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1장 마지막 수업
북한 인민군들이 38도 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한 날이
1950년 6월 25일,
허수아비같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우리나라를 미국이 지키고 있으니 아무 걱정없다고 믿으며, 태평년월을 노래하며 오스트리아 부인
프란체스카와 꿈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6월 25일 그날은 주일입니다. 우리나라 청치인들과 군장성들은 비밀 요정에 모여 기생들을 끌어안고 밤을 즐기고 있을 때 북한 인민군들이 남한을 쳐 들어왔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 패한 일본은 미국에게 항복을 하고 그 덕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뜻밖의 해방이 됩니다.
일본 역사를 보면 일찌기 서구와 문물을 교환할 정도로 해운업이
발달 하였고, 남에게 지고 싶지 않은 성격이 유난히 강한 일본은, 유럽에 유학생들을 많이 보내어 서구의 발달한 과학을
모두 배워 오는데 성공합니다.
서구에서 발달한 철공업과 전기기술을 배워 그대로 일본에서도 재현을 하는데 성공하고, 서구에서 자동차를 만들자 일본에서도
만들어내고,서구에서 기차를 만들자 일본에서도 만들어 내고 서구에서 배와 비행기를 만들자 일본에서도 다 만들어 냅니다.
일본 과학자가 이런 예언을 합니다. "일본은 화산지대이기에 언젠가는 일본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자 일본 정부가 놀라 자기들이 살아날 길은 단 한 곳, 바로 이웃의 조선(대한민국)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고 기어코 조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마자 전국의 도시와 하천들을 정비하고 길을 닦고 철로를 놓고 전기 전화를 가설하고 , 각지역에 관공서를 짓는데 그냥 짓는게 아니라 아주 튼튼하고 크고 웅장하게 한국을 일본화하려는 작업을 이주 빠르게 진행합니다.
이럴즈음에 한국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외국이 한국에 오는 것을 차단하려고 쇄국정책을 써 왔기에, 나라가 발달 하기는 커녕 양반들 자녀들만 `하늘 천 따지`
중국한자나 익히고 있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양반들을 위하여 농사나 지어야 하고 장사나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일본은 무섭게 발전하는데 한국은 오히려 뒤로 쇠퇴하게 됩니다.
한편 쏘련 공산주의는 세계를 공산화 하기위해 유럽과 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이미 공산화 하였고, 한국도 38선 이북을 공산화 하는데 성공합니다.
북한 김일성은 남한을 점령하기 위해 쏘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남한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는데, 1945년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미군들이 대거 몰려와서 각지역마다 미군들이 들어차 있게 되는데,
이때 미국은 한국을 통일시켜줄 책임이 있으나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아무 힘도 없고, 인재도 없고, 가난하고 , 광물질도 없고, 앞날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아주 가난하기 짝이 없는 거지같은 나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통일이고 뭐고 관심없이 그냥 자기들의 평화로운 시간만을 보내게 됩니다.
너무 무책임한 처사였습니다.
그러니 미국이나 일본이나 남한은 북한이 쏘련의 사주를 받아
5년간 비밀리에 전쟁 준비를 해 오는데 감쪽같이 모르는 중에,
쏘련의 탱크며 비행기며 각종 전쟁무기들을 실어나릅니다.
미국의 어리석음 때문에 한국이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됩니다. 미국 CIA나, 일본 정부나, 한국 정부에서 어떻게 바로 코 앞 북한에서 전쟁준비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느냐 말입니다.
그날 이승만 라디오 방송을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 오늘 새벽 4시에 북한 군들이 38선을 넘어왔는데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용감한 국군들이 다 물리칠 것입네다" 라고 했지만 이틀만에 서울이 북한 인민군들에게 함락이 됩니다.
이승만은 수원으로 도망을 갑니다.
1950년 6월 27일 나는 충청북도 교동 국민학교 6학년이고 나이는 14살 입니다. 그날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을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 내일 부터 선생님이 다시 나오라고 할때까지 쉬어요" 그것이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제1편1장 끝 (계속해서 제1편 2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1월6일(주일) 형광등등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2장: '내가 병이 들었는데 모든 병원에서 오진을 하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자 아이들은 아직 전쟁이란 개념조차 몰라 쉰다는 말에 신이나서 밖으로 뛰쳐 나갑니다.
나는 넓은 교정을 나오는데 갑자기 몸이 이상해 지고 하늘이 하얀 것인지 까만 것인지 이상하게 보이며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데 그 자리에 들어눕고 싶어 집니다.
내가 교문을 나 서는데 바로 신작로 입니다. 내가 눈을 내리깔고 밑을 바라보며 길을 건너는데 트럭이 `찌익 !` 하면서 미끌어지듯 내 옷깃에 닿습니다.
나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을 하며 길을 건너는데 정말로 그 자리에 들어눕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집 우암동 까지는 2km인데 나는 사력을 다하여 집에 오지만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마루에 쓰러져 의식을 잃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큰 형이 (청주 농고 3학년)학교에서 돌아왔다가 나를 발견하고 놀라 영단(오늘날 농협의 전신)에서 일 하시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합니다.
어머니가 놀라 달려와서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나는 깨어 납니다. 나의 병명은 말라리아(학질)라고 오진을 합니다.
그 무렵 한국 에서는 위생관념이 매우 열악하여 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를 앓거나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곰보가 되는 자가 무척 많았습니다.
말라리아는 하루는 괜찮다가 다음날 다시 아프기에 일명 `하루걸이`라고도 합니다. 그때 말라리아의 즉효약이 있는데, 바로 `키니네` 입니다. 하도 유명하여 모르는자가 없습니다. 그 약을 한번만 먹으면 말라리아가 뚝 떨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먹어도 떨어지기는 커녕 병세가 더욱 악화됩니다. 청주시내의 모든 병원과 한방에 까지도 다 가 보지만, 전혀 낫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악화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는 몸이 답니다. 나의 몸이 불덩이 같이 뜨거워져 열이 40도 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나의 열이 42도 2부까지 올라가 나는 의식을 잃습니다. 그야말로 나의 생명은 마지막 꺼져가는 촛불이었습니다.
이때 누군지는 모르나 어머니에게 "성당 가는 길쪽에 `순천향 병원` 에 가 보세요 용합니다" 라고 했다고 후에 어머니가 말 해 주었습니다.
순천향 병원은 청주 중학교 앞의 성당가는 길쪽에 새로지은 큰 병원도 아니고,아주 작은 그냥 기와집으로 된 가정집에 `순천향 병원`이라는 작은 간판을 달았기에 누가 봐도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병원`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어머니와 나는 성당에 가기위해 그 집 앞을 수도 없이 지나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머니가 이것 자것 따질 일이 아닙니다. 나를 업고 그 순천향 병원으로 달려가니 여자의사가 피난가려고 짐을 싸고 있었다고 후에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의사는 의대를 나올때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신 분입니다. 지금 죽어가는 나를 보고 모른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나를 몇가지 검사를 해 보고는
"이는 말라리아가 아니고 `척추 뇌막염` " 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가 기어코 나를 죽음에서 살려 냅니다.
먼 훗날, 나는 그때 일이 생각이 나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순천향병원`이 있는데 내가 전화를 걸어 "그때 청주 북문로 3가에 있던 순천향 병원이 모체 였습니까?" 라고 물어보자 "아닌데요"라고 합니다.
제1편 2장 끝 (곧 이어 1편 3장이 계속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
'형광등등'
2019년1월7일(월)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3장 다음날 어머니는 나를 업고 피난길에 오르다.
어머니가 나를 업고 고3의 큰 형과 중3의 작은 형의 등에는 짐을 지우고 우리는 피난을 갑니다.
정부에서는 피난 가지 않으면 인민군들이 사람을 전차로 깔아 뭉갠다고 하여 모두 겁을 내어 피난을 갑니다.
비포장의 신작로에는 피난민들로 가득합니다. 어떤이는 우마차에 짐을 싣고 늙으신 부모님들을 태우고, 우마차가 없으면 리어커에 부모님과 병든자를 태우고 가고, 리어커도 없으면 늙거나 병든 어른들을 업고 가거나 지게에 지고 갑니다.
차라리 피난은 가지 말았어야 하고 피난 가려면 젊은이들이나 갔어야 하지만 사람들이 전쟁에 대처할줄도 모르니 우선 겁이나서 피하고 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어머니는 무거운 나를 업고 가는데 나는 이상하게 오른쪽 다리가 너무 아파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건들면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울음을 터뜨립니다.
첫날은 어머니가 40리를 가는데 (16km) 무거운 나를 업고 무 더운 날씨에 먼길을 가니 어머니도 이미 지쳐 버립니다.
다음날은 20리 (8km)를 가고 , 다음날에는 5리 (2km)를 갑니다. 가는 곳마다 건강하고 발 빠른 자들이 시골의 초가집들을 다 차지하여, 우리들은 마루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들판의 풀밭에서 잠을 자기도 합니다.
우리는 미원을 지나 보은까지 왔는데, 사람들은 더 빨리 남쪽을 가기위해 피발령 고개를 넘는데 이를 `질러`간다고 합니다.
피발령 고개는 처음에는 밋밋하다가 올라갈수록 점점 가파라지며 나중에는 한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는 능선에 이르는데, 밑을 내려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거의 절벽입니다.
우리가 그곳을 지나 산중 동네에 이르자 피난민들도
지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머뭅니다.
그런데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여기저기에 눈이 띄는데 그들은 말이 없고 뭣을 살피는 군인들 같아, 어떤 피난민들은 `국군으로 가장한 인민군들 같아 보인다` 라고 말 하기도 합니다.
