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the 4·3 Resistance in Cheju-Do
- especially on Activities of the Cheju Committee of South Korea Labor Party -
Yang Jeong Sim
제주4·3항쟁에 관한 연구
-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중심으로 -
양 정 심
<차 례>
Ⅰ. 머리말
Ⅱ. 8·15 해방 - 1947년 3·1시위 직전의 제주도 상황과 조선공산당 활동
1. 8·15 해방 - 1947년 3·1시위 직전의 제주도 정치·사회 상황
2.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1) 조공 제주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관계
2) 조공 제주도위원회의 활동
Ⅲ. 1947년 3·1시위 - 제주4·3항쟁 발발 직전의 제주도 상황과 남조선노동당 활동
1.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와 1947년 3·1시위 및 3·10총파업
1) 제주도당, 민전의 결성
2) 3·1시위 및 3·10총파업
2. 미군정·우익청년단체의 공세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대응
Ⅳ. 제주4·3항쟁과 남조선노동당
1. 제주4·3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2.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주요인물과 조직
3.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와 무장투쟁전술
Ⅴ. 맺음말
Ⅰ. 머 리 말
8.15 해방과 함께 우리 민족은 민중의 생활을 억압하였던 반봉건적 사회경제 구조를 청산하고 자주적 독립국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소 분할 점령으로 남한에 들어선 미국의 정책은,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추진해 나가던 남한 민중들의 민족적.계급적 요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과 미국의 비호속에 성장한 이승만과 한민당 극우세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려 하였고 5.10단독선거를 추진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중간파와 南朝鮮勞動黨(이하 南勞黨) 세력은 선거를 보이코트 또는 파탄시키려 하였으나 실패로 끝났고 남과 북에 단독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한반도는 끝내 분단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와 제주도민은 5.10단선을 저지.파탄하고 통일독립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였고 그 결과 제주도는 단선을 저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원호를 받는 남한단독정부가 들어선 이후 경찰.경비대.우익청년단의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8만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항쟁에 대한 언급은 40여 년 동안 철저히 금기시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때문에 제주4.3항쟁을 한국현대사속에 올바로 자리매김 할려는 학계의 연구도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제주4.3항쟁을 다루고 있는 연구로는 김봉현.김민주와 김점곤의 글, 그리고 양한권, 박명림의 정치학 석사논문이 있다.
김점곤은 4.3항쟁이 일어난 원인을 남로당의 무모한 투쟁노선때문이라고 파악하면서 당시 한반도를 규정하고 있던 미군정과 우익의 탄압 그리고 미국의 책임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4.3항쟁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인 김봉현.김민주는 4.3항쟁을 미제국주의에 대항한 반미자주화 투쟁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당시의 좌익세력의 역량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을 유의해서 본다면 일본으로 건너간 4.3항쟁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되었기 때문에 1차적 자료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양한권의 논문은 4.3항쟁의 배경만을 다루고 있으므로 항쟁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박명림은미국의 대한정책과 중앙과 제주도의 상황을 유기적으로 분석하면서 국내의 연구로는 처음으로 4.3항쟁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외에도 고창훈, 김창후의 글이 있는데 이들 제주지역 학자들은 증언과 현장 채록 등으로 4.3의 전모를 밝히려고 하였지만 제주도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나온 濟民日報의 기획물인 '4.3은 말한다'는 방대한 취재와 새로운 사실 발견 등 4.3의 전모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외국에서 나온 논문으로는 존 메릴(John Merril)의 글을 들 수 있는데, 메릴은 4.3항쟁을 좌우익의 대립으로만 파악한 채 미국의 정책과 역할은 간과하고 있다.
위와 같은 그동안의 연구성과는 비교적 4.3항쟁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으나 정작 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연구 논문은 없다. 본논문은 위와 같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제주4.3항쟁의 주도세력이었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일반제주도민과 결합해 나가는 과정과 항쟁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당시 남로당의 비합법적 활동의 특수성 때문에 제주도위원회의 활동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문건이나 자료가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므로 인하여, 본 논문에서는 항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의 증언을 많이 참고하였다. 물론 증언자는 현재의 자기상황에 따라 과거의 경험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증언을 사용하는 데는 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1차자료가 전무한 지금의 상황에서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은 대단히 유용하다고 여겨진다.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Ⅱ장에서는 8.15이후 1947년 3.1시위 직전까지의 제주도상황과 朝鮮共産黨(이하 朝共) 濟州委員會의 조직과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南勞黨 濟州道委員會가 3.1기념대회와 3.10총파업 등 대중투쟁 과정속에서 제주도민과 어떻게 결합해 나갔는가를 다루고자 한다. Ⅳ장에서는 南勞黨 濟州道委員會가 4.3이라는 무장투쟁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규명해보자 한다. 그리고 무장투쟁노선을 채택하고 이를 전개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 대한 평가를 해보고자 한다.
Ⅱ. 8·15 해방 - 1947년 3·1시위 직전의 제주도 상황과 조선공산당 활동
1. 8·15 해방 - 1947년 3·1시위 직전의 제주도 정치·사회 상황
일제의 항복이 발표 결정되었으나, 제주도에 남아 있던 일본군이 철수하기 시작한 것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68일이나 지난 1945년 10월 23일부터였다. 제주도는 아직 일본군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조직 경험과 방법을 토대로 자치적인 치안조직 및 행정.경제조직의 결성에 착수하였다.
우선 도민을 방어하기 위한 자위기관으로서 자주적으로 청년대나 보위대를 편성하였으며, 관공서, 학교, 기업체 등에서는 '--- 관리위원회' '--- 복귀위원회'를 만들어 도민들의 손으로 접수.관리.운영되었다. 이를 모태로 45년 9월 10일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吳大進)가 결성되었다.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시작으로 각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마침내 건준의 발전적 해체로 9월 22일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결과 제주도는 1945년- 46년 사이에는 인민위원회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다.
이것과 병행하여 청년.부녀.문화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림면 청년동맹의 결성을 위시하여 9월말에는 각면의 청년단체를 총망라한 통일기구로서 '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가 조직된다. 10월초에는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1928년)에 연루되어 투옥된 바 있던 金正魯가 주도하였다고 한다. 연말에 이르기까지 부녀위원회, 교육자동맹, 소비조합, 관리조합, 협동조합, 제주문화협회 등 각종 외곽단체가 광범위하게 조직되었다.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한 것은 해방된지 44일만인 45년 9월 28일 이었고 실질적인 군정업무를 담당할 제59군정중대가 도착한 것은 11월 10일 이었다. 이들은 들어오자마자 일제하 제주도청으로 사용하였던 건물에 그대로 군정청을 설치하고 군정장관에 스타우드 소령, 법무관 존슨 대위(차기 패트릿지), 정보관 실크 중위, 공보관 라크우드 대위, 재산관리관 마턴 대위로 미군정 관리를 구성하여 군정업무를 실시하였고 포고령 제1호에 따라 붕괴된 일제통치기구를 재수립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본질상 일제식민지 지배기구의 계승이었다.
59군정 중대는 도착후에도 내적으로는 준비부족과 인원부족으로, 외적으로는 인민위원회의 힘이 강력했던 관계로 통치업무를 수행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인민위원회에 대해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59군정중대가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행정기관,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군정은 1946년 8월 1일 제주도를 道로 승격시키면서 우익의 입지를 넓혀주었고 동시에 인민위원회의 해체를 위해 좌익계열을 공개적으로 탄압하였다. 즉 도내의 물리력을 군수준에서 도수준에 맞게끔 법적.제도적으로 확대 강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의 도승격은 단순한 행정적 의미 이상의 정치적 결정이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갈등 위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중첩되면서 도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 갔다. 8.15 당시 제주도는 본토 다른 지역과는 달리 소작농의 비율이 매우 낮았다. 농민의 대부분은 자영농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농촌 대부분의 농지가 밭이었고 토지 생산성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절대적 빈곤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농업은 계속된 흉년으로 인하여 그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있었고, 빈농들의 보조적인 경제활동인 수산업 어획고 또한 38선 이북으로부터의 재료공급이 두절됨에 따라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에 있었다. 게다가 일제시기에 해외로 이주했던 도민들이 대거 귀환하면서 도민의 실업률이 급증하였다. 생활필수품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도내에 유통되는 상품은 귀환자가 반입하여 온 일본상품 및 미군정에 의하여 분배된 미국 상품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46년 8월 1일 도제가 실시된 후, 도제승격에 따른 각종 부담 잡세가 신설되거나 증가하여 도민의 부담은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미군정은 "대일교역 및 일본상품 유통은 불법"이다라는 조취를 취하여 제주도 경제를 더욱 위축시켰다. 특히 6만명에 이르는 귀환인구로 식량난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이 와중에서 실시된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은 도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인민위원회는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에 맞서 미곡수집거부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도민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한 미곡수집저지의 선전활동과 거부운동에 대해 민중들은 폭넓은 지지를 보냈으며, 수집 관리를 집단구타하거나 마을별로 거부하기도 하였다.
