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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은 위해위와 함께 북양 해군의 근거지였다.
여의주를 움켜쥔 용의 앞발처럼 발해만을 껴안은
요동 반도와 산동 반도.
발 사이의 발해 해협을 여순과 위해위가 마주 보며 지키고 있었다.
이들이 지키는 용머리는 베이징과 톈진.
천연의 양항良港 여순은 지세가 험해
지키기는 쉬운 반면에 공격은 어렵다.
항구 내 수심은 평탄하고 얼지도 않았다.
대본영의 구상은 육군이 여순을 점령해 해안포대를 침묵시키면
연합함대는 해협을 봉쇄해 북양함대를 발해만에 가두는 것.
즉 포위고립 작전이었다.
그러나 평양전투 패배로 그 작전은 무산되었다.
해안포대의 지원을 받는 북양함대 본거지를
해군 단독으로 제압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본영은 휴전을 제의해왔다.
말이 휴전이지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평양전투로 인해,
아니 어쩌면 나라는 변수 때문에 역사는 달라졌다.
원래 역사에서 승전국 일본은 요동반도, 대만, 펑후 제도를 차지했었다.
청나라는 전쟁 배상금 2억냥을 물고
여순은 2차대전 끝까지 내내 일본이 지배했었다.
청나라와 조선의 역사 또한 달라졌다.
이홍장은 시모노세끼 조약의 치욕을 면했고
청나라는 승전국이 되었다.
평양의 일본군 포로들은 전쟁 배상금이 지불될 때까지
인질로 억류되었다.
또한 조선에서는 금년 11월의 우금치 전투,
동학군 2만이 일본군에 몰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나지 않아
동학은 막강한 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주재 영사 당소의에게 톈진으로부터 훈령이 왔다.
『일본군 포로 송환에 대비하라.
시기는 미정이나 금년 중 실시도 가능.』
영사관의 연락을 받은 섭지초와 좌보귀는 끄덕였다.
“겨울도 다가와 걱정했었는데 다행이군.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역사가 비틀린 사실을 확인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다행이다.”
“뭐가요? 애써 가꾼 말, 왜놈한테 갖다 바친 거요?”
보스를 돌려준 일로 잔뜩 심통이 난 돌쇠는
요즘 말끝마다 불퉁거린다.
“어이구, 이 가련한 중생아, 중생아,
음덕을 쌓다보면 언젠가는 복을 받는 법.
다 훗날을 위한 투자란다.”
“뭐, 말을 안고 우는 걸 보니 찡 하긴 합디다만..,
그나저나 청나라에는 언제 간대요?”
그건 나 역시 궁금한 대목이었다.
휴전 협상을 한다지만 바쁠 것 없는 정치가들이니
세월아, 네월아 질질 끌 것이다.
그 동안 청군은 하릴없이 평양이나 지킬 것이고...
자고로 군대란 한가하면 사고 치기 마련,
잘못하면 그 뒤치다꺼리나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럴 땐 딴 짓거리 못하게
일거리나 왕창 안겨주는 게 상책이리라.
이제 10월도 막바지,
슬슬 겨울준비를 시작할 때였다.
평양성의 청군은 15천,
수용소의 일본군 포로 역시 비슷한 규모,
자그마치 3만 명의 겨울나기 준비는 예사 일이 아니었다.
평양의 혹독한 겨울을 천막 막사에서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문제는 땔감 준비였다.
사방이 두루 평탄하다 해서 평양.
그건 땔감 구할 산림이 적다는 말이기도 했다.
갑자기 늘어난 3만 명분 땔감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잘못하면 전사자보다 동사자가 더 많아질 판이었다.
미래 지식은 모름지기 이럴 때 써먹는 게 마땅하리라.
조선의 석탄개발은 1896년 니시첸스키가
경성과 경원지방 석탄채굴권을 획득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실제 개발은 1903년 내장경 이용익이
평양 사동탄광을 개발한 것이 최초.
사동은 평양성에서 불과 10리 거리에 있는 노지 탄맥이었다.
나는 좌보귀 장군을 찾아 나섰다.
“흠, 듣고 보니 과연 문제로군,”
난방문제에 대한 설명을 들은 장군은
내 말에 수긍했다.
“일본군 포로를 써서 이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그래서 포로 사역을 허락받고 싶습니다.”