형들도 힘이들어하고 어머니는 더욱 힘들어 합니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텐데 나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말을 잘 못합니다.
나는 죽음에서 살아났고 수술을 하자마자 피난을 가느라고 그런지 너무 몸이 아프고 정신이 오락가락 합니다. 나는 조금도 일어나 앉거나 걷지를 전혀 못합니다. 항상 누워 있어야 하고 어머니가 밥을 먹여 줍니다.
우리가 천신만고 끝에 충북 영동군 까지 왔는데 우리 앞에 금강이 흐릅니다. 그런데 금강에는 피난민들이 가득 모여 있고, 앞에 갔던 피난민들이 되돌아오면서
"군인들이 금강 다리를 끊어놨어요"라고 합니다.
서울에서도 인민군들이 쳐들어오자 우리국군들이 하는 짓꺼리가 `다리를 폭파`시키는 일입니다.
그들은 국민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적군이 강을 건느지 못하게 하느라고 다리를 끊어 놓지만 그들은 이미 전쟁 준비하기위해 다리가 끊어질 것을 다 예상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일도 다 준비를 해 놓고 쳐들어 오는데우리 국군들의 생각은 아주 짧고 피난민들을 생각하지도 못할만큼 어리석고 진정으로 전쟁을 할 줄 모릅니다.
힘없는 피난민들이야 죽건말건 그런것에는 아무런 보호조치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인근 농민들이 새끼줄을 가지고 와서 여러겹을 다시 꼬아 굵고 튼튼한 밧줄을 만듭니다.
그리고 강을 헤염쳐 건너가서 밧줄을 묶자, 장마로 불어난 물 위에 밧줄이 둥글게 휘어 집니다.
"자 한 사람씩 밧줄을 잡고 건너가세요"라고 말 하는데 어떤 남자가 먼저 밧줄을 잡고 건너자, 물이 금방 그의 목까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겁에 질려 버리며 맨 뒤로 쳐집니다.
제1편 3장 끝 (계속해서 제1편 4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8일(화)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4장 죽음의 渡江
그 많던 피난민들이 이제 모두 무사히 강을 잘 건너갔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업고 포대기로 단단히 묶고 "우리 죽어도 같이 죽자" 라고 하시며 금강물로 들어갑니다.
강물은 금방 어머니의 허리까지 오더니 금방 어깨까지 올라오고
어깨에서 다시 목까지 올라옵니다.
목에서 다시 어머니의 입술까지 올라오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더 올라오면 엄마가 숨을 쉬지 못할텐데 어쩌나 걱정을 합니다.
어머니가 고개를 뒤로 젖히는데 물은 더 이상 올라오지 않고
엄마의 입술과 코 사이에서 찰랑입니다.
어머니가 조심스럼고 천천히 강 한 가운데 까지 왔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발에 뭐가 걸렸는지 아니면 미끄러졌는지
엄마가 몸의 중심을 잃고 쓰려지려고 하자, 어머니는
안 쓰러지려고 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한참 엄마가 애를 쓰다가 간신히 몸이 중심을 잡고
한동안 서서 꼼짝을 못합니다. 이때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릅니다. 나 아니면 아머니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텐데 모두가 내 잘못이 아닌가?
나는 어머니에게 한마디의 위로이 말도 못합니다. 어머니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천친히 움직입니다.
그러자 강물이 어머니의 입술에서 목으로 목에서 어깨로 내려 오고 다시 허리로 내려오고 빠르게 엉덩이와 무릎까지 내려오는게 아닌가? 그러나 어머니는 그만 지치고 힘이 없는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한참이나 그대로 있습니다. 물이 어머니의 목에서 찰랑입니다.
어머니가 다시 일어나 밖으로 나옵니다. 우리 형들은 강을 잘 건넜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풀밭에 내려 놓으시고 길게 눕습니다. `엄마 미안해요 저 때문에 ....` 나의 마음은 부서집니다.
사람들은 모두 산길을 돌아 사라졌는데 우리만 남았습니다. 어머니가 다시 일어나 나를 업고 산길로 올라갑니다.
산길을 돌아가니 그곳에는 산골동내가 나오는데
피난민들이 그곳에 많이 머물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초가집 마루에 앉아 쉬시는데 너무 피로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다시 그 동내를 떠나고 어머니는 그 동내에서 하룻밤을 잡니다.
다음날 우리는 또 산을 넘고 내를 건느고 동내를 지나기를 반복 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가는데 멀리서 포성이 들려 오고
그 포성은 점점 가까워집니다.
어머니가 어느 마을에서 누가 잡아먹다가 남긴 돼지고기를 먹다가
그만 체해 버립니다.돼지고기에 체하면 약이 없다고들 하는데
어머니는 배가 아프다고 비명을 지릅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길을 가다가 더 이상 갈 수 없이 아프자,
어머니는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아이고 배여 아이고 배야"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때의 내 가슴은 갈갈이 찢겨지지만
내가 아무 일도 할수 없다는 것에 내가 차라리 죽고만 싶습니다.
어머니의 비명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던 한 나이드신 어른이,
어머니의 손가락을 바늘로 따 줍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좀 덜 아픈지 일어나 또 길을 갑니다. 그리고 어느 작은 동내에서 하룻밤을 잡니다.
나의 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계속 아프고,
앉아있지도 못하여 어머니가 쉴때는 나는 누워 있습니다.
14살이나 다 큰 소년을 연약한 어머니가 업고 청주에서
충북의 끝자락인 영동까지 왔으니 기운이 다 빠졌을 것입니다.
포성이 점점 가까이서 들려옵니다. 피난민들은 이미 다 어디론가 떠나고 늦은 피난민들만 여기저기에
보이는데, 아무도 없는 산골 동내와 산길에서 무서움을 느끼는지
늦은 피난민들끼리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다음날 정찰기가 우리들의 머리위로 지나면서 삐라를 뿌립니다. 형들이 삐라를 줏어와서 읽어보니
"피난민 여러분 ! 이 앞은 작전지역이니 더 가지 마시고
뒤로 돌아가시거나 그 자리에 머물러 주십시오"라는 내용입니다.
"뭐야? 그 자리에 머물라고" 피난민들은 한 사람도 그 말을 믿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갑니다.
다음부터는 우리 머리위로 날라가는 제트기들이 갑자기 엔진을 끄고
수직으로 우리에게 소리도 없이 돈두박질 치다가 "따다다다......." 기총소사를 하고는 수식으로 상승하며 귀를 째는 소리를 냅니다.
"저놈들이 미쳤나?" 사람들이 욕을 합니다.
그때부터 비행기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만 보면 바로 기총소사를 하여
비행기 소리만 나면 숲에 숨느라고 야단입니다.
우리가 어느동내에 이르자 초가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에 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겁이나서 나를 어느 초가집 방으로 들어가 그 집에 있는 이불로
나를 둘둘 말아주고 나갑니다. 그것은 포탄의 파편들이 이불을 뚫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잠시후 어머니가 다시 들어와 나를 데리고 뒷곁에 기다란 장대를
많이 세워 둔 곳에 들어가 나를 내려 놓고, 또 어디론가 갔다 오시더니
나를 다시 없고 밖으로 나갑니다. 어머니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우왕좌왕 하느라고 허둥댑니다.
어머니가 나를 들쳐 업고 밖으로 나와 원두맏 밑으로 들어갑니다. 내가 동내를 바라보니 이미 여러채가 불 타고 있고
포탄은 계속 여기 저기에 떨어집니다.
어디에서 포를 쏘고 왜 초가집에 떨어지는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이리 올라오세요"라고 산 언덕위에서 피난민들이
우리를 보고 소리칩니다.
어머니가 다시 나를 업고 형들과 함께 언덕으로 올라갔는데 거기에는
포탄이 덜어져 생긴 구덩이 속에 피난민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포탄이 떨어진 곳에는 다시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는대요" 라고 말 합니다. 우리는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엄마 원두막이 없어졌어" 내가 내려다 보니 방금 우리가 머물던 원두막에서는
원두막은 사라지고 한줄기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제1편 4장 끝 (계속해서 제1편 5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9일(수)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5장 事故:할머니가 게곡 밑으로 떨어졌어요
포성이 멎었습니다.
이 동네에는 모두 피난을 갔지만, 소를 한마리 키우는 남자는 소 때문에
그런지 피난을 가지 않고 소에게 풀을 뜯기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포탄이 소에 맞아 소가 즉사하고 소의 뒷다리 하나가 어느집 마당에 떨어졌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늦게 만난 우리 피난민들이 거의 50여명이 됩니다. 그중에는 리더다운 분이 한 분 계신데 그가 "어서 저녁을 해 먹고 오늘은 밤새도록 행군을 해야 합니다. 황간에 가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기차를 타야합니다." 라고 하는 바람에 우리 모두 저녁을 일찍 해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리더를 따라 행군을 시작하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기울어있는게 보입니다. 195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밤 눈이 밝습니다. 오염된 사회가 아니었기에 눈이 밝아 밤길이 어두워도 잘 갑니다.
우리는 산을 넘고 내를 건너고 동네를 지나기를 반복 하면서
어느 계곡을 지나는데 사람들은 앞 사람만 보고 부지런히 걷느라고
조용한 밤애 발자귝 소리만 들릴뿐입니다.