46년산 추곡에 대한 지역별 수매실적을 보면 전국적으로는 69.5%가 이루어진 반면에 제주도는 0.1%를 기록하여 추곡수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과 더불어 밀무역을 둘러싼 모리배와 결탁한 단속기관의 뒷거래 행위는 도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악화시켰고 이때에 이르러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미군정이 일제때만도 못하다'는 개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편 道制 실시이후 군정당국은 강화된 물리력을 이용하여 인민위원회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46년 말까지만 하더라도 미군정과 좌익의 대립 정도는 육지부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덜한 편이었다. 제주도 좌익세력은 46년말 전국을 휩쓴 '10월 인민항쟁'에도 직접적인 참여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해 10월말에 있었던 남조선 입법위원 선거는 군정 연장의 음모이자 남조선 단정수립 기도라는 이유로 중앙의 좌익세력이 전적으로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경우에는 참여를 결정, 선거에서 2명의 좌익계열 인물을 당선시켰다.
2.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1) 조공 제주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관계
8.15직후 제주에서 최초로 결성된 정당조직인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이하 朝共 濟州島黨)는 1945년 10월 초 제주읍 한 민가에서 조직되었다. 이날 회의에는 金正魯, 趙夢九, 文道培, 金 煥 등 일제하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해왔던 20여명의 인물이 참석하였다. 회의는 金正魯가 주도하였고 당 지도부의 구성에 관해서도 김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각 참가자는 각 면 지부를 결성할 것을 결정한 다음 산회하였다.
당시의 조직구성과 주요간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도당 서기는 金正魯였고 남로당으로 개편되어서도 당을 주도해 나갔다. 김정로는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바 있으며 8.15를 맞이하여 목포에서 건준 결성에 참가한 후 吳大進과 함께 제주도로 돌아와 제주도 건준 결성을 주도하였던 인물로 당과 인민위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이 밖에 조공 제주도당의 주요 인물로는 安世勳(조천면), 金 煥(조천면), 文道培(세화면), 趙夢九(제주읍), 吳大進(대정면), 金漢貞(안덕면), 李辛祜(대정면), 李運芳(대정면), 金容海(애월면 하귀), 金正魯(제주읍), 文在珍(제주읍), 夫秉勳(조천면 화북), 宋泰三(서귀포), 李道伯(서귀포) 등을 들 수 있다.
조공 제주도당은 1931년 5월 강창보, 이익우, 오대진, 김한정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가 32년 '해녀사건'으로 일경에 의해 적발되어 해체되었던 재건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의 후신으로 볼 수 있다. 제주야체이카는 31년 5월 결성모임에서 "현재 조선공산당은 존재하여 있지 아니하나 장래 재건이 되면 정식으로 연락을 취할 것"을 전제로 하여 당의 세포를 결성하고 아울러 당 규율 및 입당 자격을 정하였다. 그리고 각 면, 각 리 단위에 야체이카를 구성하여 중앙야체이카의 통제하에 두었다.
야체이카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김한정, 오대진 , 문도배, 오문규, 김유환, 고운선, 이신호 등은 8.15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야체이카 조직 즉, 각 지역의 당의 세포가 8.15후 당의 재건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는 검증을 필요로 하지만 인민위원회, 당의 외곽조직인 청년동맹 등 각종 단체가 해방을 맞아 신속히 결성될 수 있었던 데는 이 조직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재건된 조공의 당원 가입은 매우 엄격한 심사를 거쳐 엄선되었다. 당원이 되려면 일단 친일전력 여부에 대한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정당원 2명의 보증이 있어야 되는데 이런 절차를 통과한 다음에도 6개월 동안 준당원의 과정을 거쳐야 정당원이 되었다. 따라서 당원수는 엄격히 제한되어 결성직후에는 100여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조공 제주도당은 당원을 급격히 확장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제주도에서는 사회주의 세력 이외의 정파는 미약했고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던 사회주의 세력은 도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조공 제주도당은 조선공산당의 이름을 내세워 활동하기 보다는 대중조직인 인민위원회 활동에 주력했으며 청년동맹 등의 외곽단체를 통해 대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조공 제주도당 조직원들은 건준과 인민위원회 조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제주도당은 10월 초에야 결성되었기 때문에 9월 10일에 조직된 건준과 초기 인민위원회(9월 22일 결성) 활동에는 조직적 차원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건준이나 초기 인민위 활동에 개별적으로 참여하였지만 그들간에는 이미 이념상의 또는 활동경력에서의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에 쉽게 결합할 수 있었고 그들의 의견은 보다 강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건준조직과 인민위조직에서 보다 확실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도당이 결성된 이후부터는 인민위원회에 프락치를 파견하는 형식으로 당의 지도력을 관철하며 인민위 활동을 주도해 나갔다.
물론 인민위원회는 통일전선적 조직체로 구성원 가운데는 당원 뿐만아니라 지역의 유지, 명망가, 심지어는 전직 일제 관료들까지 포용한 다양한 성분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지도하고 이끌어 나갔던 세력은 조공이었다. 도인민위 위원장 오대진을 비롯하여, 총무부장 김정로, 치안부장 김한정, 산업부장 김용해, 집행위원 김시탁, 조몽구, 현호경 등 도인민위의 주요 간부 대부분은 조공당원이 맡고 있었다. 인민위 위원장은 오대진이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조공 도당서기였던 김정로에게 있었다.
인민위와 더불어 조공의 정책과 노선을 일반대중에게 관철시킨 것은 청년조직인 '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위원장 文在珍)'였다. 청년동맹은 45년 9월말에 결성된 건준청년동맹이 중앙의 '전국청년단체총동맹'에 가입함에 따라, 건준청년동맹을 모태로 하여 45년 12월 10일 결성되었다. 청년동맹은 도내 12개 읍.면에 전부 면청년동맹을 결성하였으며, 169개 부락에 거의 리지회를 두고 있었을 정도로 단일조직으로는 도내에서 가장 많은 수의 맹원을 갖고 있었다.
청년동맹은 겉으로는 독자적인 대중단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해당지역의 인민위원회의 지시와 통제를 받았다. 즉 중앙과 도청년동맹의 통제보다는 해당 지역 인민위원회의 통제를 강하게 받았다. 인민위원회의 실질적 활동은 주로 청년동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조공과 인민위, 청년동맹의 관계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표2>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와 외곽단체의 관계
사회주의 세력이 제주도의 사실상의 정부라고 일컬어지는 인민위원회를 주도해 나갈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이들이 일제하에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인 유일한 세력이었으므로 도민들이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세력의 항일운동의 조직적 경험은 8.15후 건준과 인민위가 신속하게 결성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도민들은 사회주의라는 사상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항일 운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혈연과 지연으로 얽힌 제주사회의 특수성 또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개인적인 명망성을 그들이 속한 조직에 대한 도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나타나게 했다.
그리고 8.15 직후 6만여명에 이르는 일본으로부터의 귀환자는 사회주의 세력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 일본에서 저임금과 민족차별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으면서 계급의식을 갖추고 노동운동에 직접 참여한 귀환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전형적인 농촌사회였던 제주도에 노동자적 의식이 퍼지고 일정정도 사회주의 운동이 확장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당은 계급운동을 벌여나가기 보다는 인민위원회라는 통일전선적 대중조직을 통해서 자주적 국가수립이라는 당면과제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제주도당의 운동 노선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의 경력과 함께 이들의 활동이 제주도민의 지지를 받게 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2) 조공 제주도위원회의 활동
조공 제주도당의 주요 정치활동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와 입법의원 선거 투쟁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우익의 반탁투쟁을 민족분열적 행위로 규탄하고 민족통일전선을 주장하면서, 적어도 1946년 1월 1일 오후 2시까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월 2일에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은 조선민족해방을 확보하는 진보적 결정으로서, 이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고 표명하였고, 같은 날 조공은 중앙위원회의 명의로 이를 지지하였다. 이와 같은 신탁통치에 대한 조공의 갑작스런 입장 변화로 인하여 지방에서는 인민위원회나 공산당 조직에서 주관하여 반탁대회와 삼상회의 결정 지지대회가 잇달아 일어나는 등 많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제주도에서도 중앙의 결정과 달리 1946년 1월 5일 도당의 지령에 의해 각 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신탁반대궐기 대회가 열렸다. 제주읍내에서도 2만 관중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북국민학교 교정에서 반탁대회가 열렸다. 중앙에서는 이미 3일전에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지지대회를 가졌는데도 이틀후에 제주도에서 반탁대회가 열린 것은, 삼상회의의 긍정적인 부분이 알려지지 않고 다만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 5년제 실시라는 부분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제주도당을 비롯한 인민위 등 좌익세력은 삼상회의 지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처음에 도민들의 혼선을 가져오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하였으나 부락내 세포원을 통한 해설작업 등의 노력으로 삼상회의 결정지지운동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 결과의 이면에는 삼상회의 결정 그 자체보다 인민위로 대변되는 좌익세력에 대한 제주도민의 신뢰감이라는 부분이 더 많이 작용하였다
조공 제주도당은 '10월 인민항쟁'에는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그해 10월말에 있었던 입법의원 선거에는 참여하였다. 1946년 10월말 입법의원 선거를 군정연장의 음모이자 남조선 단정수립 기도라는 이유로 중앙의 좌익세력이 전면적으로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경우는 참여를 결정하고 2명의 좌익인물을 당선시켰다.
