하기 이전까지의 그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보면,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라고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며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개인적으로 체험하기 이전의 모습은 자기 의와 자기가 믿고 신봉하는 자신의 율법 신앙의 틀에 꽉 갇혀서 다른 사람을 절대로 받아들이거나 포용할 줄 모르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달라지고 변화된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사도 바울의 13편의 편지들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쓴 편지이다.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사도 바울이 제 2차전도 여행의 때였다. 사도행전 17장 5절에서 10절이 그 역사적인 배경이다.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하여 3주 정도 만에 복음을 전하고 떠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 근동의 데살로니가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범적이었고 주변에 좋은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기억을 갖고 기도하며 지내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복음 전파의 요지는 이것이었다.
첫째,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둘째, 전파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다.
그 때에 경건한 헬라 사람들 중의 큰 무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다. 또한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의 복음 전파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에 곧 유대인들의 시기심이 불길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어떤 시장의 불량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떼를 지어가지고 다니면서 성을 소동시켰다. 바울의 선교단 일행이 야손의 집에 머무는데 그 사실을 알고 야손과 그의 몇 형제들을 읍장 앞에까지 끌고 가 버렸다. 저들은 바울 사도 일행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고발했다. 또한 가이사의 명을 어겨 가면서 “또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며 다니는 자들을 집안에 받아들인 자들이라고 소동을 피워 댔다. 결국은 야손과 그 주변 사람들이 읍장 앞에 보석금을 내고야 풀려 날 수 있었다.(행17:9) 그 밤으로 사도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 지역으로 피신하여 그 곳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급하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지나간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성도들이 탄생되고 신자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믿음이 너무 모범적으로 잘 성장되고 선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절에 보면, 바울은 저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칭했다. 따로 무슨 예배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저들의 가슴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었다. 그것이 교회인 것이다. 저들 데살로니가 지역의 성도들의 신앙생활 제대로 잘 하는 소문이 각처에 번져 가기 시작하였다. “소문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한다. 저들이 바로 그런 좋은 소문의 주인공들이었다. 저들의 신앙생활을 든든하게 하는 세 기둥이 있었다. 그 기둥의 이름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다. 우리가 데살로니가 전서를 읽을 때마다 대하는 이 표현은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말씀인지 모른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말씀 말이다. 공동 번역으로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좋은 기억으로 기억하며 늘 감사한 기억 가운데 감사한 기도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실라나 디모데와 함께 대화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한 기억을 갖게 하는 저들의 믿음이라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자.
택(擇)함 받은 성도들에 대한 감사한 기억.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택하심을 받은 종들이었다. 이것이 소중한 것이다. 우리가 믿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은 택하심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이 아니고는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베드로후서 1장 10절에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핍박과 환란을 잘 감당하며 이겨 나간 성도들이었다. 6절 말씀에 보면 저들은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사도 바울의 선교 일행과 주를 본받은 믿음의 성도들이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4절에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라고 했다. 고난이 끊임없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택함 받은 성도의 신앙을 잘 지켜 간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을 깨달아 알고 나면 그 믿음의 태도와 자세가 달라진다. 이것이 믿음의 힘이다. 로마서 8장 35절의 말씀처럼 그 택하심과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시련과 환란도 성도의 택함 받은 믿음을 결코 약하게 할 수는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렇다. 이것이 성도들의 믿음인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36절 이하의 말씀 그대로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히11:36-38)
찬송 336장의 가사에 보면,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이것이 선조들의 고난을 극복해 나가던 신앙이었다. 택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환난이 있다. 그러나 그 환난을 이겨 나가는 힘은 무엇인가. 성령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의 힘이다. 그렇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역경과 시련과 질병과 곤고한 일들을 겪고 오해와 시기와 모함을 받을 지라도 각 사람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성령으로 인한 기쁨과 말씀의 힘이 있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요 복음의 능력이요 성령의 감화인 것이다.
주를 본(本)받은 자들에 대한 감사한 기억.
사람이 누구를 본받느냐 혹은 무엇을 본받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요즘 소위 흔하게 말하는 롤 모델을 누구를 삼느냐는 말이다. 이 세상에 스승 삼을 만한 이들이 많겠으나 우리 모두의 영원한 스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사도 바울은 몰랐을 때에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다메섹 체험 이후로 철저하게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추구했던 복음의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4절에서 16절에 이런 고백을 남겼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구구절절이 사도 바울의 아비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편지이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편지하듯이 권면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노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까지 초청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고백인가. 사도 바울은 직분뿐인 사도요 이름뿐인 명목상의 사도가 아니라 그의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꽉 찬 주인공으로 살아갔다.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는 이런 교훈도 남겼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신앙이요, 이것이 우리의 사역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고백이요 가르침인가.
우리 모두 이런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야 할 것이다.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그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에 철저해야 할 것이다. 믿는 시늉을 내는 모양뿐인 성도가 아니라 주변에 영향력과 감화력을 줄만한 성도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본받아 가야 할 것이다.
