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은 더러 기분좋음을 선사한다.
그다지 티비를 사랑하는 편은 아니지만 더러 공중파던 종편이던 불문하고
정해진 방송국 JTBC의 뉴스와 어느 방송이던 관심있는 음악프로그램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도
가끔은 상식을 늘려줄 프로그램이나 궁금증을 해소해줄 혹은 관심 가질만한 프로그램이 눈에 띄면
작정하고 들여다 보기는 한다.
바로 KBS2의 "대화의 희열"이 그렇다.
정해둔 방송사가 아니지만 개인적인 촉으로 관심권에 들어온지 한참이 되었기도 하고
별 불편 사항이 없는 고로 이유불문 선택되어지기도 했지만
벌써 시즌 시리즈 3번째로 계속 이어가기 프로그램이 된 까닭에 탁월하다로 명명되어 시청하게 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수장 유희열의 토크를 이어가는 방식이나 함께 하는 패널들의 참견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게스트의 대화가
쓸데 없이 번잡스럽거나 수다스럽지 않아서, 와글와글, 시끌시끌이지 않아서 그나마 들여다 보고 있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게다가 대화의 흐름이 산으로 가지 않고 적당히 요점 정리가 되어가며 진행되는 것이
다른 프로그램과의 차이점이기도 하고 소소하지만 은근짜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고품격이기도 하며 정해진듯 정해지지 않은 듯 흘러가는 모양새도 나쁘지 않다.
하여 애정을 갖고 들여다 보는 프로그램이긴 한데 이번 주 목요일 밤을 책임져준 양희은....
거의 동시대인이어서도 반가웠다.
덕분에 그녀의 사연 사연 하나에 "맞아 그랬지" 라거나 "그래 그 시점에 나도 그곳에 있었지"로 점철되는
기억회로가 작동했다.
그녀의 음악적 시작이 가난 때문이었고 생계형이었으며 소녀가장이었다는 것은
그녀를 좋아하고도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 시절에 청년문화를 대표하였던 그녀가
사실은 생존 때문이었으며 딱히 "청년문화"를 대변하는 "청바지와 통기타" 를
나름 모든 청춘과 젊음을 표방하며 내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그 시절에는
개인적으로 충격과 실망감이 겹쳐져 서운한 마음으로 비난의 시선을 보내며 희비가 교차되기도 했었던 그런 기억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으로 여기던 그녀가 청년문화의 산실을 함께 거쳐갔다는 사실에 반가워 하던 기억들이
사실은 청년문화 운운하던, 누군가가 정해버린 허상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녀를 계속 좋아해야 하나로 괴로워하던 시절...
그땐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던 그녀 "양희은"이었다.
그래서 그런 그녀가 부르던 노래는 필수적으로 따라 불러야 했으며 금지곡이 되는 순간에는
더욱더 악이 바쳐 부르기도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그렇게 명곡이 탄생하는 순간들을 함께 공유했다는 사실.
그녀가 말하던 Y-TEEN...명동, 그 시절에 쥔장은 와이틴 소속으로
YWCA에서 당수도를 배우며 학원이라는 잡지에도 인터뷰한 기억도 있고
열정과 에너지와 충실함과 성실로 우리를 가르치던 "황진문" 관장을 잊지 못해 오래도록 찾아다녔던 기억도 있다.
덕분에 자신을 수호하는 일은 물론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를 잡아내는 용감무쌍함이 발현될 기회를 갖기도 했던.
하여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던 치기어린 소녀가 자라 숙녀가 되었어도 여전히 그때 배운 무술이 도움이 되었다.
여하튼 일주일에 한번씩 특활시간을 빙자하여 명동거리들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명동거리는 이미 그 시절부터 개인적인 해방구였으며 청개구리 시절의 여고생이 되는 시점이다.
그 초록 카펫에 쪼그리고 앉아 음악을 듣던 그 시절은 또 얼마나 행복하였던지.
이미 어릴 때 부터 음악을 하고 관련 학교를 들어가 충분히 클래식에 입문을 하여 나름 음악도의 길을 가다가
명동시절과 여고시절에 번쩍 뜨인 또다른 음악세계와 청년문화를 접하면서 방향을 선회할 기회를 갖기도 하였던
그래서 영어는 팝송으로 배워 익히고 그 시절에도 좋아하는 팝아티스트가 오면 반드시 무대를 찾아들곤 하였다.