이때 앞에서 누가
"할머니가 게곡밑으로 굴러 떨어졌어요" 라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그것 뿐입니다. 그 후 모두 조용하게 앞사람만 바라보고 부지런히 밤길을 갈뿐입니다. 어머니는 거의 맨 뒤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따라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위험에 처해있으면 만사제쳐놓고
도와주어야 하는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50여명의 사람들은 못들은체 그것을 회피하며
자기만 살겠다고 부지런히 가고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어떻게 할머니가 계곡밑으로 떨어졌는데
모른체 하고 그냥 지나갈 수 있는가?
하느님이 보시기에 이는 천별을 받아 마땅한 일일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50여명은 곧 천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어느 큰 동네에 이르렀는데 학교도 보입니다. 사람들이 다 피난을 갔는지 동네가 깜깜하고 개 짖는 소리도 없습니다.
어느 누가 소리칩니다. "여기에서 좀 쉬었다 갑시다 !"
그러자 앞서가던 리더가 "여기는 영동군 용산리입니다. 여기에서 황간은 오리 (2km)밖에 안되니 거기에 가서 쉬고
이제 신작로로 갈 것입니다." 라고 하는 바람에 아무도 말 하지 못하고 계속 그를 따라갑니다.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사방을 다 볼 수 있습니다.용산리에서 500m쯤 되어 보이는 곳에 신작로가 희미하게 보이고
신작로 옆은 바로 산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 농로는 차도 지나다닐 수 있을만큼 넓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지나는 동안 나는 바로 옆의 논둑 길에서
검은 그림자 3명이 총을 들고 달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손들었!"
그들은 동네근처의 산에 진을 치고 있던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피난민들을 몸 수색을 하고 짐 보따리도 다 검사를 한 후
우리가 피난민임을 알고 이제 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농로를 지나 드디어 신작로로 올라갑니다. 그러자 또 한무리의 군인들이 "손들었!"하며 우리를 모두 조사를 합니다.
거기에는 미군장교로 보이는 미군이 통역관을 시켜 "이 앞은 작전지역이기에 더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다시 동내로 들어가 쉬었다가 내일 아침 9시에 이곳에 나오면
차를 태워 안전하게 피난시켜줄 것입니다." 라고 하자 우리 피난민들은 일제히 "와 !"하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러자 미군이 깜짝 놀라 "쉿 조용히 하세요, 인민군들이 가까이 와 있으니, 동네에 들어가서도
이야기 하지말고, 담배도 피우지 말고, 조용히 머물기 바랍니다." 라고 하여 우리는 피로에 지친 몸에 생기가 돌며 동내로 내려 옵니다.
우리는 리더의 지시에 따라 두 집에 머물게 됩니다.
제1편 5장 끝 (계속해서 제1편 6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10일(목)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6장 :풍전등화 (風前燈火)
그날이 1950년 7월 23일 입니다.
그당시에는 시계를 가진 사람은 우리 어머니와 리더뿐입니다. 누가 어머니에게 몇시냐고 묻자 "새벽 1시입니다." 라고 하는데 1950년 7월 24일 입니다.
운명의 날이 밝았지만 그날이 삶과 죽음의 길을 가르는
끔찍한 운명의 날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비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곳 용산리 동네는 낮에 우리국군들이
조사를 한 곳인데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밤중에 사람들 소리가 나고 밤배불빛이 보이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던 우리 국군들은 밤중에 이미 인민군들이
이 동네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1950년에는 군인들이 현대화된 군인들이 아니고 또한 지휘계통도 현대화된 지휘계통이 아닙니다. 어제 밤중에 우리를 검문한 군인들은 이 동네에 피난민들이
머물고 있음을 다른 부대에는 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나를 방에 눕히고 어머니는 덥다고 마루에 나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눕거나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날 밤의 날씨가 열대야 때문인지 무척 덥습니다.
멀리서 또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리고 때로는
기관총 소리가 `따다다다...` 들리고 다발총 소리가 `드르륵....`하며
들리는데, 어떤분이 "저 다발총은 인민군들이 가지고 있는 다발총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총소리가 유난히 큰 소리가 나는 총이 있는데
그 소리가 "딱콩 !"합니다.
"저 총소리는 인민군들이 가지고 다니는 총신이 긴 딱콩총 인데
총신이 길어 명중률이 높다"라고 말 하는데,
어떻게 인민군에 대하여 저렇게 잘 아는지 나도 궁금합니다.
나는 아프던 몸이 조금 회복되어 스스로 일어나 앉을 수가 있지만
아직 걸음은 걸을 수 없습니다.
나는 너무 더워 일어나 문지방에 턱을 괴고 밖을 내다보며
어른들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새벽인제 밤 안개가 자욱합니다.
다음날이 무척 더울 것이라는 것을 에고 하는 현상입니다.
총소리가 점점 가까운 곳에서 들려 옵니다. 이제 여명이 밝아오자 사람들이 안심하고 큰 소리로 말을 하고
왔다갔다 하며 담배를 피웁니다.
6.25 전사에는 이곳 용산리 전투가 격전지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날이 바로 7월 24일 오늘입니다.
그러나 그 전운을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는대 그것은 미군이
오늘 아침 9시에 나오면, 차를 태워 안전하게 피난시켜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훤하게 밝아오자 어떤 어른이 삽작문을 열고 밖을 나갔다가
금방 돌아오면서 "우리집이 군인들이 포위하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삽작문이라는 것은 가늘고 긴 나무가지로 엮어 사각형의 문을 만들어
열었다 닫았다 하는 전형적인 시골의 대문입니다.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마당이나 뜨락에 돌을 궤고 아침 밥을 합니다.
제1편 6장 끝 (계속해서 제1편 7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11일(금)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7장:살육전 (殺肉戰)
1950년 7월 24일 날이 밝았습니다. 아침에도 후덥지근한 것을 보면 오늘 낮이 무척 더울 것같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아침 밥을 지으려고 마당이나 뜨락에 돌을 괴고
나무를 때서 밥을 합니다.
어머니도 뜨락에 돌을 괴고 밥을 합니다. 사방에 둘러친 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사방에서 산발적인 총소리가 들립니다.
이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딱콩!" 하는 귀청을 찢는 총소리가 들려오는데, 동시에 그 딱콩 총알이 어머니가 밥을 하는 돌멩이를 치고나가
밥과 불과돌이 튀어나갑니다. 어머니가 혼비백산하여 방으로 뛰쳐 들어와 숨을 헐떡입니다.
모든 사람들도 다 두려워 합니다. 옆집에 머물던 리더가 와서
"우리가 9시 까지 기다릴께 아니라 8시에 나갑시다" 라고 하며 다시 돌아갑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밥을 먹는둥 마는둥 짐들을 챙기고
마당에 모두 모입니다. 어머니도 밥이고 뭐고 다 치우고 그냥 짐을 형들에게 지우고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마당에 섭니다.
이때의 내 기억으로는 맨 앞에 선 아이가 까만 교복과 까만
교모를 썼는데 그것은 청주고등학교 교복이고 모자 입니다.
"자 이제 나가자!" 라고 어른들이 말 하자, 그 고등학생이 삽작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탕!"하는 한방의 총소리와 함께 고등학생이 푹 고꾸라지는게 아닌가?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 삽작문을 닫습니다. 옆집에 있던 그 리더와 다른 또 한사람이 태극기를 들고와서
"여러분들 태극기를 들고 나갑시다 ,
태극기가 없으면 수건이라도 흔들고 나갑시다 !"라고 하는데 나는 어떻게 사람들이 피난갈때 태극기를 다 가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삽작문을 열고 우르르 몰려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이 비오듯 쏟아집니다.
이곳의 용산리 전투에서는 우리국군과 미군들이 모두 2만명이 집결해
있었고 뒤에는 인민군들이 4만명이 집결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렴 20000명의 군인들이 방아쇠 한 번 당길때마다
2만개의 총알이 우리 50명의 피난민들에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한방의 총 소리가 얼마나 큰지 잘들 아시지요? 그런 총소리가 2만개나 혹은 그 절반인 1만개나,그 10분의 1인
1000명이 총을 쏜다하여도 그 소리는 대포같은 소리입니다.
산에서 쏘는 총알은 땅에 박혀 흙이 튀어 오르는데
앞이 안보일만큼 먼지가 자욱합니다. 사람들이 힘없이 마구 쓰러지는데 어머니는 나를 업고
그 시체를 타 넘으며 앞으로 달립니다.
"엄마 엎드려 !"라고 내가 소리쳤는데
그 소리가 내 귀에는 들리지 않고 총소리에 묻혀 사라집니다.
총알이 내 눈앞을 휙 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것이 느껴지고 총알이 또 휙 하고 내 귀 옆을 지나가는 바람을 느낍니다.
어머니는 어제 미군이 약속한 그 신작로를 향하여 뛰고 있는데
거기만 가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제 어머니 앞을 가리던 사람들이 거의 다 죽고 어떤 나이드신 어른이
엉덩이에 충을 맞았는지 피에 젖어 있는데, 걸음이 기우뚱 기우뚱하고
걷다가 길 옆의 논에 쳐 박힙니다.
그가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봅니다. 이제 어머니 앞을 막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드디어 신작로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미군이나 국군이 없습니다. 차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산비탈입니다.
어머니가 신작로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에는 작은 밭이 있는데 콩이 심겨져 있고 옥수수도 띠엄띠엄
심겨져 있고,어머니가 콩밭을 지나 산 모퉁이를 지나는데 그 산모퉁이가 집중 사격으로 먼지를 일며 허물어 집니다.
어머니가 몇발자국 가다말고 나를 내려놓고 엎드립니다. 이때 어머니가 총을 맞았지만
나는 아직 어머니가 총을 맞은 줄을 모릅니다.