믿음의 좋은 소문(所聞)이 각처에 퍼진 것에 대한 감사한 기억,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소문이 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자연적인 원리이다. 당시에 데살로니가 지역 성도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의 소문은 각처에 퍼져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들의 신앙생활의 모범이 전역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에게 본이 되었다. 7절의 말씀이 그러하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했다. 당시 헬라는 북쪽에 마게도냐와 남쪽에 아가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그 거대한 북쪽 마게도냐 주의 주도가 데살로니가였다. 또한 남쪽 아가야의 주도는 고린도였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고린도전, 후서를 읽어보면 그런 염려를 갖고 편지한 사도 바울의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전혀 달랐다. 저들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 8절에 나타나는 대로, 말씀 전파와 말씀 생활과 믿음의 소문이 각처로 퍼져 나간 것이다. 8절의 시작에 ‘왜냐하면’이란 표현이 원래의 성경에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모범적인 신앙의 특징이 무엇인가.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수고하고 소망을 갖고 참고 인내하게 하였는가. 저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 받고 있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저들은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에 대한 큰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언제나 성령의 기쁨이 넘쳐 났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믿고 받아 들였다. 그리고 흐트러짐이 없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때가 되니 저들의 소문이 처처에 번져 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상을 버렸다. 어리석은 과-거의 신앙을 청산한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 왔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 것이다.
회개가 신앙생활의 출발이다. 1907년 1월의 평양 대 부흥의 발단도 회개로부터였다. 길선주 장로가 둘째 날 집회 중에 공개적으로 회개했다. 가까운 친구가 죽으면서 재산관리를 부탁했는데 몰래 죽은 친구 돈을 떼어 먹었다고 회개했다. 이 회개의 물결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번져 갔다. 도적질, 살인, 강도, 사기, 공갈, 횡령, 음란, 불륜한 죄들을 토하듯이 서로 회개하기 시작하면서 평양에 성령의 대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회 후에 어떤 사람은 술독을 깨트려 버렸다. 어떤 사람은 160킬로미터 4000리길을 가서 과거에 도둑질한 물건을 되돌려주고 회개 하고 돌아 오기도 했다. 독일교회의 자랑인 순교자 본회퍼 목사는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인간관계의 막힌 것이 뚫리고 십자가에 이르는 길이 뚫린다.”고 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 간에 막힌 것이 뚫리려면 회개하여야 한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진실하시고 참되신 아버지이시다. 그 하나님을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섬기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했다.
하나님 우편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강림(降臨)하실 것을 기다리며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심판 날에 진실한 성도들을 죄와 악의 심판으로부터 건지실 구주이신 것을 믿고 전파하였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런 믿음이 분명했고 이것을 낱낱이 전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잘 믿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주를 섬기며 장차 오실 부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은 그 때나 오늘 날이나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기초요 믿음의 바탕이 아닌가. 특별히 환난 중에 고통을 이기며 소망을 갖고 살아가던 저들에게 있어서 장차 주께서 노하심으로 세상을 신판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을 건지실 것이라는 믿음이 분명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현세와 내세에 우리를 고통과 환난과 질병과 가난과 역경과 두려움으로부터 건져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브라함을 우상을 섬기던 소굴에서 불러 내셔서 말씀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이라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하던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믿는 자의 의를 세상에 전해 주신 하나님이시다. 우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 내시는 영원한 구주이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의 복음이시다.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시는 구주이시다.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시는 구세주이시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시는 주님이신 것이다.(눅4:18-19)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이 소문나는 모범 성도가 되자, 그리함으로 서로에게 감사한 기억만 쌓아가는 축복 받는 성도가 되자. 아멘
신망애의 삶과 재림의 소식
데살로니가전서 1:1-10
1.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한국 교회 선교역사에 있어서 가장 어두웠고 잔인했던 때가 2007년 7월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때 분당 샘물교회의 단기선교 팀 23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어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한국 교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았던 아주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그때 단기선교 팀의 리더인 배형규 목사와 팀원이었던 심성민 형제가 순교했고, 나머지 21명이 무사히 돌아옴으로 사건 발생 42일 만에 끝났습니다.
그 사건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더 이상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교회로 하여금 단기선교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샘물교회 단기선교 팀을 비난하면서, 자기들이 위험한 곳에 자원해서 갔는데도 왜 나라의 세금을 사용하여 그들을 풀어주도록 돈을 주었느냐고 욕을 했습니다. 동시에 한국 교회 전체를 향해서도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심지어 교계 내에서도 무리한 단기선교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다수였습니다.
그때 사실은 가짜뉴스들이 많이 돌았습니다. ‘나라에서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억지로 갔다’라고 했는데, 사실은 전혀 가지 말라고 한 적이 없고 저지한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건이 벌어지고 보니까 사실과 다른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비난하고 욕을 하겠지만, 교계 내에서도 많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무리한 단기선교는 중단해야 한다고 하는 소리들을 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단기 선교는 계속되어야 합니까? 그런 위험이 있는데도 이슬람권 선교를 계속해야 합니까? 답은 ‘그렇다’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단기선교는 계속되어야 하고 이슬람권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교와 사랑의 실천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의 땅 끝은 그렇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이슬람권도 포함되기 때문에, 결국은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선교지에 들어가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선교를 중단했다면, 오늘 한국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고 우리도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가끔 보면 어떤 분들이 그런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도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돈과 시간을 허비하면서까지 저 멀리 해외로 가야 하느냐?’
만약 그 논리대로 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19세기 말은 미국에서 조선으로 가기 어려웠을 때인데, 많은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조선 땅이야말로 사실은 위험한 나라였습니다. 쇄국정책도 있었고, 외국인 선교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테러의 땅이었습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보다 더 위험했던 땅이 조선이었습니다.
