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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2-35 (65)
《논공행상 (論功行賞)》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속에 부장품(副葬品)을 꺼낸 것은 항우의 커다란 실책이었다.
뿐만 아니라,죽은 사람의 안식처로 지어진 지하 아방궁(阿房宮)에 불까지 질러버린 것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 간에는,
"항우는 진시황보다도 더 무섭고 무지막지한 폭군이다 !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게다가 항우가 초패왕으로 등극하고 난 뒤에도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장수들에게 논공행상
(論功行賞)조차 베풀지 않아서, 그들 역시 항우에게 불평이 대단하였다.
범증은 그러한 불만을 알고 항우에게 간한다."진나라를 정벌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사온데,
장수들에게 아직도 논공 행상을 내려주지 않으셔서 모두들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데, 대왕께서는 그들을 후백(侯伯)에 봉하시옵고 식읍(食邑)을 하사하시어
임지로 부임케 함으로써 나라의 변방을 튼튼히 수호하게 하시옵소서."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좋은 말씀이오. 그러면 논공행상을 하기로 합시다.
그런데 정작 논공행상을 베푸는데 걸리는 인물이 하나 있구려. 패공 유방은 어떻게 처우
(處遇)했으면 좋겠소 ? "항우는 <관중왕(關中王)>의 자리를 유방에게서 억지로
빼앗아 오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유방의 존재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범증은 한동안 생각해 보다가 대답한다."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하여 파촉(巴蜀)으로
보내시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유방을 파촉으로 ? "
"예, 유방을 지금처럼 패상에 계속 머물러 있게하면, 군사를 모아 어떤 짓을 할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한왕>이라는 명목으로 멀리 파촉으로 쫒아 버리면 감히 다른 짓을 할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파촉으로 보내버리면 딴 짓을 못 할 것 같소이까 ?""물론입니다. 파촉은 워낙 첩첩 태산의
산간 벽지인 관계로, 그곳은 사람도 적고 물산도 빈약하여 대군(大軍)을 양성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니 군사가 없이는 어떻게 모반을 도모할 수가 있으오리까. 그러하오니 유방을 한왕에 봉하여
파촉으로 보내버리기만 하면 그는 어쩔수 없이 거기서 늙어 죽고야 말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좋아하였다."참 기막힌 계책이오. 유방만 맥을 못 추게 해놓으면,
천하는 절로 내 것이 될 게 아니겠소 ?""그러하옵니다, 대왕전하 ! 그러니 논공행상이라는 명목으로
유방을 하루속히 파촉으로 쫒아 버리도록 하시옵소서."항우는 범증의 말을 옳게 여겨,
유방을 비롯한 모든 대장들에게 <논공행상을 거행할테니 침주로 모두들 모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방은 항우의 호출장을 받아 보고 매우 난처하였다. 부른다고 호락호락 달려가자니 위신이 문제요,
그렇다고 항우의 명령을 묵살하자니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유방은 생각다 못해 중신 회의를 열었다."항우가 내게서 관중왕 자리를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논공행상을 하겠노라고 하면서 호출장을 보내왔으니 이 일을 어찌해으면 좋겠소? "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지금 형편에 항우의 명령을 묵살해 버렸다가는 보복이 두렵사오니
먼 장래를 생각하시어 가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경솔하게 달려갔다가 만약 만인의 좌중에서 모욕이라도 당하게 되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하겠소 ?"
소하가 다시 아뢴다."천만다행으로 장량선생이 지금 항우의 막하에 머물러 계시오니,
침주에 도착하시는 대로 모든 일을 장량 선생과 상의하시면 되실 것이옵니다."
"정말 그렇구려, 그러면 장량 선생을 믿고, 용기를 내어 침주로 가보기로 하겠소이다."