나도 어머니 따라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지금 우리가 지나온 500m의 길을 바라보는데
용산리에서는 전투를 하는지 계속 총소리가 콩볶듯 하고
하늘에서는 제트기 4대가 어느곳을 폭격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나는 앞을 바라봤습니다. 신작로가 앞으로 곧게 뻗어 있는데 옆은 바로 산이고
우리가 엎드려 있는 일직선 상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미군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150m거리입니다.
한 미군이 엎드려 우리에게 총을 쏘고 있고 다른 미군은 무릎에 팔을 괴고 총을 쏘고 있고,
또 다른 미군은 소나무 가지에 총을 얹고 우리에게 쏘고 있고,
또 다른 미군은 눈에 망원경을 대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1편 7장 끝 (계속해서 제1편 8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12일(토)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8장:어머니가 총에 맞았고 나도 맞았다. 내가 사방을 둘러보지만 어머니는 엎드린 채 가만히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산비탈은 앞으로 신작로와 함께 똑바로 뻗어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태양이 지글지글 끓는 듯 합니다. 바람은 한 점도 없습니다.
이때 나의 왼쪽 팔 어깨 부분을 뭐가 탁 치고 나가는데, 나는 개구리나 풀무치 일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풀무치라는 것은 가장 큰 메뚜기류를 말합니다.
그리고 곧 그쪽이 뜻끔하여 나도 모르고 오른손이 가서 만져 보는데 "물컹 !"한게 아닌가?
내가 바라보니 내가 총을 맞은 것입니다. 어깨 바로 밑의 살이 걸래같이 헤어져 있고 속의 하얀 뼈가 보이고 피가 마구 솟구치며 이미 땅에 피가 고이기 까지 합니다.
"으악 ! 엄마 나 총 맞았어 !엉엉" 내가 놀라 소리치며 어머니를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도 총에 맞은 것 같아 살펴보는데 어머니의 눈이 이상하게 변하였고 촛점이 없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자세히 살펴보자 어머니 뒷머리 한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났고 골수가 조금 흘러나오는게 보입니다. 어머니가 머리에 총을 맞은 것입니다. "엄마 엄마 엉엉" 나는 마구 소리내어 웁니다.
미군들이 가지고 있는 총은 후에 알았지만 M1이라고 하며 성능이 가장 좋고 총알이 몸에 들어가면 상처를 휘저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맞은 총은 미군들이 쏜 것이고 어머니가 맞은 것은 국군이 아니면
인민군이 쏜 소총이거나 카빈총입니다.
만일 어머니가 미군의 M1총을 맞았다면 머리의 상처가 크고 총알이 이마나 얼굴로 빠져 나갔을 것이지만, 어머니는 머리속에 총알이 박힌 것을 보면 꽤 먼곳에서 쏜 총입니다.
조금 전에 어머니가 나를 업고 산 모퉁이를 지나 갈 때 산이 허물어지는 것을 봤는데 그때 맞은 것입니다.
총을 가진자의 심리
1960년 우리나라의 4.19 혁명이 일어날 무렵 경찰이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총을 쐈을때 내무부장관이 한 말은
"총은 쏘라고 준것 !"이라고 말 하였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국가이며 사람의 생명과 권리를 존중해 주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군인이나 일반인이나
그들의 손에 총이 쥐어지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심리가 총을 갖게 되면 마비가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악마의 소유물이고 악마가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죄송하지만 여러분들의 손에 총이 쥐어지면
무엇인가 쏘고 싶을 것입니다. 새를 쏘던 짐승을 쏘던 어느 누가 있으면 한 번
맞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미군들은 지금 전쟁터에 와서 적을 죽이려 총을 쏘고 있는데 그들의 눈에는 내가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어디 내가 한 번 맞춰볼까? `
`나 하고는 아무런 관게없는 한국사람이 아닌가?` `조그만 어린이인데 한 번 맞춰볼까` 악마의 속삭임에 그는 방아쇠를 당깁니다.
`와 맞았다, 내가 맞췄다 !` 그 미군은 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미군 뿐만이 아니라 어머니가 나를 업고 산 모퉁이를 지나는데 집중사격을 하는 군인들의 심리가 똑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어머니가 병든어린 아이를 업고 가는 것을 봤을텐데 방아쇠를 당긴 것입니다. 한 사람이 아니고 수십수백명이 산 모퉁이가
허물어지게 집중 사격을 한 것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미군이 어머니를 쏘지 못한 것은 어머니가 바닥에 납작하게 누워 있기 때문이지만, 나는 상반신을 들어 동네와 미군들을 보고 있었기에 총에 맞을 가장 좋은 자세였던 것입니다.
나는 마구 울었습니다.. 이때 큰 형이 등에 짐을 지고 달려옵니다. "네 울음소리가 저 밑에까지 들려 달려왔다"라고 합니다. 형은 우리의 참담한 모습에 경악을 하며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형은 자기의 옷을 찢어 나의 팔을 싸매주지만
이미 피가 다 나온 상태입니다
제1편 8장 끝 (계속해서 제1편 9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13일(일)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9장:꺼져가는 나의 생명
아무 말이 없던 어머니가 갑자기 "무울 물 줘 !" 라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고
다른사람의 목소리처럼 거칩니다.
큰 형이 짐을 풀자 그 안에 있던 각종 그릇이나 냄비들이 구멍이 나고,
깨어지고 찌글어 들었습니다.
형이 구멍난 냄비를 한쪽으로 우굴어 뜨리고 신작로로 내려가고,
논에서 물을 떠 오는데 어머니에게 먹이고 나에게도 먹입니다. 물이 뜨겁습니다.
큰 형이 콩밭의 옥수수대를 하나 꺾어 나의 얼굴을 햇빝에서
가려 주지만 나에게는 있으나마나한 일입니다.
그날의 뜨거움은 지금의 내 기억으로 작년 여름
2018년 7,8월의 용광로 같았던 한국 여름과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또 "무울 물 줘!"라고
소리를 치자 형이 다시 물을 뜨러 갑니다.
형이 물을 떠 오자 내가 채뜨려 다 마셨습니다. 형이 다시 물을 뜨러 갑니다.
이번에는 나를 피해 어머니에게만 드립니다.
이때 미군 찦차 한대가 우리옆을 지나가다가 바로 우리 옆에 섰습니다. 두명의 미군이 내려 마을을 바라보며 차 밑에 숨을까말까 하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가려고 하는데 나의 큰 형이 "살려주세요, 우리는 피난민입니다!"라고
영어로 소리쳤는데 형은 영어를 아주 잘 합니다.
형은 청주에서도 해방후 청주에 주둔해 있는
미군들과 친하게 놀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미군이 입에 두 손을 대고 우리에게 총을 쏘던
150m의 거리에 소리칩니다.
그러자 그렇게 우리에게 총을 쏘던 미군들이 모두 일어나 허리를 굽히고
총을 겨누며 방아쇠를 당길듯한 자세로 아주 천천히 우리에게 오는데 그때 내 나이가 비록 14살의 어린이 이지만 그들의 동작을 보고 `참 어리석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총을 겨누고 천천히 다가오는 꼴이
만화를 보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적이었다면 지금 우리옆의 찦차를 탄 미군 두명을
그대로 두었겠는가?
그리고 아까부터 눈에 망원경을 대고 있던 미군은 아직도 눈에서 한번도
그 망원경을 뗀것을 본적이 없습니다.눈에 본드로 붙여놓은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한참 후에 우리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비친게 뭔가? 가녀린 죽어가는 엄마와 또 피를 다 흘려 죽어가는 어린 소년이 아닌가?
그제서야 정신이 펏득 든 미군들이 마구 소리지르며
이리뛰고 저리뛰고 난리입니다. 한 미군이 나를 번쩍 들어 소나무 그늘로 옮깁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옮기지 않습니다.어머니는 큰 형이 지키고 있습니다.
군의관으로 보이는 미군이 나의 팔에 묻은 흙을 물을 부어 씻어내고,
치료를 하는지 무엇을 바르고 아주 두툼한 붕대에 붙은 가제를 대고
감아줍니다.
그리고 그때의 장면을 나는 어른이 되었을때 자세히 생각해 보는데, 내가 피를 다 흘려 죽어가는 것을 보고 살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듯이 보이는데 내 피를 검사하고 나와 똑같은 0형의
피를 가진 미군을 찾아내어 나에게 수혈을 해 줍니다.
이때 나는 의식을 잃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내가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 미군 흑인 하나가 양쪽 팔에 발가벗은 갓난아기 두명을 안고 와서
내 옆에 뉘입니다. 두 아기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울고 있는데 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몸이 샛빨갛게 익었습니다.
목소리가 쇠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흑인미군이 우유 캔을 따고 아기에게 먹이는데
내 어린 생각에도 기가찹니다. 지금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물과 시원한 그늘인데
그 진한 우유를 먹이다니! 아기가 마구 토하자 그만 둡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잃습니다.
제1편 9장 끝 (계속해서 제1편 10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14일(월)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10장:내가 총을 맞은지 16시간이 지난 후 살아나다.
이들 미군들은 몇명밖에 되지 않은 소대들 입니다. 이들 중에 나에게 총을 쏜 군인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와서 내가 동맥 핏줄이 끊어져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의식없고 축 늘어진 나를 안고 찦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황간의 야전 병원으로 달려 갑니다.
신작로는 패여 울퉁불퉁하여 차가 마구 튀어 오릅니다. 그때 내가 잠깐 정신이 돌아왔는데
한 미군이 나를 안고 가는데 내가 깨어나자 운전사와 뭐라고 큰 소리로 말 하며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나는 봤습니다. 그가 나를 쏜 군인 같습니다.
