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이 또 다른 비극 낳지 않게… ‘자살자 유족’ 돕는 그들이 왔다
[위클리 리포트] 자살 유족 원스톱 서비스
사건 벌어지면 심리적 충격-공황… 남겨진 빚에 가족 부양 어려움 겪어
주변 사람에게 말 못하고 숨기기도… 담당자, 사건 발생하면 유족 대면
심리상담-임시주거비 등 각종 지원… “더 많은 유족에게 혜택 돌아가야”
인천시자살예방센터의 ‘자살 유족 원스톱 서비스’ 담당자가 전화로 유족을 상담하는 모습. 인천시자살예방센터 제공
《아내는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첫 목격자였다. 길을 걸어도, 밥을 먹어도,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아도 끊임없이 그 장면이 떠올랐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몸을 휘감았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에서는 늘어진 비디오테이프처럼 ‘무한 반복’됐다.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가 그날 아내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평소에 한 번이라도 더 말을 건넸다면 안 죽지 않았을까. 힘들어할 때 같이 엉엉 울어줬더라면. 죄책감은 일상이 됐다. 다시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현재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한 장면이다. 이처럼 가족, 친구, 동료 등 가까운 사람을 자살로 떠나보낸 이들을 ‘자살 유족’이라고 한다. 견디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았다’는 의미에서 전문가들은 이들을 ‘자살 생존자’라고도 부른다.
갑작스럽게 고인과 이별한 유족들이 받는 충격과 고통은 상상 이상이다. 이때 사건이 발생한 지 24시간 내에 유족이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다. 지역 내 정신건강복지센터나 자살예방센터에서 시행하는 ‘자살 유족 원스톱 서비스(원스톱 서비스)’다. 11월 18일은 세계 자살 유족의 날이다. 미국에서 아버지를 자살로 잃은 해리 리드 전 상원의원이 발의해 1999년 미국 의회에서 결의안이 통과됐다. 그때부터 전 세계는 매년 추수감사절 직전 주 토요일을 자살 유족의 날로 기린다.
이날을 앞두고 자살 유족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원스톱 서비스 담당자들을 만났다. 2019년 9월부터 시작된 원스톱 서비스는 현재 서울, 인천, 광주 등 9개 시도에서 시행되고 있다.
● 장례식장에서 비에 젖은 청년을 만나다
원스톱 서비스 시행 지역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은 정신건강복지센터나 자살예방센터에 연락한다. 원스톱 서비스 담당자는 정신건강사회복지사, 정신건강간호사 등 정신건강 전문가다. 이들이 경찰의 협조를 받아 사건 발생 24시간 안에 유족이 있는 경찰서나 장례식장으로 출동한다. 위기 상황에 처한 유족에게 24시간이라는 골든 타임 내에 ‘직접 찾아가는 것’이 이 서비스의 핵심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자살사망자(2022년 기준)는 1만2906명으로, 하루 35.4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배미남 인천시자살예방센터 부센터장은 수년 전, 장례식장으로 출동했을 때 부모를 잃은 20대 청년을 만났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했는지 청년의 머리카락은 비에 푹 젖어 있었다. 신발조차 제대로 챙겨 신지 못하고 뛰쳐나온 청년은 슬리퍼만 겨우 신고 있었다. 조문객이 거의 없는 장례식장은 숨막힐 듯 고요했다. 그 청년과 이야기를 나눴던 순간이 지금도 배 부센터장의 마음에 맺혀 있다.
자살은 유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삼성서울병원의 2018년 연구에 따르면 자살 유족은 일반인보다 18.3배 더 우울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고사는 사망에 대한 책임을 물을 대상이 있지만, 자살은 아니다. 죽음의 책임을 고인에게 물을 순 없다. 결국 유족은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면서 ‘내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자책한다. 원스톱 서비스에서 자살 유족의 특성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애도 상담’을 진행하는 이유다.
광주자살예방센터에서 원스톱 서비스를 받았던 한 20대 남매도 그랬다. 남매의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1시간이 지난 뒤 남매의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시간 간격으로 부모님을 모두 잃은 20대 남매는 긴 시간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한순간에 가장이 되어 버린 누나는 공황장애를 겪었고 군대에 간 동생은 의가사제대(복무 도중 개인의 사정 때문에 중도에 제대하는 것)를 했다.