유방이 항우를 찾아가니, 항우는 용상을 덩실타고 앉아 내려다 보며, 유방을 완전히
수하의 장수 취급을 하였다. 뿐만아니라 논공행상을 자리에서는 항우는 용상을 타고 앉아 있었고,
유방은 다른 장수들과 함께 단하에 꿇어 앉아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자리에는 장량도 항우의 등 뒤에 배석해 있었다. 장량은 단하에 꿇어 앉아 있는 유방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여러번 끄덕이며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윽고 군정사(軍政司)가 항우의 명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논공 공문을 읽어 내려갔다.
1. 유방 장군을 한왕(漢王)에 봉하노니, 남정(南鄭)에 도읍하여 파촉(巴蜀) 41현(縣)을 다스리도록 하라.
2. 장한 장군을 옹왕(甕王)에 봉하노니, 폐구(廢丘)에 도읍하여 진령(秦領) 38현(縣)을 다스리도록 하라.
3. 사마흔(司馬欣) 장군을 색왕(塞王)에 봉하노니, 역양에 도읍하여 진령11현을 다스리도록 하라.
4. 동예 장군을 적왕(翟王)에 봉하노니, 고노(高奴)에 도읍하여 서진(西秦)38현을 다스리도록 하라.
5. 영포(英布) 장군을 구강왕(九江王)에 봉하노니, 육합(六合)에 도읍하여 북진(北秦) 45현을
다스리도록 하라.이상과 같은 논공행상을 낭독하고 난 뒤 끝으로,
1. 범증 군사를 승상에 제수하여 <아부(亞父)>로 존칭하고,
2. 항백(項伯)장군을 상서령(尙書令)에 제수하여 대왕을 측근에서 보필케 하고,
3. 종이매(鐘離昧)장군을 우사마(右司馬)로, 계포(季布)장군을 좌사마(左司馬)로 삼아,
대왕의 경호를 책임지게 한다.
논공행상에서 유방은 완전히 부하 취급을 당하는 바람에 모욕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명색은 비록 <한왕(漢王)>이라고 하지만, 사람이 살지 못할 심심산중으로 정배를 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관중왕의 자리를 빼앗아 간 주제에, 나를 이렇게나 홀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아무리 참을성이 많기로, 이것만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 )
이런 생각이 든 유방은 항의를 할 요량으로 얼굴을 들어 항우를 정면을 쏘아보며,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였다.그러자 그 순간, 항우의 뒤에 배석해 앉아 있던 장량이 손을 들어 유방의 행동을 누르는
손짓을 해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항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유방은 그래도 참을 수가 없어서, 몸을 움직여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자 장량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항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대왕 전하 ! 논공 행상을 끝내셨으니, 이제는 제후들에게 축배를 나눠 드리도록 하소서."
유방에게 항의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장량은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윽고 항우가 주최하는 축하연이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논공 행상을 받은 장수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저마다 술잔을 나누며 크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은 화가 동하여 술을 마실 기분이 나지 않았다.장량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말했다."아무리 불쾌하시더라도, 오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마시옵소서.
축하연이 끝나거든, 이번에는 저도 패공을 모시고 패상으로 돌아가기로 하겠습니다."
유방은 그 소리에 귀가 번쩍 틔는 것만 같았다."선생이 나와 함께 패상으로 돌아가 주신다면,
그처럼 기쁜 일이 없겠소이다. 그러나 항우가 선생을 돌려보내려 하겠습니까 ?"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그로부터 얼마 후, 장량은 항우 옆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를 평정하는 대업을 이미 완성하셨으니, 저는 오늘로서 패공과 함께 일단 패상으로
돌아가겠습니다."항우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못마땅한 듯,
"아니, 나는 자방더러 언제까지나 나를 도와 달라고 했는데, 자방은 나보다 더 패공을 도와주고
싶어서 내 곁을 떠나겠다는 말씀이오 ?"하며 노골적으로 나무란다.장량은 얼른 이렇게 대답한다.
"대왕의 말씀은 오해의 말씀이시옵니다. 저는 패공을 돕기 위해 이곳을 떠나려는 것이 아니옵고,
저의 고국인 한(韓)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이곳을 떠나려는 것이옵니다.