난방 이야기를 꺼내자 오오시마 소장은 반색했다.
안 그래도 그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노라고...
일본과 달리 매서운 북국의 추위를 그도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 겪어본 둥베이의 겨울이 떠올랐는지
새삼 몸서리친다.
석탄 이야기를 꺼내자 들어본 적 있다며
끄덕였다.
“홋카이도에선 그걸 장작 대신 쓴다고 들은 적 있네.
헌데 본 적은 없어 잘 모르겠어.”
“구체적인 건 소관이 압니다.
난로, 연통 등 연소 장비는 내구재지만
땔감인 석탄과 황토는 계속 조달해야 합니다.
캐고 나르는데 일손이 많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장군님의 지원을 얻고 싶습니다.”
오오시마는 손사래를 쳤다.
“지원이라니, 무슨...!
내 일인데 당연히 내가 해야지.”
흔쾌히 수락한 오오시마 소장에게 나는 당근을 내밀었다.
산악지대가 많은 북도 지방에는 온천도 많았다.
평양 인근에도 여럿 있고...
나는 채탄지 근처의 온천 후보지 한 곳을 점 찍어두고 있었다.
“작업 나가는 병사들에게는 보상도 있습니다.
온천욕을 준비하겠습니다.”
“온천..?” 눈이 반짝인다.
청결이 몸에 배인 일본인들에게
제대로 씻기 힘든 수용소 생활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온천욕이라면 거부하기 힘든 유혹일 수밖에 없었다.
동원한 병력을 온천 개발과 채탄 작업에 나누어 투입했다.
온천 사역에 나선 병사들은
김이 자욱하게 서린 노천탕을 보더니
대뜸 기성을 내지르며 뜨거운 물로 풍덩 풍덩 뛰어들었다.
찌든 옷에 훈도시까지 미친 듯이 빨아 널더니
삶은 문어처럼 벌게져 작업하러 나선다.
온천 개발은 하수 물길을 내는 것과 주변 정리가 전부라
불과 일 주일 만에 뚝딱 끝났다.
개장하는 날,
장교단 온천 회식을 가졌는데 다들 좋아했다.
온천욕을 마치더니 황홀한 표정이 되어
저마다 작업 감독을 하겠노라며 다투어 나섰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인력 조달은 걱정 끝.
온천욕으로 원기를 회복한 병사들은
수용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마차와 손수레로 석탄을 가뿐히 날랐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수용소에 석탄 언덕 세 개가 불끈 솟아올랐다.
그동안 나와 돌쇠는 황토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감영 공방의 기와 장인들은 황토 연통과 화로를
가마에서 구워냈다.
두자 반 높이에 두자 너비의 장독형 몸통 밑에
이은 연통으로 연기를 보내는 구조.
황토와 섞은 석탄 반죽 한 무더기를 밑불 위에 올리고
부지깽이로 숨구멍을 한두 개 뚫어주자 잠시 후 불이 옮겨 붙었다.
이윽고 벌겋게 타오르자
미심쩍게 지켜보던 오오시마 소장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걸로 겨울걱정은 끝이군.
이거, 신상에게 신세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호칭이 어느새 꿍君에서 상으로 격상되어 있었다.
8인용 막사마다 설치하는데 필요한 난로는 줄잡아 2천개.
게다가 연통과 부삽, 황토 반죽통도 필요했다.
채탄이야 포로를 동원한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난로와 연통 제작비만큼은 누군가로부터 받아내야 했다.
나는 당연히 청군이 부담할 것으로 믿었다.
장군 막사에 설치한 난로를 본 섭지초는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어떻게 이런 신통한 궁리를 다 해냈나?
역시 자넬 데려오기 잘했어.”
마치 자신이 발탁한 양 과장된 태도로 내 어깨를 두드린다.
설레발치는 낌새가 어쩐지 수상했다.
아무래도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수작 같았다.
‘설마... ! 말 한 마디로 퉁치고 날로 먹으려고?’
청군 장령들의 얍삽함을 아직 겪어보지 못했던 나는
순진하게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입을 싹 씻었다.
‘오호, 그렇게 나오시겠다...!‘
섭지초는 모르는 게 있었다.
승진에 목매는 그의 부하들과 나는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
또한 내가 이 시대의 관습을 벗어난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
관급물자가 될 뻔 했던 석탄난로가
사기업私企業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둥베이 출신의 작림이나 좌 장군은 달랐다.