그것도 잠깐 나는 다시 의식을 잃습니다. 내가 다시 의식이 돌아온 것은 깜깜한 밤중이었고 숲속의 천막을 친 야전 병원이었습니다.
그때 나의 눈에 비친 모습은 미군들 10여명이 손전등을 나에게 비추며 수술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미군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것도 잠깐 나는 다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어느 초가집 마당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피난민들이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고 나처럼 당가에 누워 있는데 아프다고 마구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나도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는데 마치 내 팔을 소금에 절이고 칼로 난도질을 하는 지독한 아픔 속에 나도 비명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후에 알았지만 거기에는 부상당한 피난민들이 9명이 있었고, 부상을 당하지 않은 피난민들이 7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두명의 나의 형들이 거기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던 작은 형이
그곳에 있다가 나에게 와서 댓뜸 "죽었어" 라고 내가 말 하자 작은 형은 초가집 벽에 머리를 얹고 엉엉 웁니다. 벽에는 람프불이 하나 켜져 있습니다. |
큰형에게서 다 이야기 들었을텐데 왜 나에게 묻는가?
나는 훗날 이날의 작은 형을 보고 고민을 합니다. 내가 부상을 당해 비명을 지르로 있는데 나를 위로 한마디 하지 않고 엄마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은 작은 형이 온전한 정신인가?
우리가 용산리에서 삽작문을 열고 모두 나갈때 총알이 비오듯 날라오자 작은 형은 논둑길 밑으로 엎드려 기면서 황간까지 왔다고
후에 말을 합니다.
위험이 다가오면 위기를 모면하려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작은 형이었던 것입니다. 부모 형제는 다 필요 없고 오직 자기만이 살아야 한다는 본능 입니다.
큰형이 나에게 와서 라고 위로합니다. "응"
"용산리에서 미군들이 오후 4시에 여기 황간으로 후퇴하는데, 나는 미군에게 우리 어머니도 데려다 달라고 하자 미군이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차에 태우고 여기로 왔단다." 라고 말 합니다.
"어머니 손목에서 시계를 빼 왔단다" "몇시야?" "새벽 1시다"
그러니까 1950년 7월 25일 새벽 1시라면 , 내가 총을 맞은 시간이 24일 오전 9시경입니다. 그러면 내가 총을 맞은지
16시간이 지난 것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아픈 통증을 느낀것은 내가 죽지 않고
살수 있다는 표시입니다.
미군들이 다시 우리 환자들을 GMC트럭에 싣습니다.
|
제1편 10장 끝 (계속해서 제1편 11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15일(화)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11장: 대구 도립병원
우리 환자들만 트럭에 태워 깜깜한 밤중에 어디론가 가는데 도로가 울퉁불퉁하여 차가 마구 튀어 오르자, 환자들이 당가에서 튕겨져 나가 이리저리 머리를 부딧치자 환자들이 바명을 지릅니다.
나도 당가에서 튕겨저나가 머리를 부딧쳐 몹시 아프고 팔이 더 아프고 나의 다리도 아픕니다.
우리가 비명을 지르자 미군 운전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차를 몹니다. 우리가 밤중에 도착한 곳은 김천 도립병원입니다.
김천시도 이미 다 피난을 갔는지 도시가 깜깜하고 조용한데 길에는 군인들만 바글 바글 합니다.
도립병원도 불빛 하나없이 깜깜합니다. 한참 있자 의사 한명과 간호사 한병이 와서 우리를 병실로 옮겨 줍니다. 간호사가 쌀밥에 고깃국을 끓여와서 나 보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팔이 아파 죽겠는데 간호사가 밥을 먹으라고 하니 나는 짜증을 부리자 간호사가 밥을 가지고 나갑니다.
나의이마와 머리에는 여러개의 혹이 나 있습니다.
곧 새벽이 오고 날이 새자 이번에는 한국 군인들이 우리들을 트럭에 태워 기차역으로 갑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대구역입니다. 대구역은 무척 큽니다. 그리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가득합니다.
우리가 트럭에 탄채 대구시내로 들어가는데 웬 사람들이 그리많은지 어디를 봐도 흰옷을 입은 사람들로 그야말로 바글바글 한데 전국의 피난민들이 모두 대구로 모인것 같습니다.
우리가 간 곳은 대구 도립병원입니다. 나는 소년이기에 어린이들만 있는 작은 병실로 올겨졌는데 그곳에는 나까지 4명의 어린이들이 아주 작고
낡은 나무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다른 3명의 아이들에게는 부모님들이 다 있는데 나는 혼자 입니다. 형들은 황간에 그냥 있을 것입니다. 미군들이 환자들만 태우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숨이 막힙니다. 병실에는 창문이 하나 있는데 창밖에는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은행알이 많이 열려 있는게 보입니다.
그런데 대구도립병원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와글와글 거리고 특히 대구사람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큽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나는 `우웩 우웩 `하며 구역질을 합니다.
그무렵 병원에는 의사가 부족하고 간호사가 부족하고 의약품이 부족하여 3일에 한 번씩 치료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 살이 썩는가 봅니다.
나는 소변과 대변이 마려워도 누가 돌봐줄 사람이 없고 밥이 배달되어도 누가 먹여줄 사람이 없자 , 한 아이의 엄마가 나에게 밥을 먹여주고 나의 대소변을 받아내 줍니다.
나는 너무 더워 숨이 막히고 옷은 땀에 젖어 냄새가 나도 그런 것은 나 분만이 아니고 모두 땀을 흘리고 냄새가 납니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들이 부채질을 해 주지만, 나에게는 누가 부채질을 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대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더운 곳이라고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어머니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에
혹시 어머니가 살아서 나를 찾아 올지 모른 다는 환상에 젖어 있는데, 나는 또 그런 환상이 사실이라고까지
생각하며 하루종일 문만 바라봅니다.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타날거산 같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기다리는데 어머니가 나타날리가 없습니다. 나는 실망하여 창밖의 은행알을 셉니다
세다가 잃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세고 또 다시 세지만 한번도 다 세어 보지를 못합니다.
제1편 11장 끝 (계속해서 제1편 12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16일(수)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12장: 1950년 8월 초에 대구시내에 포탄 4발이 떨어지다.
내가 대구도립병원으로 온지 3일 후에
큰형과 작은 형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야 세근아 ! 네가 여기에 있은줄 미리 알았다면 우리가 너를 찾으러 다니느라고 대구시의 모든 병원을 다 돌아다니느라고 지치지 않았을 것이다 반갑구나 좀 어떠니?"
"응 괜찮아 !" 나는 너무 반가워 눈물이 났고 형들도 반가워 눈물이 글썽입니다. 이제 형들이 왔으니 나는 어머니에 대한 환상도 버렸습니다.
"형 저 아줌마가 나 밥 멕여 주었고 오줌 똥도 받아내 주었어" 그러자 큰 형이 그 부인에게 허리굽혀 감사하다고 하자 기뻐하십니다. 형이 종이를 접어 부채질을 해 줍니다.
의사가 나를 치료해 주는데 내 팔에서 냄새가 난다고 하며 , 다시 가더니 무슨 특별한 약을 가지고 와서 발라줍니다. 그리고 3일애 한번이 아니고 매일 와서 치료를 해 줍니다.
그리고 나의 아픈 오른 다리가 오그라 든다고 깁스를 해 주는데, 엉덩이쪽에서 발가락 까지 붕대를 하얀 시멘트에 적셔 다리게 감습니다. 여러번을 감는데 다 끝나고 나자, 다리가 엄청 무거워 내 힘으로 다리를 옮길 수가 없어 형이 옮겨 줍니다.
대구가 사과 산지라고 나는 학교에서 배웠는데 그래서 그런지 어느날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사과 배급을 해줍니다. 사과는 큰데 너무 시고 호박을 삶은 것 같이 허벅허벅해서 맛이 없습니다.
어느날은 한 사람당 옥수수 찐것을 하나씩 나누어 주는데 나는 너무 맛있어서 옥수수 대까지 다 먹어버렸습니다.
작은 형은 밖에 나가 미군들의 차에 매달려 가서, 차를 청소를 해 주고 돈을 벌어옵니다.
1950년 8월 초 나는 새벽에 일찍 잠을 깼습니다. 나의 형들은 병원 옥상에 올라가 잠을 잡니다. 그곳이 시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대구 시내에 밤 11시면 통행금지가 실시됩니다. 그렇게 하루종일 와글와글 거리던 대구시내가
밤만되면 아주 조용합니다.
새백 4시 ! 이때 나는 하늘을 가르는 듯한 금속성 소리를 들었습니다. "뾰오오오오.................." 그것은 포탄이 높게 날라가는 소리입니다.
나는 어머니와 형들과 피난 가는 중에 충청북도 영동군을 지날때 여러번을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나는 시간을 재 봅니다. "꽝 !"
잠시후에 또 포탄이 날라가는 소리가 났고, 어디에선가 터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잠시후에 또 하나의 포탄이 날라가서 터졌습니다. 4번째의 포탄 소리는 뾰오가 아니고 "슈슈슈슈슈,,,,,,,,,,,,,,,,,,,,,,,," 그 소리는 포탄이 낮게 떠가는 소리입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 "꽝 !" 매우 가까운 곳에 떨어져 지축이 흔들립니다. 형들이 놀라 뛰쳐내려 왔습니다.
"세근아, 대구 시내에 포탄 4발이 떨어졌다" "형, 나도 다 들었어"
조용하던 대구가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것 처럼 왕왕거리고 점점 시끄러워 지며 차들이 빵빵 거립니다.