사랑이 고난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기를 중단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은 정말 삭막한 곳이 될 것입니다. 물론 사랑으로 인하여 고난이 올 때 무조건 밀어붙이라는 게 아니라,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지혜롭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프간 피랍 같은 사건을 통하여 위험하니까 중단해야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더욱 성숙하고 지혜로운 선교 방향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건 이후 내릴 수 있는 가장 나쁜 결정이 바로 선교를 그만두는 결정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고, 그 후에도 변함없이 선교를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은 한국 국적으로는 못 들어가니까, 미국 국적을 가진 선교사님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우리 교회에서도 미국 국적을 가진 분들이 몇 년 전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데살로니가전후서가 바로 단기선교의 결과로 나온 편지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1~2주에서 2~3년까지를 단기선교라고 부르는데,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중 AD 52년에서 53년경 데살로니가에 도착해서 3주에 걸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여 루디아나 빌립보 감옥 간수 같은 사람들이 믿어서 교회가 세워졌고, 그 후 마케도니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데살로니가로 이동한 것입니다. 지금도 데살로니가가 아테네 다음으로 그리스 제2의 도시입니다. 지금은 이름이 테살로니키입니다.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유대 사람의 회당이 있었다. 바울은 자기 관례대로 회당으로 그들을 찾아가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행 17:1-2, 새)
갈라디아 사역에서는 어디에나 유대인 회당으로 갔지만, 빌립보에서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강가로 갔다가 루디아 등 여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는 큰 도시라 유대인들이 많아서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토론을 하는데, ‘세 안식일’이니까 3주 동안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최소 3주에서 최대 7개월까지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짧은 기간의 단기선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놀라운 일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5절)
복음이 데살로니가에 전해졌는데, 그냥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도 전해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8절)
마게도냐(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부를 말하고 아가야(아카이아)는 남부를 말합니다. 북부 마게도냐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이고, 남부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입니다. 여기 보면 이렇게 복음이 짧은 기간 안에 전해졌는데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이 북쪽 마게도냐와 남쪽 아가야까지 다 들렸다는 것입니다.
2. 데살로니가에 전해진 복음
그렇다면 이 데살로니가에 전해진 복음은 어떤 복음이었습니까?
1)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는 복음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9절)
진정한 복음이 가져오는 첫 번째 삶의 변화는, 우상을 포기하고 이제부터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가리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상은 이런 하나님과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데, 우상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참되신데, 우상은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다는 것은, 더 이상 죽어 있고 거짓된 것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복음보다 우상을 붙들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대표적인 우상으로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은과 금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시 135:15-18)
우상은 죽은 것이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호흡도 없고, 한마디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섬기는 사람도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우상의 본질이 바로 이런 물질에 대한 탐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바로 그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는 일체의 탐심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많은 경우에 역시 돈이 우상이 됩니다.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왔다고 3차 전도여행 후 잡혀 있을 때 바울을 불러다가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가 막힌 것은, 벨릭스가 왜 바울을 불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로마에서 온 유대 총독이고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죄수로 잡혀서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뭔가 돈을 받을까 해서 불러다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를 빼달라고 뇌물을 주지 않을까 하며 불러다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그러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심판과 절제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그러니까 벨릭스는 돈이 없어서 돈을 바란 게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이상하게 욕심이 있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탐심입니다. 돈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돈이 많은데도 돈을 바랍니다. 왜? 그냥 욕심이 계속 생기는 겁니다. 사람은 만족할 것 같지만 만족을 못 합니다. 왜냐하면 억만금보다 우리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아무리 갖다 부어도 채워지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탐심을 가지는데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식이나 인기나 권력이나 성공이나 성취나 쾌락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상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고 허상입니다. 우상이 우리를 배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상이 거짓된 신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고 붙드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렇게 우상을 버리고 복음 앞에 돌아오는 모습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몰려오면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흥이 아니라 수적 성장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복음 앞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버리지 않고 우상을 가진 채로 온 사람들로 가득한 것이 어떻게 부흥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부흥’이라는 찬양곡을 부르지 않습니까? 고형원이라는 분이 쓰셨는데, 진정한 부흥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사도 바울의 단기선교 사역을 통해 바로 이러한 부흥이 데살로니가에 임한 것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사람들 사이에 마구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일행이 나오는데, 1절에 나오는 바울, 실루아노(실라), 디모데입니다. 2차 여행 시작 때 바울은 바나바와 갈라져서 실라를 데리고 다소를 거쳐 더베로 가고 그 다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디모데도 거기서부터 동행한 것입니다. 이 2차 때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2차 때 함께 한 실라와 디모데의 이름도 1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해서 데살로니가에 큰 영향을 미치니까, 그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키면서 바울을 잡으려 했는데, 거기 없으니까 믿게 된 야손을 잡아서 끌고 가 시청 관원들 앞에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행 17:6)
영어성경 NRSV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ese people who have been turning the world upside down”. 그러니까 ‘세상을 뒤집어 놓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왔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천하를 뒤집어놓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욕으로 한 말이지만 엄청난 칭찬입니다. 세상을 뒤집어놓는 사람들!
