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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며칠쯤은 게으름을 부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괘씸했다. 그가. 선주가. 둘 사이에 시도때도 없이 문자가 오가는 일이 잦아지고, 하
루 혹은 이틀에 한번쯤은 통화를 하고,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달콤해지고. 그런 모든 징조들이 있음에도 둘 중 누구하
나 나에게 일의 전말이나 진행 과정을 설명하려 하는 이가 없었다. 둘은 아는데 나만 모르는 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자 10년 가까운 우리 우정에도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그 두 사람이 그렇게나 밉살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내 방식대로 저항하며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침식사 당번인 주제에 실컷 자고 열시 쯤 일어나서 그의 배를 쫄
쫄 굶긴다든지, 쌓여있는 그의 디자인화 색채 작업을 조금씩 밀리게 만든다든지 하는 지극히 유아적이고도 소심한 불만 표출이었
지만. 그러니 그 정도 반항이 내 성에 찼을리는 만무했다.
“어디가.”
“약속 있어.”
“작업은 어쩌고. 오늘까진 마무리 짓겠다면서.”
“다녀와서 밤새서라도 끝낼 테니까 걱정 마.”
오늘도 여지없이 늦잠을 자고는 일어나자마자 분주히 외출 준비를 했다. 방 안에서 옷장 문을 수십 번 열었다 닫았다 하며 부러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내 행동에도 꼼짝 않고 반응을 보이질 않더니,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나서며 ‘갔다올게’라고 목소릴 높
이자 그제야 내 앞을 가로막았다.
“늦을지도 몰라. 기다리지마.”
구두 앞꿈치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끝내고 나가려는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다시한번 나를 잡았다.
“무슨 약속인데. 일?”
“아냐. 만날 사람이 있어.”
“누군데.”
“도헌선배.”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꼭 추궁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고작 도헌선배를 만나러 나간답시고 두어 시간을 치장하고 일까지
미뤄두고 나가는거냐고 묻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왜 숨겨.”
“뭐?”
“처음부터 형 만나러 간다고 하면 되잖아.”
“난 사생활도 없니?”
“원래 그런거 숨기는 성격 아니었으니까 하는 소리야.”
“자꾸 그렇게 표현하지마. 기분 나빠. 숨긴 적 없어.”
...
“선주가 너 보고싶어해.”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기분이 조금은 덜 상한 채로 집을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나가는 걸 공개할 것도 없이 그냥 조용
히 빠져나갔으면 됐을 걸. 그의 입에서 불려지는 ‘선주’라는 어감이 굉장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친구 이선주가 싫은 게 아니라 단
지 그 두 글자가 엄청나게 낯설게 다가왔다. 그가 이렇게 미워 보일 수가 있을까. 니가 선주 대변인이니?
“그런 말은 나한테 직접 하라고 해.”
§
어째서 금방 들통 날지도 모르는 거짓말을 했을까. 마음이 허허로워서인지 옷깃 새로 스며드는 칼날 같은 바람이 유난히 더 춥게
느껴졌다. 나는 목을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오피스텔 주변 공원을 배회했다. 바깥바람을 쐬고 뒤틀린 마음이라도
조금 정리해 볼 겸 가벼운 쇼핑이라도 할까 해서 외출준비를 했던건데, 대뜸 나를 추궁하듯 바라보는 그의 태도에 중요한 약속이
라도 있는 듯이 둘러댄다는 게 순간 떠오른 사람이 하필이면 도헌선배였다. 내 거짓말에 희생양이 된 선배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내 유치한 자존심이었다. 내 손에도 너만큼이나 큰 사탕이 있어- 같은 유치원생 질투.
