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나비> 김인숙 지음, 27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줄거리
주인공은 ‘나’다. ‘나’는 아이를 가지고 있는 중년의 여자다.
채금은 중국 사람이다. ‘나’는 중국에 도착했다.
중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 사람이 채금이다.
‘나’는 채금의 어머니가 맡긴 돈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채금에게 그 돈을 전달해 주는 임무를 가지게 되었다.
채금의 어머니는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채금은 25살이란 젊은 나이에 마흔이 넘는 한국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마흔이 넘는 한국 남자는 결혼을 하지 못했으므로 아내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 같다.
‘나’는 한국을 떠나기 얼마 전 남편과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아이를 공부시키기 위해, 아이를 세계인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나’와 ‘나’의 아이를 가르칠 중국어 가정교사가 있다.
말이 가정교사지, 실은 ‘나’의 중국 생활을 돌봐주는 사람이다.
그는 채금과 마찬가지로 한국에 가는 것이 꿈이다.
중국어 가정교사, 그녀는 채금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이었다.
‘나’는 중국의 상황들을 일일이 지켜본다.
중국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이 상황들을 단순히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채금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채금의 아버지는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50년 전, 처형장에서 한 죄수가 공개 총살당하는 장면을 채금의 아버지가 보았는데,
그때부터 왼쪽 눈인 한 눈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그때 당시 눈병이 유행하였으므로 눈병으로 한 눈을 실명한 듯 하다.
채금은 ‘나’가 채금의 어머니가 한국에 있었던 일들을
채금의 아버지에게 이야기 해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나’는 채금의 안내를 받고 조선족 마을로 향한다.
‘나’는 채금의 아버지를 보았고 채금의 가족 상황에 대해 하나씩 알아나간다.
그리고 ‘나’는 ‘나’의 상황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다.
21세기는 중국이다. 아이를 세계인으로 키우기 위해 중국으로 간다.
‘나’는 이런 말들을 ‘나’의 어머니나 형제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역시 남편에게도 이러한 사실들을 이야기했고, 남편은 말한다.
“왜 하필 중국이야.”
남편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남편은 스스로 사표를 던지고 나왔던 잡지사에 다시 재취업하게 될 때까지,
남편은 자그마치 3년 동안 실업자였다.
그 후 ‘나’와 남편은 부부생활의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곧 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채금에게서 전화는 더 이상 걸려오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다시 채금과 함께 왔었던 조선족 마을에 도착했다.
채금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나’가 왜 채금의 집에 왔는지 생각해본다.
아마 ‘나’는 채금의 아버지를 만나, 당신은 어떤 눈으로 나를 보았던 거냐고,
이 물음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느낀 점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바다와 나비’를 이야기하기 전에
특별상 수상작과 추천 우수작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낼까 한다.
특별상 수상작인 ‘플라나리아’는 내용이 굉장히 어려웠다.
한 문단 안에도 여러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플라나리아’의 작가는 전상국이다.
그는 우리 문학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인물이다.
이 작가의 대표작은 ‘우상의 눈물’로 간략히 정의할 수 있는데,
그때 그 문체와 ‘플라나리아’의 문체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점은 ‘플라나리아’에서 보인 문체가 더욱 정교하고 복잡해졌다는 사실이다.
‘플라나리아’의 작가로 인해 예전에 감동 있게 본 ‘우상의 눈물’을 떠올려 본 계기가 된다.
복거일의 ‘내 얼굴에 어린 꽃’은 SF 소설이다.
처음에는 제목이 너무 감성적이어서 미래소설이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먼 미래의 로봇이 향수를 느끼는 장면은 아무래도 어색하지 않나 싶었다.
김연수의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는 내용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이 소설 이해하려고 4번은 읽었는데 그래도 이해하지 못했다.
추천 우수작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 작품은 김영하의 ‘너의 의미’였다.
김영하는 누구인가.
예전에 영화 ‘주홍글씨’를 본 적이 있었다.
한석규와 이은주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였다.
이 영화의 최대 단점은 두 이야기가 교차하는 과정이 너무 어설펐다는 점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로, 나는 ‘주홍글씨’의 원작을 알게 되었는데,
그 작품은 김영하의 소설 ‘사진관 살인사건’과 ‘거울에 대한 명상’이란 작품이었고,
영화 ‘주홍글씨’는 이 두 작품을 합친 작품이라 하였다.
