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략에는 황제 헌원이 姜,저,갈,夷의 4개의 종족을 아우르고 하나로 합쳐 華夏族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치우는 본래부터 화하족은 아니었는데 황제헌원이 이들과의 싸움에 이겨 이들을 점령하고 화하족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강,저,갈,이는 모두 황하 중상류와 하류, 강회 사이에 있었던 종족입니다.
치우가 활약했던 이족은 황하하류에 있었던 종족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과연 치우가 우리의 조상과 관련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맥계통의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은 비파형 청동검입니다. 이들 예맥족이 한반도에 흘러들어오면서 선주민인 한족을 지배하면서 세형 청동검을 남김니다.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발전하는데 약 100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요하를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는 전혀 다른 유물이 발견됩니다.
요동은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발견 됩니다.
요서는 중국식 유물인 환형 동검이 나올뿐 비파형 동검이 발견되지 안습니다.
황하유역은 요서의 남서쪽입니다.
그리고 치우가 활약했다는 황하 하류지역에서는 중국식의 환형동검이 발견됩니다.
헌원이 신석기를 사용하고 치우가 청동기를 사용했다면 치우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당연할것 입니다.
하지만 헌원과 치우는 같은 청동기시대의 인물이고 중국식의 환형 동검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만일 치우가 고조선계통의 조상이라면 비파형 동검을 사용 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치우는 우리와 관련된 조상이 아닙니다.
또한 고대의 상,주시대의 중국은 황하 하류지역의 주민을 동이족이라고 불렀고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는 전국7웅의 2개국인 연, 제를 동이족이 세운 국가라 했고 화하 계통은 조,위,한 뿐었습니다.
우리는 연,제를 동이족이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조상이라고 보지 않고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봅니다.
제나라의 관중은 관자에서 동이의 조선을 소개하면서 전혀 별개의 종족으로 여깁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동이족이라고 하면 무조건 우리와 관련된 우리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아는 동이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의 동이의 개념이 확대된 이후의 동이이고 그전의 동이는 중국의 황하하류에 살았던 중국인 입니다.
고대의 중국인은 요동이란 지역도 어떤 종족이 살고 있었는지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진 이후의 동이도 산융,예,맥,숙신,한,왜등 여러 종족이 있었습니다.
이들 여러 종족중 예맥,한만 우리와 관계된 조상이므로 동이라고 해서 모두 우리와 연관시키려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지 않을까합니다.
무조건 우리라고 해서 아니라는것도 문제가 아닙니까? 홍상문명의 청동기 영향은 중국과 산둥지역으로 연향을 주었잖습니까? 비파형동검만해도더욱이 산둥동이족과 요동동이족 각각 있는 문화의 유사성도 존재함도 있는만큼 아니라고 단정할수 없는문제같습니다만.. 더욱이 더욱이 치우가 활동했다는 곳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산둥지역과 북경지역입니다. 왜냐하면 탁록이라는 곳이 북경북방인만큼 거기서 싸웠다는건 결과적으로 그가 동북방쪽의 세력과 중국지역의 세력과 싸웠다는 결론이 되잖습니까? 더욱이 중국인들은 동북공정 이전부터 치우를 이민족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자신들의 조상인 헌원과 싸운 이민족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비파형 동검은 가장 많이 나오는 지역이 요서지역이고 그 다음이 요동, 그 다음이 부여, 평양지역입니다. 나그네님 말대로 화북 동해안지방과 요동, 요서 지방의 동이간의 고고학적 관계 뿐 만 아니라 최근 검토되는 동이족의 신화와 한국신화의 비교-거기서 발견되는 유사성때문에 동이족은 비록 우리의 직계 조상은 아니지만(홍산문화, 하가점문화쪽이 만주, 한반도의 문화와 더불어직계가 아닐까 인식되고 있습니다.)우리와 관련이 있다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두리 뭉실한 의미의 동이족이란 생각은 지양 될 부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시기에 정치혁을 행사하는 국가적 사서 기록이나 유적이 나온다면 더욱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리고 정치화가 되어 가는 사회에서는 이런 중심력이나 영향력은 주변 지역으로 더욱 가시 되기 마련이지요. 현재 요서 지역의 고조선 관련 유물과 대형 석성들이 그래서 더욱 비중있게 와닿고 관심사 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현재 열도에 대해 삼국 시대 그냥 문화적 교류라는 희석된 표현을 많이 씁니다. 물론 정치적 사항만으로 말할수 없는 교류적 부분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를 간과 해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열도가 통일된 정치 왕조가 등장하고 어느 정도 대등한 입장에서의 조선 통신사 같은 문화 교류가 과연 삼국시대 열도의 고고학적 정치체의 수준에서 대등한 교류적 표현이나 이해가 맞을수 있냐는 것입니다. 열도는 국가적 정치체를 증명할수 있는 왕성이나 성곽등을 7,8세기 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열도의 고고학적 엄청난 인력이나 규모에서도- 그런 상황에서 호족의 난립과 우리 삼국유물이 쏟아 지는 시대적 수준에서 단순한 문화 교류라는 식은 맞지 않지요. 백제가 남부에 와서 초기 마한을 어찌 했는지 열도에서도 다르지 않는 상황일 것입니다
철기 시대 만큼 청동기 초기 시대를 활발한 서로 간에 대립이나 정복 활동을 말할수는 없어도 이미 하가점 하층문화에 강력한 정치력이 나와야만 가능한 대형 석성이 한두개가 아닌 상황이고 그 지역이 고조선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상황에서 그 주변 지역 즉 동이족이란 그들 지칭에는 더욱 그것을 상징하는 중심체는 분영 존재했을 가능성은 높을 것이며 이런 앞선 정치국가적 규모에 주변 동이족이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하에 있을 가능성은 높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하가점 하층 문화에 이런 정치력이라면 그 이전 시대의 역사성도 의미가 달라 질것입니다.
