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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5: 18 예수를 죽이려는 이유 ( 하 )
3]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은혜로운 계시(啓示)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가장 요긴한 점을 반대한 셈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특수한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만이 저런 특수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셨고, "우리 아버지"라고는 하지 않으셨다(Zahn).
그런데,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학설들이 있다.
Ⓐ 성령적 신자설(聖靈的神子設).
이 학설이 성립된다면, "하나님 아들"이라는 이름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라기보다도 순 인간으로서 성령과 함께한다는 의미의 하나님 아들일 것이다.
곧, 뤼트겔트(Lutgert)의 이론에 의하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일들을 문견(聞見)하신다는 어귀들에 하나님 아들이란 칭호가 많이 나오는데, 이 천적(天的) 문견은 현세에 있어서 성령을 통하여 되는 일일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의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의 관계 장 절들을 연구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고로 하나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 요 1: 33-34 –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그뿐 아니라, 하늘 일에 대한 문견이, 그의 현세적 경험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그의 화육(化肉) 이전의 것도 있다. 예를 들면, 3: 32의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란 어귀의 그 문견에 관한 동사는 완료 시상이다.
그것은 그의 화육 이전의 경험을 말함이다. 그 이유는, 그 윗절에 있는 그의 화육 사실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는 현재 사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 종교 윤리적 신자설(宗敎倫理的神子設).
하르낙(Harnack)은 이 학설의 대표자이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 아니고 종교 윤리적으로 그가 하나님과 일체이신 의미에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 한다.
요한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대한 그의 순종(종교 윤리)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10: 18, 12: 49, 14: 31, 15: 10).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이 신자격의 성립 원인이라고 하지 못한다. 요한복음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이런 교훈을 찾을 수 없다.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은 그의 신자 격의 결과로 나타는 일종의 수반 현상이고, 결코 그것이 신자 격의 성립 원인은 아니다.
Ⓒ 역사적 신자설(歷史的神子設).
독생자란 술어를 기초로하여 역사적 신자설을 지지할 수 있을까? 독생자란 말(*)은, 예수님의 화육(化肉) 사실을 의미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영원 자존의 신자격을 가리킨다. 3: 16, 18. 요일 4: 9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독생자 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화육 전에도 이미 독생자였음) 보내셨다고 한 까닭이다.
독생자가 독생자 되심은, 역사상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영원(永遠)에 속한 일이다.
4]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5: 10-18)
38년간이나 자리에 누워있었던 병자는 베데스다에서 주님을 만난 후 새 사람이 되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처럼 주님을 만난 사람은 먼저 자기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이것은 자리에 누워 있었던 죽은 행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나가는 새로운 생활이다.
* 롬 12: 2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주님이 그에게 들려주신 말씀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은 후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1) 주님의 경종
38년 된 병자는 병을 고침을 받은 후에 성전에서 주님을 만났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님을 만난 일은 고침을 받은 후의 그의 생활에 한 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가 죄에서 돌이킨 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
주님은 그를 만나셨다. 언제나 그에게 가까이하는 사람들에게 만남이 되신다. 아마 그가 감사를 모르는 아홉 명의 문둥이처럼 세상에 묻혀있었다면 주님을 만나볼 수 없었을 것이다.
① 우리에 대한 경종이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들려주시는 경종이다. 우리의 병은 죗값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담의 범죄로 인간에게 저주로 내려진 것이 병이지만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그의 생애에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병은 죄의 보응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② 이 사람은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하심으로 고침을 받았다.
우리가 우리 몸의 병을 어떤 형태로 고침을 받던, 고침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나오신 은총이다. 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의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의 역사가 따라야 한다.
즉 죄를 떠나는 생활이다. 그러나 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다시 죄에 물든 생활에 빠져 버린다면 그는 얼마 안 가서 그의 고침 받은 병이 더 무섭게 재발 될 것이라고 하는 경종이다.
(2)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침을 받은 병자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쳐주신 이가 예수님이심을 알려주었다. 이 같은 일은 예수님을 그들에게 고발한 것이 아니라 베데스다 못에서 자리를 들고나올 때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가는 그를 향하여 책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때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대답했을 때 유대인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말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병자는 자기의 병을 고쳐주신 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차후에 알게 되면 알려주기로 약속하였다가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자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그들에게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려주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지킨 안식일은 외식적이었으며 장로들의 유전을 첨가함으로 하나님의 바라시는 근본 취지를 저버린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휴식을 주시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는 데 있었다.