제주도당이 당중앙의 선거 거부에도 불구하고 당중앙의 양해도 없이 도당이 선거에 참여하게 된 경위를 이운방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미군정의 하수기관인 입법의원의 창설에 반대하고 따라서 의원선거 역시 보이코트 한다는 것이 우리 진영이 기본입장이었으나 우리 제주도에서는 뜻하는 바 있어 이 기회를 역이용하여 우익의 진출을 막고 선거를 무효화함과 동시에 우리의 힘을 과시하는 효과를 거두어 보자는 의미에서 입법의원 선거투쟁에 돌입했었다. 서울 중앙에 대해서는 차후에 우리의 진의를 해명하면 대체로 양해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제주도의 입법의원 선거 참여 여부는 제주읍당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제주읍당이 대정면당에 선거 참여를 주장하는 문건을 보냈고, 그로부터 며칠후가 되자 도당으로부터 읍당의 것과 마찬가지 취지로써 입법의원 선거투쟁에 착수하라는 지령이 하달됨으로써 제주도에서 선거투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입법의원 선거는, 선거방법과 선거일은 정하지 않은 채 지방실정에 맞춰 지방장관에게 일임되었는데, 선거는 10월 28일에서 30일 사이에 진행되었다. 제주도에서는 10월 말에 실시되어 좌익계 인물인 文道培(구좌면인민위 인원장)와 김시탁(조천면인민위 문예부장)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1946년 12월 10일까지 마감된 입법의원 등록을 하지 않고 12월 12일 입법의원 개원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민전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3상회의의 충실한 수행만이 민족독립의 유일한 길" 이라며 사퇴해 버렸다.
제주도당의 입법의원 참가는 우익의 진출을 막고 선거를 무효화하는 동시에 좌익의 승리가 전도, 나아가 전국에 확산되는 선전효과를 거두자는 데 있었다. 그래서 즉각적인 거부선언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제주도당은 2, 3일의 시간여유를 두어 선전효과를 거두는 것과 중앙에 제주도당의 진의를 해명함과 동시에 그자리에서 당선거부를 발표하는 이중의 효과를 기대하였다. 이 입법의원 참가 목적은 일정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11월 4일의 입법의원 개원일이 연기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상경이 늦어졌기 때문에 좌익도 입의에 참가했다는 미군정과 우익측의 선전을 가져오는 역효과도 초래하였다.
그리고 당중앙의 거부방침에도 불구하고 입법의원 참가라는 제주도당의 결정은 조직규율상 항명에 가까운 것으로 일종의 반당적인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당은 입의 참가는 입법의원의 창설을 반대한다는 근본원칙에 위배됨이 없이 다만 선거투쟁에 국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앙 보이콧트와 별반 다름이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는 제주도당이 중앙당과의 관계에서 일정정도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러한 관계는 4.3봉기 때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조직의 정식계통으로 볼 때 이것은 당조직의 이상을 뜻하는 것으로 중앙이 제주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읍당의 결정은 형식상 적어도 도당의 결정을 받고 도당을 통해 하달되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읍당에서 면당으로 횡적 연락을 했다는 것은 당시 제주도당이 미약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제주도당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앙의 통제를 일정정도 벗어났다는 것은 제주도당이 4.3봉기라는 무장투쟁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게 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Ⅲ. 1947년 3·1 시위 - 제주 4·3항쟁 발발 직전의 제주도 상황과
남조선노동당 활동
1.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와 3·1시위 및 3·10 총파업
1) 제주도당, 민전의 결성
1946년 11월 23일 중앙에서 공산당.인민당.신민당 등 3개 좌익정당의 통합으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됨에 따라 조공 제주도당도 '남로당 전남도당부 제주도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조선공산당을 제외한 다른 좌파 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중앙에서처럼 노선대립이나 정당조직간의 통합과정을 거치지 않고, 조선공산당 지부조직이 중앙의 정치변화에 맞춰 남로당으로 개편되는 명칭변경 과정만을 거쳤다.
조공 제주도당 당원들은 1946년 12월 조천면 김유환의 집에서 긴급회의를 갖고 '남로당 전남도당부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제주도당의 위원장은 安世勳, 조직책은 趙夢九였다. 이 시기 조직과 구성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남로당으로 개편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공의 지도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당의 주요 간부들의 교체가 이루어 지는 것은 3.1시위 이후 당지도부의 검거로 조직 개편이 불가피해지면서 부터이다.
합법적 정당으로 미군정에 등록한 남로당은 대중정당의 형식을 취하면서 당원을 늘리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남로당은 10월 항쟁의 여파로 인한 당조직의 정비.미소공위 재개에 대응할 당세확장을 위해서 많은 인적자원이 필요하였다.
제주도당 또한 당의 주요활동이 대중조직 사업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47년 초에 당원배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민전, 민청, 부녀동맹 결성 등 외곽조직의 확산과 함께 추진되었다. 이무렵 남로당 대정면책을 맡았던 이운방의 증언에 따르면 "대정면의 경우 당원이 25-30명에 불과했으나 47년 3.1대회를 앞둔 2개월전 60명 정도로 늘어났다"고 한다. 당원배가운동은 당원 한 사람이 비당원 한 사람을 끌어들이는 책임제로 진행되었는데 한달 정도의 짧은 기간동안에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당원배가운동이 수월하게 이루어진 주된 요인은 미군정의 실정에 실망한 일반 대중이 그 대안을 남로당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47년 1단계 당원배가운동 때만 하더라도 사람늘리기식이 아니라 사상이 확실한 사람을 입당시켰기 때문에 당원확장운동이 당의 질적인 저하를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1947년 2월 23일 도.읍.면 대의원 3백명과 2백명의 도민이 모인 가운데 조일구락부에서 결성되었다. 이때 선출된 민전간부진은 의장단에 안세훈, 이일선(관음사주지), 현경호(제주중교장), 부위원장 김용해, 김택수, 김상훈, 오창흔, 사무국장과 조직부장에 김정로, 선전부장 좌창림, 문화부장 김봉현외 31명의 집행위로 구성했다.
서울에서는 민전이 1946년 2월 15일에 결성되었기 때문에 제주도 민전 결성은 중앙에 비해 1년이 늦고 있다. 이것은 제주도에서는 좌익세력 이외의 다른 세력은 미약하였고 무엇보다도 인민위가 민족민주세력을 망라한 통일전선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주에서의 민전결성은 중앙의 정치변화에 맞추어 명칭만 변경한 것에 불과했다. 민전결성 이후에도 면.리 단위에는 인민위가 계속 존재한 곳이 많았다.
남로당의 외곽단체로 대중투쟁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선민주청년동맹은 청년단일전선을 목표로 중앙에서는 1946년 4월 25일 결성되었지만 제주도에서는 9개월 후인 47년 1월 12일에 결성되었다. 제주도 민청은 1947년 1월 12일 오전 10시 조일구락부에서 결성되었는데 도민청은 중앙민청의 강령을 채택하고 위원장에 金澤銖를 선출하였다. 청년동맹을 기반으로 1947년 1-2월에 걸쳐 결성된 읍.면 민청은 기존의 리청년동맹을 바탕으로 곧 마을까지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민청은 인민위원회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함으로서 사실상의 활동이 쇠퇴됨에 따라 인민위원회의 통제를 받던 청년동맹과는 달리 자체적으로 도 → 읍.면 → 리 → 반으로 이어지는 조직체계를 구축하였다. 각 면 민청위원장들도 청년동맹보다 진보적인 인사로 바꾸어진다.
