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클한 삶의 이야기가 스며있는 자리,
환희대(歡喜臺)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수덕사 오르는길,
느끼지 못한다면 쉽게 지나칠 길이다.
알지 못한다면 둘러보지 않을 곳이다.
알고나면 찾을 것이며,
느낄수 있다면 환희대의 밝음을 이해할 것이다.
환희대는 그러한 아련한 빛이 있는 이유다.
환희대 원통보전
수덕사의 여승, 그것은 대중가요속의 가사가 아닌, 실존 인물에 대한 애증의 시(詩)다.
신학문을 섭렵한 문인이요 선각자다. 또한 만공선사의 법맥을 잇는 선승이다. 수덕사 견성암에서 수행중이던 일엽스님이 말년에 주석하던곳, 바로 환희대다.
일엽스님(一葉, 1896~1971),
속명은 김원주(金元周)로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김용겸 목사의 맏딸로 태어났다.
결혼 후 6년만에 얻은 딸은 아들 못지 않은 후원속에 자랐으며,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계의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9세에 구세학교에 입학하였고 11살에는 윤심덕을 따라 진남포 삼승보통여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신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12세때, 결핵을 앓던 어머니는 남동생을 출산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동생도 3일만에 죽고 말았다. 어린나이에 죽음을 접한 그녀는 통탄의 마음을 글로 적었는데, 그것이 한국문학사 신시(新詩)의 효시라 불리는 '동생의 죽음'이다. 이 후 재혼한 아버지는 그녀가 17세 되던해에 별세를 하게 되면서 동생들과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잃은 그녀는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이 후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21살에 이화학당 예과를 졸업하고, 간호원 강습을 수료하고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 때 그녀는 첫사랑을 만나게 되니 일본인 청년 오다 세이조다. 그들은 서로 결혼을 하려 했으나 당시의 정세로는 용납이 되지 않는 연민이었다. 결국 양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딫혀 무너지고 만 첫사랑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만이 남게 된다. 그가 바로 오다 마사오, 한국이름 김태신이며 현재는 화승 일당스님이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는 가족들의 중매로 연희전문학교 이화학 교수와 결혼하였다. 남편의 지원과 이화학당 빌링스 부인의 재정 후원을 받아 나혜석, 박인덕등과 함께 1920년 조선 최초의 여성종합지 '신여자'을 발간하게 된다. 그러나 남편은 의족을 한 장애인이었으며, 첫번째 여자가 그것을 알고 놀라 파혼하였으며, 그녀도 결혼 직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처음부터 결혼생활 자체가 순탄치가 않았다. 결국 파혼에 이르면서 '신여성'은 4호를 끝으로 폐간 되었다.
이 후 그녀는 화가 나혜석과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하며 개화기 여성운동을 주장했다.
그러던 그녀가 불가와 인연을 맺은것은 중앙불교전문학교의 백성욱교수를 알게 되면서 부터이다.
그녀가 신영성운동을 주장하면서 꿈꿔왔던 자유와 평등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것이다. 1928년, 그녀의 나이 33세 되던해, 불문에 들어선 김원주, 아니 일엽스님은 만공스님의 지도로 수행하며 목사의 딸로서 비구니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녀의 호이자 법명인 일엽(一葉)은 허영숙이 춘원에게 보낼 편지를 대필하였는데, 그 글을 보고 감탄한 춘원이 붙여준 것이다. 일엽스님은 불가에 귀의한 후 각고의 수행정진에 매달리게 된다.
그 때 일본에서의 첫사랑 사이에서 사생아가 되어버린 아들 김태신이 찾아오게 된다.
아들은 생모를 보고 왈칵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냉열차게도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 이곳은 절이니라, 스님이라 불러라" 하였다. 어머님과의 해후를 기대하며 현해탄을 건넌 아들의 꿈은 산산히 부서지고 그날밤 아들은 수덕사 아래의 수덕여관을 찾게 된다. 당시 수덕여관에는 일엽의 친구인 나혜석이 머물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성해방론자였던 나혜석, 3남매의 엄마였던 그녀는 친일파 최린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에게 버림받으면서 친구 일엽과 같이 비구니로서의 길을 걷고자 수덕사를 찾은 것이다. 어머니에게 매몰찬 냉대를 받은 아들 김태신을 어머니처럼 보듬어 준 이가 나혜석이었다. 나혜석의 끈질긴 애원에도 만공스님은 "너는 스님이 될사람이 아니다"라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후, 나혜석은 출가를 포기하고 세상을 떠돌다가 1948년 서울시립병원의 무연고자 병동에서 삶을 마쳤다.
일엽스님의 아들 오다 마사오, 한국이름 김태신은 일본의 권위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였으며,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를 그린것으로 유명하다. 그 역시 어머니를 따라 67세에 불가에 귀의 하여 80세 노스님이 되어 화승으로 명성을 떨치며 양산 법수사에서 그림을 그리고 김천 직지사 중암에 머물고 계신다 한다.
한편, 일엽스님은 중생제도와 비구니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며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등의 수많은 저서를 이루어 낸다. 또한 비구니 수행처가 변변하던 한국불교에 비구니총림원을 추진하는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한 평생을 고집처럼 자신을 위해 살아 간 일엽스님은 1971년 1월 28일 법랍43세(76세)로 입적했다.
환희대(歡喜臺),
수덕사 견성암과 함게 비구니의 수행 도량이다. 1926년에 창건된 환희대는 월송스님에 의해 1984년부터 2년에 걸쳐 환희대의 전각 원통보전과 스님들의 요사채인 보광당과 난야를 건립하였다.
원통보전은 정면5칸, 측면3칸의 다포집으로 팔작지붕을 얹었다. 현판은 원담스님의 글씨며, 닫집의 처마에는 '원통궁', '자비궁', '보광궁'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3단의 돌로 축석을 쌓고 면석과 탱주가 조성된 기단을 조성했다. 환희대의 주불은 관세음보살로 중생의 고뇌를 씻어내 준다 한다. 전각의 내부는 삼면이 모두 탱화로 되어 있으며, 내부는 화려하다. 보궁형의 닫집도 법당의 장엄함을 더욱 정교하게 빛낸다.
원통보전의 앞마당을 넓게 조성하고 키큰 느티나무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일엽스님, 나혜석, 그리고 일당스님의 이야기가 스며 있는 곳,
정확히는 일엽스님의 말년에 주석한 자리이지만, 스님의 주위에 함께 하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함께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어느글에서인가, "속세를 떠난 스님을 속세의 기준으로 삼아 이야기거리를 찾아내려고 한다"며 비탄한 글을 본적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글을 수도 없이 썻다 지웠다를 반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추스린다 하여도 오해의 여지가 남을 것 같은 부분은 모두 실었다.
일엽스님의 삶, 그리고 사랑, 그리고 스님과 얽히고 섥힌 실타래와 같은 인연의 끈은 대충 얼버무리며 마무리 짓고 싶지 않음이다. 길손도 속세의 사람인지라 어쩔수 없는 모양새이지만, 욕 보이고자 함이 아님이 분명함을 밝힌다. 일반인으로서는 산산이 안되는 삶을 살았던,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싶은 마음일뿐이다.
by 박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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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곳 잘 보고 갑니다 자주간듯 하지만 이곳은 못본듯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일주문을 지나 스쳐지나기 쉬운 곳입니다.
수덕여관과 사천문 사이의 샛길에 있지요. 환희대가, 견성암이, 수덕사가..일엽스님과의 연이 깊은 곳인지라..
조금 길게 소개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월요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