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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식적으로 선수로서의 은퇴를 말씀 드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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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3월 30일 서울에서 출생해 수원에서 자란 박지성은
영본초등학교 4학년때 처음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세류초등학교로 전학하여 전국 대회에 참여해 준우승을 차지하며 차범근 축구대상을 수상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안용중학교로 입학했다.
축구로 따지면 별 볼일 없던 팀이었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의 결정은 곧 안용중학교를 도내에서도 무시 하지 못할 강팀으로 바꿔놓았다.
세월이 흘러, 수원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와서는 이상하게 박대만 당했다.
"너는 체격이 너무 왜소해."
처음으로 맞는 위기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체격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J리그에서 은퇴하자마자 수원공고의 감독으로 부임하신 이학종 감독님은
그에게 체격을 보완시키기 위한 훈련만을 시켰다.
그런 지성이를 보며 아버지는
애한테 고기라도 실컷 먹일 수 있을까 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시고 정육점을 시작하셨다.
부모님은 밤낮으로 수소문 해 오로지 키가 크는데 좋은 음식을 구하러 다니셨고,
기도하셨다.
부모님의 지극한 정성으로 그는 결국 1년 사이에 158 cm에서 170 cm 까지 자랐다.
또한 이학종 감독님의 훈련은 기본기를 철저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서야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수원공고의 주전으로 활약하였고,
대학교에 진학 할 시기가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원하는 대학교는 없었다.
그나마 입학하고 싶어서 찾아갔던 학교들도
특별한 성과가 없다며 입학은 힘들 것 같다고 손을 가로저었다.
당시에는 월등한 체격 아니면 테크니션이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작은 체격에 엄청난 테크니션도 아니었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이제 그만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이학종 감독님이 찾아오셨다.
이학종 감독님은 방황하는 제자를 도와주었다.
지성이를 데리고 명지대학교로 찾아갔다.
명지대학교는 이미 신입생 선발이 끝난 상태였지만
이학종 감독님과 명지대학교 감독이신 김희태 감독님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명지대학교의 축구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명지대 축구부가 울산에서 전지훈련을 갔다.
때 마침 올림픽 대표팀도 울산으로 전지 훈련을 왔고 두 팀은 친선경기를 가졌다.
왼쪽 풀백으로 출전한 박지성은 올림픽대표팀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올림픽대표팀의 허정무 감독은 김희태 감독에게 '왼쪽 풀백'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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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명 선수의 올림픽 대표팀 발탁 소식에 언론들은 의아해했다.
유명한 대학 출신도 아니고 작은 체구에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여론의 뭇매에 경기에 나선 그도 수비 시에 헛발질을 하는 등 안좋은 모습을 보였다.
"왜 이런 선수를 발탁했나?"
"바둑 두면서 뽑힌 거 아닌가?"
"뇌물 얼마 받았는가?"
무명 선수의 부진은 곧 허정무 감독에게 비난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을 계속 신뢰해줬다.
감독님의 믿음에 그는 이내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다.
......
이후 프로 계약을 맺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왜소한 체격을 문제삼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제의가 왔다.
시미즈 에스펄스와 교토 퍼플상가라는 팀이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당시 시미즈 에스펄스는 상위권이고, 교토 퍼플상가는 하위권이었지만,
고등학교때 경기에 나서지 못하던 때가 문득 생각났다.
결국 시미즈 에스펄스 대신 주전급 대우를 보장해준다는 교토 퍼플상가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그는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없는 일본으로 떠났다.
주변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굳이 그런 곳으로 가야했는지.
왜 잘나가는 시미즈를 내비두고 교토로 갔는지.
하지만 이미 결정은 끝났다.
그저 돈보단 축구가 하고 싶었다.
나를 더 써주고 필요로 하는 곳을 선택한 게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곧 적응이 되었다.
적응하는 중에 팀이 2부리그로 강등당해 많은 선수들이 이적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는 2부로 강등된 팀에 잔류해 그라운드를 누볐다.
경기에 뛸수록 자신감은 늘어갔고 기량도 좋아졌다.
그런 그의 활약에 팬들은 열광했고, 팀은 다시 1부리그로 승격했다.