그러나 민청은 미군정이 1947년 행정명령 제2호로 민청을 불법단체로 지목하여 해산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중앙에서는 47년 6월 6일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으로 재조직하게 된다. 제주도에서도 민청이 조직된 지 6개월 만에 해산되어 47년 7월경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위원장 : 姜大錫)로 개편되었다.
민청과 민애청의 주요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로당원으로서 민청은 남로당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이후 이들은 4.3항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김평원은 도군사부 간부로 송태삼은 서귀면 군사부장, 강대석은 남로당 청년부 책임자로 각각 활동하였다. 조천면의 김완배는 당 농민부장, 김대진은 인민유격대 부사령관이었으며, 김의봉은 유격대의 중심인물로서 49년 이덕구가 체포된 후 유격대 사령관이 되었다. 특히 민애청은 조직원이 청년조직이라는 특성상 당의 전투적 전위대로서 활약하였다. 당시 학교내에서도 민청, 민애청이 있었고 조천중학원의 경우 학생들 70-80%는 직접 도당의 지시를 받을만큼 당의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다. 학생들은 삐라와 벽보 붙이기 등 선전 활동에 동원되었고 민청, 민애청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4.3 발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당시 조직표를 보면 47년 3.1대회 이후에 학생부가 신설되어 선전부, 조직부와 동등한 위치에 놓일 정도로 학생들의 활동은 당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민청과 더불어 면.리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게 조직된 부녀동맹도 47년 1월 15일에 결성된다. 위원장에는 김이환, 부위원장에는 고인선, 강어영이 선임되었고 고덕순을 비롯한 80여명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주도 부녀동맹 결성은 전국에서 가장 늦게 이루어졌지만, 부녀동맹이 결성되기 이전에도 부녀동맹이라는 명칭은 아니더라도 여성조직(부녀회 등)이 제주도 전역의 읍과 면에 조직되어 있었다. 부녀동맹으로의 개편은 보다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여성운동에 매진할 수 있는 조건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였다.
봉건적 가부장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었던 여성들은 주로 사회주의 운동가들에 의해 설립된 야학을 통해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었다. 특히 여성들은 일부일처제의 확립으로 봉건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남성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등 좌익이 제시한 여성해방의 전망 때문에 남로당의 지지기반이 되었고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2) 3·1시위 및 3·10총파업
1947년에 이르러 남로당은 조직정비를 서두르는 한편 대중투쟁의 핵심과제를 미.소공위의 재개 촉구에 두고 이를 추진해 갔다. 이에 따라 남로당은 제28주년 3.1절이 다가오자 3.1절을 미소공위의 재개 투쟁과 결부시켜 기념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제주도에서도 2월에 접어들자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진영은 3.1절 기념대회를 본격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2월 17일에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교단체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석하여 '3.1기념행사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이 과정에서 민전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안세훈, 김정로를 비롯한 30여명의 발기로 민전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2월 23일 민전이 결성됨에 따라 3.1기념 행사는 민전의 주도하에 준비되었다. 그러나 지역단위로 갔을 때는 민전 결성이 안된 지역이 대부분이어서 면단위 기념식은 '행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미군정은 3.1절이 다가오자 전국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제주도에 2월 23일 충남.북 응원경찰 100여명을 증파하는 등 전국적으로 긴장관계가 고조되었다. 또 제주 도군정과 경찰은 시위는 절대 불허한다는 방침 등 4가지 사항을 발표함으로써 3.1절 기념행사를 사실상 허용하지 않았다.
위와 같은 긴장된 상황속에서도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개최된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는 3만여 명의 도민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고, 제주읍의 행사와는 별개로 한림, 대정, 안덕, 중문, 서귀, 남원, 표선, 구좌 등지에서도 수천 명이 모여 "제주도 개벽이래 최대인파가 참석했다"고 할 정도로 도민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치루어졌다.
3.1절 기념대회는 민전의 주관하에 개최되었지만 실제로는 남로당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각 읍.면에서는 인민위, 민청, 부녀동맹, 기타 각종 단체 및 직장 대표로 3.1기념 준비위원회를 즉시 조직할 것. 준비위원회에는 동원부, 선전선동부, 준비부를 둘 것 "등 12개항의 투쟁방침을 정하고 하부기관과 각 외곽단체에게 시달하였다. 2월 20일에는 '3.1운동 기념투쟁 방법'을 정하여 3.1기념식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3.1대회로 고조된 대중의 열기를 각종 형태의 대중집회를 통해 조직화하여 당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3.1대회의 행사 인원 동원은 각 면, 리에 방대하게 조직되어 있던 민청과 부녀동맹이 주로 담당하였다. 더구나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었던 부녀자들도 부녀동맹의 지휘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3.1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부녀동맹위원장 김이환과 당 부녀부장 고진희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3.1기념대회의 주요 슬로건은 "삼상회의 결정 즉시 실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3.1정신으로 통일독립 전취하자" 이었지만, 이외에도 "친일파를 처단하자", "부패 경찰을 몰아내자"와 "양과자를 먹지 말자"의 반미구호도 등장하였다.
한편 기념행사가 끝나자 곧 관덕정 광장을 향해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1만명 가량이 참여한 대규모 행렬이었다. 관덕정의 제주감찰청 앞에는 응원경찰과 미군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그 자리에서 발포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발포는 시위행렬이 다 지나간 후여서 희생된 사람들은 시위를 구경하던 사람들이었다. 6명의 민간인이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고 8명이 부상당했다.
3.1발포사건이 알려지고 육지부 응원경찰대에 의해 발포되었다는 점과 희생자들이 시위대가 아닌 단순한 관람군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도민들의 분노는 커져갔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를 수습하기는 커녕 3.1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더욱 주력하였다.
제주경찰은 이날 초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제주읍내에 50M간격으로 경관 3명씩을 배치할 정도로 삼엄한 경계망을 폈다. 곧이어 3.1절 시위 주동자들 검거에 주력하여 대대적인 체포 작전이 전개되었다. 3.1절 준비위원회 간부들을 검속하는가 하면 중등학생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3.1발포사건과 관련하여 사과성명은 커녕 미군정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오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삐라를 부착하여 미군정과 경찰의 만행을 폭로하고, 희생자 구호금 모금을 하는 등 즉각적으로 대응에 들어갔다. 제주도당은 3.1사건의 강력한 대응책으로 평화적인 항의의 수단으로서 전도총파업을 전개하자는 대정면당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곧이어 조직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간 제주도당은 3.1사건만을 전담하는 기관으로서 당내 조직인 '제주도 3.1사건 대책투쟁위원회'(이하 투쟁위원회)를 3월 5일에 결성하였다.
남로당 투쟁위원회는 위원장 (金龍寬)1명, 부위원장 1명, 지도부 5명, 조직부 5명, 선전부 10명, 구호부 3명, 조사부 3명으로 구성되어, 3.1사건 대책 투쟁을 전체적으로 지도하였다. 투쟁위원회는 3월10일 정오를 기하여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정, "대책위원회 조직방법, 파업부의 조직및 지도, 선전활동, 연락방법, 슬로건"등 투쟁 방법 전반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지시를 내렸다.
우선적으로 3.1사건 대책 투쟁을 합법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해 당외 투쟁조직으로서 민전 등 표면화된 대중단체의 인사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시달하였다. 이 방침에 따라 3월 9일에 '제주3.1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洪淳容)가 결성되었다. 대책위원회는 읍.면.리.구에 이르기까지 구성되었는데 농촌 부락은 리.구 3.1기념 준비위원회가 3.1사건 대책위원회로 대체되는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직장총파업과 관련해서는 "각 파업단 대표자로서 읍.면적 파업단을 구성하여 책임자1명 부책임자 1명 투쟁부(성병서의 발표,교섭 각 직장파업에 대한 지도) 선전부 구호부(구원기금 및 투쟁기금 캄파) 조사연락부" 두고 다음의 6가지 요구조건과 성명서를 1통은 미 지방장관에게, 1통은 미중앙장관에게, 1통은 각 대책위원회에 제출하는 동시에 3월 10일 정오를 기하여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지시하였다.
1. 발포책임자 강동효 및 발포한 경관을 살인죄로써 즉시 처형하라.
2. 경찰관계의 수뇌부는 즉시 책임해임하라.
3. 피살당한 동포의 유가족의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하벼 피상자에게 충분한 치료비와 위로금을 즉시 지불하라.
4. 3.1사건에 관련되어 피검된 인사를 즉시 무조건 석방하라.