한왕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 주실 때, 진나라가 평정이 되거든 그날로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엄명이 계셨던 것이옵니다.그러므로 이제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기에,
일단 패상에 들러 짐을 꾸린 후 즉시 본국으로 돌아 갈 생각입니다."
항우는 그제서야 오해가 풀린 듯,"본국으로 돌아가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구려."
하고 유방과 함께 돌아가기를 허락해 주었다.
2-36편에 계속
초한지(楚漢誌) 2-36 (66)
《유방의 와신상담(臥薪嘗膽)》
유방은 장량과 함께 패상으로 돌아오자, 곧 중신회의를 열고 항우에게 설움당한 일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모든 중신들은 그 말을 듣고 한결같이 분개를 하는 중에 조참(曺參)이 이를 갈며,
소리 높여 말한다."주공께서는 마땅히 관중왕이 되셔야 할 것인데, 파촉으로 쫒겨가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옵니다. 그것은 귀양살이를 가는 것이지, 그게 어디 논공행상입니까 ?
이것은 필연코 범증이란 자가 뒤에 숨어서 그런 책동을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태가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파촉으로 쫒겨갈 것이 아니라 , 항우와의 일전(一戰)으로 결판을 내야 합니다."
대장 왕릉도 조참의 의견에 찬동하면서 말한다."그렇습니다. 파촉으로 쫒겨가면, 우리가 어느 세월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가 있겠습니까 ? 그러니 싸우다가 몰살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서,
싸움으로 결판을 내야 합니다."그러자 번쾌도 덩달아,"소장은 두 분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찬성합니다.
만약 싸움을 하게 되면, 소장을 선봉장으로 삼아 주소서. 그러면 소장은 항우의 군사를 남기지 않고
괴멸시켜 버리겠습니다."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유방은 그들의 말을 들을수록 새삼스럽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다시피 초회왕께서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이 관중왕이 되어
함양에 도읍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소.그런데 항우는 왕명을 무시하고 <초패왕>을 자처하면서
나를 파촉으로 쫒아 보내려고 하니,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이오.파촉은 사람의 왕래조차
어려운 첩첩 산중이니, 우리가 그곳에 가게 되면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오."
유방은 감정이 격해져서, 그 역시 모든 것을 전쟁으로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소하가 침착하게 입을 열어 말한다."주공께서는 감정에 치우치지 마시옵고, 이 문제를 어디까지나
냉철하게 판단해 주시옵소서. 파촉이 제아무리 첩첩 산중이라도 항우와 싸워서 참패하느니보다는
파촉으로 가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신은 생각되옵니다.
그 옛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만인지상(萬人之上)이 되기 위해, 일시는 패자(覇者)에게
굴복을 감수하였던 고사(故事)도 있사오니, 주공께서는 그들의 지혜를 본받도록 하시옵소서.
파촉이 비록 불모의 벽지라고는 하오나, 그 대신 외적의 침략을 받지 않는 이로움은 있사옵니다.
우리가 그런 안전 지대에 가서 현사(賢士)들을 모으고 백성들을 규합하여 군사 훈련을 강력히 시행하면,
천하를 도모하는 대사업도 능히 성취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유방은 지금까지의 논의와는 다른, 소하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하며 장량에게 묻는다.
"장량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장량이 즉석에서 대답한다."저는 소하 대인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그 이유는 무엇이오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한다.
"파촉이라는 곳은, 진나라 시절에 죄인을 정배 보내던 곳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소하대인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파촉은 산이 많고 길이 험하여 외침을
받을 염려가 전혀 없는 곳입니다.따라서 그곳에서 실력만 잘 길러 놓으면 항우의 백만 대군도
능히 감당할 수가 있을 것이니, 어찌 나쁜 곳이라고만 말할 수 있으오리까.