복음은 지금도 동일한 역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붙들고 나아가면 우리가 바로 이 세상을 뒤집어놓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지만 복음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붙들고 나아가 선포하면 바로 이런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2) 성도들로 하여금 ‘신, 망, 애’의 삶을 살게 해주는 복음
‘신망애’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신덕, 망덕, 애덕’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살펴본 골로새서에도 나오고, 성경 곳곳 특히 바울의 편지에 이 세 가지가 늘 언급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도 나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누리는 삶의 특권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은 결과로 우리는 믿음의 삶, 소망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3절)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예배하는 데서 그치게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우리의 인생관을 변화시키고 세계관을 변화시킵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우리의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 3절은 믿음을 말할 때 그냥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역사’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 NIV에는 “your work produced by faith”(믿음으로 만들어진 여러분의 사역)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그냥 내 생각, 내 방식, 내 뜻대로 일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방식대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3절에서 사랑으로 사는 것을 가리켜 “사랑의 수고”라고 합니다. 이것도 NIV를 보면 “your labor prompted by love”(사랑으로 촉진되는 수고)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수고를 하지만 어떤 경우는 의무감으로 억지로 합니다. 직분자니까 어쩔 수 없이 또는 체면으로 수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자기가 사랑에 빚진 자인 줄 알기에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역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억지로 하거나 의무감에서 하거나 체면 때문에 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하게 되면 항상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사랑으로 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바로 이 변화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소망의 인내”를 갖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입니다. 다른 데가 아니라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내가 언젠가 주님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입니다. 단순히 억지로 버티는 인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고 심판하실 그분을 믿기에 우리가 소망으로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게 믿음으로 모든 일을 감당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수고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는 변화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삶입니다. 복음은 정말로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게 해주는 소식입니다. 지금 믿음을 상실한 이 시대에, 참 사랑을 잊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고 쉽게 희망을 포기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전해진 이 복음을 우리도 매일 붙들고 살아야겠습니다.
3)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게 해주는 복음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해서 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행 17:3, 새)
이것도 유대인 회당에서 말한 것이기에 구약의 배경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고, 그분의 부활로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실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전하는 이 메시지를 통해 복음의 영역을 죽음과 부활에서 조금 더 확장하여 증거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뿐 아니라, 그분의 재림까지도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10절)
예수님의 재림은 인류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영원히 건져 내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아직도 마귀가 활동하고 죄의 세력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사는 남은 자이며 소수일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역사 속으로 다시 돌아오신다는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리는 어떻게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을 잘못 이해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도 안 하고, 다 관두고, 그냥 자기들끼리 모여서 가만히 있으면서 재림을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일상의 일을 도피하는 핑계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었습니다. ‘금방 다시 오실 텐데 일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했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다른 교회들보다 많았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 이렇게 꾸짖습니다.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하고 거듭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으니,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하며, 또 권면합니다. 조용히 일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십시오.” (살후 3:10-12, 새)
단순하게 게으르면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재림이 올 텐데 뭐 하러 일하느냐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재림의 소망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렇게 무절제하고 게으르게 살면 안 되고 날마다의 삶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음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상급이 되어 주실 그분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열심히 살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만날 예수님의 재림, 그래서 영원히 들어가 살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더 열심히 살 수 있게 됩니다.
샘물교회 단기선교 팀이 탈레반에게 잡혔을 때, 인솔자였던 배형규 목사가 몇 명이 죽을 것을 예감하고서 다른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 우리 중 한두 사람을 죽일지 모릅니다. 아마도 선전 효과를 위해 비디오를 찍으며 총살을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가장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저들이 우리를 죽인다하더라도 우리는 저들에게 폭력으로 대항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핍박과 조롱을 견디시며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저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때 팀에서 가장 연장자였고 원래 장로였다가 늦게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던 유경식 전도사(당시 55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순서를 바꾸시지요. 저는 이제 살 만큼 살았습니다.” 그때 배형규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디 전도사가 목사 자릴 넘봅니까? 저는 어차피 나중에 선교지에서 여생을 마칠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8월 13일 탈레반이 두 명의 여자를 먼저 석방하겠다고 했을 때 이지영이라는 자매가 김경자라는 자매에게 먼저 가도록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은 탈레반까지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나중에 풀려나서 모여 있을 때, 그 소식을 전해들은 다국적군들은 ‘이지영이 누구냐?’ 하고 찾아와서 다른 팀원을 살리기 위해 자리를 양보한 이지영 자매에게 한국군 준장을 통해 사랑과 존경의 뜻으로 목걸이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 후 유경식 전도사는 2011년 무렵 그리스에 아프간 난민이 많다는 소식을 접했고, 4월에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현지로 갔습니다. 거기서 아프간 난민을 위해 현지에서 무료급식소 사역을 하고 있던 어느 선교사님이 휴식하는 4개월 동안 대신 사역을 맡게 됐습니다. 당시 경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었던 아픔을 섬김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4년 2월에 그는 샘물교회 선교사가 되어 아테네에 정식 파송되었고, 아프간 난민 사역에 전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2015년 7월 19일 아프간 난민들을 위한 ‘아가페 센터’를 설립하고 첫 예배를 드렸는데, 공교롭게 7월 19일이 자기들이 피랍당했던 날과 같은 날짜여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고 합니다.
유경식 목사는 이국땅에서 언어 문제로 힘겨워 하는 아프간 난민들을 위해 정규 영어 강의를 개설하고 그리스어를 가르쳤으며, 난민들이 목사나 비즈니스 선교사가 되어서 현지 사역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한편 또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2017년 7월에는 난민 쉼터를 열기 시작해 4개를 완공했고, 아가페 센터 교인은 70여 명으로 늘어서, 난민들에게 교회를 맡기고 유경식 선교사 자신은 새 교회를 개척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교 보고를 위해 잠시 파송교회를 방문했던 2017년 12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2014년 2월 그리스로 떠나기 전에 열린 파송식을 담은 영상에서 그는 “아프간 난민들이 사는 곳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화 하는 게 저희가 하려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이 단기선교 팀이 아프간에 심고자 했던 복음의 씨앗은 그 땅에 희망의 꽃이 되어 다시 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협력하는 이라합 선교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선교사님이 뿌린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재림의 소망입니다. 이 동일한 복음이 데살로니가에 전해져서 데살로니가에 전해져서 그 도시를 변화시켰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복음을 들고 다시 나아갈 때입니다.