그러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꿈 같은 소리였다.
그의 정신력과 잠재력을 높이 산 히딩크 감독이 나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꿈, 태극 마크를 다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체격이 왜소해 축구도 못하고 변변치 않은 팀조차 들어가지 못하던 한 무명 선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
2000년 4월 5일 라오스전에서 첫 태극 마크를 달고 뛰었다.
결과는 9 - 0 대승이었다.
비록 골은 기록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만족했다.
이후 두달이 지나, 6월 7일 마케도니아전에서 왼발로 국가대표 데뷔골을 기록했다.
그 동안의 설움을 모두 날리는 순간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기뻐했고,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찬사를 보냈다.
모든 게 완벽하게 돌아갔다.
2002 년이 되었다.
히딩크 감독은 여전히 그를 신뢰해줬다.
그리고 결국, 월드컵 직전에 열린 잉글랜드 평가전에서 헤딩 동점골을 넣었고,
며칠 뒤에 열린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는 김남일 선수의 롱패스를 받아 중거리 골을 넣었다.
그리고...
2002년 6월 14일 인천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포르투갈의 조별 예선 3차전..
천금같은 결승 골을 넣었다.
한국은 박지성의 환상적인 골로 16강 진출을 확정했고,
월드컵 역사상 아시아 국가에서는 전무후무한 4강 신화를 이룬다.
기적같은 월드컵이 끝나고, 히딩크 감독은 PSV 아인트호벤으로 떠났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과 이영표를 아인트호벤으로 영입하려 했다.
마침 교토와의 계약이 끝날 시기라 어렵지 않게 이적이 성사됐다.
하지만 계약이 끝나던 12월 31일 다음 날인 2003년 1월 1일.
교토 퍼플상가의 컵대회 결승전이 있던 날이었다.
결승전이 있던 날, 교토의 라인업을 본 해설자들은 의아해했다.
박지성이 들어가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1-0으로 지고 있던 후반 7분, 벼락같은 헤딩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켜
1골 1도움의 활약으로 팀의 2-1 역전승에 기여했다.
교토팬들은 기뻐하면서도 궁금했다.
어째서 계약기간이 끝난 선수가 출전하게 된건지.
사실 그와 교토 퍼플상가의 계약은 2002년 12월 31일자로 종료되었으나
팀의 우승을 위해 계약기간이 만료되었음에도 무보수로 출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 교토 퍼플상가의 컵대회 우승은 지금까지도 교토의 유일한 우승 트로피로 자리잡고 있다.
교토는 그를 잡기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유럽 도전의 꿈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교토팬들은 그의 유럽 무대 도전을 응원했고,
교토 구단주는 어딜 가든 응원하겠지만, 만일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온다고 해도 받아주겠다는 말을 밝혔다.
우승 이후, 그는 PSV 아인트호벤으로 떠났다.
대표팀 선배인 이영표와 같이 네덜란드로 진출한 그는 처음부터 잘 되진 않았다.
교토에서의 무리한 출전은 결국 그의 무릎에 이상을 주었고,
외국의 낯선 환경은 적응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그로 인해 출전하는 경기마다 부진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아인트호벤의 팬들은 그런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런 식으로 할꺼면, 한국으로 돌아가라..!!"
같은 팀 동료도 기자들이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런 형편없는 선수가 어떻게 우리 팀에 왔는지 모르겠다"
특히 홈 경기에서 출전하게 되면, 원정 경기에 출전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심하게 야유를 받았다.
공을 받는 순간마다 그를 향해 욕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단순한 패스마저 받지 못하고 경기에 끝나버리기 일쑤였고,
밖에 나가는 것 조차 무서웠다.
언론들은 다시 교토로 복귀할 것이라는 루머를 퍼뜨리기 시작했고,
시즌이 끝나자마자 방출당할 거라고 호언장담 했다.
그러나 이대로 멈출수는 없었다.
가더라도 내 능력을 한번이라도 보여주자, 그런 생각으로 버티기로 생각했고
히딩크 감독은 그런 그를 배려하고 보살펴주었다.
히딩크 감독의 배려로 원정 경기에만 나서던 03/04 시즌 중반이 되서야
네덜란드 축구에 몸이 익어갔다.