바라옵건데, 패공께서는 낙심 마시고, 하루속히 파촉으로 들어가시어 권토중래(捲土重來)의 대사업을
도모하도록 하시옵소서. 만약 패공께서 파촉으로 떠나실 날짜를 지연시키면, 어떤 불상사가 생길 지도
모르옵니다.""불상사라뇨 ? 그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
"범증은 자나깨나 패공을 해칠 계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만약 패공께서 파촉으로 속히 부임해
가지 않으시면, 저들은 우리가 불만을 가지고 싸울 채비를 하고 있는 줄로 오해하고, 병력을 움직여
우리를 치려고 할 것입니다."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러면서도 얼른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대답하기를 주저하였다.그러자 이번에는 여이기 노인이
유방에게 말한다."주공께서 파촉으로 가시면 <세 가지의 이로움>이 있사옵고, 패상에 그냥 눌러 계시면
<세 가지의 해로움>이 있사옵니다"유방이 반문한다.
"세 가지의 이로움과 세 가지의 해로움이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여 노인이 대답한다.
"파촉은 워낙 내왕이 험난한 곳인 관계로 우리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벌여도 항우가 알지 못할 것이니,
그것이 첫째 이로운 점이옵고,지세가 험한 곳에서 군마(軍馬)를 조련하면 전투력이 유난히 강해질 것이니,
그것은 두번째의 이로운 점이 되겠고,후일에 우리가 다시 관중으로 쳐 나올 경우에는, 군사들은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에서 사기가 백 배로 왕성해질 것이니, 이것은 세번째의 이로운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이로운 점이 많사온데,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파촉으로 가시기를 주저하시옵니까 ?"
유방은 여이기 노인이 미처 몰랐던 일을 깨우쳐 주는 바람에 크게 기뻐했다.
장량과 소하도 여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해 마지않는다.유방이 여 노인에게 다시 묻는다.
"광야군(廣野君 : 여이기 노인의 작위)의 말씀을 들어 보니, 과연 그럴듯하구려. 그렇다면 패상에 그냥
눌러 있으면 세 가지의 해로움이 있다고 하셨는데, 세 가지의 해로움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그러자 , 여 노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이곳 패상은 한(韓), 위(魏)등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사람의 왕래도 빈번한 관계로 우리의 군사기밀
(軍事機密)이 항우를 비롯한 외국에 속속들이 새어나갈 요소가 부단히 많사오니, 그 점이 첫번째의
해로운 점입니다."유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과연 그렇구려. 그러면 둘째, 셋째의 해로움은 무엇이오 ?"
"둘째는,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항우를 치려고 할 경우에, 범증이 우리의 실력을 미리 알고 있다가,
우리의 헛점을 선수로 치고 나올 것이니, 그것이 해로움의 둘째이옵니다."
"음 ! 과연 옳은말씀이오. 셋째는 ?""셋째는,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백성들은
정작 싸움이 일어나게 되면, 현실적으로 우리보다도 세력이 강한 항우에게 가담하려고 할 것이니
그것이 세번째의 해로움이옵니다.이렇게 이곳 관중에서의 삶은 이해관계가 복잡 다단하오니,
주공께서는 일시적인 불만을 참으시고, 파촉으로 들어가셔서 천하를 새로 도모하도록 하시옵소서.
이제부터라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각오를 다지신다면, 머지않아 천하를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유방은 그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광야군의 말씀을 듣고,
나는 크게 깨달았소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모두가 파촉으로 들어가 설욕의 대업을 만들어 가기로
하십시다."그러자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유방에게 아뢴다.
"저만은 이곳에서 작별을 고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시옵소서"유방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선생께서 나를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가시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이 돌아가시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어려운 지경을 헤쳐나가라는 말씀입니까?"장량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제가 없더라도 패공의 휘하에는 소하대인을 비롯하여 광야군, 번쾌 장군 등등 현사들이 기라성같이
많이 계시므로, 인재의 부족은 조금도 느끼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그러자 소하, 여이기, 번쾌 등이 장량의 손을 움켜잡으며 간청한다.