5. 경관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라.
6. 경찰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축출하라.
제주도당투쟁위는 1에서 5항까지의 요구조건은 최소한도이며 최후까지 양보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힘으로서 투쟁의 목표를 일정하게 규정하고 있다. 즉 투쟁의 1차적 목표는 3.1발포사건의 책임을 묻는데에만 집중되고 있다. 투쟁위는 이상의 요구조건을 전취하기 위해 "구호기금캄파를 추진할 것과 부락민대회를 열어 진상을 폭로 선전하고 부락별로 전도민에게 요구조건에 연명날인시켜 미군정장관에게 보낼 것"등을 대책위원회라는 통로를 통해 전개함으로써 합법적으로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투쟁의 대상을 발포경찰에만 한정하는 것과 함께 육지부 응원경찰대의 발포로 격앙된 민심과 결합하여 투쟁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이러한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는 미군정에 대해 당이 비난하지 않더라고 도민들이 자연스럽게 반감을 느끼게 되는 이중의 효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투쟁의 형식적인 한계선이었다. 제주도당은 총파업을 통해 남로당과 대중의 결합을 공고히하고 대중을 혁명운동의 진영으로 조직화내려고 하였다. 이것은 당의 세력확장과 맞물려 진행되었는데, 대중정당을 표방한 만큼 당원 확장과 당의 합법화 全取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남로당의 합법화 전취는 제주 민전 결성시에도 제기되었고, 3.10총파업 투쟁방법을 시달한 문건에도 "투쟁위의 슬로건은 반드시 남로당의 이름으로 할 것"을 명시하는 등 이전의 조공때와는 달리 당이 표면에 등장하고 있다. 투쟁 슬로건에도 "민족의 당 애국의 당 남조선노동당 만세"라는 구호가 들어가 있고, 당이 대중정당으로 탈바꿈하려는 노력은 "3.1투쟁의 연장으로서 당의 영웅적 대중투쟁을 위한 합법전취"라는 3.1사건 투쟁 방침에도 잘 나타나 있다.
3월 10일 제주도청의 파업을 시발로 제주도는 '조선에서 처음보는 관공리의 총파업'에 휩싸였다. 도청 파업에 이어 모든 관공서는 물론 은행, 회사 , 학교, 교통, 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상점은 철시되고 학생들은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심지어는 미군정청 통역까지 참여하고, 모슬포, 중문, 애월 지서 등지에서 제주출신 경찰관 중심으로 현직 경찰관들이 파업에 동참하는 일도 벌어졌다(이일로 인하여 경찰관 65명이 파면되었다).
총파업은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3월 11일 제주읍에서는 관공서, 학교 단체 등 파업단체 대표자들이 파업의 효과적인 실효를 거두기 위해 연합전선을 펴기로 하고 '제주읍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공동투쟁위는 제주읍뿐만 아니라 각 면에서도 조직되었는데, 이는 각 직장 파업단 대표자로서 읍.면 파업단을 구성할 것을 지시한 남로당의 지도로 이루어졌다. 각 직장별로는 파업투쟁위원회가 조직되고, 3.1사건 대책위원회가 행정단위 말단에까지 만들어짐에 따라 제주도 전역에 걸쳐 강력한 투쟁태세가 갖추어졌다.
한편 미군정과 경찰은 제주도내 각 기관이 총파업을 단행하고 도군정청의 업무까지 마비되자 강인수 제주도 감찰청장이 "도립병원 앞의 발포는 유감"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월 14일 미군정 경부부장 조병옥이 내도하여 진상을 조사함과 동시에 3월 18일까지 무차별로 총파업을 분쇄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총파업을 깨뜨리기 위하여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 경찰 99명을 증파했다. 그리고 3월 15일부터 파업주모자 검거라는 명목으로 총파업투쟁위원회를 급습, 투쟁위 간부들과 민전간부들을 연행한 것을 시작으로 4월 10일까지 500명을 검속하였다. 검속된 사람들은 미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 즉 무허가 집회 및 무허가 시위 혐의로 5월 말까지 진행된 재판에 모두 328명이 회부되었다. 이때 실형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목포형무소에 이감되어 징역살이를 하였다.
이와 같은 미군정과 경찰의 무차별 검거와 탄압으로 총파업은 조병옥이 제주를 떠나던 3월 19일에 이르러 거의 끝났지만 그 여파는 컸다. 미군정과 경찰은 총파업의 원인과 배경은 무시한 채 '남로당의 선동에 의해 조장되었다'고 파악하면서 무차별적인 검거와 탄압으로 총파업을 분쇄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은 이때 이미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여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자이거나 혹은 좌익정당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 본거지"로 규정하는 등 좌우의 대립으로 상황을 몰고 갔다.
3.10총파업을 주도했던 남로당 제주도당 또한 미군정의 강경한 탄압으로 인하여 지도적 인물들이 검거되고 기존 조직이 약화됨에 따라 일정 정도 조직 개편을 단행해야 했다. 그리고 총파업을 통해 고양된 대중의 열기를 조직화 하는데는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미군정의 계속되는 탄압에 맞서 새로운 투쟁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전환점에 놓이게 되었다.
2. 미군정·우익청년단체의 공세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대응
미군정 당국은 3월말로 총파업이 어느 정도 진정국면에 접어들자 제주도의 수뇌부를 전면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3월 31일에는 제주경찰감찰청장에 서울 출신 김영배를 임명하고 4월 2일에는 군정장관을 교체, 스타우드 소령의 후임에 베로스 중령을 임명하였다. 또한 3.1사건의 강경진압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제출한 초대지사 박경훈의 사표를 수리, 한독당 독립부장 유해진을 그 후임으로 발령하였다. 발포사건의 책임문제로 도민들로부터 사퇴압력을 받았던 강동효 제1구 경찰서장은 계속 재임토록 하다가 5월 24일에 이르러 해임, 그 후임에 제주출신 김차봉(제주경찰감찰청 부청장)을 발령하였다. 그러나 김차봉은 3개월 만에 도중하차 그 후임으로 평남출신의 문용채(만주군 대위 출신)가 임명되어 '4.3'을 맞게 된다. 또 제주경찰의 진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경찰고문관 패드릿치 대위도 6월 초 교체, 그 후임에 수도경찰서 수사과 고문관 래더루가 부임하였다.
군정장관 베로스나 도지사 유해진 등은 모두 강성인물로 이들의 부임이후 집중적인 우익강화정책이 전개되었다. 철저한 극우주의자로 소문난 유해진은 취임하자마자 "좌익계의 파괴공작을 철저히 분쇄하고 청년단 등 반공 단체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하면서 관공리의 숙정작업에 들어갔다. 총파업에 가담하거나 주도했던 관리들을 가려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파직시켰고 이는 도청, 군청, 운수 등 전 행정기관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거기에다가 행정기관의 주요 요직을 자신이 데려온 본토 출신으로 채운 반면 제주도 출신 관료들은 한직으로 좌천시켰다. 경찰 또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유해진은 제주도 경찰부대를 '극우단체의 테러리스트들'과 같이 일했던 본토출신이거나 북한출신 인물들로 채웠다. 제주도에 주둔했던 응원경찰이 철수하게 되자 새로이 타지역에서 제주도에 근무할 경찰 245명(주로 철도경찰 출신)을 모집하여 제주도에 배치시켰다. 이로써 4월 말경에는 제주도 경찰병력은 500명에 이르게 되어, 일제말기의 100여 명에 비하면 다섯 배나 늘어난 처지였다.
심지어는 경찰조차도 제주도 출신이라면 믿지 못하는, 이와같은 인사 단행의 이면에는 '좌익들의 세상인 붉은 섬'이라는 제주도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었다. 육지부에서는 46년 10월항쟁의 여파로 좌익의 세력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3.1시위나 3.10총파업에서 보여준 제주도민들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미군정과 경찰은 3.1시위나 총파업의 원인은 무시한 채, '좌익이 모든 것을 선동하고 있다'라는 인식하에 무차별적인 좌익탄압에 들어갔다.