04/05 시즌이 되서는 주전 자리를 차지하였고,
그를 비난했던 팀 동료는 공개적으로 사과했으며
홈팬들은 그에게 미안함의 표시로 응원가를 만들게 된다.
결국 04/05 시즌, PSV 아인트호벤의 리그 독주에 공헌하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16강 모나코전, 8강 리옹전에서 엄청난 활동량과 에너지로
팀이 4강에 올라가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고,
4강에서 AC 밀란과의 1차전, 2:0으로 패배하며 조용히 막을 내리는 듯 했으나,
2차전에서 하셀링크와의 연계 패스를 통해 전반 9분에 밀란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풀백들인
말디니-네스타-스탐-카푸를 뚫고 호쾌한 첫 골을 터뜨리며 홈팬들을 열광에 빠뜨린다.
이후 PSV는 AC밀란을 압도하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막판에 터진 골로 인해 3:3 원정 다득점으로 탈락하게 된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의 엄청난 활약으로 그는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로 발돋움 하게 되었고,
이는 곧 세계적인 명문 클럽들이 그를 주시하는 로직이 된다.
리버풀을 비롯해 첼시, 맨유, 데포르티보 등등 수많은 강팀들이 그를 원했다.
그 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을 주목하라는 스카우터의 보고서를 받고
네덜란드로 날아가 챔피언스리그 8강 PSV 와 리옹전을 직접 관찰 한 후 영입을 결정하고
시즌이 끝나자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맨유 이적을 설득했다.
마침내 그는 맨유 이적을 결심한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그가 맨유로 가면 벤치에 있을 것이라 말하며
PSV에 1년 더 잔류해서 기량을 좀 더 끌어올린 다음
PSV와 커넥션이 있는 첼시로 이적시켜 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박지성은 맨유로 가는 쪽을 더 바랬고, 히딩크 감독도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맨유로 보내주게 된다.
동양인이 프리미어리그, 그것도 세계적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 언론들은
박지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아시아 선수는 유럽 무대에서 통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박지성은 아시아에서 온 티셔츠 판매원"
"그는 계속 벤치나 지키고 있을 것이다"
"유망하지만 돋보이지 않는다."
연일 쏟아지는 악의적인 기사들은 그를 겨냥해 쏟아졌다.
하지만 주눅들지 않았다.
올드 트래포드에 가서 처음으로 한 일은 등번호 배정이었다.
대표팀에서 자주 쓰던 21번을 쓰려고 21번을 골랐다.
하지만 그렇게 뒷번호를 쓸 필요 없다는 퍼거슨 감독의 말에
결국 13번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2005년 8월 13일, 에버튼과의 경기에서 프리미어리그 데뷔전을 치뤘다.
PSV 시절과는 달리 맨유에서는 무난히 적응을 했다.
특히 세계적인 스트라이커이자 팀 동료였던 반 니스텔루이와는 궁합이 잘 맞았다.
경기를 하나 둘 나설때마다 팀 동료들은 그를 인정했고
그를 보는 관중들의 시선은 점차 박수로 바뀌어 갔다.
첫 시즌을 무난히 마치고, 다시 월드컵이 찾아왔다.
4년전에 비해 그는 이제 대표팀에선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와의 조별 예선 2차전.
조재진의 헤딩 패스를 받아 천금같은 동점골을 만들어낸다.
그의 골로 강팀 프랑스와의 시합에서 무승부를 거두는 성과를 냈다.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스위스와의 조별 예선 3차전.
석연치 않은 판정이 경기를 지배했고, 결국 2:0으로 패배하며
조별 예선 3위로 32강에서 탈락하고 만다.
월드컵이 끝난 후, 06-07 시즌이 찾아왔다.
지난 시즌 영입된 에브라와 비디치가 적응을 하고, 호날두가 폭발적인 활약을 보였다.
팀이 성적이 매우 좋았다.
2006년 9월 10일 토트넘 핫스퍼와의 경기에서 왼쪽 발목이 파열되었다.
갑작스런 부상에 3개월을 쉬었다.