그헐게 동서양을 접목시키며 강요되었던 고지식과 전통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이었던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를 목청껏 소리높여 부르며 본래 청춘의 가치와 정체성을 찾고자 운명적으로
"청년문화"라는 테두리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또한 그렇게 들락거리며 청개구리 시절을 만끽하면서 마주친 지금은 그랬었지로 회자되는 숱한 통기타 군단들을 잊지 못한다.
가난한 자들의 안식처였던 "청개구리"는 말할 것도 없고 명동성당은 또 얼마나 기적같은 곳이었던지.
그렇게 명동거리를 다니며 지금은 없어진 코스모스 백화점 지하 레스토장에서 맛보던 혀의 즐거움을
온전하게 만끽하게 한 신세계 같았던 서양요리의 대표주자인 돈가스며 함박스테이크는
분기별 등록금을 헌납하고 하사하며 얻은 기쁨이기도 했다....동행했던 친구들은 웬 횡재냐 했지만서도.
물론 그 대가는 엄청나게 커서 말로 표현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명동을 내집 드나들듯이 드나들던 시절은 "하루에 한번은 명동엘 간다"...가 무슨 캐치프레이즈 인양 난무하였고
와중에 방앗간처럼 찾아들었던 "OB'S CABIN"은 그야말로 또다른 경이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하루에 한번에 걸맞는 발길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거리 귀신이 되어 명동거리를 헤매던 기억 속에 중국대사관 근처 레코드 샾이라던가
이후로 활발해진 상권에 북적이던 명동칼국수집과 지금은 없어진 모호텔 커피숍과
2층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압권이었던 카페 "포엠POEM"은
우리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그렇게 싸잡아 다니던 그 시절에 남사친들은 빈약한 주머니 사정에 그야말로 주눅이 든 채 졸졸 따라나서면서도
볼멘소리는 기본이라 "꼭 명동엘 가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하루에 한 번 이라고 했잖아" 티격태격.
그랬다....그 시절에 가진 것 없는 빈 주머니 남사친들을 위해 기꺼이 먹을 것은 기본이요 담배까지 사주면서
그 친구들을 호위무사 보디가드로 동반하고 다녔던 기억이 참으로 애틋하다...다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나?
지금에서야 생각해보자면 그 시절의 청춘이란 것은 참으로 비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친구들보다는 여건이 나았던 관계로 그런대로 해볼만한 일은 죄다 해보고 누렸다 로 추억하기는 한다.
그 시절에 내 눈과 마음을 가득 채웠던 청년문화의 대표주자라고 여겼던 송창식과 양희은...그래서 여전히 그들을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음악천재라고 꼽는 사람 중에 "송창식과 김수철과 김영동"이 있다.
그들의 노래는 무엇으로도 대변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먼저고
이후로도 멋지고 근사한 뮤지션, 아티스트, 보컬들은 많지만 내게는 오로지 3인을 꼽으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것과 애정을 갖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니까 말이다.
어쨋거나 양희은 덕분에 새록새록 생각나는 오래전 기억을 잠시 불러들였다.
다음주 2부에서는 더욱더 흥미로울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이다.
아마도 대서사라고 생각되어질....그저 덕분에 잠시 옛기억 속으로 들어가보니 좋. 았. 더. 라
첫댓글 김영동은 누군지 잘 모르겠네~? 무슨 노래를 불렀지~?
김영동은 지금 생각하니 엄청나게 앞서나갔던 퓨전 국악인이었고
그의 "아마존" 같은 음악은 거의 압도적이기까지 하더라는.
서방이 출장가고나면 밤새도록 듣는 음악이 김영동 음악이었다는 말씀.
이후로 서울대 출신 국악인들이 대접받기도 하였더라는 말임.
@햇살편지 아 삼죽 살던 빠박이 국악인~?
이사간 뒤로는 조용하네요~!
@pinks 그 사람 아니어요.
그는 전라도에서 살고 있다요.
그 국악인은 임동창 입니다....와이프가 이효재였던
@햇살편지 아하~~~! sorry ~!
저도 목요일에 그 프로를 좀 봐야겠네요,,,저도 공부안하고 명동 종로에 다니던 기억이 많이 나네요,,
ㅎㅎㅎㅎ 그러셨어요?
명동, 종로....추억어린 곳이죠.
르네상스도 기억나고.
그런 성장통을 거친 기억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을 터.
그리운 이름 후암동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