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한통
/ 물빛고은
며칠 전에 전화 한통을 받았다.
번호를 확인 하자마자 뇌리를 스치는 것은
마음의 동요였다.
반가움보다 배신감으로 힘들어했던 7 년 전의 생각으로
잠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족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I m f 때 남편이 경영하던 공장이 부도가 났다.
마땅한 기술도 없는 나는 고민 끝에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시장조사도 하고 자본금을 조달해서 가게를 운영하게 됐다.
억척스럽지도 못 하고 강단도 없는 내가 장사를 할 수 있을 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두 애들을 키우기 위해선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장사라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나는, 그리 노동력이 들지 않을 것 같아
여성복을 파는 작은 양품점을 운영했다.
경험도 없이 시작했으나 가게는 생각보다 잘 됐다.
하지만 살림 하랴 물건 떼러 새벽시장에 가야 하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계절이 분분히 바뀌어 꽃이 피고 져도
그 것을 즐길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이 빠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내 적성에 잘 맞는 천직이라 생각하며 인생 공부를 하고 있었다.
경제관념도 없고 돈도 한 번도 벌어 본 적 없는 내가 가장 아닌 가장노릇을 하면서
빚도 값고 큰 애 대학도 가르치며 40 대 후반기를 열심을 다해 살고 있었다.
가게가 동네에 위치했기에 오고가는 사람들의 작은 사랑방이 되었었다.
하루라도 문을 열지 않으면 어디 아프냐고, 궁금해서 전화가 빛발 쳤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새벽별이 아스라이 빛나고 있었고,
늘 상 커피를 많이 마시니 속이 쓰려, 물 한 컵을 마시고 새벽시장에 가려고 준비를 할 때쯤
갑자기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슨 영문인가해서 문을 열고 보니 가게 단골손님이자 평상시에
친 언니처럼 따르던 그녀(순옥)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찾아왔다
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벌 벌 떨리는 음성으로
“ 언니! 우리 남편이 죽었어요. 빨리 우리 집으로 가요.”
난 너무 놀라서 자초지종을 들을 새도 없이 슬리퍼를 신고 그 집에 갔다.
방문을 여니 그 동생 남편이 벽에 걸린 옷걸이에 목을 매고 숨져 있었다.
난 일단 침착하게 119를 불렀다.
아니 그녀가 몹시도 놀라고 당황해서 나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도 자살한 사람을 처음으로 목격을 했으니
얼마나 무섭고 떨리던지 심장이 뛰고 얼굴이 상기됐다.
아마 지난밤에 사고를 친 것 같았다. 숨은 이미 끊어진 듯 했다.
구급대원들이 와서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이미 사망했다며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옮겨 놓았다.
그녀의 남편도 I m f 로 인해 작은 편물공장을 운영하다 부도를 내고
술로 세월을 보내며 화투짝만 만지며 페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도 살길이 막막해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남은 식솔들은 어쩌란 말인가...
월세를 내며 두 딸을 키우며 빚 까지 지고 있으니 살길이 막막한 집이었다.
툭하면 옷도 외상으로 사고 심지어 애들 차비에 등록금도 빌려가곤 했었다.
장례식에 빈소를 마련했으나 장례비용도 막막했고
딱히 도와줄만한 시댁이나 친정도 없었다.
난 고민을 하다가 내가 다니는 교회 장례부에 전활 했다.
장례부에선 비신자라 도와주기 힘들다며 난색을 표했다.
난 교회에서 마땅히 구제사업을 하는데 신자 비신자 따져가며 하느냐고,
장로님에게 대들기도 했다
의분이 많은 나는 조목조목 그녀의 사정을 얘기하며 설득을 했다.
수석장로님의 제가를 얻어 모든 부담을 교회재정으로
장례식을 무사히 치루게 됐다.
이제 겨우 43 세밖에 안된 그녀의 처지가 참으로 딱했다.
그녀에게 엄마는 강해야 애들을 키울 수 있다며 격려를 했다 .그녀는
조금 넋이 나간 듯 퇴근후엔 술을 마시며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일단 교회에 등록을 해서 애들의 학자금을 조달 받을 것을 권유했다.
다행히 교회 장학위원회에서는 동년배 친구들이 일하고 있어서
두 딸의 등록금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 큰애도 대학을 졸업해서 대기업에 취직을 하고, 아들은 육사에 입학을 해서
우리집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이제 엄마로서 무거운 짐은 조금 내려놓고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남편과 애들의 후원을 받으며 드디어 원하는 학교에 입성을 했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가게를 처분해야만 했다.
동네 가운데서 장사를 하다 보니 외상장사를 안 할 수 없었다.