하지만 12월 18일 웨스트햄과의 경기에서 다시 복귀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애스턴 빌라전에서 1골 1어시스트, 찰튼전에서 1골, 볼튼전에서 2골, 블랙번전에서 1골 1도움 등
연이어 이어지는 공격 포인트에 팬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산소탱크' '아시아에서 온 보물' 이라며 치켜세웠다.
하지만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블랙번전을 마치고 난 후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구단 팀닥터에게 무릎을 보여 검사를 받았다.
팀닥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오른쪽 무릎 연골 손상이었다.
선수 생활에 위기가 될 정도의 부상이었다.
교토 시절에 무리하게 출전하며 다친 그 부위였다.
구단은 그에게 1년 아웃 판정을 내렸다.
그나마 구단의 도움으로 무릎 수술의 권위자 리처드 스테드먼에게 무릎 연골 재생술을 받았다.
구단 관계자들은 그에게 위로를 건냈다.
팀 동료들도..팬들도..그것만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시즌이 끝나고, 맨유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재활 중에 경기장을 찾아 팀의 우승을 같이 축하해줬다.
그리고 그의 목에는 프리미어리그 우승 메달이 걸려 있었다.
이것은 아시아 선수 중 최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메달이었다.
재생술을 받고 하루에 1~2시간씩 재활훈련을 한 끝에
당초의 1년을 8개월로 앞당겨 복귀할 수 있었다.
07-08 시즌이 반이나 지나서야 복귀한 그는
4월 2일 UEFA 챔피언스리그 AS 로마와의 8강 1차전에서
웨스 브라운의 오버 크로스를 포기하지 않고 헤딩으로 받아내어
웨인 루니의 골을 어시스트 한 것을 시작으로
4월 6일 미들스브로전에서 후반에 교체되어 들어가 웨인 루니의 결정적인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을 패배에서 구해내는 구세주 역할을 한다.
4월 9일, AS 로마와의 2차전에서도 활약하여 팀을 4강으로 이끌었고
이어지는 바르셀로나와의 4강전.
캄프 누에서의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의 유망주였던 리오넬 메시를 완전봉쇄하는데 성공하여 0-0으로 무사히 마쳤고,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2차전에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활동량과 압박으로 바르셀로나의 중원을 찢어놓았고,
마침 터진 폴 스콜스의 중거리 골로 인해 1-0으로 바르셀로나를 제압. 팀이 결승전에 진출하는 데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그리고 5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첼시와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박지성,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결장…벤치 명단에서도 제외'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출전 할 것이라는 언론의 전망들과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에서의 활약으로 모두가 그가 선발 출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자리는 없었다.
그가 항상 출전하던 오른쪽 미드필더 자리는 오웬 하그리브스의 이름이 넣어져 있었고,
7명의 서브 명단에 조차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맨유는 승부차기 끝에 첼시를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그라운드를 나갔다.
08-09 시즌 초반은 주전 경쟁에서 밀려 자주 출장하지 못하다가
2008년 9월 21일 첼시전이 되어서야 시즌 첫 출장을 했으며
시즌 첫 골까지 기록하며 주전 경쟁에서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후 반대쪽 파트너였던 호날두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며
영국 언론들에게 '디펜시브 윙어' 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박지성이 하지 못하는 것들을 호날두가 해줬고,
호날두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박지성이 해줬다.
덕분에 맨유는 승승장구 했고
다시 한번 맨유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상대는 바르셀로나였다.
상대는 1년전만 해도 4강에서 만나 탈락시켰던 팀이지만
펩 과르디올라의 뛰어난 용병술 아래, 트레블까지 노리는 팀이 되어 있었다.
퍼거슨 감독은 이번엔 박지성을 선발 명단에 넣었고,
이는 곧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1년 사이 바르셀로나는 다른 팀이 되어있었다.
끊임없는 압박과 티키타카 전술로 공격해오는 바르셀로나 앞에
맨유는 2-0으로 패배하고 만다.
맨유는 리그 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시즌이 끝난후 국가대표팀과 클럽을 오가는 빡빡한 일정 속에 또 다시 무릎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09-10 시즌 초반을 뛰지 못하며 다시 한번 주전 경쟁에서 한발짝 물러났다.