이런 안식일의 목적이 유대인들의 손에 의하여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속하는 것 같은 제도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막 2: 27).
(3)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핍박했다. 범한다는 말은 헌다, 깨뜨린다, 파괴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율법을 헐어버리는 율법의 파괴주의자로 간주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이처럼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이때부터 죽일 기회를 찾으려고 획책하였다.
동등이란 말은 ‘이손’으로 그 수와 크기와 질에 있어서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키실 때 항상 내 아버지란 표현을 쓰셨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던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심으로 그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다 하여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지만 유대인들은 이런 표현을 참람하다고 하여 죽이려고 계획하기에 이른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포착된 것이 바로 이 죄명이었다.
예수님은 갖은 박해을 받으시면서도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생명을 다하여 힘쓰셨다. 한 병자의 병을 고쳐주시는 일로 인하여 이처럼 고초를 당하셨다. 성도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야 한다.
5] 주일에 대하여
오늘날의 달력은 B. C. 45년경 율리우스 씨이저 때부터라고 한다. 바벨론 사람들은 별들을 숭배하여 요일마다 행성의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일요일(Sunday, 태양), 월요일(Monday, 달)등이다.
교회법적 공고는 서기 364년 라오디게아 공회에서 토요일(안식일)의 예배일을 일요일로 바꾸었다. 그 전에 콘스탄틴 황제가 제정한 일과(서기 321년) 또한 약 2세기경부터 공예배일이 일요일로 변경되었다는 추정도 있다.
우선 일요일이라는 말은 이교적 명칭이다. (순교자 저스틴이 처음으로 이 말을 부득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하신 날은 안식 후 첫 날, 즉 토요일 다음 날인 일요일 새벽이다. 그래서 사도 시대부터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 것으로 나타났다(주일, 주의 날, 주의 부활하신 날).
(1) 구약의 안식일은 지금의 토요일이다.
안식교도들은 토요일에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안식일 계명을 신약에도 지켜야 구원을 얻은 것으로 주장하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며 이단적 견해이다.
주일성수 뿐 아니라 십일조나 모든 율법적 행위로 구원 얻을 수는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힘입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신약의 구원 방편이다.
(2) 예수께서는 (구약)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며 모든 율법을 이루신 분이다.
롬 10: 4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했다.
이는 (마 5: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즉 이루신 것은 폐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재해석만 남았을 뿐이다.
(3)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 다음 날인 지금의 주일에 부활하셨다. 신약 성도에게는 이 날이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이다.
율법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구약의 모든 요구를 듣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당신의 영광스런 부활을 기념하며 이 날에 예배하고 안식하는 것이 신약 성도의 바른 안식일 준수가 된다.
* 마 12: 8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 마 28: 1 -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 계 1: 10 -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하나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지으시고 일곱째 되는 날에 쉬심으로 이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곧 지금의 토요일이다. 안식일 다음 날이 되는 지금의 주일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이 날이 더욱 귀하여 사도 때부터 주의 날(부활하신 날)에 예배하며 헌금한 사실을 보여준다.
* 고전 16: 2 -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4) 주일(主日)은 주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낱말이고 일요일(日曜日)은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의로운 태양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을 뜻하기 위한 낱말이다.
* 말 4: 2 -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5) 이 날을 기억하라고 하셨다(기억하여...).
잊어버리고 있다가 주일을 당하면 당황한다든가 하는 것은 바른 안식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6) 이 날을 기억하며 6일간은 힘써 일을 해야 한다.
6일간 세상에 빛과 소금되는 성도의 충실한 삶을 통하여 영광을 돌리고 주일을 맞이하는 것이 옳다. 6일은 세속주의로 살고 주일만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정서상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우리들의 삶 자체가 거룩함으로 영광을 돌리며 주일은 특별히 성도들이 모여 주간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며 영생을 찬미하고 또한 영혼과 사회를 위해 기도하며 온전하게 하루를 살아드리는 것이다.
이 날의 언행은 우리 자신을 위하기보다 하나님을 위한 날이어야 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날이다.
* 출 20: 9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살후 3: 10 -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 요 5: 17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7) 육축(짐승)도 일하지 않아야 하고 집에 온 손님도 일하지 않아야 한다.
(8) 주일은 예배를 드리는 때만 거룩한 것이 아니다. 온 종일 거룩한 날이다.
(9) 구약의 안식일 준수는 그야말로 율법적으로 매우 세밀하고 엄격했다.
* 사 58: 13-14 –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10) 특별 사항은 생명과 위급한 일에 관련한다.