이 포탄은 낙동강에 진을 진 인민군들이 이미 전국을 다 점령하였고, 대구와 부산지역만 남았는데, 이제 대구와 부산지역을 점령하려고 장애가 되는 피난민들을 흐트러 놓기위한 `심리전`이라고 합니다.
부산애 가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대구에 소개명령이 내려 집니다.
도립병원에서도 아침을 일찍 먹게하고 한국 군인들이 트럭으로 환자들을 대구역으로 옮기는데 , 참으로 고마운 것은 김천이나 대구나 군인들이 어린이들을 먼저 기차역을 옮길만큼 특별히 배려 하는 것을 보며,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깨닫고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를 실은 트럭이 꼼작도 못합니다. 길에는 피난민들이 가득하여 차가 전혀 움직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몽둥이를 들고와서 사정없이 내려치자 길이 간신히 열렸고 우리는 무사히 대구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우리를 기차로 안전하게 옮겨 주었습니다. 환자들이 많아 기차는 조그만 도시마다 정차하여 몇명씩 환자들을 분산 시키는데 우리가 내린 곳은 경남 밀양입니다.
1950년의 밀양은 한적한 시골입니다. 기차역에도 작은 대합실 하나가 전부입니다. 이곳에 환자들을 11명을 내려 났는데
모두 어른들이고 나만 어린이 입니다.
시내는 저 멀리보이고 어느 제방에는 소나무인지 전나무인지 나무기 길게 늘어서 있는게 보일뿐 뭐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한참 있자니까 한국 군인이 트럭을 몰고 와서 우리를 싣고 가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밀양 국민학교 입니다.
그리고 학교 정문에는 이런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밀양 제7 육군 병원
제1편 12장 끝 (계속해서 제1편 13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17일(목)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13장:생지옥의 현장
군인환자들은 늘 불안해 하는데, 사랑하는 가족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자기들도 살아서 돌아 갈 수 있는지 걱정입니다.
낮에는 그런대로 옆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창밖을 내가 보기도 하지만,
밤만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낮에는 아픔을 참을 수 있지만 밤만되면 이상할 정도로 상처가
더 아픕니다. 한 환자가 "아이고" 라고 하거나 "으음...."하고 신음을 하면,
그 신음소리가 옆으로 전염이 되고 나중에는 교실 전제가 떠나 갑니다.
"아이고 아이고" "악 ....으악" "간호원 간호원 !" 간호원을 소리쳐 부릅니다.
그러면 멀리서 "또박 또박" 하는 간호원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가 교실 문 앞에서 멈추면 일제히 교실이 조용해 집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 푸른 제복에 흰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는
갭을 쓴 간호사가 나타나는데 모두 그녀가 천사로 보입니다.
군인들이 여자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이때 입니다. 간호사는 환자 하나하나를 어루 만지며 어디가 아픈가 기록을 하고 나에게 옵니다.
"많이 아프지?" "아녜요"라고 나는 말을 하지만 낮에 의사와 간호사가 치료하기 위해 문 앞에 나타나면
나는 미리 울음을 터 뜨립니다.
그갓은 간호사가 내 팔의 붕대를 푸는데 성처가 커서 가제와 붕대가
팔에 달라붙고 피고름이 굳어버리면 마치 시멘트처럼 단단해 져
붕대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간호사는 인정사정 볼 것없이 붕대와 가제를 확확 잡아떼는데
그러면 그 아픔이 얼마나 지독한지 나는 마구 비명을 지르는데,
가제와 붕대에 나의 생살점까지 묻어납니다.
그때 내 손에 무엇이라도 쥐어져 있었다면 악마로 보이는
간호사를 마구 폭행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간호사가 천사로 보입니다.
천사가 다시 돌아갔다가 약을 가지고 와서 아픈환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주사도 놔주고 나에게로 와서 미군이 준
과자를 잔뜩 주고 갑니다.
간호사들은 항상 눈이 충혈되어 있고 얼굴이 부석부석하고
피로예 쌓인것을 봅니다.
지금 2019년에 간호사가 살아 있다면 아마 85새나 86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늘 그들에게 고마운 생각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면 군인들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잠을 잡니다.
교실 북쪽의 창문은 아무리 더워도 닫아두는데 그것은 창문 밖의
저 멀리 학교 창고에서 미군들이 낙동강에서 전사한 미군의 시체를
차에 실어오는데, 너무 썩어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고, 온 몸에는
구더기가 하얗다고 그곳을 다녀온 나의 형들이 이야기 해 줍니다.
그러면 미군은 썩은 시체를 물로 깨끗이 씻어내며 목에 걸려 있는
목거리의 군인의 이름과 군번을 적고 알콜로 또 한 번 씻고
관에 담아 어디론가 보내진다고 합니다.
그런대 미군들은 장갑도 끼지 않고, 마스크도 하지 않고 , 맨 손으로 그 일을 한다고 하며 내 형이 놀라워 합니다.
그쪽에서 바람에 실려오는 송장 냄새 때문에
그쪽의 창문을 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14살의 소년이지만 미국인들의 자기 동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가를 알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1편 13장 끝 (계속해서 제1편 14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18일(금)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14장:육군병원에서 일반인 수용소로 옮겨지다.
어느날 군인들이 일반인들을 추려내어 일반 민간인 수용소로 보내는데 내가 간 곳은 정부 미곡 창고 입니다. 벽이나 천정이 모두 양철집인데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춤습니다.
그리고 비라도 오면 몹시 시끄러워 귀가 먹먹해 집니다. 우리가 들어간 창고에는 일반인 환자가 20명쯤 되고 그들의 보호자들도 그만큼 됩니다.
그곳 어느 남자 환자가 있는데 등치도 크고 잘 생긴 40대의 남자인데, 그는 기관총에 7방을 맞았다고 자랑을 하면서 그 상처를 보여 주는데, 대부분이 팔 다리와 머리를 스쳐 지나가 찰과상의 흔적이 보입니다.
그중에 가장 큰 상처는 옆구리를 뚫고 반대편 엽구리로 그 큰 기관총 탄알이 빠져 나갔는데 창자가 질기고 미끄러워 총알이 뚫지 못하고 미끄러져 나갔다고 하여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창자가 그렇게 질기고 미끄럽다니 !`
그는 매일 산책을 합니다. 어느날 산책에서 일찍 돌아와 자리에 눕는데 몹시 피로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그 건강하던 몸이 굳어버려 일어나지를 못하고 입도 벌리지 못하여 말도 못하고 밥도 먹을 수가 없게 되었고 몇초 간격으로 경련이 오면서 이마와 관자놀이와 목의 핏줄이 불거져 나오며 땀을 흘리고 오만상을 찡그리는대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 입니다.
그리고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서 나가는게 아닌가? 그러자 또 이번에는 다른 두명의 남자가 그와 똑같은 증새를 보이다가 그들도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갑니다.
의사가 와서 창고 안을 크레솔로 소독을 하며 "이것은 `파상풍 전염병` 입니다."
"큰 상처만 쫓아다니는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라고 하며 매일 아침 저녁으로 창고를 소독하라고 약을 주고 갑니다.
나는 왼쪽 팔의 상처가 거의 한뺨이나 되게 커서 겁이 납니다.
우리 창고에는 또 26세의 남자 환자가 있는게 그는 아주 심한 간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는 시시 때때로 아무데서나 갑자가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서 흰거품을 내 뿜으며 발버둥 치다가 축 늘어집니다. 그리고 15분 정도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뿌시시 일어나 먼지를 툭툭 털고 가는데, 수시로 그런일이 벌어져 무섭기도 하지만 그가 불쌍해 보입니다.
그도 어느날 죽어 나갔습니다. 창고 뒤에는 천막이 수도 없이 많이 쳐져있고 일반인들이 수용되고 있는데 거기에서 밥을 하면 우리들은 그곳에서 밥을 타 와서 먹습니다.
우리창고 앞은 신작로 인데, 부산항구에서 하역한 탱크들이 우리 창고 앞을 밤낮으로 지나가는데 그 소리가 너무 크고 지축이 흔들려 우리들은 귀가 멍멍하고 말 소리도 안들리고 온 몸이 덜덜 떨리기까지 합니다.
이때 세계 유엔군들이 한국에 집결하여 우리 창고 앞을 지나 중부전선으로 가고, 바다에서는 아무도 몰래 남해 바다와 서해 바다를 지나 인천으로 집결하는데 우리는 나중에서 그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이 바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룩작전 인것입니다.
1950년 9월 초에 드디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고 전해져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가 만세를 부릅니다.
그리고 9월 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되었다고 하여 난리입니다. 그러자 피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나의 팔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해 늘 피고름이 흘러 내립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8월 초에 다리에 깁스한 것을 아직도 떼어내지 못해 여간 힘든게 아닙니다.
제1편 14장 끝 (계속해서 제1편 15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20일(일)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15장 나의 첫번째 영적체험
1950년 11월 초에 의사가 톱과 가위를 가지고 와서 지난 8월에 대구 도립병원에서 나의 오른쪽 엉덩이에서 부터 발끝까지 깁스를 한 것을 떼어내느라고 애를 먹습니다.
한참 걸려 깁스를 떼어내는데 깁스안에는 그동안 이가 몇대를 걸쳐 번식을 하며 내 살을 뜯어먹고 피를 빨아먹느라고 살이 통통하게 쪄서 마치 보리쌀 톨만하게 큰데 바글 바글 거립니다.