소문이 좋게 나는 교회
살전 1:1-10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인구 20만으로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였습니다. 주전 315년에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더(Cassander)가 세운 도시로 자기 아내(알렉산더 대왕의 누이)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헬라인과 로마인 유대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 복음이 처음 전파된 것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개척한 후 데살로니가로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7:2). 그 결과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행 17:4). 그러나 유대인들의 시기하여 바울과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베뢰아로 가야 했습니다(행 17:5,10). 바울 일행은 이제 막 복음을 영접한 어린 양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때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또 받은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많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거기까지 좇아와서 깡패들을 동원하여 핍박했습니다(행 17:13). 그래서 바울은 다시 아덴으로 떠났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바울은 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두 번이나 데살로니가로 가고자 했지만 마귀가 훼방을 해서 갈 수 없었습니다(살전 2:18). 그래서 아덴에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파송하고 고린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가서 성도들을 돕고 고린도로 와서 바울에게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데모데에 의하면 그들의 마음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이 잘 자라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크게 기뻐하며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는 교역자도 없었습니다. 단지 3주 동안 바울에게서 들은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였습니다. 또 많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울이 가르쳐 준 그 말씀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문이 온 마게도니아에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서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그들을 격려하고자 이 편지를 썼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가 바울이 쓴 13개의 서신 중에 첫 번째 서신이 되었습니다(행 18:15; 살전 3:6).
오늘 읽은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4절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성숙한 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5-10절은 온 마게도니아에 전파되는 그들에 대한 믿음의 소문을 소개하며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마게도니아교회는 좋은 소문이 퍼지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한마음교회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좋은 소문이 퍼지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믿음, 사랑, 소망이 넘치는 교회(1-4)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가 어디에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데살로니가에 위치해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모든 교회는 지역적으로는 흩어져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 하나의 교회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문안한 후에 그들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2). 바울이 그들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기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은 세 가지 점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데살로니가교회에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역사” 믿음이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히 11:1). 우리 마음속에 있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역사(work)로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어떤 행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마음에 믿은 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 2:17). 행위가 따르는 믿음이라야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교회에 믿음의 역사가 있었다는 말은 그들이 살아 있는 진짜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고,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노아는 살아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이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고, 백세에 얻은 외아들을 번제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기생 라합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영접하고 숨겨줬습니다. 이처럼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역사로 나타납니다.
둘째,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수고’라는 말은 ‘자르다’, ‘채찍으로 때리다’, ‘애쓰다’는 뜻으로 ‘고통을 동반하는 수고’를 말합니다. 고통을 수반하는 수고가 따르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십자가의 그 모든 고통과 수고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양떼들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었습니까? 굶주림, 잠 못 이룸, 매 맞음, 핍박, 투옥, 온갖 위협을 다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사랑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새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 캠베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 보면 “고통이 없는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통이 없는 사랑은 사랑의 모양은 있는데 참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희생과 수고가 따르지 않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수고 없는 사랑, 희생 없는 사랑, 나눔 없는 사랑, 드림 없는 사랑… 그런 사랑이 존재할까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관념이요, 생각일 따름입니다. 수고, 부담, 손해, 희생, 나눔, 드리는 것이 없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수고를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곳에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수고입니다. 하루 종일 근무하고 집에서 쉬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부인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배당에 오는 수고가 없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수고가 따르는 법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을 위하여 기쁨으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행복입니다. 기쁨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면 교회를 위해서 기쁨으로 사랑의 수고할 것입니다.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가족을 위해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할 것입니다. 목회자를 사랑한다면 목회자를 위하여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한다면 형제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는 아주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번은 아프리카에 있는 슈바이처에게 한 젊은 의사가 찾아왔습니다. 저도 선생님과 같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슈바이처는 그 젊은이에게 장작을 패는 일, 물을 길러오는 일 등을 시켰습니다. 그 일이 가장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사흘이 지난 후 젊은이는 슈바이처 박사에게 되물어 따졌습니다. "선교사님, 저는 이런 일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을 하고 싶어 온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그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했던 일이 그런 일일세. 그러니 그런 일을 못 하겠거든 그만 돌아가게나." 결국 젊은이는 돌아갔다고 합니다. 추상적인 사랑, 입으로만 하는 사랑, 수고가 따르지 않은 사랑은 다 거짓입니다. 사랑에는 구체적인 희생이 따라야 하고,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셋째, 데살로니가교회는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인내’라는 말 ‘휘포모네’라는 말로 ‘아래’ ‘머물다’는 합성어입니다. ‘인내’는 소망 아래 머무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에 머물며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면서 인내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10절을 보면 이들의 소망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서 모든 믿는 자들을 노하심에서 구원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런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고난을 인내로 극복해 나가는 모습이 초대교회에 많은 성도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솟아납니다. 탄압과 박해의 고난을 인내로 견디면서 그들의 신앙이 더욱 성숙하여집니다. 소망을 굳게 잡을 때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에 절망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46:5)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시련 중에서도 주님을 소망하며 인내하는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요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상황만 바라보기 때문에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참고 견디기 어렵습니다. 