“이거야, 대단한 발명을 해냈군 그래.”
난로 뚜껑을 열어보고는 벌겋게 타는 석탄에 감탄하더니,
“종일 이렇게 타는 건가?”
“예, 반나절은 가니까 서너 번 보충하면 종일 탑니다.”
“솥만 얹으면 물도 끓일 수 있겠구먼.“
“그렇습니다. 밤이나 고구마 구워먹기에 딱 입니다.”
“고기도 굽고...”
장단을 맞추던 작림이 문득 말했다.
“이걸 시전市廛에 내다 팔면 대박나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작림이었다.
“이건 조선에서만 팔릴 물건이 아냐.
둥베이에선 캉炕의 연료로 나무랑 가축 똥을 써.
그나마 넉넉하지도 않고...
하지만 석탄이라면 센양이나 푸순 일대에 지천으로 널렸어.
쓰는 방법을 모를 뿐이지.”
좌보귀를 보며 말했다.
“장군님, 이건 예사 물건이 아닙니다.
큰 사업이 될 수 있습니다.”
봉천 군벌의 창업자다운 안목이었다.
훗날, 둥베이의 탄광사업은 작림의 사업기반이 된다.
작림의 봉천 군벌이 여타 군벌과는 달리 민폐가 적었던 것은
둥베이의 풍부한 탄광을 기반으로 한 석탄사업 덕분이었다.
난로 공사는 장교 막사 시범설치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청군이 난로 값을 주지 않아서였다.
섭지초는 몽땅 조선에 떠넘기려 했지만
민 감사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안 감영은 그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고 여유도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외국끼리의 전쟁이다. 포로는 전쟁의 부산물이고.
그걸 왜 이쪽에 얘기하느냐?.”
“우리는 번국의 요청에 응해 출병한 입장이다.”
“그럼 요청하신 분과 얘기하라. 본관에게는 본 건을 처리할 권한도 예산도 없다.”
그 동안 쌓인 게 많던 민 감사는 작심하고 맞섰다.
정 이렇게 나오면 천진의 이홍장에게 보고 하겠다 으름장도 놓았다.
점령군 행세를 하는 섭지초 일당이 저질러 온 비리 증거들도
차곡차곡 모아놓았다.
한번 숙이기 시작하면 저들의 횡포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질 것임을
아는 민 감사는 초장부터 기를 꺾어놓기로 결심한 터였다.
‘일단 전쟁은 끝났으니 뼈다귀 놓고 싸울 차례다 이거지.
좋다. 해보자. 어차피 개판인데!’
이를 악 물었다.
자기 말 한 마디면 설설 길 줄 알았던 평안감사의 당돌함에
섭지초는 분개했다. 즉각 한성에 공문을 보내 천군에 대한
감사의 무례를 꾸짖고 파면을 요구했다.
또한 번국의 협조가 미흡하니 철병하겠노라 위협했다.
그러나 조정의 실세는 친청파인 대원군이 아니라 민비 일파였고
민병석은 민비와 재종 남매간이었다.
승정원에 접수된 섭지초의 공문은 즉각 민비의 손에 들어갔다.
일의 발단이 착복한 비용을 조선에 덤터기 씌우려는
청군의 수작임을 안 민비는 파르르 떨며 분개했다.
병사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석탄을 보며 수군댔다.
“꼭 난로가 있어야 저걸 쓸 수 있나?”
“장작 때는 거랑 뭐가 다른데?”
석탄 사용법을 익힌 장교숙소 당번병이
석탄으로 모닥불을 지펴보였다.
매연은 나왔지만 그 정도야 사실 무얼 태워도 나오기 마련.
여하튼 편리했다.
무엇보다도 땔감이 무진장. 종일 피워도 될 만큼 넉넉했다.
화력도 좋아 여럿이 쬘 수 있다.
모닥불로 시작된 석탄의 용도는 삽시간에 늘어나
야외용 질화로가 등장하고 조리용 화덕에도 사용되었다.
난방이 부실하기는 청군 막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작림과 함께 쓰는 막사에 석탄난로를 설치했다.
구경하러 온 봉군 병사들은
둥베이 식 난방시설인 캉炕을 들먹였다.
온돌 침상 캉은 온돌의 변형이고
조선은 온돌의 나라.