남매에게는 부모님과의 이별을 충분히 슬퍼하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한 애도’ 과정이 필요했다. 남매는 센터의 도움으로 애도 상담을 받았고 다른 자살 유족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자조 모임에도 참여했다. 이제 누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동생은 대학에 복학하면서 일상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 사건이 벌어진 집, 유족에겐 트라우마 공간
고인이 사망한 장소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식은땀이 나는 건 유족들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반응이다. 그런데 그 장소가 함께 살던 집이라면 어떨까. 유족에게 집은 더 이상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증폭시키는 공간이 된다. 보건복지부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자살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견된 장소는 자택(55.5%)이었다.
원스톱 서비스는 유족이 고인과 함께 살던 집에서 잠시 떠나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호텔 등의 숙박시설 비용을 지원한다. 호텔에 머물고 있는 유족에게 전화해서 끼니는 챙겨 먹었는지, 심리적인 어려움은 없는지도 묻는다. A 자살예방센터 관계자는 “마치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느낌을 받는 유족들에게 ‘당신은 버림받지 않았다. 당신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반복해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망 장소가 집인 경우 그 현장을 수습하는 것도 유족의 몫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심적으로 너무 버거운 일이다. 그래서 현장을 수습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두려움을 호소하는 유족에게는 특수청소 업체 비용이 지원된다. 배 부센터장은 “유족에게 ‘저희가 수습해 드릴 테니 그냥 그대로 두시라’고 하고 업체를 불러 청소해 드리면 ‘너무 무서웠는데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정말 많이 한다”고 전했다.
● 빚 남기고 떠난 경우 상속 포기 등 법률 지원도
고인이 떠난 뒤에는 고인이 생전에 짊어지고 있는 현실의 짐들이 고스란히 남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고인의 부채다. 유족은 슬픔에서 채 벗어나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예상치 못하게 떠나보낸 이들 중 상당수가 무력감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조정옥 광주자살예방센터 유족지원팀장은 “부채와 같은 문제는 고인의 사망 시점으로부터 일정 기간 안에 상속을 포기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그 시기를 놓치게 되면 신용불량 등의 문제에 처하게 된다”며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 팀장은 사업을 하다가 수십억 원 규모의 부채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남성 가장을 떠올렸다. 살던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고인의 자녀들은 한참 교육비가 많이 들어갈 나이대였다. 고인의 아내는 남편을 잃은 충격뿐만 아니라 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심한 우울감을 호소했다.
센터는 사망 사건이 발생한 당일 출동해 고인의 아내와 면담을 진행한 뒤에, 애도 상담과 함께 고인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무사 상담을 연계했다. 현재 법률 처리가 진행 중이다. 고인의 아내는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한다. “선생님들이 안 계셨다면 저와 제 자녀들에게는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선생님들이 저희 가족이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지금 이 여성은 ‘투잡’을 뛰면서 부지런히 현실을 헤쳐 나가고 있다.
● “직원 1명이 유족 100명 관리도… 지원 늘려야”
하지만 모든 유족이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스톱 서비스는 현재 9개 시도(서울 대구 인천 제주 세종 광주 강원 충북 충남)에서만 시행 중이기 때문이다. 또 사망 사건이 9개 시도 내에서 발생했더라도, 유족의 거주지가 다른 지역이라면 원스톱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배 부센터장은 “유족을 보호하고 지지하는 ‘사회적 울타리’는 반드시 필요하다”며 “원스톱 서비스가 전국적으로 시행돼 더 많은 유족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예산이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원스톱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는 지역에서도 인력 부족 등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광주자살예방센터에서는 유족지원팀 직원 7명이 교대로 24시간 근무를 하는데 턱없이 부족하다고 호소한다. 조 팀장은 “지원 대상인 유족이 계속 늘어나면서 직원 1명이 관리해야 하는 유족이 한때 100여 명에 달할 때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 팀장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는 담당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지원을 받던 유족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라며 “현장에서 유족들을 더 촘촘하게 지원할 수 있도록 인적, 물적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살 유족 원스톱 서비스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 24시간 내에 지역 내 정신건강복지센터나 자살예방센터에서 유족이 있는 곳으로 출동해 지원하는 서비스. 2019년 9월 처음 시작돼 현재 서울 인천 광주 등 9개 시도에서 시행되고 있다.
김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