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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동향
한해 4,000조 원이 넘는 물동량이 오가는 남중국해가 뜨겁다. 지구공학적으로는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온도 상승 때문이지만, 지정학적으로는 미중 간 해양패권 경쟁과 연안국 간 영토주권 및 해양 영역에 대한 관할권 갈등이 고조되어서다. 그 공통분모는 중국이다. 2015년 불거진 무인 암초의 인공섬 및 군사기지화 논란과 함께 2013년 시작된 ‘일대일로(BRI, Belt and Road Initiative)’ 사업은 중국의 의도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역내 아세안 국가는 물론 미국, 호주, 독일, 프랑스 등 역외국가도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 시도’에 반대 목소리를 내며 행동에 나서고 있다1). 최근 대만 이슈까지 더해져 남중국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군력이 집중된 지역이 되었다2).
남중국해 이슈의 핵심은 1953년 중국이 동 해역의 90%(300만㎢)에 달하는 영역에 일방적으로 선언한 ‘남해구단선(南海九段線, nine dash line)’ 내 스프래틀리(Spratly)와 파라셀(Paracel) 군도 및 주변 수역에 대한 관할권 다툼이다. 남해구단선 주장에 대한 베트남의 반발이 가장 심한데, 종종 그 불꽃이 역외로 튀기도 한다. 남해구단선 이미지가 등장한다는 이유로 베트남 정부가 2023년 7월 개봉 예정이었던 할리우드의 신작 ‘바비’의 상영을 금지한 것이 그 예다. K팝 걸그룹 블랙핑크도 남해구단선 이슈를 피해 가지 못했다. 베트남 공연을 기획한 업체가 자사 웹사이트에 남해구단선 이미지가 포함된 남중국해 지도를 게시했고, 베트남 정부가 조사에 나서자 이를 서둘러 삭제하는 해프닝이 있었다(강종훈, 2023; 김보라, 2023).
베트남 못지않게 남해구단선에 각을 세우는 나라가 필리핀이다. 남해구단선 일부와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이 중첩되는 필리핀은 자국 수역 내에서 중국 해안경비대와 해상민병대가 자국 어선에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한다. 중국과 밀월관계였던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2016~2022년 재임) 전(前) 대통령과는 달리 신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Ferdinand Romualdez Marcos Jr.) 필리핀 대통령은 미국과의 밀착으로 중국 견제에 나섰다. 2023년 2월 미국에 필리핀 군 기지 4곳을 추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동년 4월 미군과 함께 처음으로 실탄 사격을 가해 가상의 적국 군함을 격침하는 연합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한편, 중첩수역 내 세컨드 토마스 암초(Second Thomas Shoal)를 두고 최근 들어 물리적 충돌이 빈번하다. 2023년 2월 중국 함정이 이 지역에 주둔 중인 필리핀 해군에 물자를 보급하던 선박을 향해 군사용 레이저를 조사(照射)해 긴장이 고조된 데 이어, 8월 초에는 중국 해안경비대가 필리핀이 군사시설로 사용하는 폐역함 시에라 마드레(Sierra Madre)호에 물자를 보급하던 선박에 물대포 세례를 가해 외교 문제가 되었다(류재민, 2023; 박은하, 2023)3).
2. 남해구단선과 「유엔해양법협약」
남중국해 연안국이 유무인 도서를 가릴 것 없이 거점 확보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이유는 1969년 국제사법재판소의 북해 대륙붕 사건 판결 이래로 확립된 ‘육지가 바다를 지배한다(The Land governs the Sea)’는 원칙 때문이다. 남중국해 거점 확보 경쟁은 각 거점을 잇는 ‘선’ 경쟁으로 진화해 왔다. 중국의 남해구단선은 1980년대 이후 서태평양상의 제 1, 2 도련선 개념으로 확대되었고, 일대일로 전략으로 그 정점에 달하고 있다. 주변국들은 인도-태평양 전략 등 새로운 점-선-면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구민교, 2022).
남중국해 연안국들은 남해구단선의 법적 지위를 놓고 치열한 법률전(lawfare)도 벌이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유엔해양법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에 따라 설치된 국제중재재판소(International Arbitral Tribunal)에 필리핀이 중국의 남해구단선 내 관할권 주장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취지의 소를 제기한 것이다. 2015년에 필리핀의 제소에 대한 관할권을 갖는다는 결정을 내린 국제중재재판소는 2016년 7월 본안 판정에서 중국 측 관할권 주장의 국제법적 근거, ‘도서(島嶼)’와 ‘암석’의 구분, 무분별한 어업행위, 해양환경 보호를 위한 연안국의 의무 등과 관련된 해양법의 적용과 해석을 명확히 했다4). 그러나 관할권 판결은 물론 본안 판결 이후에도 중국은 이러한 중재의 결과가 ‘무효(null and void)’이며 중국에 대해 구속력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판결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이를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구민교, 2022).
그럼에도 필리핀의 제소에 대해 국제중재재판소가 관할권을 인정하고 남해구단선 주장의 법적 효력을 무효화한 것은 남중국해 이슈의 전개 방향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중국의 의무 이행과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실질적 수단이 없다는 점은 현 국제중재 제도의 큰 약점이지만, 국제법상 중국의 반대 의사와 상관없이 중재판결은 재판의 당사국 모두에 대해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아울러 중재판결을 전면적으로 무시하는 행위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구축하려고 하는 화평굴기(和平崛起, China's peaceful rise) 이미지를 훼손하는 ‘위신비용(reputational cost)’을 낳는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구민교, 2022).
