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8. 큐티
마태복음 26:69 ~ 75
베드로의 통곡
관찰 :
1) 베드로의 상황
- 69절.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 베드로는 바깥 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던 듯싶습니다. 바깥 뜰에서 안 뜰의 상황의 눈치를 살피며 이 일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행동의 원인이 아니었나 싶게 추정하게 됩니다. 그 때 한 여종이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의 여종은 나이 어린 소녀입니다. 이 소녀는 지금 상황이 자신이 말하는 것으로 인해서 베드로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 예수의 무리와 함께 있던 것을 본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 70절.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 어린 소녀의 주장에 당황한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며 부인했습니다. 비록 나이 어린 소녀의 주장이었지만 베드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바깥 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베드로를 주목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어린 계집 종을 무시하며 앞문으로 피신했습니다.
- 71절.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 앞문으로 피신을 하며 도망하고자 하나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좀 전까지도 베드로의 자랑은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 요한이 비록 예수님의 이종 사촌이었을 지라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즉 예수님의 이모인 살로메 마리아가 와서까지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했을지라도 자신의 위치가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던 베드로는 이 때 후회가 막급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뻐기고 떠벌리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않았을 것인데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72절.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 베드로는 그래서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사람들은 베드로의 이러한 강한 부정에 대해 대략 수긍을 하게 된 듯 합니다. 그래서 앞문으로 해서 나가려던 베드로는 조금 더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워낙 강하게 부정을 하니까, 그리고 그러한 증언을 어린 계집 종들이 한 것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 73절.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 그러나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이제는 좀 더 무게 있고 논리적인 증언을 하게 된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뜰 안쪽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이어지고, 예수님을 주먹과 손바닥으로 치고 침을 뱉고 하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하고 폭력적인 속성이 끓어 오르고 있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베드로의 말소리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그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후음과 치음을 구분하여 발음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 쉽게 식별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 74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 이에 베드로는 그들을 저주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저주하고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 말이 떨어지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예수님의 좀 전에 하셨던 말씀,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가르침 :
1) 십자가의 길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수님의 왕권으로 말미암는 논공행상에 눈이 멀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혀갈 때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결박 당하여 무리에게 끌려 가야바의 집 뜰에 급조된 재판장으로 가게 되었을 때, 그래도 끝까지 따라간 제자는 베드로 뿐이었습니다. 인간적 용기와 호기심으로 그곳까지 갔지만 결국 그곳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과 같이 세 번 주님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2) 베드로가 반응을 하는 과정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취하는 자기 보호 본능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과 같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렇듯 본능에 따라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이러한 상황이 오더라도 죽을지언정 주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 예언을 하시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으로 인해 가룟 유다와 같이 목을 매는 결정을 하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 마음이 완악해져서 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은 베드로에게 ‘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구나. 진짜구나! 진짜 예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는 것이구나!’라고 깨닫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무능에 대하여 통곡을 하였을지언정 비관하고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3) 통곡 이후에 베드로는 제자들의 무리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이 3번이나 부인한 것에 대해서도 감추지 않고 제자들의 무리들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아는 제자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야바 제사장의 집 바깥 뜰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제자들과 모든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새벽 닭울기 전에 세 번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은 베드로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살리는 것이었고, 베드로는 보호하는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4) 베드로의 이 통곡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보호본능을 극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통회의 마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좀 전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애통하며 기도하실 때, 졸면서 그 기도에 동참하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을 탓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예수님과 같이 기도했더라면 이렇게 허망하게 예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자책이 뒤따랐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통곡으로 인해 그는 가야바의 뜰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계속 양심에 찔려서, 그리고 호기심 반으로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더욱 험한 상황이 펼쳐지는 가운데 불똥이 튀어 예수님의 예루살렘 교회 개척의 초대 목회자인 베드로가 죽임을 당하는 상황으로 펼쳐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모두 보호하시고 다음 수를 위하여 이 때는 자신의 죽음에 동참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두 여종의 증언과 여러 사람들이 베드로의 발음을 문제 삼는 논리적인 증언이 뒤따랐음에도 누구도 베드로를 잡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5) 주님의 열 제자들은 이 때 가야바의 집 근처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복음을 위하여 열 명이 순교하게 됩니다. 늦게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요한도 결국은 순교합니다. 이렇게 일하시는 주님이 더욱 위대하십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갔지만 그들 모두를 다시 모아 자신을 위하여 목숨을 걸게 하시고, 모두 순교의 길을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모범을 보이신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위대하십니다. 나 역시 아직 미약하고 부족한 믿음을 소유했지만, 주님의 은혜로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아닌 주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적용 :
1) 베드로는 3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을 보더라도 주님이 이 문제로 베드로를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아셨고, 그것을 또한 미리 말씀하심으로 베드로를 보호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제자들의 안전을 우선으로 하시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나에게 맡겨지는 양들, 제자들의 안전과 발전에 나의 안전과 발전보다 우선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되물어봅니다. 멘토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멘토는 자신의 겉옷을 멘토리에게 줄 것을 작정을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리더가 되고자 하는 나는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존재임을 늘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은 오히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구워주시고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심으로 베드로의 트라우마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 세 번의 부인과 더불어 일어나는 베드로의 통곡과 오버랩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나에게도 그렇게 사랑으로 대해 주시고, 나를 세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코 자신의 양을 포기하거나 방치하거나 치워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래서 나도 무너지고 무너져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 앞에 언제나 다시 설 수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