형이 문앞으로 들고가 불에 태우자 이가 타는 냄새가 창고안으로 들어옵니다.
내가 그동안 다리가 가렵고 근지러웠지만 손을 넣을 수 없어 거의 4개월을 그런속에 지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오른쪽 다리가 살이 하나도 없고 막대기 같은 뼈만 남아 있는데 나는 `저기에 살이 붙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일어나지도 못합니다.그리고 다리의 피부도 무슨 거친 나무 껍질 처럼 아니면 거친 시멘트벽처럼 허물이 벗겨지고 까칠까칠한데 감촉이 매끄러운게 어니라 거칩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 , 나는 밤중에 잠을 깨었습니다. 그 넓은 창고에는 전구가 하나 켜저있지만 너무 흐려 글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 입니다.
모두 잠들어 있는데 나는 불현듯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허리를 천천히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내가 드디어 똑바로 서게 되었는데 몇개월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나를 업고 피난가던 6월 29일부터 11월까지 처음일 것입니다.
나는 똑바로 서긴 하였지만 왼쪽 다리의 힘만 믿고 서 있고 오른쪽에는 아직 힘을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걸음을 걷기 위해서 오른쪽 아픈 다리에도 힘을 주어야 하기에 양쪽 다리에 똑같은 힘을 주려고 똑바로 섰는데 , 그 순간 오른쪽 다리에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와서 "으악 !" 비명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느 보이지 않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힘센 어떤 분이 나를 잡아 다시 똑바로 일으켜 주었는데, 그때 그 강렬한 느낌은 69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것은 나의 첫번째의 영적체험이었습니다.
이런 영적체험이 곧 있을 귀향길에서 또 한번 일어납니다.
제1편 15장 끝 (계속해서 제1편 16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21일(월)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16장:귀 향
유엔군들이 평양을 탈환하고 앞록강을 행하여 진군하는데 이제 한국은 통일이 될 것은 틀림없어 보여 우리나라 국민들이 모두 환호합니다.
11월 중순에 우리 3형제도 수용소를 퇴원하여 나는 큰 형의 등에 업혀 밀양 기차역으로 갑니다. 해가 기울어지자 부산에서 기차가 오는데 천정과 벽이 없는 그냥 화물칸 뿐인데 이미 피난민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도 사람들 틈을 비집고 기차에 올려탑니다. 기차는 금방 떠납니다. "삐익......칙칙폭폭 칙칙폭폭......" 굴뚝에서 시꺼먼 연기가 많이 나오고 연기속에 빨간 불똥도 떨어집니다.
날이 금방 어두어 집니다. 나는 아까부터 걱정이 하나 있는데 소변이 마려운데 날씨가 너무 추워 손이 얼어 바지의 단추를 풀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두명의 형이 있는데 내가 도와달라고 하면 다 잘 들어줄 형이지만 나는 이상할 정도로 바보 같아서 남에게 나의 의사를 전달 하지못합니다.
3살때부터 아픔속에서만 지내왔고 삼촌집에서 오랫동안 구박을 받으며 살아와서 그런지 항상 주눅이 들고 모든 것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일어나는데 승객들은 모두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잠들어 있습니다. 내가 간신히 기차의 가장자리까지 나왔습니다. 기차는 바람을 가르고 쏜살같이 달리며 덜컹 거리는데, 만일 내가 몸의 중심을 잃으면 나는 바람에 날려 밖으로 내 동댕이쳐져 죽을 것입니다.
나는 바지 가랭이로 소변을 누우려고 했는데 단추가 이미 풀려 있는게 아닌가?
이때 나는 보이지 않는 어느 힘센분이 나를 꼭 안전하게 안아주고 내가 소변을 누울 수 있도록 아주 편하게 잡아준 것을 느끼며 소변을 시원하게 봤습니다.
며칠 전에 창고에서 체험했던 그 영적체험을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체험한 것입니다. 나는 형에게로 와서 나도 담요를 쓰고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새벽에 조치원에서 내렸습니다. 조치원은 전에 한 번 와 본적이 있었는데 공장들이 무척 많았고 굴뚝도 많았는데 지금은 공장과 굴뚝 들이 다 망가져 있습니다.
같은 말과, 같은 풍습을 가진 한 동포인데,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어찌 이렇게 파괴와 살인밖에 모르는가? 이해가 안됩니다.
조치원에서 청주 까지가 50리 (20km)입니다.
우리는 청주로 들어가는 신작로로 들어 섰습니다. 그곳의 가로수에는 다음과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충북도민의 귀향을 환영합니다. 들어와서 식사하고 가십시오.
옆에는 지붕이 반듯한 기와집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마루 밑에는 구두와 고무신들이 가득하고, 방에서는 식사하며 즐겁게 이야기 하는 소리가 밖애 까지 들려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배가 너무 고픈데 이제 밥을 먹게 되었으니 힘이 납니다. 우리가 식당 마당으로 들어가서 살펴 봅니다.
이때 부엌에서 풍채가 좋고 깨끗한 한복을 입은 나이든 아주머니가 나오시고 거지같은 우리 삼형제를 위 아래로 훑어 보시더니,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서 국 그릇에 배추국을 한그릇 가져와서
"밥이 다 떨어졌으니 이거라도 먹고 가거라 !"고 하십니다.
우리는 돌아가며 배추국을 한 모금씩 마셨는데 배추 건더기가 한개뿐입니다.
제1편 16장 끝 (계속해서 제1편 17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22일(화)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17장:1.4. 겨울 피난
우리 삼형제가 마구 울자,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보고 "엄마는 어디계시냐?"라고 하기에, "엄마가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요"라고 하자
동네사람들이 모두 슬퍼합니다.
"참 좋으신 분이었는데 총에 맞아 돌아가시다니 이럴수가 흑흑" 그 부인이 눈물을 흘리시고 몇몇 부인들이 다 웁니다.
어느 부인이 밥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먹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 배가 고파서 마구 입안에 밥을 쑤셔넣었습니다.
또 어느 부인은 쌀을 조금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방이 얼마나 추운지 발이 시릴정도 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 땔감을 찾아다닙니다. 우리는 길가에 떨어진 조그만 나무 쪼가리라도 줏어오고 나는 논둑이나 밭 가장자리에 가서 마른 풀과 풀대를 뜯어 옵니다.
1950년 12월은 무척 추웠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땔감을 얻느라고 노력하지만
나무가 없습니다. 모든 가정이 다 나무를 때기 때문에 우암산에 올라가
작은 나무와 검불까지 다 긁어 옵니다.
어느분이 요와 이불을 가져다 주어 다행히 우리들은
서로 부등켜 안고 몸을 따뜻이 하고 잠을 잡니다.
맥아더 장군이 압록강 까지 쳐 올라갔으나 중공군들이 인해전술로
계속 쳐 내려오기에 더구나 혹한의 추위속에 견디지 못한
유엔군들이 후퇴를 합니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이렇게 중국이 한 순간에 망쳐 버립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때 이런말을 하였습니다.
"중국의 군수공장과 몇군데만 폭격하면 전쟁은 끝날 것이다!" 그러자 미국 트루만 대통령이 3차세계전쟁이 일어날지 몰라
겁을 내면서 즉시 그 훌륭한 장군 맥아더를 해임시켜 버립니다.
결국 미국 때문에 오늘날 까지 남한이 힘들게 살게 되었는데 , 미국은 거기에 대하여 한마디 말도 없고,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도 미국을 비난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미국의 무책임으로 6.25전쟁이 일어난 사실조차 모두 숨기려 하다니 !
"형 !" 내가 큰 형을 부르자 "왜?"
"어머니가 다니던 회사에 어머니 소식을 알려야 되잖아?" "아 그렇구나 !"
큰 형이 어머니가 다니던 영단에 가서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전하자,
회사에서 모두 슬퍼하며 얼마간의 돈을 주었습니다.
그 돈이 결국 우리가 곧 일어날 `겨울피난` 때에 굶어죽지 않도록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까지 준비되어 있을 줄이야 !
1월 4일인 정부에서는 `일사후퇴` 겨울 피난명령을 내립니다. 전 국민들이 여름피난을 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기에,
이젠 죽어도 피나나가지 않겠다고 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뭐라고 한 줄 아는가? "피난 가지 않으면 적에게 동조한 것으로 간주한다 !" 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천인이 공노할 말이 어디에 있는가? 그 엄돌설한에 왜 피난을 가라고 명령을 하는가? 그것은 죽음으로 내 모는 것인데, 가다가 죽는것 보다
집에서 죽는게 더 낫지 않는가?
그러자 또 신작로에는 겨울 피난 가느라고 농촌사람들이 꾸역꾸역
지나가는데 병드신 어른들을 업고 가거나, 지게에 지고 가기도 하고,
리어카에 싣고 가기도 하는데 밤에는 어디에서 자며
밥은 어떻게 해 먹는가?
이승만이 단 하루만이라도 겨울 피난을 가 봤다면 오히려 피난가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피난민들은 여기저기의 시골 초가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뜨락에 돌을 궤고 밥을 해 먹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계속 가면서 늙으신 부모님들이 얼어죽고
병든 부모님들도 다 죽습니다.
우리 삼형제들은 돈이 생겼지만 , 우리가 입을 옷을 살 곳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여름에 입던 홋바지를 입고 그냥 피난을 가는데,
나는 신발도 없어서 검정고무신을 신고 갑니다.
