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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7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루카 6,1-5
화내는 사람은 화내기 전부터 화가 나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또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이번엔 안식일에 남의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 때문입니다.
과연 바리사이들이 안식을 참으로 지내고 있는 것인지, 제자들이 안식을 지내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도 화가 나 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안식일에도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요?
‘tvN 어쩌다 어른’에서 상담학 전문가 ‘권수영 교수’가 나와 강의한 내용 중 ‘분노 조절 못 하는 아빠의 충격적 비밀’에 관한 것을 소개해드립니다.
경제적으로도 유복하고 자녀들도 잘 성장한 평범한 집의 가장입니다.
근데 이분이 권 교수에게 상담을 받으러 왔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 때문이란 것입니다.
차가 깜빡이 켜지 않고 끼어들면 보복 운전을 하고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휴게소까지 쫓아 들어가 폭력을 행사하여 벌금과 구금, 심지어 감옥까지 갈 정도였습니다.
두 자녀에게 물질적 지원은 충분히 했지만,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두 자녀는 각자 방으로 그냥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분은 “너희가 아빠를 무시하는 거야?”라고 하며 급기야 아들에게 손찌검까지 합니다.
그렇게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고, 이혼하기 전에 상담 한번 받아보라고 해서 권 교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상담하던 중, 어린 시절 두번의 큰 상처를 기억해냅니다.
어렸을 때 바쁜 어머니가 큰아들을 묶어놓고 다녔습니다.
그때 엄청난 공포와 좌절, 분노 등이 자신에게 내재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은 엄마가 외삼촌에게 애가 말을 안 듣는다고 혼내주라고 하였습니다.
외삼촌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흙탕물에 들이박고 숨이 멎어서 죽기 직전까지 가게 체벌하였습니다.
이 두 사건이 그의 심장에 커다란 분노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권수영 교수는 자녀에게 사과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하였습니다.
자녀도 건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권 교수는 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자신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말하면서도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입니다.
아직도 그것 때문에 영향을 받는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자녀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자신이 싫었을 것이고, 그렇지만 그렇게 한 이유를 제대로 보게 되어 마음이 편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더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군대 가기 전 아버지와 단둘이 여행을 갔습니다.
그때 아들이 한 번도 못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아빠, 사실 나 중학교 때 자살하려고 했어. 아빠 때문에. 근데 엄마가 불쌍해서 못 했어.”
이젠 아버지가 폭풍 눈물을 흘렸고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나의 상처를 타인에게 털어놓으면 이젠 나는 그 상처의 주체가 아니라 제삼자가 됩니다.
사실 상처는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내 자아가 받은 것입니다.
그 상처 입은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 믿어온 것이 문제입니다.
두 물통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 물통은 상온이고 한 물통은 들어가서 오래 버티기 어려운 온도입니다.
어렸을 때의 상처를 안고 용서가 안 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다시 그 고통을 느끼기를 두려워합니다.
거의 온천수의 온도의 물에 들어가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1도만 더 높아져도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그 1도의 온도를 높일만한 일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이 표출되는 것이 분노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모든 상처를 다 용서하면 그만이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용서가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용서를 위해서는 ‘피’가 필요합니다.
이철환 작가의 예를 많이 드는데, 태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소매치기하며 사는 청년이었습니다.
동생을 통하여 어머니가 아파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말을 듣고도 병실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담배만 피우다 지하철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한 여자의 핸드백에서 돈뭉치를 소매치기합니다.
몇 달 뒤 동생에게 전화가 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왜 돌아가셨느냐고 묻자 병원비가 없어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태수는 펄펄 뛰었습니다.
돈 없으면 죽어야 하는 나라, 이러니까 내가 이 꼴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동생도 말합니다.
여자친구가 찾아오던 결혼자금만 있었어도 엄마를 살릴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것을 소매치기한 장본인이 자신임을 안 태수는 더는 말을 잊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피가 자신의 심장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얻는 것이 ‘안식’입니다.
자기 심장에 그리스도의 피가 떨어지면 두 가지 큰 효과가 일어납니다.
내가 더 큰 죄인임을 알아 용서하게 되고, 또 그 피가 떨어져 죽은 내가 참 내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자아가 나인 줄 알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문설주에 피가 발라진다고 집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당사자임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그렇게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내가 바로 자아였음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설설 끓고 있던 물에서 나와 그 물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개미가 물고 뜯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집의 문설주였습니다.