대부분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주 고객이라 한 달에 한 번 결재를 해주지만
사정을 얘기하고 외상값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며 유대관계를 맺어 논 사람들과의 이별이 쉽질 않았다.
물론 경제적으론 어려운 시기였던 것은 맞지만, 경제도 배우고
인간관계도 배우게 됐으니
나에겐 아주 좋은 피난처였고 삶의 원동력이 된 아주 고마운 사업체였다.
7 년 동안이나 운영했던 가게 문을 닫자니 많은 갈등과 아쉬움이 있었다.
난 그녀(순옥)에게 밀린 외상값과 빌려간 돈 30 여 만 원을 값아 달라고 했다.
그녀는 지금 돈이 없다며 차일피일 미루고 아예 전화도 받질 않았다.
가게에 발을 딱 끊고 뒷길로 다니는 지 한동안 볼 수 없었다.
난 조금 서운 했다.
내가 자기 남편 사고 때 발 벗고 나서서 그리 애쓰고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었건만
배신감과 괘씸한 생각에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그녀의 어려움을 젤 잘 아는 나로선
이해는 하지만, 말 한마디 없이 가게를 멀리하는 그녀의 행위가 괘씸했다.
난 단골손님들과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처분하고 남은 옷가지들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집에는 옷걸이와 마네킹만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녀(순옥)에게 문잘 하나 넣었다.
용기 잃지 말고 그저 애들만 잘 키우라고...
그리고 형편이 낳아지면 송금하라고 은행 계좌번호를 찍어주었다.
그리고 훌쩍 세월이 흘러 다 잊혀 질 무렵
며칠 전 밤에 전화 한통이 온 것이다.
난 깜짝 놀랐다.
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 언니 ! 미안하고 고마워요.”
언니 은혜는 평생 잊을 길 없다면서, 아니 잊은 적 없었다고 울먹였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었다고 사과까지 하니 미운 맘과 야속한 맘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
그리고 은행으로 돈 4 0 만원을 부쳤다고 했다.
큰 애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직해서 벌고 작은 애도 졸업반이라 곧 취직이 되면
생활이 조금 나아질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언니 돈을 갚을 때가 된 것 같아, 전활 했다고 한다.
난 순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원망하며 야속하다고 원망했던 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한 밤중에 걸려온 한통의 전화가 잔잔한 감동의 파문으로
다가왔다.
첫댓글 은혜를 왼수로 갚았다는 얘기일까봐
끝까지 맘 졸이며 봤어요
참 좋은 이웃 이셨습니다.
댓글을 건너 뛰셨으니
제가 달아드립니다.
님도 좋은 이웃이시죠? 라고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랬군요!
도와줄 땐 받을생각 안하면 마음이 편한데~
그땐 저도 아주어려운 시기였느지라.......ㅎ
@장유멋쟁이 그대는 멋쟁이!
전 속 좁은 사람....ㅎ
저도 그땐 사는 게 막막하고 아주 힘든 때였죠~
심지어 울집에서 쌀도 퍼가고 양념까지 갖다 먹을 정도로...
다들 어려운 시기였지만 사별한 젊은 여인에겐 혹독한 사련이었겠지요!
고맙습니다.
생각지도않던 돈을 갚아주었으니....더 고마왔겠죠....
근본적으로 마음이 착한분이셨네요.
그분이 돈을 떼먹을맘으로 발길을 끊었다기보다....
미안해서 차마 못들렸을거같아요.
좋은분과의 우정 고이 간직하시길요...
제가 성격이 주고 받는 거 확실한 사람이라~
그때 당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요~
그래도 은혜 갚는다며
조만간에 이곳에 온다네요~~
스스로 하늘나라 갔다는 소리만 들으면
온 몸에 닭살이 돋아요
머리는 멍해지고요
은혜를 잊지 않으셨
다행이구먼요
가신분은 얼마나 마음이 아팟을까요
@전원일기, 가신분 마음 이해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 생각을 해야쥐
울조카 몇년전에 하늘나라 가면서
유서를 남기고 갔는데
3일 지나면 자기를 잊을수 있다고
참 기가 차더이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많은 사람들을 고통속으로 몰아넣는 것을요~~~
그 때 당시 너무 무섭고
떨렸었지요!
@전원일기, 오죽하면~~~~
그치만 무책임한 행동 아닌가요!
@물빛고은 난제로부터
혼자 도망가는 무책임한 행동이지요,
하지만
의지가 약한걸 어쩌겠습니까,,
@황금이 삼 일이요!!!