부상에서 복귀해서도 주전 선수들이 활약하는 통에 한동안 경기에 나서지도 못했다.
매번 돌던 위기설이 다시 한번 나왔다.
항상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설이었지만, 이번에는 진짜인 것 같았다.
간간히 출장하는 기회에서도 폼은 올라오지 않았고,
장점이었던 활동략과 체력도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껏 해오던대로 묵묵히 앞만 보고 갔다.
그리고 결국 2010년 2월 1일, 아스날과의 경기.
캐릭의 로빙 쓰루패스를 받은 박지성은 하프라인 조금 안되는 지점에서 볼을 잡은 후,
약 50m를 단독 드리블 후 시즌 1호골을 성공시켰다.
지금까지의 부진을 시원하게 날리는 골이었다.
이후 다시 폼을 되찾고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컵 결승전에 선발 출전해
베르바토프와의 합동플레이로 팀의 공격을 주도하고, 골대를 맞추는 등 연일 맹활약했다.
그리고 5년만에 만난 AC밀란과의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
세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중 하나인 안드레아 피를로를 전담 마크하며
AC 밀란의 공격흐름을 원천봉쇄하였고, 골까지 기록하며 AC 밀란전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풀럼과의 경기에서는 베르바토프에게 날카로운 크로스를 날리며 시즌 첫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3월 21일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후반 60분, 1-1로 팽팽한 경기를 이어가던 도중
플레쳐의 크로스를 받아 다이빙 헤딩슛으로 결승골을 넣으며 2-1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어진 10-11 시즌은 초반부터 발렌시아, 나니, 긱스가 줄부상을 당하면서 자연스레 주전 경쟁에 우위를 점하고
공격진의 줄부상으로 팀의 공격력이 약화되자 스스로 플레이스타일을 공격적으로 전환하여 플레이했다.
9월 22일 스컨도프전에서의 골을 시작으로 10월 26일 울버햄튼전에서의 골,
11월 6일 리그 11라운드 울버햄튼전에서는 전반 종료직전 선제골과 후반 종료직전 버저비터 골로
맨유 입단 이후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 다음 이어진 위건전에서는 친한 친구인 파트리스 에브라에게 그림같은 어시스트를 했고
11월 28일 블랙번전에서도 골, 12월 14일 아스날전에서의 헤딩골을 기록하면서 시즌 반도 안되어 자신의 한 시즌 최다골을 기록했다.
최다골을 기록한 후에는 아시안컵에 참가, 국가대표 은퇴무대로써 팀을 8강 이란전에서의 투지 등을 보이며
4강까지 맹활약했지만, 예기치 못한 부상으로 인해 4강 경기에 참여하지 못했고,
결국 주장이자 팀의 중심인 박지성의 공백을 느끼며 4강에서 탈락했다.
이는 그의 은퇴 무대임과 동시에 대표팀 센추리 클럽 (A매치 100경기) 에 가입 하는 영광을 누렸다.
부상 복귀 이후 챔피언스리그 8강전 첼시와의 2차전에서 2-1로 역전하는 결승골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시즌 36라운드 첼시전에서 전반 35초 경 다비드 루이스를 제치는 결정적인 쓰루패스로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에게 연결해 줌으로써 선제골을 어시스트 하였다.
시즌 마지막 경기인 블랙풀전에서도 시즌 8호골과 안데르손에게 칼 같은 패스를 제공하며 시즌 6호 어시스트를 기록,
맨유의 19번째 우승을 확정시켰으며, 5월 29일 오전 3시 45분에 벌어진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다시 한번 선발 출장하여
홀로 메시의 볼을 태클로 뺏는 등 선전했으나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전술에 의해
3:1로 패배, 또 다시 선발로 출전해 챔피언스리그를 거머쥐지는 못했다.
그는 실망했지만, 팬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머나먼 타지의 땅에서 유럽의 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의 모습을 보며
팬들은 좌절한 그를 일으켜 세워줬다.
11-12 시즌이 되기 전 연봉 86억의 2년 재계약을 체결하게 되어
팀내에서 루니와 퍼디난드에 이어 3위가 되었다.
