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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당신의 에피스테메는 무엇인가?
김순아 시인·문학평론가
우리의 내면은 수많은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타자도 마찬가지다. 타자의 말과 행동이 내게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나와 다른 삶의 기억을 구축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부부라 할지라도 공유한 기억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한 사건, 또는 사람에 대한 기억은 각자의 인식과 감성이 개입되기에 서로 다르게 기억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 자신의 기억을 강제로 공유하려 하기도 한다.
대상 + 각자 인식과 감정 = 기억
국가나 사회 공동체 역시도 그렇다. 공동체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을 공유하도록 만들고 싶어 한다. 자신에 대한 불리한 정보는 배제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정보를 개인에게 각인시킨다. 어떤 국가라도 그 나름의 '국사(책)'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문제는 이렇게 각인되는 기억이 개인의 삶에 생동성과 자율성을 부여하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개인의 삶에서 힘을 빼앗는 기억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 관여하는 기억에 맞서 새롭게 재구성하거나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은 억압의 기억에 맞서 해방의 기억을 만들어가려는 기획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해 보인다. 그는 인간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접근하여, 연속적 역사와 절대 불변의 진리(Idea)가 있음을 강조한 플라톤의 논의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안은 현실 세계이자, 감각으로 경험하는 가시계이며, 이 가시계의 잘못된 인식은 독사(Doxa)로 말해진다. 반면 동굴 밖은 이데아의 세계이고, 이성으로 인식하는 가지계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세계이다. 플라톤은 이 이성적 작용을 참된 인식, 또는 에피스테메라고 하며, 그것이 곧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말한다.
여기에 주목한 푸코는 각 시대별 에피스테메는 다르고 절대 불변의 진리란 있을 수 없음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낸다. 가령, 어떤 고고학자가 지층을 깊이 파 내려가면서 철제농기구나 비파형청동검, 빗살무늬 토기를 발견한다면, 그는 그 유물이 나온 지층을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로 판단하게 될 것이며, 시대별 유물이 같지도 연속적이지도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푸코는 지식도 그렇다고 본다. 그에게는 통시적 역사뿐 아니라 동시대를 관통하는 지식도 다르다. 예를 들어, 호랑이, 고양이, 개를 범주화할 때, 한국인은 호랑이와 고양이를 한 범주로 묶을 수 있다. 고양이과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고양이와 개를 사육동물로 보아 한 범주로 묶을 수 있다.
푸코의 에피스테메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과도 다르다. 패러다임이 한 시대의 과학적 지식을 규정하는 '틀'로서, 과학 물리학에 적용되고, 의식적 작용이나 합리적 기준을 의미한다면, 에피스테메는 우리의 감정과 의식, 즉 문학 철학에 적용되고, 무의식적 작용이나 합리적 기준이 없음을 의미한다. 푸코는 이렇게 다른 가치 기준을 전체 하나로 묶어내려는 움직임이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서양의 근대인들은 이탈리아에서 보편적 모델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을 정상적 인간이라 보고, 나머지는 인간 아닌, 정상 아닌 존재로 취급했다.
광인은 16세기까지만 해도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로 이해되었지만, 중앙집권식 정치가 이루어진 17세기에는 환자, 거지, 범죄자 등과 함께 비정상인으로 취급되어 종합병동에 감금되었다. 이후 19세기에 근대화가 본격화되면서, 그들 대부분은 공장으로 보내졌다. 그리하여 공장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그들은 보이지 않는 간수의 지배를 받으며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상품을 생산해야 했다.
21세기에 이르러 공장은 인터넷 공간으로 변용되었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간수의 지배를 받으며, 얼굴(Face) 없는 책(Book)을 읽고, 타자를 배척하거나 혐오하는 이미지와 기호를 생산한다.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단되기도 한다. 과연 괜찮을까. 만일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말을 한다면, 겉모습도 똑같다면 어떤 느낌일까. 끔찍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실재다. 오늘도 한 사람이 차단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차단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에피스테메가 (시대)정신과 감성/기억을 의미하고, 새로운 에피스테메가 낯섦을 느끼게 하는 타인에게서 비롯된다면, 타인 없는 세계에서 어떤 새로움이 가능한가. 무수한 이미지와 기호 속에서 다름을 배척하는 당신의 에피스테메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김순아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