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은 매우 답답했다. 현옥과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돌려보냈는데, 그 후부터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도 일체 반응이 없었다. 현옥의 원룸에 가보았으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분명 다른 남자가 생겼구나! 나와 관계하는 걸 무척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하자고 안 하는 걸 보면 확실한 거야.’
현옥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져서 조장은 지수를 만났다. 한 동안 지수와도 냉각기를 거쳤다. 그것은 지수가 너무 매달리고 부담을 주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조장이 지수에게 푹 빠졌다. 지수의 사이즈가 작고 아담해서 좋았다.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한 어린 소녀 같았다.
지수는 플롯을 전공했다. 중학교 때부터 플롯을 해서 연주 솜씨가 대단했다. 전국 콩쿠르 대회까지 출전했다. 물론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우승은 한번도 못했지만, 그래도 지방에서 전국 대회에까지 나갔으니 사람들은 지수를 ‘플롯의 여왕’, ‘플롯계의 김연아’라고 극찬했다.
조장은 여러 번 지수와 단 둘이서 지수의 연주를 들었다. 첫 번째 연주는 조장이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서 풀밭에서 돗자리를 깔아놓고 들었다. 강변이 보이는 호젓한 곳에서 ‘아베마리아’를 들었다. 조장은 황홀했다. 그런 신비스러운 장면은 생전 처음이었다. 너무 감동이 되어서 눈물까지 흘렸다. 지수는 체격은 작았지만, 가슴이 풍만했다.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떴을 때 지수의 가슴이 클로즈업되었다. 눈이 부셨다.
한 시간을 그렇게 보낸 다음 두 사람은 차를 탔다. 해는 지고 어두워졌다. 조장은 숲 속으로 차를 세웠다. 음악을 틀었다. 지수의 옷을 벗겼다. 지수는 아무 저항이 없었다. 차 뒷좌석에서 지수를 소유했다. 플롯 연주 때문에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욕정을 콘트롤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지수에게 푹 빠졌다. 기존에 만나던 모든 여자들을 끊었다.
그런데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 승낙을 받아야 하는데, 지수는 머리가 좋지 않은 것이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는데, 공부를 아주 싫어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산수(算數)’와 ‘수학(數學)’을 구별하지 못했다.
롯데리아에 가서도 만원짜리를 내고 햄버거 셋트메뉴가 6,850원이면 잔돈 계산을 하지 못했다. 조장은 즉시 암산을 할 수 있었다. 3,150원인데, 지수는 꼭 4,250원으로 계산해서 아르바이트생이 1.100원을 적게 준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면 조장이 즉시 지수를 깨우쳐주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때마다 조장은 주변 사람들에게 창피했다. 전자계산기가 나왔으니 망정이지, 만일 옛날 주판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시장을 가거나 햄버거가게에 가더라도 주판을 두 개는 꼭 들고다녀야 할 것이었다.
지수는 1학년 말 음대 졸업반 선배를 만나 데이트를 했다. 성악을 전공하는 황생선은 지수를 무척 사랑했다. 생선과 지수는 거의 매일 만났다. 별로 하는 일이 없어도 매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생선은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지수는 생선을 만나 음악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두 사람은 깊은 관계에 들어갔으나, 이상하게 생선은 별로 성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체력도 약했고, 여성스러운 면이 많았다. 지수도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고 생선을 좋아했다. 생선이 대학을 졸업하고 일년 동안 놀고 있을 때도 지수는 계속해서 만났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일년 정도 사랑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생선은 지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수는 미칠 것 같았다. 여기 저기 백방으로 수소문해보았지만 생선의 근황을 알 수는 없었다. 생선은 원래 부산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다가 대학교에 들어와서 학교 앞에서 원룸을 얻어 혼자 생활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한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돈이 없어서 지수를 만날 때도 모든 데이트 비용을 지수가 냈다. 지수로서 가장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둘이서 모텔을 갈 때도 모텔 비용을 지수가 내야하는 것이었다. 생선은 가만있고, 체격이 아담한 여학생이 모텔비가 얼마냐고 묻고 현금으로 계산을 하니, 모텔 주인은 남자를 밝혀서 자기 돈을 써가면서 남자와 그 짓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모텔 주인에게. ‘지금 이 사람은 취업준비중에 있어서 그래요.’라고 설명하기도 그랬다.
생선은 빨리 모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프로트 주변을 예의 살펴보고 그곳에 있는 생수나 커피를 챙겨서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었다. 그래도 지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감수했다. 그러다가 생선은 갑자기 연락을 끊고 한 달 후에 미국에서 편지를 보냈다. 발신인도 황생선이 아니라, Mr. Fish Yellow로 영어로 쓰여있었고, 발신지 주소는 번지는 없고 Street까지만 적혀 있었다. 하늘 나라에서 온 편지 같았다.
“사랑하는 지수에게! 그동안 같이 지낸 시간, 너무 행복했어. 우리 사랑을 평생 잊지 않을 거야. 갑자기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어 따라왔어. 미안해. 사전에 연락을 하지 못한 거. 이해해 줘. 그리고 행복하게 잘 살아.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을 거야.”