참 철없네요~~
먼저가면 남은 사람들은
가슴에 피멍드는데~
@물빛고은 그러게 말입니다
꽃다운나이
28살 사기를 2번이나 당하는 바람에
에고 내가 어떻게 자기를 키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눈물이 나요
울언니도 일하다가 크게 다쳐
딸이 손톱도 깎아 주고 넘 예뻤는데~~~~ㅠㅠ
근본이 바른 사람은 결코 은혜를 잊지는않지요.
도와 주어도 한사코 거절하는 사람도 있구요,
양심적인 사람은 더 도와주고 싶은것이 인지상정,
물빛고은님 존경스럽습니다.
바름를 추구하는 분이시니...
부끄럽네요!
그땐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 많았었지요~
가장들이 많이 이 세상 버리고 떠났다는 뉴스가
속출했으니까요!
순옥씨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글쓴님의 이야기로 옮겨서 잠시 헛갈렸네요,,,ㅎㅎ
사람은 너무 상대하기 힘들면 우선 피하게 되더라고요,
그 입장에서 해결할수 없는 상황은 뻔히 아는데 할말이 없을겁니다,
지금이라도 다 해결 되었으니 다행이네요,
아~
그때 당시엔
누구의 짐이 더 크냐고 물은 다면 당연히 그녀(순옥)의 짐이였겠지요!
하지만 저도 이혼의 위기까지 겪으며 혼란과 고통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저희 가정뿐만아니라 많은 부부들이 위장 이혼 까지 하며 가정들이 헤체되는
시기 였으니까요!
물론 그녀의 절망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 때 상황이 아주 절박했었던 터라 제 얘길 안 할 수 없었답니다.
그녀는,지금은 재혼을 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때는 가정도 많이 무너지고 세상포기하는사람도 여럿됐었죠
힘들다고 혼자 세상버린사람은 불쌍하고도 야속하더이다
미안해서 숨어다녔을 그분마음이 어땠을지 안스럽군요
이제라도 빚갚고 오해풀고했으니 다행이예요
님은 그당시 서운하고 괘씸할만했어요
좋은인연 이어가세요^^
정신 못차리고 술만 먹는 그녀가 한동안 이해가 안 되기도 했었지요!
남편을 잃은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 때 저에게는 40만원이 천금같은 돈이었으니까요!
근데 그녀는 술값은 아깝지 않고 외상값은 안 값고
또 신용도 없어서 사실 관계를 끊고 싶은 사람 순 번중에 1 번 이었답니다....ㅎㅎ
저도 일수돈 얻어가며 힘들 게 장사하던 터라...
매일 일수돈 안 찍어 본 사람은 그 심정 절대루 이해 못 합니다!
물건 힘들 게 떼어노아 이쁘게 디피 해 놓으면 보는 눈은 있어서
그녀(순옥)이 젤 먼저 외상으로 가져 간답니다.
참 얄미울 때도 있었지요!
자본금이 부족하니 외상 가져가는 사람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물건을 신속히 파는 게 목적이니 안 팔 순 없었지요~
그리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선한 끝은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고하잖아요
덕을 쌓으면 반듯이 이웃이 생기고 복이 온다고
세상만사 모든일은 고통의 인내속에서 성숙하게
열매가 익어간다고 양심을 속이지않는 인간이라면 ?
네~
그래서 아무리 부족한 사람도
한번 관계를 맺으면
끝까지 믿어주고 기다려야 한다는 덕목을 배우게 됩니다.
사실 인생살다보면
당장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조금 도와줘야겠지요!
그리고 도움을 받았으면
고마움을 잊지는 말아야 겠지요!
이상순님 !
댓글 감사하구요,
화창한 가을 날 이네요!
즐건 휴일 되시길^0^
잊지않고 늦게나마 갚는 그 마음이 감동입니다.
저는 평생에 남에게 큰돈은 빌려준적 없지만 아주 작은돈이라도 악착같이 받아요.
신랑이 못받는 돈도 제가 나서서 핏대세우며 받아요.
줄돈도 확실하게 주고 받을돈도 확실하게 받자!!.....돈에 흐리멍덩한 사람 참 싫습니다.
그렇죠~
셈이 정확해야 어려울때
단 돈 10만원이라도
빌릴 수 있지요~
댓글 감사해요!!!
어려울 때 도와준 것을 기억하는게
사람의 도리일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뒤 돌아서서 잊는경우가 많다보니...
고맙습니다~
휴일 잘 보내세요!
그렇지요~
감사합니다.
돈보다 사람을 되찾아 즐거우시겠어요. 참 다행이네요.
돈보다 사람이지요~
사실 기대도 안 했었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그대는 진정 대인배 시구려,,,화이팅,,,,,,,,,,,,
그런 과찬을....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