이같은 정책은 전통적으로 육지인에 대해 배타적이던 제주도민들을 자극시켰고 연이어 일어난 육지부 경찰대에 의한 고문 취조는 도민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1947년 8월에 접어들면서 미군정은 좌익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파괴정책을 전개했다. 이것은 중앙은 물론 지방에까지 전국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주도에서도 8월에 접어들자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착수하였다. 3.1발포사건의 강경진압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도지사를 사임하고 7월에 제주민전의장에 추대된 박경훈을 비롯한 민전간부 30여명을 구속하였다. 또한 좌익세력에 비해서 열세를 보이던 우익진영의 세력확장에 들어갔다. 10월에 독립촉성청년연맹과 광복청년회를 통합,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단부(단장 김충희→김인선)가 12월에는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단부(단장 백찬석)가 각각 결성되었다. 또 10월에 제주경찰후원회가(회장 홍순용)가 조직되면서 각 지서마다 후원단체들이 생겨났다. 도지사 유해진은 경찰과 청년단을 적극 지원하면서 좌익탄압을 독려하였다. 아울러 각 관공서와 학교 등지에서도 좌파성향의 인물들에 대한 추방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점에서 제주도민들의 미군정.경찰.육지출신 관료 그리고 서청에 대한 인식은 불만의 정도를 넘어서 적개심으로 표현될 정도였다. 특히 제주도민들의 분노를 가중시킨 것은 육지출신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테러와 만행이었다. 서청은 도내 각 읍.면에 골고루 분파되어 활동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금품을 갈취했고 테러를 자행했다. 해방후 북한의 사회개혁시 일제치하에서 누려오던 사회적.경제적인 모든 기득권을 박탈당하고 월남한 이들은 "자다가도 공산주의자라면 벌떡 일어날 정도"로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제주도 지부가 발족된 것은 47년 11월 2일이었지만 3.1사건 직후에 이미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던 서청은 제주도를 '한국의 모스크바'라고 부르면서 제주도민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서청의 만행은 4.3발발 직후 '항쟁에 가담하라'는 인민유격대의 호소문에도 서청은 제외될 정도로 항쟁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서청을 비롯한 우익청년단은 부락내에서 지하화한 남로당 세포와 외곽 단체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기능하였으며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비호받고 있었다.
제주도민들은 빨갱이사냥의 표적이 되었고 특히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자 검색이라는 명목하에 테러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이때 많은 좌익운동가들이 탄압을 피해서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하였다.
경찰.서청의 만행과 더불어 제주도민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굶주림이었다. 미군정의 곡물수집정책은 흉년에 시달리는 도민들을 더욱 괴롭혀 곳곳에서 미곡수집반대투쟁이 일어났다. 이 시기부터 반미투쟁의 성격이 들어있는 전단이 살포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3.1시위 이후 짧은 시기 동안에 미군정이 제주도에서 행사했던 폭력의 정도와 그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인식의 전환 정도를 의미한다.
미군정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조직적 활동의 위축되자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7년 가을에 이르러 새로운 조직개편을 단행하였다.
우선적으로 당지도부가 일정 정도 개편되게 된다. 이는 3.1사건과 총파업이후 당원들이 대거 검거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처로 보인다. 3.1사건의 재판 결과 최고형 1년 이하, 6개월, 3개월 등으로 당원들이 투옥되는데 이 가운데에는 애월의 金容海, 대정의 李運芳, 李辛祜 , 중문의 金性秋, 서귀의 강성렬, 宋泰三 등 거물급 당원들도 포함되었다.
3.1사건 이전에도 47년 2월 말에 열린 하귀회의에서 조공 시절 당서기였고 남로당으로 개편된 이후에도 당을 주도해 나갔던 김정로와 인민위 위원장이었던 오대진이 당에서 제명을 당하였다. 이 조치는 당의 조직책인 조몽구의 건의하에 이루어졌다. 당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두 사람이 제명된 이유를 살펴보면 김정로의 경우는 입법의원 선거과정에서 행한 반당적 행위로, 오대진은 당활동을 게을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각 지역 중심 지도부의 체포는 각 면 지역에서 활동하던 활동가가 지도부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은 도당의 부족한 인원을 메꾸기 위하여 도당과 면당을 오가며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8.15 이후부터 활동한 젊은 층이었다.
당지도부의 개편과 더불어 하부조직도 변화를 갖게 된다. 이 시점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당의 주요활동은 대중조직사업에 집중되었는데, 3.1사건의 성과와 더불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후 미소공위 개최 직후부터 시작된 당원 5배가운동은 47년 9월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당원 배가운동으로 당에 들어온 사람들은 20대 초.중반의 젊은 층이었다.
이들은 당 지도부로 부상한 젊은 층과 함께 당 조직에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였다. 해방 직후 지도부에서 활동하였던 사람들은 대개 일제시대에 활동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활동과정에서 어느 정도 이론적 훈련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3.1시위 이후에 미군정과 우익의 탄압과 체포로 신변이 노출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들은 육지로 활동 공간을 옮기거나 일본으로 밀항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심지어는 활동하기 어려운 조건을 이유로 조직에서 이탈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조직의 부족한 인원을 메꾸고 조직에 사기를 불어넣은 세력은 젊은 층이었다. 특히 이들중에는 해방후 사회모순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성장해온 농민, 어부(해녀) 등 기본계급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실천력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였다. 3.1시위 이후 부상한 신진들과 당원확장사업을 통해 들어온 이들이 당의 주요활동 역량으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당 활동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이 47년 후반부터는 당을 주도하였고 무장투쟁을 주장하여 4.3봉기의 지도세력이 되었다.
Ⅳ. 제주4·3항쟁과 남조선노동당
1. 제주4·3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제주 4.3항쟁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과 주위의 각 오름들에서 일제히 봉화가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1,500여명(무장 500명, 비무장 1000명)의 인민자위대는 도내 24개 지서 가운데서 제1구 경찰서 관내 화북 ,삼양, 조천, 세화, 외도, 신엄, 애월, 한림지서와 제2구 경찰서 관내 남원, 성산포, 대정지서 등 11개 지서와 서북청년단숙사, 국민회, 독촉, 대동청년단 사무소 등을 습격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제주 4.3항쟁은 57년 4월 2일 마지막 빨치산인 오원권이 생포될 때까지 만 9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전투와 항쟁 그리고 살육은 1948년과 49년에 집중되었다.
4.3항쟁은 크게 보아 세 시기로 진행되었다. 첫째 시기는 선거가 실시되기 전까지의 시기로 5.10단선을 파탄시켜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둘째 시기는 선거가 치루어지고 난후 -비록 제주도에서는 선거를 파탄.저지시켰지만-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 사실화된 시기이다. 4.3발발 이후 5.10단선 전까지는 '무장투쟁'이라고는 하지만 좀 더 조직적이었다는 점을 빼놓고는 공격횟수나 규모면에서나 당시 전국적인 단선거부투쟁의 면모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5.10단선이 끝나고 미군정과 군경토벌대에 의한 강경진압작전이 실시됨에 따라 인민유격대는 자위적이고 방어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수립이 확실시됨에 따라 남로당을 비롯한 항쟁 세력은 인민공화국수립으로 투쟁의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는 북에서 세워지는 인민공화국에 대한 정통성을 확보하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능동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그들과의 타협여지가 봉쇄되어 정면으로 무장투쟁을 하고 있었던 상황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세째 시기는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의 기간으로, 남한단독정부의 초토화작전으로 인하여 항쟁 세력이 약화되어 49년 봄의 대토벌을 거쳐 49년 중반에 이르면 무장 투쟁은 사실상 끝나게 된다.
항쟁의 목적은 4월 3일 인민자위대가 기습공격과 더불어 살포한 두가지 호소문 -하나는 무장대가 공격대상으로 삼았던 경찰관, 공무원, 대청단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과 전단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항쟁세력은 항쟁이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저항하는 자위적 투쟁임을 밝히는 동시에 단선 저지를 통한 조국의 통일 독립쟁취, 그리고 반미구국투쟁이라는 항쟁의 지향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경찰과 서청의 횡포에 맞서 싸우겠다는 도민적 울분의 토로에서 더 나아가 보다 정치적인 색채를 띤 것으로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단선단정반대투쟁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2.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주요인물과 조직
4.3봉기를 전후한 시기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간부들은 다음과 같다.
도당부 : 안세훈, 조몽구, 김유환, 강규찬, 김용관
군사부 : 김달삼, 김대진(대리), 이덕구
총무부 : 이좌구, 김두봉
조직부 : 조몽구, 이종우, 고칠종, 김민성, 김양근
농민부 : 김완배
경리부 : 현복유
선전부 : 김은환 김석환
청년부 : 강대석
보급부 : 김귀한
정보부 : 김대진
부인부 : 고진희
48년 4월 15일 남로당 제주도당부대회가 열렸다. '4.3'발발 이후 처음 열린 이 대회에서는 정세판단, 역량분석, 민중의 동향, 장래의 전망 등 지금까지의 투쟁에 관한 종합적인 평가와 함께 단선을 저지하고 통일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앞으로의 투쟁방향이 확고히 정해졌다.