온돌 놓을 줄 모르는 일꾼이 오히려 드물다.
캉을 막사에 설치해보니 그럴 듯 했다.
석탄난로까지 함께 설치하니 겨울추위 걱정은 멀리 사라졌다.
나는 오오시마 소장과 장교단에게 캉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다다미방에서 유담뽀湯湯婆를 안고 떨던 그들에게
온돌은 실로 별천지였다.
게다가 장작대신 석탄을 때니 금상첨화.
이윽고 수용소에 캉 설치 붐이 일었다.
자재인 황토와 땔감이 쌓여있고
남아도는 게 노동력이니 공사는 어렵지 않았다.
빠르게 진행되어 해를 넘기기 전에
모든 막사가 캉을 갖추었다.
자구노력으로 겨울준비를 마친 것이다.
이른바 궁즉통 窮卽通이었다.
조선 조정은 섭지초의 항의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결국 청군과 민비 일파의 기 싸움은
수용소 난방문제가 자체 해결되면서 흐지부지 끝났다.
청군과 평안감영이라는 고래 사이의 새우신세였던 나는
이번 사태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탄광을 공공사업으로만 여긴 나는 석탄을 상품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민 감사의 생각은 달랐다.
“물건을 쓰려면 그 값을 내야 한다.
병영과 수용소에서 쓰는 석탄 값을 광주 신경석에게 지불하라.”
이치가 반듯한 얘기였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온 내가 이 당연한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몸이 바뀌면서 맹꽁이가 되었나?
수용소 난로설치비를 꿀꺽하려다 체면만 구긴 섭지초는 석
탄 값 청구서까지 받자 합죽이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자로 심기일전한 나는 돌쇠를 내세워 석탄난로 가게를 열었다.
견본 난로와 캉을 설치해 석탄사용법을 보여주며 주문을 받았다.
상호도 지었다. 『조선 난로공방』
공치던 겨울철에 일거리가 생겨 신이 난 기와 장인들은
난로설치 인력도 지원했다.
석탄난로가 본격적으로 상품화된 것이다.
공방의 주 수입원은 난로가 아니라 석탄이었다.
난로야 한번 팔면 끝이지만 땔감은 계속 쓰기 마련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채탄 작업을 하는 포로들의 노임을 고민할 때였다.
그 고민을 오오시마 소장은 한 마디로 정리해주었다.
“요리 솜씨와 온천욕으로 퉁 치면 되지 않을까?”
듣고 보니 나는 제법 자산가였다.
탄광에 온천 그리고 대 이랑을 비롯한 주변의 도움.
나는 새삼 반성했다.
석탄과 온천을 쉽게 얻은 나는 그 가치에 무심했고 돈과 결부시키는 개념도 희박했었다.
일인들의 근면함과 응용 능력은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난로공방』이 자리를 잡아가자
나는 수용소에 석탄 연구부를 만들어 후원했다.
이들은 석탄 활용법을 개발해 불가마를 제작했고 조리용 화덕에 질화로도 만들었다.
독한 냄새와 매연때문에 질화로는 야외용이었는데
장작보다 편리했고 밤새 피울 수 있어 좋았다.
석탄과 황토를 섞은 조개탄도 개발했고
연통과 화로뚜껑도 연구했다.
또한 가정집에서 석탄을 쓰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장작보다 싸고 화력도 좋았지만 문제는 독한 냄새와 연기.
사동 탄광에서 나오는 석탄은 역청탄만이 아니었다. 무연탄도 있다.
매연 없는 무연탄에 주목한 연구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윽고 구멍이 숭숭 뚫린 구공탄을 개발했다.
센다이 공업 전문학교 출신인 가지, 시게루, 고바야시 세 병사였다.
구공탄의 미래를 아는 나는
세 발명가의 외박을 주선해 온천욕과 요리를 즐기며 함께 하루를 보냈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언젠가 둥베이에 석탄사업을 일으켜보자고 다짐했다.
포로수용소와 청군 병영은 캉을 설치하고 석탄을 비축하는 등
겨울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병사들은 싸돌아다닐 여유가 사라졌고
평양거리는 모처럼만에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았다.
수용소나 청군 지휘부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감사 민병석의 감회는 남달랐다.
평양성 전투 몇 달 전부터 주둔하기 시작한 청군은 끊임없이 말썽을 피웠었다.