상온의 물통이든, 뜨거운 물통이든 들어가 있지 말고 나와야 합니다.
상온의 물도 오래 끓이면 끓습니다.
나와서 제삼자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이 끓든 말라버리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더는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참된 안식입니다.
파라오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끓는 물속에서 빼내 주실 분은 나를 위해 피를 흘린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나의 구원자요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을 얻은 이는 그래서 나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7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6,1-5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롭고 따뜻한 아버지로 다가가신 예수님이었지만, 율법 지상주의에 깊이 함몰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분이 또한 예수님이셨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언제 들어도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그들은 특히 안식일 규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규정들을 셀수도 없이
많이 만들고 나서는, 누가 규정을 어기는지 매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기만 가차없이 잣대들 들이대며 단죄하고 처벌했습니다.
그들의 과도한 가르침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극히 사소한 일도 절대 금지였습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밭갈이, 파종, 수확, 단묶기, 타작, 키질, 선별, 분쇄, 체질, 반죽, 굽기, 글쓰기, 건축, 이사, 점등, 소등 등등.
너무나 웃기는 부분도 수두룩합니다. 안식일에 촛불을 켜는 것은 금지되지만, 촛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손수건을 옷에 달고 사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땅에 침을 뱉는 것도 금지요,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금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같은 규정입니까?
안식일에는 약 1킬로 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가능하나 그 이상 걷은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엿새간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 편안한 몸과 마음을 쉬라는 의미에서 제정된 안식일 규정입니다.
안식일 날 편안한 복장으로 호젓한 산길 3~4킬로 천천히 걸으면 그 얼마나 편안한 휴식이겠습니까?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밀이삭을 추수하는 규정도 꽤나 까다로웠습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이웃집 밀밭에 심어져 있는 밀 이삭을 그 자리에서 잘라 먹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낫을 대는 것을 금지되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잣대는 점점 수위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배배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처럼 관찰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신명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도 아닌데, 마구잡이로 들이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2)
고지식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날카롭습니다.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5-8)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수는 참으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생하는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한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속박하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규정이 되고만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근본 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모릅니다.
기쁨 없는 봉사 역시 위험합니다.
자비없는 선행의 실천 역시 부담입니다.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역시 행복한 얼굴로 행해야 마땅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강론>
(2024. 9. 7. 토)(루카 6,1-5)
<자비 없는 종교는 폭력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1-5)”
1)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2,1).
예수님께서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한 일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것도,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그랬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심심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의 기준으로는, 배가 고파서 그랬더라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탈출기와 신명기의 ‘십계명’을 보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탈출 20,10; 신명 5,14).
밀 이삭 몇 개를 뜯어 먹은 것을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리사이들은 그것도 곡식을 추수하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는데, “밀 이삭 몇 개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가 바리사이들의 엄격하고 철저한 율법 준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엄격하고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2) 바리사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좋은 예가 마카베오기 상권에 있습니다.
“......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도 않고 자기들의 피신처를 봉쇄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한 채로 죽겠다. 너희가 우리를 부당하게 죽였다는 것을 하늘과 땅이 증언해 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 갔다.
죽은 이는 천 명이나 되었다(1마카 2,36-38).”
천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군이 공격하는데도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죽었습니다.
<최소한의 방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안식일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들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며, 서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형제들이 한 것처럼 한다면, 우리가 모두 목숨과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이민족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이제 곧 그들은 이 땅에서 우리를 몰살시킬 것이다.’
그날에 그들은 이렇게 결의하였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1마카 2,39-41)”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이유로 그냥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안식일이라고 해도 전투를 해서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3) 마르코복음을 보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르 2,27).
안식일 계명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들은 전부 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살리기 위해서 내려 주신 것이지, 억압하고 죽이려고 내려 주신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항상 ‘법’보다 ‘사람’이 위에 있습니다.>
사실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명령의 본래 취지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해야 하는 종들을 쉬게 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4-15).”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도 굶을 걱정이 없는 사람도 있고,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무시하고 양쪽에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씀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 즉 메시아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 활동이 안식일 규정 적용의 기준이라는 것, 즉 안식일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마태오복음을 보면,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태 12,7).
자비 없는 법, 자비 없는 종교는 폭력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