나는 그때부터 편견을 가지기 시작했다.
‘주홍글씨’를 별로 재미있게 보지 못했기 때문에,
또 ‘주홍글씨’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이 너무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김영하라는 작가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했다.
다들 소설이 보여주는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지만,
나는 그다지 김영하라는 작가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의 의미’란 작품을 읽고 생각이 180도 달라졌다.
김영하란 작가는 글 쓰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작가였다.
처음부터 글을 읽는데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글 흐름이 매우 뛰어나다.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는 그런 스타일을 지닌 작가였다.
아마 이 작가는 독자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작가라 할 수 있다.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주제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근엄한 얼굴의 심사위원 둘,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 심사위원 한 명이
두 페이지가량의 평을 써놓았다.
그중 가장 근엄해 뵈는 심사위원의 글을 먼저 읽었다.
그는 심사 과정을 다소 장황하게 써놓은 후에 조윤숙의 작품은
근래 보기 드문 진지한 작품이며 특히 주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폭소하였다.
이상문학상 수상집도 볼 때마다 이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근래 보기 드문 진지한 작품이며 특히 주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이야기는 거의 단골로 나오는 것 같다.
또 이 소설에서 말하기를,
조윤숙의 소설보다 심사위원의 심사평이 더 흥미로웠다는 구절이 있는데,
내가 수상집을 읽을 때의 버릇을 들켜버린 것 같아 뜨끔하였다.
만약 ‘너의 의미’의 주제가 좀 더 무겁고
많은 이야기들을 포괄적으로 형상화 하였다면
이 작품이 대상을 받았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예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우리 시대의 소설가’와 맥을 같이 하였으리라 본다.
한편 나의 단순하고 불필요했던 편견을 가졌다는 것에 큰 후회를 한다.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가 대상을 탄 것에 대해서는 큰 불만은 없다.
그러나 ‘바다와 나비’가 지니고 있는 주제의식은
뭔가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색이 겨우 문턱에 걸쳤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이 강렬하게 다가가는 문체도 아니고
소박하게 다가가는 문체도 아니기 때문에
그 어중간한 문장 표현력이
더욱 이 작품을 가볍게 여기는 요인이라 나는 생각한다.
작가가 ‘바다와 나비’라는 시를 염두하고 썼는지 안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 작품은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와 같은 맥락을 가진 작품이 되었다.
중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중국은 현재 독재 개발국이다.
하나의 당을 운영하고 거기서 자본주의의 경제원리와 비슷한
새로운 경제 운영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지금 중국의 경제 성장률은 연 10% 내외로 매우 빠른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겉에서 보면 중국은 곧 미국과 맞먹을 강대국이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중국에서 잘 사는 사람은 4천 만 명에서 1억 사이라고 하였고
나머지 11억에서 12억은 경제적으로 잘 사는 편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중국에 가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외부에서 느끼는 것과 현지에서 직접 느끼는 것의 차이가 매우 크다고 한다.
또 중국이 비록 독재 개발국이라고는 하나,
한번 자유가 확산된 이상 정권에 대한 자유도 확산되지 않으란 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좀 더 잘 사는 나라인 한국에 이민 오고 싶어한다.
갑자기 잘 살게 된 나라인 한국을 시기하면서도
본인은 한국으로 이민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중적인 잣대를 지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는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중국으로 향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달리 실제로 중국이 정말 크게 성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나라가 중국의 값싼 노동력만 이용하려 들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중국이 크게 성장할 것이란 착각으로 중국에 기대려는 나라도 있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바다와 나비’는 아무 말이 없다.
중국이 어떻게 될 거란 이야기도 없고 어떻게 진행 되는지도 이야기한 바가 없다.
그러나 그 소설에서 나오는 중국 사람들은 한국을 가고 싶어한다.
여기서 ‘나’는 중국이란 광활한 대륙을 건넌다.
‘나’는 나비이고 중국은 바다이다.
아마 이 모순적이면서도 현실이 이 세상을 ‘바다와 나비’로 보여주고 싶은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나열한 것 같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다지 독자를 크게 끌어들일만한 어떤 연결고리가 없다.
그리고 주제를 형상화 하는 과정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좀 나쁘게 말하자면, 이 소설은 밋밋했다.
좀 더 심층적이고 과감하게 돌출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진다.
물론 나의 소설 읽는 취향이 그런 스타일이므로, 다른 독자들은 다르게 생각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