"저희들은 오로지 선생만을 믿고 대업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선생이 떠나시면
저희들은 어떡하라는 말씀이옵니까 ?"유방도 장량의 손을 움켜잡고 눈물로 만류하는 바람에
장량은 어쩔 수 없이 파촉으로 함께 떠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첩첩 산중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파촉으로 떠나려니 유방의 심정은 처량하기가 그지 없었다.
가도가도 태산뿐인 파촉만리(巴蜀萬里)로 가는 것은 귀양살이를 떠나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니 갈 수도 없는 길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떠나려고 하는데, 홀연 항우로부터 난데없는
호출장이 날아왔다."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즉시 출두하라!"
그렇다면 도대체 항우는 무슨 까닭에 유방을 긴급히 호출한 것일까 ?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유가 있었다.
항우를 부추겨 유방을 파촉으로 쫒아 보내도록 책동한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범증이었다.
말하자면 범증은 유방을 파촉으로 쫒아 보내는 일에 보기 좋게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범증은 이 일에 성공을 하고나서,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오행(五行)으로 점을 쳐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앗차 ! 유방을 파촉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구나 ! )
범증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크게 당황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
그 이유는 이러하였다.유방이라는 인물은 오행으로 따지면 화덕(火德)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유방은 자기 군대의 깃발도 붉은 빛깔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유방이 부임해 가게 될 파촉은 서(西)쪽으로서,서방은 금(金)에 해당한다.
오행에는 <금이 불을 만나면 대성한다(金得火大)>는 점쾌가 있다.
그 점쾌대로 판단한다면, 유방은 파촉으로 가면 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크게 일어날 것이 분명하였다.
(내가 일생 일대의 과오를 범할 뻔했구나.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유방을
파촉으로 보내지 말아야 하겠구나.)
범증은 마음을 그렇게 먹고 부랴부랴 항우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자기가 꾸며 놓은 일을 자기 입으로
번복하기에는 위신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범증은 항우에게 이렇게 꾸며대었다.
"유방은 파촉으로 가라는 왕명을 받들었을 때, 귀양살이를 가는 줄로 알았는지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어쩌면 파촉으로 가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대왕께서는 유방을 직접 부르셔서
확답을 듣도록 하시옵소서."항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직접 물어 보아서, 만약 파촉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떡해야 하겠소 ?"
"만약 자기 입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대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되므로
마땅히 참형에 처해 버리심이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유방을 살려 두었다가는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 같아서, 범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방을 죽여 없애고 싶었던 것이다.
"음 ....., 승상의 말씀을 들으니 과연 그렇기도 하구려. 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를 살려 둘 수는
없는 일이지. 그러면 곧 유방을 호출하도록 하오."이리하여 유방을 긴급 호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사유를 알턱 없는 유방은, 생각지도 않았던 호출장을 받자 적잖이 불안하였다.
유방은 장량을 불러 호출장을 내보이며 물었다.
"항우가 느닺없이 이런 호출장을 보내 왔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히는 것이 좋겠소이까 ?"
장량은 호출장을 세밀하게 검토해 보고 나서 이렇게 대답한다.
"무슨 용무로 오시라는 것인지, 이 호출장만 보아서는 전혀 짐작이 되지 않사옵니다.
그러나 호출장을 받고, 가시지 않게 되면 <명령 불복종>이 될 터이니, 가시기는 가셔야 하겠습니다."
"왜 이런 호출장을 보내게 되었는지, 선생으로서도 짐작이 아니 되신다는 말씀이오 ?"
장량은 눈을 감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입을 열어 대답한다.
"추측컨데, 이번 일도 범증이 한 것 아닌가 싶사옵니다.""범증이 무슨 일로 이런 장난을
친다는 말씀이오 ?"장량이 다시 대답한다."범증은 지략도 비상하지만, 선견지명(先見之明)도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항우의 장래를 위해서는 패공을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사온데, 이번에도 무슨 구실을 잡아서 든지, 패공을 해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닌가 짐작되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불안하였다."나를 죽이기 위해서 부른다면, 내가 가서는 안 될 것이 아니오 ?"
