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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설교 시리즈의 작성
구속사는 에드워즈가 1739년 3월과 8월 사이에 노샘프턴 교회에서 행한 30편의 강의- 설교(lecture-sermons)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일대학교의 희귀본 및 사본도서관에 맡겨진 에드워즈의 원고집 속에는 구속 설교 시리즈가 수록되어 있는 12권의 책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설교 소책자들과 마찬가지로 12권의 책자들은 손바닥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다. 각 변의 길이는 대략 10.2cm와 9.4 cm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구속 설교 시리즈의 구성과 전달에 대해 내적 증거든 외적 증거든 거의 아는 바가 없다. 30편의 설교들은 다섯 편마다 날짜가 기입되어 있는데, 짐작하기로는 설교가 행해진 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설교 1에는 "1739년 3월" 설교 10에는 "1739년 4월"이라고 적혀 있는데 반해, 설교 16에는 단순히 "17번째 6월"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설교 28과 설교 29회는 똑같이 "1739년 8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외에도 내적 증거로 볼 때, 최소한 설교 14와 설교 15, 설교 18과 설교 19, 그리고 설교 20과 설교 21은 하나의 쌍으로 구성되고 아마 그렇게 설교되었을 것이다. 각각의 경우에 그 쌍 가운데 첫 번째 설교는 같은 날 오전에 행해지고(이것은 아마 쌍으로 되어 있지 않은 다른 설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번째 설교는 오후에 행해졌다(그날은 말할 것도 없이 주일이었다). 그것 말고는 원고의 책자들 속에 설교가 행해진 날이나 시기가 적혀 있지 않다
에드워즈 학문의 역사 속에서, 이 설교 시리즈에 대해서는 더 세부적인 주장들이 제시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증손자로서 총 편집자겸 전기 작가인 세레노 드와이트는 6개월에 걸쳐 행해진 이 설교의 기간 배분에 대해 아주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다: "처음 8편은 [3]월 한 달 동안 행해졌고, 다음 8편은 다음 두 달 뒤 동안에 행해졌으며, 전체 30편의 설교는 8월 마지막 날이 되기 전에 완료되었다." 드와이트의 진술은 구속 설교 시리즈의 내적 증거와 일치되고 드와이트가 제시한 분류는 원문으로부터 뽑아낸 추론에 기초되어 있다. 물론 드와이트는 구속 설교 시리즈에 대해 현재에는 별로 의미가 없는 부차적 정보를 제공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드와이트는 또한 분류 방식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설교들에서 나온 정보를 참작했을지도 모른다. 이 특별한 6개월 기간(3-8월)에, 에드워즈의 설교 작성은 구속 설교 시리즈에 대한 설교를 빼면, 다른 때보다 현저하게 양이 줄었다 에드워즈가 1739년에 작성하고 전한 설교들을 표로 만들어 보면 1월과 2월에 8편, 9월에서 12월까지 13편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3월에서 8월까지는 구속설교 시리즈에 대한 30편의 설교를 빼면 10편의 설교만 있다. 이 증거가 이 기간의 설교 배분에 대한 드와이트의 주장을 반드시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순되는 것도 아니다.
드와이트는 이 기간에 에드워즈의 활동과 여행 등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속 설교 시리즈가 전해진 시기에 대한 그의 추측은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 에베네저 파크먼은 일기에서 에드워즈의 특징적 활동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파크먼는 1739년 5월 하순에 비교적 가까이서 에드워즈를 관찰했기 때문에 그의 일기 내용은 에드워즈가 구속 설교 시리즈를 작성하고 선포할 때 정상적인 생활을 조금도 방해받지 않았다고 상정할 만한 근거를 보여준다. 파크머는 5월 24일 목요일에, 에드워즈가 보스턴에서 공개 강좌(딤전 2:5절을 본문으로 한)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파크먼은 조수아 기 목사가 시무하는 보스턴 교회에서 에드워즈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는데, 그 후 에드워치는 엘더 라이먼스 교회에서 설교했다. 에드워즈가 토요일에 노샘프턴으로 돌아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주일 오후에 파크먼은 웨스트보로의 자기 교회에서 설교했다. (웨스트보로는 보스턴으로부터 노샘프턴까지의 거리의 3분의 1정도 밖에 안 된다.) 월요일(5월 28일) 오후에 파크먼는 케임브리지를 향해 떠났다. 파크먼는 돌아오 돌아오자 에드워즈가 그날 저녁 웨스트보로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았다. 아마 에드워즈는 노샘프턴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그곳에 들렀을 것이다. 또는 27일에 노샘프턴에서 설교를 한 다음 보스톤으로 다시 가던 중일 수도 중이었을 수도 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기간에 에드워즈가 뉴잉글랜드의 목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어렴풋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에드워즈가 아무튼 참으로 바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더 중요한 요점은 에드워즈가 스케줄이 꽉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설교 시리즈를 준비하고 설교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통상적인 주일 설교를 통해 이 중대하고 포괄적인 주제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전했던 것이다.
