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3일 금요일 (백)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양승국 신부
콘스탄티노플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_by Pedro Orrente_in Museo del Prado.jpg
복음; 루카6,39-42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 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습니다! 이천 년 교회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 강론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을 기억합니다. 시리아 안티오키아 출신인 그는 원래 은수자의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산으로 광야로 들어가서 6년간의 금욕과 수덕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기간 동안 요한은 얼마나 깊이 성경을 묵상했던지 신구약 전체 내용을 통째로 외울 정도였답니다. 광야에서 깊은 내공을 닦고 성덕의 정상으로 올라간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세상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다시 도시로 돌아옵니다. 요한의 출중함을 눈여겨 본 안티오키아 주교는 그에게 사제품을 수여하고 주교좌 대성당 주임 설교가로 임명합니다. 그 시점을 계기로 요한은 물 만난 고기처럼 사목자이자 명강론가로서의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의 설교는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시원하고 달콤했으며 강렬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요한의 강론이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사람들은 혹시 사도 바오로가 다시 태어나신 것은 아닐까 의구심을 지닐 정도였습니다. 그의 강론을 듣는 청중들은 큰 감동을 받아 울고 흐느꼈으며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였습니다. 강의가 너무 은혜로워 기쁨에 찬 나머지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많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오늘 내 강론은 어떠한가? 말씀이 살아 있는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 교우들이 다시금 힘차게 세상을 살아갈 힘과 위로를 주고 있는지? 오히려 반대로 내 강론이 청중들을 분심으로 몰고가며, 분노와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한의 말년은 참으로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초대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영입되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 수난과 십자가 길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강직한 성격상 대도시 신자들의 나태함과 문란함을 간과하지 못했습니다. 사도 시대의 열렬한 신앙과 소박한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단이 성행했고, 악습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엄격한 수도생활이 몸에 밴 요한은 탄식을 거듭하며 악폐를 개혁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교관을 건립하는 대신 병원과 순례자 숙소를 지었습니다. 훈계할 일이 있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하게 훈계를 했습니다. 요한의 꼬장꼬장한 모습은 즉시 악습에 젖어 사는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동료 주교, 사제들조차도 요한을 향해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치다며 반감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과격함을 지적했습니다. 결국 황제와 황후의 심기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는 주교좌 자리에서 추방되고 맙니다. 이리로 유배되었다가, 또 저리로 유배되고, 마침내 흑해 해안가 폰투스 코마나에 도착한 그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요한이 체포되어 주교좌 성당에서 쫓겨날 때 남긴 말입니다.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습니다.”
[살레시오회/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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