"가시지 않으면, 그 자체로써 <명령 불복종>의 죄가 성립되오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가시기는 가셔야 하옵니다.""그러면 죽음을 각오하고 가라는 말씀인가요 ?"
"거기에 대한 대책은 간단합니다. 패공께서 항우를 만나시면, 항우는 패공을 처벌할 구실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로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그러면 패공께서는 어떤 질문을 받으시든 간에 <모든 것은
대왕 전하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라고만 대답하시옵소서. 그러면 항우는 우직하고도 단순한
인물이기 때문에 어떤 위험도 모면하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고맙소이다. 그러면 선생의 말씀대로 항우를 만나러 가기로 하겠소이다."
유방은 용기를 내어 항우를 만나려고 침주로 향하였다.
항우는 유방을 만나자, 대뜸 다음과 같은 질문을 퍼부었다.
"내가 패공을 <한왕(漢王)>으로 봉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지났건만, 공은 어찌하여 아직도 임지에
부임하지 않고 있소? 공은 파촉으로 떠나기가 싫어서, 패상에 그냥 눌러 있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오?"
유방은 장량으로부터 미리 주의를 받은 일이 있기에, 항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황공하옵게도 신은 한왕에 임명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사옵는데, 파촉으로 가는 것을
어찌 마다하겠나이까. 신은 오직 대왕의 명령에 복종이 있을 뿐이옵니다."
항우는 그 대답을 듣고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바가 있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임지로 속히 떠나가지 아니하고, 아직도 패상에 그냥 머물러 있느냐 말이오 ?"
유방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많은 식구가 먼 길을 한꺼번에 떠나자니,
준비관계로 출발이 다소 지연되고 있으나, 불원간 떠나게 될 것이옵니다."
유방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뜸을 두었다가, 이번에는 머리를 깊이 숙여 보이며 다시 말한다.
"이 기회에, 신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바를 대왕전에 한 말씀만 여쭙고 싶사옵니다."
"무슨 얘긴지 어서 말해 보오.""그러면 한 말씀만 여쭙겠사옵니다. 신은 마치 대왕께서 애용하시는
말(馬)과 같은 몸이어서, 대왕께서 채찍질을 하시면 무조건 앞으로 앞으로 달려 나갈 것이옵고,
만약 대왕께서 고삐를 당기시면 그 자리에 멈춰서서, 다음의 명령을 기다릴 것이옵니다.
그 점만은 신을 의심치 말아 주시옵소서."
유방은 물론 언제까지나 항우의 그늘에서 종신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먼 장래를 위해서는
순간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와 함께, 따르는 아첨은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지극히 흡족스러워하며, 소리를 내어 크게 웃는다.
"하하하, 패공이 자기 자신을 나의 말에 비유한 것은 명담 중에 명담이오. 그러면 속히 돌아가
파촉으로 빨리 부임해 가도록 하오."
이리하여 유방은 죽을 고비를 또 한 번 넘기고, 패상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범증은 유방이 이번에도 무사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또다시 한탄해 마지않았다.
(아아, 항우는 이번에도 유방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 주었으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항우가 워낙 우직하여, 유방의 술책에 번번히 속아 넘어가고 있으니, 이제는 내가 직접 나서서
유방을 죽여 버리기로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장차, 유방에게 천하를 빼앗겨서, 언젠가는 나 역시
항우와 함께 유방의 손에 죽게 될 것이 아닌가 ?)
범증은 유방이 제왕의 기상을 타고난 인물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지금 죽이지 않으면 항우와 자기가
그의 손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방을 죽여 버리기로
결심하였다.범증으로서는 그야말로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하는 결사적 투쟁이었던 것이다.
2-37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