무전취식에 고성방가는 예사였고
부녀자 희롱에 민간인 폭행, 심지어는 금품까지 갈취하는 작태를 벌여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감영은 청군 장령들 접대에 허리가 휠 지경이었고
무리한 요구에 불평하는 아전들을 잡아다 태형을 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일들이 싹 사라진 것이다.
실로 반가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내막을 알아보니 겨울나기 준비에 바빠서였다.
장령들도 처음 만든 포로수용소를 관리하고 겨울나기 지원에 바빠
다른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했다.
바빠진 이유는 전에 없던 난방기구, 석탄난로와 캉 때문이었고
배경에는 새로운 연료, 석탄이 있었다.
평양거리가 평온해진 것은 결국 석탄 덕분이었다.
탄광개발은 신경석의 공.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누리는 평화로움이 누군가의 덕분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실로 군자로다.“
신 감사는 감복했다.
그는 경석의 상사이니 당연히 아는 사이다.
하지만 공을 세우고도 이를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인품임은 알지 못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
평양은 승전군의 위세를 업은 청군들 등쌀에
지금쯤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명의란 병자를 잘 치료하는 자다.
그러나 진정한 명의는 병을 예방한다 했다.
그는 평양성에 닥칠 재앙을 예방한 명의였다.
어떤 식으로든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던 민 감사는
청군 지휘부로 공문을 보냈다.
“물건을 쓰려면 그 값을 내야 한다.
병영과 수용소에서 쓰는 석탄 값을 광주 신경석에게 지불하라.”
또한 평양성 전투에 기여한 공으로 청군에 발탁된 경위와
탄광을 개발해 평양성의 외국군 3만 병력이 겨울나기 준비를
무사히 마치게 한 신경석의 공을 아뢰는 장계를 올렸다.
그리고는 일체 티를 내지 않았다.
공을 드러내지 않은 군자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예를 갖추는 민 감사였다.
나는 난방 문제와 탄광 개발에 몰입해
세월 가는 줄 모를 만큼 바쁘게 지냈다.
하지만 그걸 돈과 관련 지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자칫하면 포로들이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 때문에 열심히 뛰었을 뿐.
석탄을 찾기 위해 미래지식까지 동원했지만
어떤 사심도 없었기에
좌 장군이나 오오시마 소장에게 떳떳한 태도로 인력지원을 청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선 민 감사가 탄광을 내 재산이라고 선언해버렸다.
그 시대를 살다 온 나보다도 더 자본주의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제야 이 시대의 광업권 제도를 알아보았다. 별
다른 게 없었다.
조정이나 지방관청에서 몇 자 적고 관인을 쾅 찍으면 그게 바로 권리증이고 등기문서였다.
내가 아는 역사와는 다르겠지만 여하튼 산업화 시대는 열릴 터.
석탄은 산업시대의 쌀이니 탄광사업은 규모가 점점 커질 것이다.
석탄 난로나 구멍탄도 큰 사업이 될 것이고..
휴전협상이 마무리되면 평양 주둔군의 거취도 정해질 것이다.
아직 두어 달 정도는 여유가 있겠지만 언제 이동할지 모른다.
군령이 떨어지면 불문곡직 따라야 하니 이 사업은 누군가에게 맡겨야 했다.
나는 이 시대에 와서 인연이 생긴 사람들을 꼽아보았다.
장작림, 부친, 돌쇠, 좌보귀,대 이랑, 당소의, 오오시마,
그리고 석탄 연구소 연구원 3명,
하지만 이거다 싶은 사람이 없다. 그
럴 바에야 차라리 가족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
병영에 박혀 지내던 나는 오랜만에 본가를 찾아 나섰다.
본가의 아궁이는 이미 구공탄용으로 싹 바뀌어 있었다.
석탄 난로와 야외용 질화로도 들여놓고 석탄 저장용 광도 지어놓았다.
부친은 같은 성내에 있으면서도 자주 오지 않은 아들이 섭섭한 눈치였다.
그러나 그 동안 벌린 일들의 자초지종을 들으며 감탄했다.
“자주 못올 만도 했었구나.”
비로소 서운한 기색을 거둔다.
그러나 탄광과 온천 권리문서를 내놓자 다시 서운한 얼굴이 된다.
영영 타국으로 떠난다는 실감이 나서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