3라운드 아스날전에서 교체투입된지 2분 만에 골을 넣은 것으로 시작으로
12월 26일 위건전에서 2호골을 기록했고
12년 1월 28일, 리버풀전에서 하파엘의 측면 크로스를 받아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2월 6일, 첼시전에서는 후반 40분 교체 출전하며 맨유 통산 2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2월 24일, 유로파 리그 아약스전에서 맨유의 주장이 되어 출장하였다.
하지만 이후, 위기가 찾아온다. 유로파 리그 16강 빌바오전을 시작으로 출장 기회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5월 1일 맨시티와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를 앞두고 선발 출전했으나,
8경기 연속 결장으로 인해 무뎌진 경기감각은 결국 부진한 활약을 낳고 말았다.
사실 맨유 모든 선수들이 부진했지만, 현지 언론들은 박지성에게 혹평을 쏟아내었다.
깜짝 선발이 실패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최저평점을 부여했다.
결장이 길어지자 끝내 박지성은 새로운 도전을 결심한다.
새로운 도전을 찾아 떠난 곳은 퀸즈 파크 레인저스였다.
퀸즈 파크 레인저스의 구단주, 토니 페르난데스는 그를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구단의 장대한 비전을 설명했다.
그리고 등번호 8번을 택하려는 그에게 구단주는 7번을 달아줄 것을 요구했다.
지금은 공석인 주장직까지 맡아달라는 부탁도 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대우였다.
데려오는 과정에서도 구단주와 감독이 직접 와서 선수와 협상했고,
팀 내 에이스의 상징 번호인 7번이 기존 선수가 달던 번호임에도 7번을 달아줄 것을 원했고,
이제 막 입단한 선수에게 주장직을 주었다.
그렇게 박지성은 2012-13 시즌 팀의 새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퀸즈 파크 레인저스는 매 경기 팀 플레이가 맞지 않는 경기력을 보였고,
결국 시즌 내내 강등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리그 20위 최하위로 강등되고야 말았다.
동시에 이번에도 박지성은 비난의 여론을 피해갈 수 없었다.
팀내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고, 주장인만큼 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주어야만 했었지만
그 역시 부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PSV 아인트호벤으로의 임대 이적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역시 2부 리그의 빡빡한 일정보다 PSV로의 복귀가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퀸즈 파크 레인저스에서 받는 연봉 70억을 PSV는 감당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PSV 측은 그에게 50%도 안되는 15억원을 제시. 원 주급의 80%를 깎아 제의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돈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결국 2013년 7월 30일 PSV 아인트호벤과 1년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22살의 나이에 팀의 주축이 되어 유럽을 호령하던 그가,
어느덧 33살의 경험많은 베테랑 선수가 되어 다시 복귀했다.
비록 그의 기량은 예전의 팬들이 봐왔던 날카롭고 파괴적이었던 것이 아니게 되었지만
팬들은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그를 환영해주었다.
그와 같이 팀을 이끌던 필립 코쿠는 PSV의 감독이 되어 있었고
맨유에서 같이 뛰며 친분을 맺었던 반 니스텔루이는 PSV의 코치가 되어 있었다.
'나'의 세대가 저물기 시작했다.
서서히 끝이 보이는가 싶었다.
시즌이 시작되고, 대체적으로 나이가 어린 선수단에 경험을 불어넣어주고, 조율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즌 중반이 되어서는 다시 무릎이 말썽을 피웠다.
시간이 지나, AC 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경기가 있을 때 출전이 불투명했지만
어렵사리 회복에 성공해 선발 출전했다.
그리고 팀을 잘 이끌며 성실하게 조율해낸다.
MOM에 올랐다. 다시 한번 'AC밀란의 킬러'로써 존재를 입증했다.
그리고 이후 8월 25일 골을 넣었다. 무려 575일 만에 리그 득점이었다.
2013년 9월 23일 리그 우승을 위해 반드시 잡아야 했던 아약스와의 경기에서는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PSV는 이 경기 이후 1위로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다시 무릎 부상이 도졌다. 또 다시 한달을 결장했다.