지수는 울음도 나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그렇다고 자신이 생선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몸속에 들어박힌 그 놈의 정 때문에 괴로웠다. 그의 노랫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생선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칸초네로 알려진 오 솔레 미오(O Sole Mio)를 즐겨불렀다.
정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1년 동안 만나 모든 것을 공유했던 두 사람 사이에 남겨진 것은 정이었다. 지수는 그 정을 떼어내기 위해 1년을 고생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가슴도 많이 아팠다. 잊을 만하면, 또 ‘오 솔레 미오’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Che bella cosa 'na jurnata 'e sole, n'aria serena doppo na tempesta! Pe' ll'aria fresca pare già na festa...>
생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대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하던 호프집이 그럭저럭 되었다. 그래서 음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음대에 들어가려면 렛슨도 받아야 하고, 사교육비도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는 늘 불평을 했다. ‘여자도 아닌 남자 녀석이 음악을 해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 취직이 불가능할 텐데, 나중에 장가도 갈 수 없을 것 아니냐?’
더군다나 실용음악도 아니고, 클래식으로 성악을 하면 돈을 벌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방탄소년 같은 아이돌이 될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고 놀고 있다가 음대 간다고 하니까 한심하게 생각은 했지만, 하는 수 없이 보내주었다.
생선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기타를 들고 다니고, 드럼을 배웠다. 이 때문에 생선을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음대에 들어가서 성악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원래 커다란 소질이 없어서인지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4학년이 될 때까지 많은 여학생들과 연애를 했다.
그런데 4학년이 되면서 아버지가 다단계에 빠져 파산을 했다. 식당을 오래 해서 자리를 잡고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보험회사 직원이 끌고 들어가서 투자를 하게 되었다. 그 회사는 달러나 유로화 같은 외화를 쌀 때 사서 비쌀 때 파는 방법으로 단기차익을 낸다고 했다. 투자하면 한 달에 10%나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투자설명회에 참석했다. 사무실이 으리으리했다. 회장이 있고, 사장이 따로 있었다. 외환전문가라고 하는 외국인도 있었다. 회사 벽에는 영어로 많은 것을 써놓고 있었다. 마치 미국 뉴욕 맨해튼 오피스 빌딩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사무실 직원들도 전화하는 것을 들어보니 모두 영어로 쏼라쏼라 하고 있었다. 설명회 때 몇 사람이 나와서 자신들이 이 회사에 투자해서 단기간에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성공담을 알려주고 있었다.
투자에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외제 명품 옷에 샤넬 백을 들고 있었다. 타고 온 자동차도 최하가 BMW였다. 어떤 사람은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커다란 밴에 운전기사를 데리고 왔다. 그 밴에서는 연예인들이 옷도 갈아입고, 장거리를 갈 때는 누워서 자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 아주 진한 검정색 밴이었다.
그리고 투자자가 다른 투자자를 소개하면 그 사람의 투자금액의 10%를 영업수당으로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아버지는 흥분했다. 그까짓 호프집을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생활비밖에 나오지 않는다. 더 나이 먹기 전에 돈을 벌어야 노후에 고생을 하지 않는다. 생선을 비롯한 자녀들 결혼자금도 만들어야 한다. 최소한 결혼할 때 아파트 전세라도 얻어줘야 결혼할 수 있다.
아버지는 가지고 있는 돈 3천만원 현금을 몽땅 투자했다. 그랬더니 매달 말, 놀랍게도 3백만원의 수익금이 통장으로 꼬박꼬박 들어왔다. 아버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를 담보도 해서 2억원을 대출받아 추가로 투자했다. 자신의 형제 및 사촌, 육촌까지 투자를 하도록 했다. 그에 대한 10%의 소개비까지 받았다.
매달 들어오는 수익금 때문에 호프집 영업은 열심히 하지 않았다. 워낙 수익금이 커서 호프집에서 버는 돈을 껌값이었다. 돈도 흥청망청 썼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유럽 여행까지 다녀왔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났는데, 어느 날부터 들어와야 할 수익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놀라서 물어보았더니 사업이 약간 꼬였다는 것이었다.
몇 달을 끌더니 회사는 마침내 부도를 내고 사장부터 간부들 모두 사라져버렸다. 알고 보니 임직원 이름도 모두 가명이었다. 앙드레 김, 패티 김, 펄 시스터즈 등이 본명이 아닌 것처럼 이들은 연예인도 아닌데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채권단에 가입해서 열심히 쫓아다녔지만, 받아낼 돈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돈을 갚지 못해 아파트는 경매로 날라갔다. 호프집 보증금도 차압당했다. 아버지 형제 및 친척들도 아버지 때문에 모두 거지가 되었다면서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했다. 맨 처음 아버지를 끌고 들어간 보험회사 직원은 초반에 투자했다가 모두 다 빼낸 상태였다. 그 여전히 건재하면서 다른 새로운 다단계회사에 출근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