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복락은
신 보 성
내가 이 정도의 복락이라도 누리고
살아가는 것은 주체적 노력보다는
객관적 환경적 요인의 도움이 더 많았기 때문
가난했지만 품위 잃지 않고
올곧게 사시어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부모님
영특한 재능과 헌신적 사랑의 누님
착한 아내
훌륭한 스승님 뜻이 고결한 친구들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식들
새벽이면 창가에 숲 그림자 아른거리고
밤이면 베개 밑으로 샘물소리 스며드는
아름다운 고향의 우리 집 오두막
이 모든 것 어우러져 오늘의 나를
키워온 것이다
이들의 덕분으로 살아온 나
이들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는데
이들을 닮지 못한 것은 불운이리라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다보면
마음 밭에 움돋는 새로운 씨앗
오롯한 생명으로 피어오르리
텃밭의 노인
신 보 성
텃밭에서 채소를 재배하는 노인
아침이면 낙엽을 태운다
쓰레기를 태운다
지난날의 후회와 번민을 불사른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교만과 의심을 태운다
애욕과 그리움을 불사르고
시기 질투 증오를 태운다
다비의 불꽃으로 시린 손을 녹이며
영진하는 연기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본다
잿더미를 뒤적여도 사리는 없다
낙엽을 태우면 향기가 나고
쓰레기를 태우면 악취가 나기에
낙엽과 쓰레기를 섞어 태운다
미추 호오 선과 악 더럽고 깨끗함
알곡과 쭉정이 사량분별하지 않고 함께 태운다
여기에 진정한 평화 있으리
칡넝쿨 사랑
신 보 성
저건 악의적 짝사랑
일방적 성폭행이며 지독한 스토커다
온 몸을 칭칭 감아 몸속에 홈을 파
상처 내는 사랑
뿌리는 정력의 저장소
하늘까지라도 징그럽게 감고 올라갈
힘이 솟구친다
전자발찌도 차지 않은 성 범죄자의
줄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소나무
의로우신 하늘의 재판장에게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을 해도 무심한 하늘은
대답이 없으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칡넝쿨에 묶여 사는 인간 부부들은
없는 것일까
가을의 발원
신 보 성
가을이 무르익어 갑니다
파아란 하늘을 닮아가고 싶습니다
물에 비친 가을의 달처럼 가슴 속의
생각을 비워 마음이 맑아지고 싶습니다
하얗게 서리 맞은 소나무의 청결한 지조를
본받고 싶습니다
노랗게 익은 은행알처럼 심성이
투명해지고 싶습니다
몸이 아프지만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에도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으면 합니다
높을 것도 없는 자리에 있더라도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갈 것입니다
공경과 자비의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잔잔한 호수를 닮아가고 싶습니다
산림처사의 가을여행
신 보 성
가을에는 잔치도 많고 여행도 많다
은둔처사의 우편함에도
여행안내장 잔치초대장이 심심찮게 들어있다
물론 읽어보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지만
아파트 오피스텔 분양광고 유인물은
모델하우스에 구경만 와도 선물을 주고
경품을 준다고 유혹한다
나의 존재가치는
불특정 다수인의 한 사람인 광고의
대상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매달아놓은 미끼를 물 듯
여행과 잔치에 중독된 사람들
미국 유럽 동남아 다 정복하고
중국 대륙 정복에 나선다는데
숨어 사는 수행자는 이 아름다운 가을
바람 부는 산록에서 잠자리와 노닌다
이 보다 더 좋은 여행 잔치가 어디 있으랴
살육의 현장
신 보 성
가을의 들판에서 수확이란 이름으로
전개되는 처절한 살육
낫에 잘리는 참깨 들깨의 들리지 않는 신음소리
자루 속으로 납치 감금되어가는 고구마
탈곡기에 목 잘리는 벼이삭들
눈에도 안 보이는 낭자한 핏방울
뿌리 뽑히는 무 배추 귀에도 안 들리는 통곡소리
인간의 배를 채우기 위해
욕망의 곳간으로 실려가는 전쟁포로들
자연은 떨어지기 싫은 잎사귀를 거름 삼아
단풍든 낙엽으로 산을 키워
또 다른 살육의 축제를 마치면
전쟁의 폐허와도 같은 황량한 산과 들에
찬바람이 불리라
인간도 이들을 위해 뭔가를 갚아야할 때
농업혁명
신 보 성
콤바인 한 대
운전자 한 사람 보조자 두 사람
벼 베기 탈곡을 한다
기계에 의한 자동장치 알곡은 알곡대로
가마니에 담겨지고 짚은 짚대로 자동 분쇄되어
논바닥에 깔린다
운전자는 70살 쯤 되어 보이는 노인
보조자 중 한 사람은 여자이다
밀짚모자 눌러쓴 운전자
담배 피워가며 핸들 조작하는
솜씨가 능란하다
보조자들은 알곡 담긴 가마니
트럭으로 옮기기에 바쁘다
이제 농부의 아내들은 새참으로 수제비를
끓이거나 점심상을
머리에 이고 나오지 않아도 된다
농부들도 막걸리 대신에 커피를 마시고
점심은 식당 전화 한 방에
퀵 서비스로 배달된다
낫으로 벼를 베고 짚으로 단을 묶어 햇볕에 말려
탈곡을 해야 했던
지날 날의 노인 농부 구경꾼의 눈에 비친
이 시대의 기계식 벼 베기 탈곡 솜씨는
도둑처럼 쓸어가는 요술로 보인다
농사일이 이토록 쉽고 재미있어 보이는데
왜 농촌 인구가 늘어나지 아니하고
농촌 총각에게 시집 갈 여자들이 없을까
농업혁명은 농법의 기계화만으로는 어렵고
의식의 혁명 실질적인 농업소득의 혁명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완성되리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