추운 것도 물론이었지만, 공원을 배회하는 것도 지쳐서 일단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유난히 친절한 기사분의 경쾌한
목소리에 나는 가까운 백화점의 이름을 댄다. 시트에 몸을 묻고서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마천루를 바라보다 나는 문득 생각난
듯이 기사님에게 목적지를 변경했다. 점심시간도 이미 지나버렸는데 만날 수 있을까. 십 여분 뒤, 나는 한 대기업의 건물 앞에 우
두커니 서 있었다.
-어, 정말? 니가 웬일이야?
“얼굴 보려구. 할 얘기도 있고.”
-최대한 빨리 내려갈게. 좀 걸릴지도 몰라.
“나 시간 많으니까 걱정말고, 할 일 마치고 와.”
-기지배. 쫌만 기다려.
괜히 대기업이 아니구나. 로비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 앉아 분주히 오가는 커리어우먼들과 샐러리맨들을 보고 있었다. 선주도 저
런 모습들 가운데 한 명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괜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씁쓸한 아메리카노의 맛이 그런 기
분을 더욱 짙게 만들어주는 건지도. 저들은 다 행복할까. 저들도 다 사랑을 할까. 대기업의 인재라는 타이틀 때문이 아닌, 마음에
서 바라는 사랑을 하고 있을까.
할 얘기가 있다는 구실로 부르긴 했는데, 막상 선주가 오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선주는 원래 눈치가 빠른 타
입이었으니 ‘보고 싶어서 지나는 길에 들렀어’ 같은 뻔한 핑계는 내 성격이 아님을 알 것이다. 뭐든 난감한 상황엔 빙빙 돌리는 것
보다 직설적인 게 가장 좋다던데. 지금 내 감정대로 선주에게 직접적으로 묻는다면 아마 싸움이 날지도. 너 진언이랑 사귀는거니?
왜 나한테 말 안했어? 셋 중 두 사람이 연인이 되 버렸는데 아직도 세 사람 분의 우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연우야!”
양 손으로 어깨를 짚는 갑작스런 등장에도 나는 크게 놀라진 않았다. 이것이 선주의 방식. 뒤에서 몰래몰래 다가와 깜짝 놀래켜주
는 걸 그리도 좋아했었던.
“빨리 왔지.”
“나 땜에 일부러 서두른거야?”
“아냐, 그렇게 급한 일도 없었어. 그나저나 니가 다 찾아오구, 별일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주앉은 선주는 벌써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만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딱히 유난스러울 재회
도 아닌데. 이 애의 이런 시원스런 성격이, 숨김없는 표정에 나는 벌써 반쯤은 허물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입에서 나올 리
만무한 뻔한 대사를 내어놓고야 만다.
“지나가다가, 얼굴 볼까하고.”
선주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른 멘트는 없냐는 말로 핀잔을 주면서 내 아메리카노를 조금 마셨다. 뭔가, 내가 찾아온 의도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내가 묻고 싶은 것이 뭔지 알고 있을 것 같은 묘한 표정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 내내 휘어진 눈은 분명 웃는 얼굴이었다는 점이다.
“진언이가 말 안해?”
“아무것도.”
“나. 왜 웃는지 알지.”
“.........”
“그렇게 됐어, 우리.”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직접 말로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새삼 깨닫는다.
“며칠 됐는데, 너한테는 바로 말 못했어. 미안.”
“..왜?”
“실감이 안 나서.”
실감이 안 나서. 실컷 행복의 단물을 빨아 마신 뒤에 오늘같은 날 즈음 잔뜩 달큰해진 목소리로 내게 말하려고.
“지금은, 실감이 난다는 뜻이니.”
“응.”
끄덕이는 그 애의 얼굴이 아련하다 느껴질만큼 행복이 묻어났다. 행복하냐고 물을 것도 없게끔 만들어준다. 그리고는 그렇게 마
냥 달뜬 감정을 안고서 내게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아니, 그건 기대가 아니라 친구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반응에 대
한 기다림이었다. 나는 기대에 합당한 친구가 되는 쪽을 택한다. 물러터진 마음은 그 애의 행복한 얼굴 앞에 어떤 쓴소리도 늘어
놓지 못했다.