군사부는 도당대회에서 수립된 기본방침에 입각해서 우세한 토벌대의 집중공격에 대적하는 강력한 전투대를 만들기 위하여 종전의 인민자위대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전투적으로 유능한 전사를 중심으로 각 지구로부터 30명씩을 선발하여 '인민유격대'를 편성하여 여기에 기동성과 민첩성을 보장하고 지휘체계의 일원화를 꾀하기 위하여 연대와 지대로 구분 편성하였다. 김달삼이 인민유격대장을 맡았고 조직은 다음과 같다.
이 밖에 독립대로서 정찰임무를 맡는 특공대와 우익 제단체들의 움직임과 각 지방 자위대의 행동을 감시하는 별동대가 조직되고 각 지대와 소대에 '정치소조원'을 배치하여 정치교육을 시켰다.
이와같은 투쟁조직의 개편은 물론 당과 유격대 그리고 민중과의 연대를 공고히 하고 투쟁역량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각 읍.면의 무장대는 권역별로 묶인 3개의 연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실제의 활동은 독자적으로 했다. 대정면을 예로 들어 면사령부 조직표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표4> 남로당 대정면당 사령부 조직표
투쟁 위원회(사령관[캐}, 조직책, 자위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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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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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직 부 자 위 부 선 전 부 총 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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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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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경대(3개 소대) 각 마을 자위대
면당책이 캐가 되고, 자위부책은 도당에서 파견된 정치지도원(정치소조원))이 맡았다. 특경대는 소위 인민군이라고 불리우는 무장대였지만 자위대는 무장대와 일반 대중들과의 유기적인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각 부락마다 조직되었는데 무장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위대는 토벌에 대비하여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고 선전이나 홍보를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소위 '왓샤부대'는 주로 이들이었다. 이밖에 총무부와 선전부가 있어, 총무부는 식량 등 보급활동을 담당하고 선전부는 삐라를 만들거나 산간부락, 민주부락에 가서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일을 맡았는데 선전부는 학생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무장대의 무장력을 살펴보면 4.3봉기 직후 유격대 편성 당시의 전투원은 불과 50여명이었으며 무기 또한 35정 정도의 열악한 보병총과 죽창 농기구 등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전투과정에서 획득한 무기와 국방경비대의 입산 등으로 6월을 전후해서는 무장대원은 무장대원과 무장력이 증강되어 도당소속부대는 M-1, M-2, 카빈-1, 카빈-2, 기관총 등을 면당 차원에서도 카빈총을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9연대 대원들의 입산은 실제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이라는 점과 이들이 입산할 때 가지고 오는 무기류로 인하여 유격대의 전력 강화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국방경비대에는 남로당 세포들이 조직되어 있어 토벌작전이 유격대에게 미리 알려지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한편 인민유격대의 투쟁력을 더욱 고취시킨 것은 일반 대중들의 지지 투쟁이었다. 마을의 자위대, 여맹 등 각 부락에 남아 있던 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대중투쟁은 봉화를 올리거나 삐라를 뿌리는 선전활동과 식량보급,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유격대를 여러 방면으로 지원했다. 48년 10월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유격대원들이 부락내에 거주하면서 활동할 정도로 중산간 지역은 유격대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래서 중산간부락은 '민주부락'이라고 불려졌는데, 조천, 한림, 애월, 대정면 등의 대부분의 부락이 이에 속했다. 당조직도 도당은 4.3발발 전에 입산하였지만 대정면당의 경우에는 면당부가 4.3후에도 입산하지 않고 부락내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시작된 초토화작전으로 인하여 정세가 불리하게 되자 48년 가을에 마을에 남아있던 모든 조직이 마을 단위 투쟁위원회로 편재되면서 자위대, 여맹, 민애청 등 기존의 조직들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때부터는 면.리투쟁위원회 단위로 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부락내에 남아 있었던 조직원들의 많은 수가 군경의 탄압을 피하고 토벌로 인해 전력이 약화된 유격대를 지원하기 위해 입산했다. 유격대와 일반 대중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던 이들이 입산하게 된 것은 남한단독정부의 초토화작전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또한 이것은 일반 대중과의 유대가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유격대는 49년 3월의 대토벌 이후 전력이 많이 약화됨에 따라 조직을 개편, 3개 면을 하나로 통합하여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49년 6월 9일 이덕구가 사살된 후 가을이 되면서는 면당별로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유격대의 무장력은 약화되어 조직을 단일화시키기에 이른다. 통합된 무장대의 인원은 50명도 채 되지 않았고 남아 있는 총도 7정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당시 책임자였던 송원병(캐), 백창원(조직부책), 고승옥(군사부책,9연대 출신)은 투쟁을 중단하고 대피생활을 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를 반대하는 대원들에 의해 숙청당하고 50년 초 조천면 김의봉이 군사부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의봉은 50년 3월 전향한 동료의 밀고로 군경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러나 49년 중반에 이르면 남은 유격대원들도 생존을 위한 도피생활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 때 이미 무장투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3.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와 무장투쟁전술
미소공위의 타결에 기대를 걸었던 남로당은 공위가 최종적으로 결렬되고, 조선문제의 유엔이관이 결정되자 이것의 부당함을 선전하고 '미소양군 철수후 민족자주정권수립'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48년 2월 26일 소총회의 공식적인 남한단선결의가 있자 남로당은 "소총회결의 자체가 미국에 의한 미.소공위 파기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괴뢰적 반동적 단정조치의 일환"이라고 주장하고 "전인민이 유엔임시위원단에 어떠한 환상이나 기대를 갖지 말고 '유엔임시위원단구축','괴뢰적 단선단정분쇄','쏘.미양군의 철병'으로 조국의 민주독립을 전취코자 전인민적 항쟁을 벌일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남로당은 단선단정반대 주장에 머무르지 않고 임시위원단 철퇴와 남한단선저지. 파탄을 위한 조직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단선을 저지하기 위한 전인민적 항쟁은 본토가 아닌 외딴 섬 제주도에서 먼저 일어났다.
1948년에 제주도의 정치적 상황이 한층 긴장을 더해가는 가운데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은 몇차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 첫번째는 조직부 연락책의 전향으로 빚어진 '1.22 검거사건'이었고, 두번째는 2.7구국투쟁이후 전도에 불어닥친 '2.7 검거선풍'이었다. 1월 22일 미군정은 남로당 제주도당지도부가 회합을 갖고 있던 조천면 지부를 습격, 106명을 체포하고 등사기를 비롯하여 다량의 문서를 압수했다. 미군정은 이 때 압수된 문서에는 "2월 중순에서 3월 5일 사이에 봉기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폭동지령 유인물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도에 걸쳐 검거령을 내리고 1월 26일까지 115명을 추가로 구속하였다. 이 무렵 김달삼, 안세훈, 김용관 등 남로당 거물급 지도자들이 체포되었지만 김달삼은 경찰서로 호송되는 도중 도망쳤다. 곧이어 전국적으로 전개된 2.7구국투쟁의 여파로 인해 제주도에서도 2월 7일 당일에는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2월 8일 성산면 신양리의 시위를 시작으로 3일에 걸쳐 방화 1건, 17차례의 시위가 발생하였고 6개의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각종 삐라가 살포되었다. 이에 경찰은 290명을 체포하고, 2월 12일에는 CIC까지 가담하여 남로당 제주도당본부를 습격, 다량의 문서와 삐라를 압수하였다.
그러나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을 노출시킨 '1.22검거'사건도 앞의 8.15폭동음모사건처럼 요란한 검거선풍을 일으켜 놓고도 사후처리는 흐지부지되었다. 그것은 폭동음모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밝히지 못한데다, 3월에 이르자 5.10선거를 앞두고 미군정에서 특사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제주도당 거물급 인사들도 4.3발발 이전에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으로 조직의 노출이란 치명타를 입은 제주도당은 만약 단독정부가 수립된다면 당이 존립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없어질 수 있으므로 당의 활동공간을 확보하는 의미에서 무장투쟁을 사고하기 시작하였다.