자포자기합니다. 절망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어렵고 힘든 이 시대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힘을 덧입고, 신앙의 불을 밝히는 기회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낙망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고난을 참고 견디며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어느 숲 속에서 두 사람의 벌목꾼이 큰 나무를 배었습니다. 힘들게 나무를 배고 나이테가 보았습니다. 나이테기 백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5개의 나이테는 아주 촘촘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나이테가 상당이 간격이 넓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주 조밀하게 나있는 다섯 개의 나이테를 가리키면서 “5년간의 가뭄으로 전혀 자라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물론, 5년 동안 가뭄으로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5년 동안 크게 자라지 않았습니까? 이는 가물 때에 부족한 수분과 양분을 얻기 위해 이 나무는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다음부터 이 나무나 엄청나게 크게 성장한 것입니다. 이 나무는 고난을 이겨냈기 때문에 이런 거목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그 사람이 “5년의 가뭄기간이 이 나무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군요.” 라면서 동료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통해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끝까지 인내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소망을 반드시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Ⅱ.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교회(5-10)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배당이 웅장하거나 교인의 수가 많다고 소문이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이 좋게 났습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소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교회(5,6)
5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복음이 말로 전해졌을 뿐 아니라 능력으로 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성도들에게 깊은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깊이 영접하고 우상숭배에서 돌이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말로 전파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시에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또 성령께서 복음을 영접한 각 사람의 마음에 큰 확신을 주셔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복음을 영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또 8절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주님의 말씀이 그들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렸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으니까 그 말씀이 온 세계로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그들에게 임한 말씀뿐만 아니라 믿음의 소문도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된 것은 복음신앙과 말씀 중심 신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는 교회, 주의 말씀이 퍼져나가는 교회가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는 교회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교회야말로 모든 교회의 모델이 되는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려면 복음중심, 말씀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좋은 소문이 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영접합니다. 주일 오후 말씀 교제 시간에 말씀을 사모하여 나옵니다. 복음은 선포되어야 하고, 말씀은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복음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전파할 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역사할 줄로 믿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큰 기쁨으로 영접하고,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 때 믿음의 소문이 대구와 한국과 전 세계로 퍼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방송 TV, 인터넷에서 수많은 설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정작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이 다가오지 못하고,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듣는 마음 밭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능력으로, 성령으로, 큰 확신으로 역사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영접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교회로 소문이 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교회(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9)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모두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우상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살아계시는 참 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전 세계에 퍼진 믿음의 소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상숭배를 버리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소문이 각 처로 퍼져나갔습니다.
옛날에는 우상들이 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보이는 우상보다 보이지 않는 우상이 더욱 크고 심각합니다. 하나님 보다 더 신뢰하고 더 의지하고 더 사랑하는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말세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딤후 3:1-5). 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보다 더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에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골 3:5).
우리 교회에는 어려움 형편 가운데서도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또 가난한 가운데서도 구제헌금을 넘치게 드리는 분도 있습니다. 군에 가기 전에 모은 모든 돈을 선교와 구제에 사용해 달라고 통장을 드린 분도 있습니다. 또 선교헌금을 넘치게 드립니다. 물질적인 유혹을 뿌리치고 대구에 남아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받고 삶이 변화되어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변화의 소문이 더욱 많이 퍼져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주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교회(10절)
10절을 보십시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많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기다렸습니다(마24:44, 요14:18, 행1:11, 계1:7). 심판 날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힘든 삶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서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을 구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문둥환자 촌 애향원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일제 식민 통치와 6.25 동란과 여순반란 사건을 겪었습니다. 여순반란사건 때 두 아들이 공산당에게 죽었습니다. 격변하는 세상에 살면서 손양원 목사님은 이 땅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지는 해와 붉은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주님 고대가’를 지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준비 다 해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다시 오실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분을 맞이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힘든 때일수록 더욱 더 주님의 강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세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께 받을 상급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께서 재림 하시면 이 세상을 심판하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주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기실 것 것입니다. 우리에게 충성된 종이라고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신앙연륜이 깊지 않았지만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복음을 깊이 영접하고, 주님의 말씀을 큰 기쁨으로 영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죄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우상숭배를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또 재림 신앙으로 오실 주님을 소망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교회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말씀을 큰 기쁨으로 받는 교회,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숙한 교회
살전 1:5-7 / 김충기 목사
남에게 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자 중의 신자가 있고, 교회 중의 교회가 있고, 목사 중의 목사가 있고, 사도 중의 사도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어떤 이는, 사도가 아니지 않느냐? 누가 그를 사도라고 명한 적이 있느냐고 말합니다만 그는 사도 중의 사도입니다. 이사야 같은 이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신자 중의 신자가 있습니다. 남에게 우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는 자입니다. 물론 우대라고 하는 것은 어떤 권력을 가지고 우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대 아닌 우대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멸시하면서 계급 때문에 면전에서는 굽신거립니다. 존경과는 좀 다릅니다.