병원, 약국을 영업하라는 것이 아니며 위급해 찾는 자가 있을 시나 본인이 필요할 시 가능하다. 국가 안보 문제나(군복무) 일정으로 잡혀 있는 직장 당직 관계인데 가능한 예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국이 아닌 사회에서 주일을 성수하기 힘이 든다. 그러나 신앙 양심이 허락하는 한 주일을 성수 할 수 있는 직업과 직장이 돼야한다. 경비를 서는 일 등도 예배의 날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조경 사업, 건설업 등은 월요일 아침부터 작업을 하기위해서 일요일에 작업 준비(나무, 시설물 등)를 하게 되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가능한 토요일쯤에 월요일에 착수할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다. 주일에는 일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주일은 주님의 일로 충실해야 한다.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하는 날이며 믿음의 일을 하는 날이다.
구약의 안식일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들이 신약에 와서도 그렇게 율법대로 행할 의무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구약처럼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정신에 있어서 구약의 안식일과 다름없이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구약의 모든 율법의 존재와 그 목표가 완성되었다는 신약적 구약의 재해석에 따른 안식일의 개념은 행위 언약은 폐하고 은혜 언약적 내용은 그대로 전수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많은 지도자들이 주일성수를 현실 문화에 비추어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정통신학에서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 주일성수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많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대 생활에 적용 문제로 주일에 상거래를 하는 것이나 인간 중심으로 주일을 지내는 일들이 많다.
과연 신앙 양심이나 신학의 문제일까? 아니면 현실주의에 따른 합리적 해석일까? 우리는 주일성수가 구원을 얻는데 결정적인 율법적 요구가 된다는 이론은 내세울 수 없다. 신약에 예수님의 속죄 사건 중심으로 소위 하나님의 구속사적 입장에서 구약이 해석돼야 한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셔서 부활하시게 되므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안식일보다 날 자체로도 주일이 더욱 중요한 날이 된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는 온전한 예배와 이웃의 아픈 자, 약한 자를 돌보며 위로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많이 얻고 기도로 영성 훈련을 하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영생을 충분히 찬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어야 할 것이다.
주일날 생업에 종사하는 것은 내세의 소망이 없는 불신자들의 불신적 삶이 된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생업이나 어떤 상거래 같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영적으로 잘되고 세상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믿음의 순종이 되는 것이다.
먼저 주일에는 시장 보는 일은 금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영업을 하게 되는 불신자는 결국 이 날에 주님께 찾아올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 힘든 세탁은 전날에 해두는 것이 유익하다. 이날 너무 힘겨운 청소나 세탁하는 일로 고달픈 것은 주의 부활을 즐거워하는 날에 조화롭지 않다.
간단한 목욕은 가정에서 가능하며 오락을 즐기는 것은 부당하다. 이날은 인간의 안식이 되기 전에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토대로 하는 신령하고도 영광스러운 기념의 날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처럼 오락으로 육체적인 즐거움에 취하는 것은 거룩한 행위가 아닐 것이다.
직장 시험 치르는 것과 국가고시 자격증 시험 등에 대해 본인은 거절한다. 아무리 개인적인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결코 축복받을 행위는 아니라고 본다.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는 것은 무척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갈 수 있다.
현실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우리는 합리화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주일에 대한 신약적 이해 그리고 신학적 해석이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은 많은 논란이 따른다.
그런데도 주일은 전통적으로 상업적 거래나 인간중심의 오락적인 행위를 금하는 것으로 전해져 왔다. 주일 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부분에서 신자들의 삶의 규칙이 흔들리고 있다. 십일조의 개념이나 주일성수나 신약적 재해석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께서는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38년 된 병자를 쉽게 고쳐주셨다. 그것은 신적 능력이었다. 그는 38년보다 더 오래된 인간의 뿌리깊은 죄병을 고쳐주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단번에 사하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구주이시다.
* 롬 3: 2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구원은 궁극적으로 영육의 완전한 구원이다.
* 롬 8: 30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둘째,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지으면 징계를 받을 것이다.
* 히 12: 5-13 –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이 성화의 삶이다.
그런 결심과 노력이 없으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요 중생하지 못한 자일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시하셨다. 유대인들은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 하였다.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증언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그의 참된 신성을 밝히 증거하고 또 하나님 삼위일체의 신비를 밝히 증언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찬송하며 경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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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건강을 가져오고 행복을 안겨 줍니다.
사랑이 꽃피고 행복이 넘치는 웃음 가득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