2016년 중재재판 판정 이후 「유엔해양법협약」을 통한 갈등의 해결 노력이 답보상태에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국제규범은 여전히 중요하다. 베트남과 필리핀뿐만 아니라 다른 연안국도 국제규범에 따라 중국의 주장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국제사회가 구단선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자국 배타적 경제수역 내 나투나제도(Natuna Islands) 주변 해역을 ‘북나투나해’로 명명하고 중국의 불법조업 어선에 대한 법 집행과 중국 해안경비대에 대한 감시활동 강화에 나섰다. 또한 배타적 경제수역 경계획정 협상을 타결하고 나투나제도 인근의 대륙붕 개발 프로젝트에 협력하기로 합의하는 등 그간 불편했던 베트남과의 관계를 전격적으로 개선해 중국 견제에 나섰다(김규환, 2023).
3. 남해구단선 이슈의 향후 전망
남해구단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남중국해 분쟁의 특징은 전면적 법적 해결이나 무력 충돌로 가지 않으면서 단속적으로 갈등이 표출되고 불완전하게 해소되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물론 최근 해양 군비경쟁 양상을 볼 때 안보 딜레마 상황에 빠진 일부 당사국 간 무력 충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이 군사력에 의한 영토 문제의 해결 유혹은 독재국가일수록 강한 것도 사실이다. 긴장이 고조되는 대만해협 상황이 그렇다. 하지만 국제법 원칙을 위반하며 선제적으로 군사력을 사용한 국가는 대개 영토적 야망 달성에 실패했다. 또한 사전적 및 사후적으로 고려해야 할 규범상 억지 요인이 많아서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남해구단선 이슈를 놓고 무력 충돌을 감수할 가능성은 작다. 역내외를 불문하고 다수 국가 간 팽팽한 힘의 균형이 형성되는 남중국해에서 무력을 동원한 갈등 해결은 누구에게도 현실적 대안이 아니다(구민교, 2022).
영토주권과 해양 관할권과 관련해 이해 당사국이 합의된 지식(consensual knowledge)에 도달할 때까지 남해구단선을 둘러싼 역내 갈등은 다자외교를 통해 관리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해상에서의 의도하지 않은 조우나 충돌의 확대재생산을 방지하기 위한 갈등관리와 신뢰구축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외교’도 군사력 및 국제규범에 근거한 활동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 그럼에도 적대적 정체성을 순화하고 동료집단 압력을 통한 선의(good will)를 쌓는 노력은 물리적 압박이나 규범적 구속을 추구하는 것과 구분되는, 외교적 접근의 고유 영역이다(구민교, 2022).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물론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대중국 외교 전략이 ‘디커플링(de-coupling)’에서 ‘디리스킹(de-risking)’으로 바뀌는 시점에 중국의 남중국해 외교가 어떻게 응답할지가 앞으로의 관전 요소다.
*각주
1) 올해 들어서도 ‘최초’ 사례가 많다. 2023년 6월 초 미국-필리핀-일본 해안경비대가 남중국해상에서 최초로 연합훈련을 전개했다. 아세안도 회원국 간 처음으로 2023년 9월 남중국해 남나투나해에서 연합 해상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유럽연합도 2016년 국제중재재판소 판결을 지지한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필리핀과의 해상 안보 협력을 강조하며 관계 개선에 나섰다(이도연, 2023; 이재준, 2023).
2) 중국의 행보에 맞서 미국이 포괄적 경제-안보-기술 협력을 위한 다자외교에 공을 들이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G7 정상회의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한국, 호주, 뉴질랜드, 인도네시아 등 비회원국을 초청한 것에도 그러한 계산이 깔려있다. 최근 캠프 데이비드에서 회동한 한미일 3국 정상이 이례적으로 중국을 직접 언급하며 “남중국해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한 불법적 해상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위험하고 공격적인 행동과 관련해, 인도-태평양 수역에서의 어떤 일방적 현상변경 시도에도 강하게 반대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곽인숙, 2023).
3) 2차 세계대전 중 미 해군의 수륙양용함으로 취역한 하넷 카운티호(USS Harnett County)는 베트남 전쟁 중 남베트남에 양도되었다가 1976년 필리핀으로 다시 양도되어 시에라 마드레라는 이름으로 1990년대 후반까지 운용되었다. 1995년 중국이 남중국해상 미스치프 리프에 군사시설을 짓자 1999년 필리핀은 동 간조노출지(low-tide elevation) 인근의 세컨드 토머스 암초에 운용 수명을 다한 시에라 마드레호를 고의로 좌초시킨 후 콘크리트로 고정해 군사기지로 활용하고 있다(박은하, 2023).
4) 동 판결의 다섯 가지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남해구단선 내 자원에 대한 중국의 역사적 권리 주장에 법적 근거가 없다; (2) 스프래틀리 제도 중 어느 섬도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가질 수 없으므로 이 지역 중 일부는 중국의 권리와 중복됨이 없이 필리핀의 200해리 구역 내에 포함된다; (3) 중국은 필리핀의 200해리 구역 내 주권적 권리를 침해했다; (4) 간척사업과 인공섬 조성으로 중국은 연약한 해양 생태계를 보존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를 위반했다; (5) 중국의 간척사업과 건설활동은 중재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해당 분쟁을 악화시키지 않을 의무와 양립하지 않는다(구민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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