“축하해.”
§
양 손에 식재료가 잔뜩 든 봉지를 들고 들어서는 나를, 그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럴만도 했다. 도헌선배를 만난다고 당차게
나서더니 두어 시간만에 난데없이 장보러 나갔던 사람처럼 한아름을 들고 돌아왔으니. 나는 구두를 벗고 현관과 내 방 사이의 어
중간한 지점에서 마주하고 선 그에게로 사가지고 온 것들을 팍- 하고 안겨주었다.
“바보야, 나한테 그 말 하기가 그렇게 힘드니?”
“........”
“가서 얼른 양상추 벗기고 셀러리 씻어놔.”
웃는 것도 힘이 들 수 있구나. 나는 안간힘으로 웃어 보이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준비했던 대사를 마치고 바로 방으로 뛰어들었
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얼른 파티 준비를 해야했다. 조금 뒤에 퇴근한 선주가 찾아오면 우리 ‘셋’이 하게 될 파티.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의 연결을 기념하는 파티.
“깨끗이 박박 씻어. 요즘은 농약을 많이 써서 한 두번 설렁설렁 씻는 걸로는 택도 없다.”
“그렇게 잔소리만 하지 말고 그럼 니가 씻어.”
“혼자 남은것도 서러운데 그런 것까지 해야겠니?”
팔짱끼고 서서 계모처럼 명령만 내리는 나를 힐끗 돌아다보더니 그는 피식 웃으며 다시 기다란 셀러리를 열심히 씻기 시작했다.
그의 등을 보는게 편했다. 지금 얼굴을 마주하면 감정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나머지 식재료들을 꺼내 차
근차근히 정리했다. 주방에는 싱크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했어?”
“응? 뭐라구?”
“서운했냐구.”
그가 여전히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채로 내게 묻는다. 굳이 대답을 바라는 질문은 아니었음을 알지만, 내 섭섭함을 누군가 알아
주길 바라는 마음이 동해 못내 그에게 투정 같은 말을 해버렸다. 알면서 뭘 물어- 라고.
“그럼 그거 안해도 돼.”
“뭘...?”
“억지로 웃는거.”
첫댓글 으...왠지 선주보다 진언이가 더 얄미운 느낌. 킥킥. 그냥 연우 도현이랑 이어주세요=_=..거짓말이구요 앞으로도 재밋는 소설 마구마구 써주세요.
이제 겨우 네 편째 연재했지만 앞으로도 그리 길어질 것 같진 않아요^^ 연우랑 다른 세 사람, 앞으로 어떻게 될지 계속 지켜봐주세요^^
아, 정말 -_- 한대 쥐어박고 싶은 ... 은근히 얄미운 진언이 다알고 있으면서 _-_ 복수해주세요 작가님 ! 그리고 화이팅 ~
ㅎㅎ진언이가 아주 밉상으로 도장이 꽝 찍힌 것 같네요. 어떻게 복수를 해야 속이 시원하시려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힘낼거예요^^!