첫댓글 이 글은 치우가 우리의 조상일까 에 대한 답글로.. 윗글에 이병도 왈 과는 관련없습니다 ㅎㅎ
고조선 시대 요동과 요서가 다르다???? 좀더 확인 해보시길
무조건 우리라고 해서 아니라는것도 문제가 아닙니까? 홍상문명의 청동기 영향은 중국과 산둥지역으로 연향을 주었잖습니까? 비파형동검만해도더욱이 산둥동이족과 요동동이족 각각 있는 문화의 유사성도 존재함도 있는만큼 아니라고 단정할수 없는문제같습니다만.. 더욱이 더욱이 치우가 활동했다는 곳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산둥지역과 북경지역입니다. 왜냐하면 탁록이라는 곳이 북경북방인만큼 거기서 싸웠다는건 결과적으로 그가 동북방쪽의 세력과 중국지역의 세력과 싸웠다는 결론이 되잖습니까? 더욱이 중국인들은 동북공정 이전부터 치우를 이민족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자신들의 조상인 헌원과 싸운 이민족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중국 스스로가 이민족으로 규정했고 또한 치우의 활동범위인 산둥지역과 홍산문명이있는 그 동이족등과의 문화적 연계성도 무시할수 없는 문제라 봅니다.더욱이 비파형동검만 해도 산둥지역과 가까운 북경지역외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비파형 동검은 가장 많이 나오는 지역이 요서지역이고 그 다음이 요동, 그 다음이 부여, 평양지역입니다. 나그네님 말대로 화북 동해안지방과 요동, 요서 지방의 동이간의 고고학적 관계 뿐 만 아니라 최근 검토되는 동이족의 신화와 한국신화의 비교-거기서 발견되는 유사성때문에 동이족은 비록 우리의 직계 조상은 아니지만(홍산문화, 하가점문화쪽이 만주, 한반도의 문화와 더불어직계가 아닐까 인식되고 있습니다.)우리와 관련이 있다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우리 동이족은 구이족 중의 하나이고, 치우도 구이족 종의 하나이죠. 치우는 묘족입니다.
저렇게 써 놓으니 황제나 치우가 무슨 역사같군요. ㅎㅎ
밀리터리 나그네님.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동이족은 특정 종족집단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당시 중국인들이 동쪽에 있는 각 부족을 통칭해서 부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이족이야 크게 9개 종족이 되는 집단이라는건 알고 있습니다. 여기 처음와서 제가 자료 탐색한게 동이족이고 그전부터 동이족 자료를 모아왔으니까요^^ㅋㅋㅋ
두리 뭉실한 의미의 동이족이란 생각은 지양 될 부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시기에 정치혁을 행사하는 국가적 사서 기록이나 유적이 나온다면 더욱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리고 정치화가 되어 가는 사회에서는 이런 중심력이나 영향력은 주변 지역으로 더욱 가시 되기 마련이지요. 현재 요서 지역의 고조선 관련 유물과 대형 석성들이 그래서 더욱 비중있게 와닿고 관심사 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현재 열도에 대해 삼국 시대 그냥 문화적 교류라는 희석된 표현을 많이 씁니다. 물론 정치적 사항만으로 말할수 없는 교류적 부분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를 간과 해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열도가 통일된 정치 왕조가 등장하고 어느 정도 대등한 입장에서의 조선 통신사 같은 문화 교류가 과연 삼국시대 열도의 고고학적 정치체의 수준에서 대등한 교류적 표현이나 이해가 맞을수 있냐는 것입니다. 열도는 국가적 정치체를 증명할수 있는 왕성이나 성곽등을 7,8세기 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열도의 고고학적 엄청난 인력이나 규모에서도- 그런 상황에서 호족의 난립과 우리 삼국유물이 쏟아 지는 시대적 수준에서 단순한 문화 교류라는 식은 맞지 않지요. 백제가 남부에 와서 초기 마한을 어찌 했는지 열도에서도 다르지 않는 상황일 것입니다
철기 시대 만큼 청동기 초기 시대를 활발한 서로 간에 대립이나 정복 활동을 말할수는 없어도 이미 하가점 하층문화에 강력한 정치력이 나와야만 가능한 대형 석성이 한두개가 아닌 상황이고 그 지역이 고조선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상황에서 그 주변 지역 즉 동이족이란 그들 지칭에는 더욱 그것을 상징하는 중심체는 분영 존재했을 가능성은 높을 것이며 이런 앞선 정치국가적 규모에 주변 동이족이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하에 있을 가능성은 높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하가점 하층 문화에 이런 정치력이라면 그 이전 시대의 역사성도 의미가 달라 질것입니다.
치우가 묘족인게 확실한것도 아니잖습니까? 어떤경우 묘족이 치우를 전통대대로 모셔온것으로 압니다. 사실 묘족이 박해를 피해서 원래 고대 묘족위치하고 현재하고 다르잖습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서요.
저는 치우천왕기 읽고있는데...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