드와이트의 또 다른 주장 역시 내적 증거에서 비롯된 것이다. 드와이트는 에드워즈가 "그의 성도들에게 구속설교 시리즈를 다시 전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드와이트만이 입수한 특수한 정보에 의존한 것일 수 있지만, 드와이트가 에드워즈의 설교 작업 습관을 잘 알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개연적이다. 에드워즈는 같은 설교를 다시 할 때에는 보통 설교한 날짜를 기재했고, 그때마다 설교를 철저히 개작했다.
더 충분한 내적 증거가 없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외적 증거를 찾기 마련인데 이 설교 시리즈에 대한 당시의 소문들을 확인해 보는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 가정(假定)에 입각한 실례이기는 하지만, 이후의 교회 지도자로 크게 성공한 조셉 밸러미가 이 동안 에드워즈 가문의 학생으로 기숙하면서 구속설교 시리즈를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찾은 외적 증거는 오직 하나의 회상에 집중하게 되는데, 에드워즈의 손자인 티모시 드와이트의 회상이 그것이다. 그는 <뉴잉글랜드와 뉴욕에서의 여행>이라는 책에 회상을 적어 놓았다. 드와이트는 "연방 미국"은 "인간의 지식 영역을 확대하고 다양화하고 또는 윤색하는데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고 주장한 <에든버러 리뷰지>의 한 논설을 논박하기 위해 자신의 네 번째 책의 네 번째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드 화이트는 "고 에드워즈 학장은 영국이나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어떤 신학자보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드와이트는 휫필드를 제외하고 에드워즈의 설교는 능변에 있어서 적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드와이트는 구속 설교 시리즈에 대한 회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노샘프턴 토착민으로 예일 대학에서 수학과 자연철학 교수를 역임한 고 느헤미아 스트롱 교수는 젊은 날에 에드워즈 목사로부터 구속사에 대한 설교를 들은 것을 확인해 주었다. 스트롱은 언급하기를, 에드워즈의 주제에 자기는 처음부터 깊이 매료되었다고 했다. 설교를 들을수록 스트롱의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스트롱은 에드워즈 목사가 최후의 심판에 대해 설교할 때, 그날 그곳에서 펼쳐질 두려운 장면에도 불구하고, 아무 두려움 없이 자신이 자신이 기대한 정점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스트롱은 나팔 소리와 천사장의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심판자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아버지의 영광을 갖고 오시는 것을 보기 위해 가장 심오하고 엄숙한 갈망을 갖고 기다렸다. 그런데 날이 가고 세상이 여전히 평상시처럼 조용한 상태로 있자 크게 실망했다.
스트롱의 증언은 이 중요한 강의 설교 시리즈를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단지 개인적인 회상에 불과하다. 드와이이트가 단지 이 사례만 공개한 것은 구속설교 시리즈에 대한 기록이 당시에는 전혀 없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처음부터 에드워즈는 구속 설교 시리즈를 분명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도의 작업으로 간주했다. 첫째로, 전체 30편의 설교는 "옷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같이 좀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인은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라는 이사야 51장 8절, 단지 하나의 본문에 입각해서 구성되었다. 그 설교의 내용은 이사야 51장 8절 본문과 본문에서 뽑아낸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한 후부터 세상 끝날까지 수행하시는 활동이라는 교리에 의하여 규제되고 있다. 다른 청교도 설교와 마찬가지로 에드워즈의 설교 역시 청중의 유익을 위해 전체적으로 '응용'이나 '적용' 부분이 들어있다. 에드워즈는 구속 설교 시리즈를 전체에 대한 적용과 함께 끝맺는다. 그러나 다양한 공식적 요소들과 그 요소들이 구속 설교 시리즈에 미친 제약들에도 불구하고, 장르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내러티브와 신학적 요소가 골고루 섞여 있는 30편의 교훈적 강론이 드디어 출판되었을 때, 편집자는 본문과 교류의 반복 그리고 논증의 되풀이와 같은 설계적 특징들을 쉽게 따로 분리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하자 안에 논문의 형식이 유지되고 있음을 발견했고 내용을 합리적으로 배열하고 연대 순으로 세분하여 재구성함으로써 우리가 <구속사>로 알고 있는 책을 만들었다. 이것은 분명히 처음부터 에드워즈가 출판을 위해 구속 설교 시리즈를 사실상 논문으로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뉴저지 대학의 수탁자들에게 보낸 잘 알려진 편지에서는 그와 반대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한 가지 이유다.