10주년이 지난 우리의 교회가 정말 한국의 수많은 교회의 본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본이 되는 교회, 본이 되는 신자, 직분을 가진다 해도 본이 되는 직분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학교 생활에서도 모범생이 있습니다. 또 교도소 안에도 모범수가 있습니다. 모범수는 감방에서 풀려 나와 같은 교도소 안에서 활동하는 기관 요원과 같이 행정을 맡아 일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이 되는 교회는 성숙한 교회, 성숙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1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만큼 신자 수가 늘어났고 교회 수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가 100년이 되었다고 해서 성숙한 교회는 아닙니다. 수만 명의 성도가 모였다고 해서 성숙한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성장한 교회라는 말은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재정적인 면에서 넉넉하다고 해서 결코 성숙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교회는 주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이제부터 성장된 교회로서 주는 교회가 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 선교하는 일과 교육하는 일을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자원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일과 일군을 양성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원을 돈으로 보지 않습니다. 믿음의 자원인 줄 믿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그 교회는 부자가 많아서 헌금이 많이 나오겠다’고 합니다. 헌금이라는 감사의 표는 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믿음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믿기 바랍니다. 중요한 교회의 자원은 분명히 물질이 아닙니다. 교회의 자원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인 줄 믿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교회 자원이지, 돈 많은 사장이 몇 명이나 되느냐 하는 것이 교회 자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성숙한 신자, 성숙한 교회의 직분자는 누구입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직분이 올라갈수록 관료주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아랫사람을 누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도 당회 문제가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장로나 안수 집사로 올라가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교회 위에서 군림하려고 합니다. 이런 관료적인 정신 상태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한 자리는 집사가 평신도를 섬길 줄 알고, 발을 씻기는 섬기는 자세가 되어야 하고, 대접받기보다는 대접해 줄 줄 아는 자세, 교만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교회는 섬길 줄 아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모습을 닮아가는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뿐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모범이 된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범 된 교회가 어떻게 외적으로 퍼져 나갔느냐 하면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 1:8)고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들의 본이 된 믿음이 각처에 퍼졌다고 하였습니다.
1. 첫째로 생각할 것은 성숙한 교회는 역사(役事)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수년, 수십 년을 믿었어도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란 은사나 외적 증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역사를 말합니다.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때 모든 사람이 스스로 본이 되려는 외적인 모형을 나타내려 하지 않아도 예수 믿는 믿음이 풍기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본이 될 것입니다. 신문이나 매스컴을 통한 과대 선전보다 개개인의 속에서 정말로 일어나는 믿음의 소문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날 교회를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해도 자신에게는 역사가 없느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강단에서 외치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5에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고 했고, 2:13에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사람의 말로, 학문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로, 재미난 이야기나 야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몇 십 년 교회를 다녀도 역사가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치료의 역사,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나는 왜 축복을 받지 못하느냐? 나는 왜 응답받지 못하냐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도 축복을 받기 위해서 감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잘못된 기도이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구원을 연장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기도도 잘못된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부딪칠 때, “내가 과거에 영이 뭔지, 하나님이 뭔지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천국의 여부, 인간 사후 세계의 존재 등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냥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줄 알고 내 멋대로 살았는데, 하나님 앞에 와서 말씀에 부딪치고 보니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분하다. 지금까지 헛되게 살았다. 이제부터 하나님 믿고 살아야겠다.”고 마음 속에 결심이 될 때, 찬송할 때나 기도할 때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 그것이 완전한 회개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회개하고 마음을 비워둘 때 하나님의 말씀의 씨와 하나님의 생명이 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인간이 살려면 사업을 해야 하고, 가정 생활을 해야 하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며, 세상과 부딪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인 우리는 짜증도 나고 부부간에 언쟁도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또 지옥 가게 되었구나. 오늘 밤새 회개해야 구원이 또 머무르겠구나" 하는 회개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 구원의 확신을 가졌으면 어떤 사소한 것을 회개해야 구원이 연장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채찍을 받지 않기 위한 회개 기도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축복 받기 위해서, 이것을 바쳐야만 축복 받는다는 감사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이미 영혼이 구원을 받았으니 최고의 축복을 받은 자다' 라는 생각으로 축복을 받기 위한 감사보다 축복을 받았으니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응답을 받기 위한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응답 받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성도의 영적인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하기를 기도를 하지 않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쉬지 않고 생활화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기도를 생활화하셨습니다.
성숙된-성장된 신앙이라는 것-믿음의 역사라는 것은 계속적으로 특별한 일이 있어서 금식하고 작정해서 할 때도 없진 않지만 이렇게 하는 것만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 생활이 정상적인 신앙이 되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또 어떤 자에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데살로니가전서 1:5에는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확신은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만이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음의 역사는 어떻게 됩니까? 6절을 봅시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믿음의 역사는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오는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성령을 구하는 기쁨이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신앙은 환난을 당하거나 우겨쌈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거기서 기쁨을 갖는 것, 그것이 신앙의 역사입니다. 기뻐할 조건에서 기뻐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합니다. 많은 환난 가운데서 기쁨의 도를 받아 성령으로 기뻐하는 역사가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2. 성숙한 교회와 신자는 누구입니까?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현실적인 대가를 받는 수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성가대, 교사, 구역장, 전도 등의 수고는 현실적인 물질적인 대가가 없습니다. 주를 위한 수고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물밀 듯이 밀려오지 아니하면 수고할 수 없는 것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 수고를 가리켜 '사랑의 수고'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도 많은 은혜를 받은 교회임이 사도행전 19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요한계시록 2:1에 제일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한 것을 볼 때 에베소 교회가 주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주를 위해 수고해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도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고, 예수님은 “참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생명을 희생한 자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고린도후서 5:14에 말했습니다. 로마서 8:35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1:27에 바울은 “나는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주를 위해서 애쓰고 헐벗고 자지 못하고 여러 교회를 위해서 염려한 바울 사도의 수고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고를 알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서 수고했던 것임을 믿기 바랍니다.
성숙한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성숙한 신자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 2:8에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늘 헤어지면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마음이 늘 마음속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데살로니가전서 3:12에서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이 많아서 넘친다고 했습니다.