아 스크롤 다 내려온지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었어요ㅠㅜㅋㅋ 연우는 사랑에 있어서 너무 착한가봐요 그래서 진언이가 더 얄미운걸지도 ㅠㅜ.. 앞으로 마음 고생 하게 될 연우가 불쌍해요 엉엉 정말 재밌어요! 다음편도 완전 기대할께요 *0*
문득 저도 연우가 딱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연우 편에서 그 맘 이해해주시는 파닥파닥님이 계셔서인지 제가 다 든든해요^^ 늘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1편부터 읽었어요. 이젠 과거형이지만, 제 경험이랑 너무 비슷한 이야기라 완전히 몰입되었네요ㅠㅠ 잔잔하고 세심한 심리묘사가 마음에 들어요;ㅂ; 건필하셔서 다음편도 얼른 읽게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와, 이런 아픈 경험을 하신분을 직접 뵙게 되네요. 글이 어설픈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게 더 노력해야겠다는 의지가 막 생겨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진언이 완전 나쁜 남자네요.ㅋㅋㅋㅋ 그래도 이젠 연우 그냥 놔뒀음 해요..연우는 도현선배랑 러브하게 해주세요.~
진언이, 그렇게 몹쓸놈은 아니랍니다^^ㅎㅎ 아직 초반이고 남은 시간동안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요, 좀 더 여유롭게 지켜봐주세요. 덧글 감사합니다^^
아 정말 다음싫다!! 내 600바이트 코멘을 어쩜 그렇게 한입에 꿀꺽! 아...허무해라. 흠, 후후-다시 진정하고 기억을 떠올리며 뭐 다시한번 아로님에 대한 진정성을 담아 감상을 날립니다. 아 일단 '등록'부터 한 다음에
마지막 진언멘트 듣는데, 치에가 연우가 된것마냥 가슴에 콕 하니 박히더군요. 아주 사람 마음 후벼파다 못해~에잇!! 나쁜 엑스!!같으니라고~하지만 뭐, 진언이가 억하심정이 있어 연우에게 그러는건 아닐테니~조금만 미워하도록 할게요~음, 역시 선주는. 솔직하긴 한데, 그래서 더 얍상맞아 보인다고 할까요? 뭐, 연우가 진언을 애틋하게 생각한다는걸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애가 쫌...쫌...자, 인물에 대해선 이쯤하고. 아참 도현이, 이 사람은 아직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앞으로 많은 두각을 나타낼테니 차츰차츰, 말하도록 하고~음, 이 글 읽으면서 갑자기 뜬금없이 생각한건데요~이건 정말 경험으로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절대 이렇게 감성적으로 풀어낼수 없는 뭔가 묘한 아른함이 있어요. 흐흐, 아로님~우리 나중에 1:1 러브?쪽지라로 주고 받으면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좀 풀어보시렵니까?ㅋ.농담이구요~그만큼 글에 대한 흡입력이 깊어요. 이거, 아주 명품스킬에, 중독성까지? 역시 우리 아로님!!의 필력은 죽지 않았어?!! 오늘따라 참 호들갑스러운 치에 입니다. 사실 긴시간 '시대극'에 몰입해 계신터라, 현대극으로 전환함에 따라 어려워 하시는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살짝 염려하고 있었는데, 에잇! 그런건 애초부터 필요도 없었다는거 아닙니까~훌쩍. 무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다음글도 아로님답게!!^^
아이그, 치에님>_< 제가 졌어요! 전 말주변이 없어서 이렇게 600바이트를 꽉꽉 채우라고 시켜도 못할거예요, 아마ㅎㅎ 이렇게 숱한 문장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빠짐없이, 얼마나 관심있게 지켜봐주시는지를 증명하고 있는것 같아 뿌듯하면서도 감사한 마음 이루 말할수가 없네요. 그렇지만 캐릭터화에 대해서라면 드릴 말씀이 없어요;;; 열심히 능력부족을 탓하고 있습니다ㅎㅎ 미숙한 부분이 군데군데 자꾸 눈에 띄는만큼 아직 더 배워야할 부분도 많다는 뜻이겠죠. 실은 어제 오늘 제게도 눈코뜰새없이 바쁜 일이 겹쳐서 생기는 바람에 지금도 무슨 정신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마음을 가다듬고 비축분을 만들어야하는데
말이죠. 정신은 혼란해도 마음만큼은, 치에님의 배려로 가득한 덧글만큼이나 따뜻하게 꽉꽉 채워지는 기분이예요^^ 저는 저답게, 그리고 치에님 '완전범죄를 꿈꾸다' 언제나 기다리고 있으니까 화이팅해주세요! 이건 독촉입니다!ㅎㅎ 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