그 사이 팀은 순위가 10위까지 떨어져 버렸고
몇몇 언론은 중요한 순간때마다 부상당한다며 '먹튀'라는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부상을 다시 추스르고 출전하게 되면서 연승하게 되었다.
그렇게 2014년 3월 16일 2위 비테세 원정에서 쐐기골을 도왔다.
이 승리로 팀은 3위까지 올랐다.
팀은 계속해서 연승해 나갔지만 이미 벌어진 승점 차는 줄어드질 않았다.
결국 막판에 트벤테에게 역전당하게 되어 리그 4위로 마치게 되었다.
아쉬움은 남지만 유로파리그라도 갈 수 있어서 미련은 없었다.
시즌이 끝난 후 항상 그랬듯이 그의 거취로 뜨거웠다.
다시 QPR로의 복귀냐, 다시 한번 PSV로의 복귀냐.
........
그는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5월 14일...
"오늘은 공식적으로 선수로서의 은퇴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지난 2월부터 은퇴 생각을 했습니다. "
"제 무릎 상태 역시 다음 시즌까지 치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은퇴 발표를 하게 됐습니다."
"축구선수 박지성의 인생은 끝나겠지만, 축구계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Fin.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회 (2002년)
에레디비지 우승 2회 (2002-03 시즌, 2004-05 시즌)
에레디비지 준우승 1회 (2003-04 시즌)
KNVB 컵 우승 1회 (2004-05 시즌)
요한 크루이프 실드 우승 1회 (2002-03 시즌)
요한 크루이프 실드 준우승 1회 (2004-05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1회 (2004-05 시즌)
잉글리쉬 프리미어 리그 우승 4회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10-11 시즌)
프리미어 리그 준우승 3회 (2005-06 시즌, 2009-10 시즌, 2011-12 시즌)
FA컵 준우승 1회 (2006-07 시즌)
풋볼 리그 컵 우승 3회 (2005-06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3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11-12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2007-08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2회 (2008-09 시즌, 2010-11 시즌)
UEFA 슈퍼컵 준우승 1회 (2008-09 시즌)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1회 (2008년)
2002/2006/2010 월드컵 3회 연속 득점
개인 수상
2001년 J2리그 MVP 수상
2001년 J리그 베스트 XI 선정
2002년 J리그 베스트 XI 선정
2002년 일왕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MVP 수상
2002년 체육훈장 맹호장
2002년 일본 오사카경제법률대학교 표창장
2002년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수상
2003년 피스컵 골든볼 수상
2005년 KNVB 컵 MVP 수상
2005년 에레디비시 베스트 XI 선정
2005년 UEFA 챔피언스리그 베스트 XI 선정
2005년 UEFA 클럽 풋볼 어워즈
2005년 유로스포츠 베스트 XI 미드필더 부문 선정
2005년 에스콰이어 '한국을 빛낸 10명의 남성'
2005년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 20인'
2005년 환경 재단 선정 '세상을 밝게 한 100인'
2006년 한국 방송 프로듀서 선정 올해의 스포츠 스타
2007년 세계 경제 포럼 선정 차세대 지도자
2007년 명지대학교 공로상
2008년 슈퍼매거진 슈퍼어워즈 아시아 선수상 수상
200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3월 MVP 수상
2009년 제40회 경기도 체육상 스포츠 스타상 수상
2010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1월 MVP 수상
2010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2월 MVP 수상
2010년 대한축구협회 올해의 선수상 수상
2011년 AFC 아시안컵 베스트 XI 선정
첫댓글 데뷔골과 데뷔전은 히딩크 전이었죵 ㅋㅋㅋ
잘봤습니다!!!!!!!!!!!!!
캡틴 박
잘봤습니다!! 근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이야기가 없어서 아쉽네요 ㅠ ㅠ
캡틴 지성팍
잘 보고 갑니다.
아 진짜 앙대여 ㅠㅠㅠㅠㅠㅠㅠ
잘봤습니다. 퍼가도 괜찮을까요?
퍼가기/무단도용 가능합니다 ㅋ
지느님 박지성 레전드
지느님에게 태클걸면 안되지만.. 틀린정보가 있어서 ... 차범근 대상이 아니라 장려상인가 그럴거예요.
박지성 축구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