양말도 없어 헝겁을 찢어 발을 싸매고 가지만,
몇발작 가지못해 헐거워져 빠집니다. 검정고무신은 차갑고 낮아, 눈 속에 푹푹 빠지면
손 발이 꽁꽁 얼어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는 피난민들로 가득한 신작로를 가는데 내 생각으로 50m나 100m마다 길가에는 망가진 탱크와 각종 차량들과
각종 무기들이 즐비하고, 길가의 밑으로는 포탄의 껍데기와
망가진 총들이 가득합니다. 지난 여름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총알이나 수류탄과 포탄들을 그것을 잘못 다루다가
터지는 바람에 죽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 아무데나 버려두고 갑니다.
제1편 17장 끝 (계속해서 제1편 18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24일(목)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18장:어머니가 돌아가신 용산리까지 오다
우리는 지난 여름에 어머니와 넘었던 보은의 피발령 고개를 넘는데 눈이 많이 쌓여 있고 올라갈수록 높아져 미끄어워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칼날 같은 능선에 이르니, 앞서간 사람들이 눈을 밟아 놓아 유리알 처럼
반들반들 합니다.
큰 형이 칡덩굴을 끊어 작은 형과 나의 신발을 점매 줍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능선을 지나가는데 저 밑을 바라보니
까마득하여 너무 무섭고 어지러워 그만 미끌어 집니다.
그러나 이때도 보이지 않는 힘센분이 나를 잡아 일으켜 주고
그곳을 무사히 지나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충북 영동군의 금강 까지 왔는데 피난민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에 이끌리듯이 계속 남쪽을 행해 가는데
어머니가 나를 업고 건너던 금강이 꽁꽁 얼어버려 우리는 그 얼음위로
금강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그해 겨울이 추웠는데 우리는 잘 곳이 없어 마루나 부엌에서 잘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그것이 없으면 헛간이 볏짚단 속에서 잠을 자기 일쑤인데,
나는 볏짚단속에서 눕지 못하고 선체 잠을 잡니다.
아침에 밖에 나오면 어제 꽁꽁 얼었던 손과 발이 그냥 있습니다.
내가 30번 이상은 얼어죽었어야 마땅하지만 나는 동상한번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하느님깨서 특별히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천신만고 끝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용산리 까지 왔는데,
사방에 눈이 가득 쌓여 온 천지가 하얗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곳 용산리 사람들이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논이고 밭이고 들이고 산이고 온통 시체더미라서, 동네 사람들이
삽으로 흙을 퍼서 덮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무덤위에 눈이 쌓이니
사방천지가 볼록볼록한 무덤이 가득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산비탈에는 그런 무덤이 3개 입니다.
우리는 동네로 내려와 방을 하나 얻었는데 피난민들이 우리밖에 없어
방을 얻기가 쉬웠습니다.
우리는 동네 어른들을 찾아가서 "내일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야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라고 큰 형이 말 하자 동네 어른들이 그렇게 해 주겠다고 말 합니다.
제1편 18장 끝 (계속해서 제1편 19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25일(금)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19장:어머니의 시신을 찾아
1951년 2월 10일경 "세근아" "응 형"
"너는 다리도 아프고 날도 추운데 집에 있거라" 큰 형과 작은 형은 동네 어른들 3사람과 가마니2개와 곡괭이와 삽과
몇가지 연장을 가지고 어머니의 시신을 찾으러 갑니다.
나는 혼자 방에 누워 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대 오후가 늦어져도 형들이 오지 않습니다.
나는 생각하기를 , 날이 너무 춥고 눈이 많이 쌓였는데 어떻게 꽁꽁 언 땅을
파서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사람들이 고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시신이 다 썩었을텐데 형들이 얼마나 놀랄까 하는 생각이
들며 어머니를 생각하니 너무 불쌍하여 눈물이 납니다.
피난 가지 않아도 될 것을, 어떻게 나를 업고 여기까지 왔는가? 나는 내가 너무 원방스럽고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어머니가 너무 불쌍합니다. 결국 여기까지 죽으러 온 것이 아닌가?
날이 저물고 어둑어둑해 질 무렵 밖에서 형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먼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물을 데워 씻자"라는 큰 형의 목소리가 들리고
작은 형과 큰 형이 아궁이에 불을 때어 물을 데운후 손과 발을 씻고
얼굴을 씻고 방으로 들어옵니다.
"방이 춥구나, 좀 기다리면 따뜻해 질꺼다"라고 큰 형이 말 합니다. 그런데 큰 형과 작은 형의 얼굴 모습들이 다른 때와 달라 보이는데
무엇에 잔뜩 놀란 표정입니다.
"너 어머니가 무슨 옷 입었는지 기억나니?" 라고 큰 형이 나에게 묻습니다.
"그럼, 흰저고리에 푸른색 치마를 입고 하얀 앞치마를 둘렀어" "그렇지? 그런데 산비탈에는 3개의 무덤이 있는데 어머니가 없더라" "어? 어디로 갔지?"
"그래서 밑의 논으로 내려와 여러개의 시신을 파다가
드디어 어마니 옷을 발견했단다 , 시신은 다 썩어서 형체를 전혀 알아 볼 수가 없단다 "엉엉...." 나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른들이 어머니의 뼈를 하나하나 떼어서 우리에게 주면
우리는 가마니에 담았단다"
"가마니 2개에 어머니의 뼈를 다 담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산비탈로 올라가 양지바른 곳에 곡괭이로 꽁공 언 땅을 파고
가매장을 하였는데, 나중에 다시 장호원의 아버지 산소에 모실 생각이다" 라고 큰 형이 말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떻게 논으로 내려가셨지?"라고 내가 말하자 "아마 군인들이 그리로 옮긴 것 같다고 동네 사람들이 말하더라"
그날 밤 형들은 자다가 벌떡 벌떡 일어나 앉아,
허공을 쳐다보다가 다시 잠들곤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주인이 들어와서 "방금 라디오 방송을 들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의 모든 피난민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으니, 너희들도 집으로 돌아가거라" 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시 충복 영동에서 청주로 수백리길을 돌아오는데 올때 보다
더 힘이 든것은 날씨가 더 춥고 눈이 더 많이 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어머니의 시신을 찾으라고
우리를 영동까지 인도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1편 19장 끝 (계속해서 제1편 20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26일(토)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제1편 20장:두달 동안 밤 9시 까지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1951년 3월에 청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또 땔감을 구하려 사방을 헤매야 했습니다.
누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집을 하나 짓다가 그만 둔 빈집이 있는데 사람들이 몰래 들어가 벽에 붙인 나무들을 훔쳐 가는데 나도 밤에 몰래 들어가 나무를 훔쳐 옵니다.
이승만이 미안한지 동회에서 쌀 배급을 줍니다, 수입한 알람미쌀입니다.
나는 학교에서 통지가 왔는데 전에 배우다 말은 6학년 교재를 두달 동안 밤 9시까지 공부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야만 졸업장을 주겠다고 하여 나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천천히 2km의 학교에 갑니다.
전에는 그렇게 먼 곳 까지 갈 수 없었는데 하느님께서 다리를 좀 더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그 엄동설한의 겨울 피난에서 방에서 잠을 자 본적이 거의 없었고, 마루나 부엌이나 헛간에서 자기가 일쑤인데, 강물이 꽁꽁 얼 정도의 추위라면 거의 영하 20도가 됩니다.
내가 어떻게 동상 한 번 걸리지 않고 살아있는지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여름 홋바지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지냈는데 내가 30번 이상은 얼어죽었어야 하는데,말도 안됩니다.
큰 형도 고등학교를 좋업하였으나 돈이 없어 대학도 가지 못합니다. 작은 형도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고등학교도 다니지 못합니다. 큰 형과 작은 형이 전에 없었던 충돌이 자주 일어나 싸우기 시작하고, 종래는 작은 형이 집을 나가버립니다.
어머니의 시신을 발굴하고 마치 정신병자들이 된것 처럼 신경이 날카로워 집니다.큰형도 점점 몸이 쇠약해 지고 자리에 눕게 됩니다.
내가 좀 더 똑똑하고 남에게 말을 잘 하면 남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숙맥입니다.아무 것도 못하고 남에게 나의 의사를 전달하지도 못합니다. 큰형의 병세가 점점 깊어 가는데도 나는 어쩌지 못하고 학교에 가는데 나는 공부하면서 신경이 온통 집의 형에게 가 있습니다.
내가 밤 10시쯤 집에 와보면 방이 깜깜합니다. 내가 들어가 전등을 켜고 보면 ,큰형은 힘 없는 목소리로 "너 왔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아침에 해 놓은 밥을 형의 마리맡에 놓고 갔는데 밥이 그냥 있습니다. 굶어 죽을 작정인가? 그리고 방이 너무 춥습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방에 불을 때고 밥을 끓입니다. 내가 밥을 들고 들어가면 형이 몇숫깔 떠 먹고 수저를 내려 놓습니다.
그렇게 거의 두달이 다되어 갑니다. 어느날 선생님이 "숙제를 하나 주겠다"라고 하시면서
"국어책에 있는 3.1절 독립선언문을 내일 모레까지 외워 올것 알았나?" "예" 아이들이 잘도 대답을 하는데 그 어렵고 한자투성이인 독립선언문을 어떻게 이틀만에 다 외울 수 있는가?
공부가 끝나면 깜깜한 밤중에 기차정거장에 몰래 들어가서 신주머니에 석탄을 훔쳐 옵니다. 그러다가 들켜 빼앗기고 야단을 맞기도 합니다.
나는 국어책의 독립선언문을 외울 시간도 없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밥을 하고 불을 때고 하루종일 학교에서 밤까지 공부하는데 나에게는 너무 힘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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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20장 끝 (계속해서 제2편 1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2019년1월28일(월)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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