5.10단선 실시가 굳어진 뒤 미군정과 우익진영의 좌익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특히 제주도는 육지부 경찰과 서청과 같은 외부세력에 의해 심하게 자행되었고 이에 따라 도민의 분노는 높아갔다. 여기에다 더욱 자극제가 된 것이 3월에 연쇄적으로 일어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식량난 또한 절박한 문제였다. 양곡배급을 둘러싼 모리배의 발호는 도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양곡배급의 직접적인 통제권"은 면사무소 밖에서 활동하면서 유해진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꾼'의 손 안에 있었다. 이에 반하여 추곡수집은 47년산의 경우 할당량을 넘어선 전량이 거두어지고 있다. 이것은 46년산 추곡수매율이 0.1%를 기록한 결과와 비교해볼 때 얼마나 많은 물리력이 동원되었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미국에 대한 제주도민의 반감은 점점 높아졌다. 일반 제주도민들이 확고한 반미의식을 갖게된 것은 3.1발포사건과 총파업 뒤에 경찰과 서청 등 우익청년단을 동원한 미군정의 지속적인 탄압정책 때문이었다. 47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제주도민의 반미의식은 상당한 수위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은 단선이 구체화되자 무장투쟁을 준비해나갔고, '2월 회의'에서 무장투쟁노선을 최종적으로 채택하였다. 2월회의는 48년 2월중에 약 보름동안 구좌면과 조천면 지역을 오가면서 이루어졌던 중요간부회의이다. 각 지역책임자들이 필수적으로 참석하였고 최종회의는 신촌에서 연 3일동안 열렸다. 정세판단과 대응책에 대해 열띤 토론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무장투쟁이 결정되어 군사부를 중심으로 조직개편이 내용적으로 이루어지고 실질적인 봉기 준비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2월회의에서 '무장투쟁'에 대한 이견이 있었고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소위 강경파와 이를 반대한 온건파의 노선갈등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무장투쟁의 반대에 섰던 소위 온건파는 안세훈, 조몽구, 김유환, 김용해 등의 40대 지도부들이고 김용관, 김달삼, 강규찬, 김양근, 김대진 등 8.15 이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신진급진파들이 무장투쟁을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온건파의 노선갈등으로 4.3발발 직전에 도당지도부 핵심세력이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을 했던 장년층에서 보다 젊고 급진적인 인물들로 교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2월 회의에서 안세훈, 조몽구, 김유환 등은 무장투쟁을 반대하지도 않았고 당시에 무장투쟁을 반대하는 의견이 정식으로 제기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2월회의가 이루어질 쯤에는 이미 제주도당은 일정정도 지도부 개편이 이루어져 신진세력들이 도당의 핵심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당시의 급박한 정세때문에 무장투쟁을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미군정과 우익의 탄압으로 당 존립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고 단선이 구체화되는 상황속에서 무장투쟁이외의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진세력들이 무장투쟁을 제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장년층들도 심적으로는 무장투쟁을 반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8.15이후부터 활동한 신진세력들이 당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였는가? 우선적으로 3.1시위, 3.10총파업이 지도부의 교체 계기가 되고 있다. 총파업 이후 계속하여 일단의 간부진이 검거, 투옥되면서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한 이동이 불가피하였다. 이 사건으로 애월의 김용해,김용관, 서귀의 송태삼, 강성렬, 대정의 이운방 등의 지도부가 투옥된다. 각지역의 중심지도부의 공백은 곧 각지역 면당에서 활동하던 활동가가 지도부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김달삼이 부상하는 계기를 3.1발포사건 대책으로 항의 총파업을 전개하자는 대정면당의 건의를 도당에 전달하면서부터로 볼 수 있다. 3.1사건 이후 지도부가 투옥되는 등 도당에서도 인원이 부족해지자 대정면당 조직부장이었던 김달삼은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 도당으로 가서 활동하며 48년이 되면 도당 군사부책으로까지 부상하게 된다. 물론 남로당 중앙위원이었던 장인 강문석의 후광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총파업의 건의시 도당에서도 그의 역할을 인정했을 것이다. 4.3발발시 남로당 조직책이었던 이종우도 이 때에 대정면당에서 도당으로 옮겨 활동하게 된다.
한편 남로당 초대위원장인 안세훈과 조직책이었던 조몽구는 이 당시 발언권이 약해져 있었다. 이들은 47년 3.1시위때 경찰의 발포상황에 직면하여 즉각적인 대처를 못했기 때문에 일종의 책임추궁을 받아 당지도부에서 사퇴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장투쟁을 주장한 신진세력은 정세를 낙관하고 있었다. 당시 단선을 저지해야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상황에서 제주도 봉기는 일종의 기폭제가 되어 전국적인 봉기를 유발시켜 제주도에 진압병력을 추가로 내려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남로당 세포가 많이 들어가 있던 국방경비대는 중립을 지킬 것이고 그러면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미국 또한 국제문제로 화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진압에 관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이렇게 해서 38선 이남 지역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면 그동안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있었던 북에서 인민군을 남파하여 통일독립국가를 이룩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48년 4월의 이 시점은 남로당이 아직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돌입한 단계가 아니었으므로, 4.3봉기는 38선 이남지역만의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던 남로당의 운동이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긴 하지만 남로당 중앙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듯하다. 이 시기 남로당 중앙은 현 시기에 38선 이남 지역의 전 지구당은 선거반대투쟁을 보다 신중하게 전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곧이어 북측에서는 38선 이남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평양연석회의에 참가해 달라고 초청하였고, 그러한 일련의 상황전개로 보아 선거반대투쟁을 더욱 더 중앙의 통제 아래에서 신중하게 수행하려 하였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증언을 보아도 4.3항쟁은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결정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항쟁지도부는 국방경비대 9연대도 항쟁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했으나 9연대 책임자가 "나는 중앙당의 지시를 받고 여기 책임자로 온 사람이다. 그러니 나는 중앙당의 지시를 받아야지 (제주)도당의 지시는 받을 수가 없다. 그것도 몇사람이면 모른다. 전 군인들은 봉기할 수 없다"고 해서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남로당 국방경비대 프락치 공작은 장교와 사병을 구분하여 일반 사병은 각 지역 도당위원회의 통제를 받고 있었지만 장교는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남로당 9연대 세포책이 문상길 중위임을 고려할 때 중앙의 지시를 못받았다는 것은 제주도당이 당중앙과의 논의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무장투쟁을 일으켰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장봉기와 같은 중요한 전술은 濟州島黨 차원에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었다. 무장투쟁은 사회주의 세력의 정치투쟁중 가장 높은 단계로서 주·객관적 역량과 일반대중의 상태를 고려하면서 결정적인 시기에 일어나야 하고 당의 지도와 통제속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남로당이 본격적인 무장투쟁전술로 돌입한 시기도 아니었고 북의 관심은 남북협상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결정한 2월회의와 4.3의 발발까지는 한달 간이라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이를 추진시켰고 봉기가 일어난 후에야 사후추인의 형식으로 중앙의 승인을 받았다. 당시 남로당 중앙이 하부조직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최소한 濟州島黨의 상부조직인 全南道黨과 협의를 거쳤어야 했다. 섬이라는 공간의 특수성 속에서는 육지부의 투쟁이 함께 일어나야만 성공할 가능성이 있음으로 더욱 더 당중앙과의 협의를 거치고 육지부의 투쟁역량을 고려했어야 했다.
Ⅴ. 맺음말
8.15 해방은 당시 민중들에게 자주적 독립국가의 수립을 의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하에서 구조화되었던 사회경제 구조의 변혁을 의미하였다. 즉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처벌 및 제거, 토지개혁, 일인 소유공장의 국유화, 그리고 독립국가의 건설을 민중들은 원했다. 이 모든 요구들은 보다 철저하게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해왔던 좌익세력의 요구들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격렬한 항일운동을 통하여 정통성을 인정받은 좌익세력과 변혁을 지향하는 민중들은 결합할 수 있었다. 본논문은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제주민중들의 지향점을 조직화 해내고 함께 해나갔던 좌익세력, 즉 제주4.3항쟁의 주도세력이었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였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3.1발포사건, 3.10총파업 등의 대중투쟁 속에서 일반 제주도민과 결합해나간 과정과 4.3봉기라는 무장투쟁노선으로의 전술적 변화속에서의 남로당 제주도당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제주도의 무장투쟁은 당의 주체적 조직역량과 계속 지배력을 높여가는 미군정.우익의 물리력을 비교해 볼 때 무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5.10단선을 기필코 저지해야 한다는 인식과 미군정.우익의 탄압으로부터 당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와지는 상황속에서 당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자위적인 측면이 맞물리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결정하였다. 즉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장투쟁 이외의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제주도당의 이러한 결정은 일반 제주도민의 지지투쟁과 결합하면서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일반대중의 지지투쟁은 5.10반대투쟁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데, 단선을 저지하기 위해 선거가 실시되기 전부터 부락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산에 오르는 등 일반 대중과 유격대의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인민유격대가 미군정과 남한단독정부로 이어지는 대항세력의 엄청난 물리력에도 불구하고, 제주지역에서 단선을 저지하고 1년여 동안이나 항쟁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아닌 제주도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