성숙한 교회, 성숙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오늘부터 사랑이 넘칩시다.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은 데살로니가전서 4:9에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 사랑’이라고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남남이 아닙니다. 한 형제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인간적인 혈통적·혈연적 형제가 아니고, 사귐 속의 형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이것은 끊을 수 없는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몸이요 너희는 지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 피, 즉 영적인 피가 흐르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이것은 끊을 수 없는 형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 중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쓸 것이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왜 여기에 이 말을 했냐 하면 데살로니가전서 4:1-8의 내용에는 음란의 문제가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이런 말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우리에게 음란의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색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사랑으로 뭉쳐진 우리가 형제를 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은 10절에 근면의 생활을 말했는데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형제가 궁핍하고 어려우면 가서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애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뭉쳐야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성장된 교회이며 모범된 교회인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3에 “저희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했고 14절엔“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인 줄 믿습니다.
3. 성숙한 교회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도 ‘참았으면, 참았으며’이라는 말을 수없이 하고 있습니다. 인격자라야만 참고, 수양을 받아야만 참고, 교육을 받아야만 참고, 유식해야만 참을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것으로 우리가 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참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소망이 있어야 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상의 소망이 없어도 참고 참을 수 있는 것은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래서 심지어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데살로니가 전서 4:13에서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인간의 소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땅의 소망과 하늘의 소망, 육신의 소망과 영적인 소망이 그것입니다. 우리 중 땅의 소망을 가진 자는 쓰러집니다. '자는 자'라는 말은 죽은 자를 말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참을 수 있는 것은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을 때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자는 고난을, 환난을 참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는 자는 어려움이 와도 견디어 내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과 능욕과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힘입고 하늘의 소망이 있게 될 때 능히 승리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소망이 있어야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3:7은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망은 재림의 소망이었습니다. 주님의 만남의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이 1:10에 있습니다. 2:19,20이 그들의 소망이었고, 3:15이 그들의 소망이었으며 , 4:16 또한 그들의 소망이었으며, 5:23이하 또한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것인데 주님과 만남의 소망입니다. 예수님과 의 만남은 회복을 말합니다. 부흥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다시 살아났고, 나인 성 과부의 집의 아들이 살아났으며, 개인적으로 보면 삭개오, 바둘로매 소경이 예수를 만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할 때 소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참음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6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리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미래는 재림의 주를 만나는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는 성령이 내게 와서 만나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숙한 교회로 향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마음과 뜻을 드립시다. 성숙한 교회는 성숙한 신앙 인격자가 많은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섬길 줄 아는 지식을 얻습니다. 어느 한 부분도 부족함이 없이 온전한 지체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체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숙한 교회를 통하여 그 나라를 확장시키고 계십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6~7 –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본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나온 데살로니아 교회는 많은 환란과 고난 속에 처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신앙을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차 선교여행을 하며 마게도냐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많이 그리고 집요하게 방해를 하던 사람들이 바로 데살로니가지역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 지역에서 신앙과 믿음을 지키는 교인들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을 지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환란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이들은 더욱 신앙을 지키며 믿음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지역에 있는 신자들에게 많은 감동과 은혜를 주었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이 이러한 핍박과 고난 고난 속에서도 그들의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어려운 상황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굳건히 지킬 수 있게 하였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보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으며 묵상할 때 그냥 읽는 것이 아닌 성령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 뜻과 소망을알았다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나눈 계시록의 말씀을 보면 에베소/서머나/버가모 교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교회에 각각의 환란과고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롼란이 아닌 목숨과 생활을 위협하는 큰 환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모든 교회들이 이러한 상황을 견디는 소망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우리의 부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 죽어도 죽지 아니하고 다시 산다는 그 말씀이 그들로 하여금 천국 소망을 붙들고, 부활의 소망을 꿈꾸며 그 모든 환란을 이겨나갈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시대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힘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며 육신의 죽음 후 진정한 본향에 들어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 영생의 시작이라는것을 믿고 나아가기에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소망이자 힘인 것입니다. 특히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잔인한 현실 앞에서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믿음을 이어나갔다는 수많은 간증과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인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간이 생각할 수있는 차원을 뛰어넘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의 중심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운동력이 있는 그 말씀이 바로 그들의 중심이 되어 그들은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뜻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며 세상과싸워 이겨나갔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고난들을 더 초연히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삶을살았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록 중 많은 부분을 차지 하는 것이 순교에 대한 부분입니다. 로마의 압제 속 원형경기장에수많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은 사자의 밥이 되어 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 하지 않았고 도망 치지도 숨지도 않았습니다. 외려 중앙에서 한 곳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며 그들의 몸을 사자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어떠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리고 하나님께 찬양하며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거기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울림을 주며 믿는 자들의 본이 되고 다음 세대에 전할 복음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은 그때와 비교하면 편안한 환경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 또한 날마다 영적전쟁을 치르며 세상과싸워 나가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물질주의가 팽배해서 모든 것이 그 것을 중심으로 그 가치가 옳다고 여겨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내고 하나님께로 달려나가는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서 소망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소망을 붙들고 하나님께로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묵상합시다. 그리하여 그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참 뜻과 사랑을 알고 기쁨으로 충만한 하루하루의 생활을 영위합시다.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읽는다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고 그 사랑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달려나갈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믿음을굳세게 가지고 우리 삶을 결단하며 하나님께 드리고, 삶의 자리가 예배의 자리로, 그 삶의 자리에서 사명을 다하는 그리스도 인으로써 살아나가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