에드워즈의 구속 설교 시리즈를 담고 있는 원본 책자들에 대한 탁월한 연구자인 윌슨 킴나흐은 최소한 어떤 면에서는, 구속 설교 시리즈를 "설교 단위들", 즉 개별적 설교로 분류하는 것은 독단적이고, 에드워즈는 30번 이상 그것을 "논문"으로 전하려고 준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면에서, 구속 설교 시리즈의 원고는 분명히 구성상 설교로 분류되나 그중 설교들이 특정한 시기에 설교로 전해야 할 목적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없는 킴나흐의 더 중요한 주장은 그 설교 시리즈는 사실 그 자체로 완비된 하나의 프로젝트였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이 설교 시리즈의 전개상 에드워즈는 처음부터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다. 상황은 구속 설교 시리즈를 설교로 전달하기 좋은 단위로 나눌 것을 요구했다. 구속 사역이라는 주제가 에드워지의 성숙한 사상의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묵상한 내용을 글로 적어놓은 <신학묵상집>에서 나타난다 <신학묵상집>에 에드워즈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구속에 대한 주제 및 관련 사항을 기입해 두었다. 구속 설교 시리즈는 에드워즈가 구속을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로 믿고, 포괄적으로 묵상했던 내용을 1739년 봄과 여름에 정리한 것이다.
에드워즈가 설교 시리즈를 개작하는데(또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재설교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예를 들면, 전체적으로 다시 개작한 부분은 없다. 왜 그런 증거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시대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그 설교 시리즈를 끝내고 1년 정도 지난 다음인 1740년 시10월 중순에 조지 휫필드가 처음으로 뉴잉글랜드를 방문하여 노샘프턴에 도착했다. 그때의 휫필드의 설교와 순회 설교를 통해 폭발적인 역사가 임했고, 그로 인해 노샘프턴의 사회적 및 문화적 변혁이 일어났다. 이때의 역사는 훗날 대각성(the Great Awakening)이란 이름으로 불렀는데 불렸는데, 그 중심에 에드워즈가 있었다. 대각성의 영향으로 에드워즈는 지성적으로 인간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더 명확히 분별하는 데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관심은 에드워드가 뉴헤이번 대학 졸업 예배에서 설교할 때 일어난 현상을 분석적으로 연구한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1741)을 낳는 특별한 기반이 되었고, 이어서 <균형 잡힌 부흥론>(1742)을 낳았으며, 결국은 걸작 논문인 <신앙감정론>(1746)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신앙감정론>은 분명히 처음에는 설교의 형식으로 완성된 작품이었다.
1740년도에 출판된 이 책들 속에는 구속 설교 시리즈에 대한 내용이 기껏해야 부차적으로 담겨져 있었고, 그러기에 비록 담겨 있다. 해도 그것을 논하는 것은 거의 무익하다. 당시 에드워즈는 각성(the Awakening)에 크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원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설교 시리즈를 수정하거나 개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구속 설교 시리즈의 내용은 각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재충전은 우리가 구속의 주관적 측면으로 부르는 것, 즉 구속에 참여하는 인간들에 의해 나타나는 효력 및 적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에 입각할 때, 이 시기에 발표된 에드워즈의 설교들은 크게 진보된 모습을 보여주고, 본질상 설교 자료들을 논문 형식으로 바꾸는 데 있어 있어서 표현 기술이 발전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에드워즈가 구속 설교 시리즈에 적용시키려고 한 최종적 형식은 무엇보다 감정 속에서 나오는 신앙적 행위위와 신앙적 행위와 믿음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수행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