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5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요한 6,22-29
이런 사람은 성체를 영해도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뻐꾸기 새끼는 다른 새끼들을 밖으로 밀어내
떨어뜨려 죽입니다.
그리고는 어미가 물어오는 양식을 먹습니다.
그렇다고 그 뻐꾸기가 다른 새의 무리에서 살 수 있을까요? 뻐꾸기는 또 자기처럼 하는 새끼를
남의 둥지에 낳게 됩니다.
뻐꾸기 새끼들에게 양식은 자기 어미를 찾는 데 소용되지 않습니다.
그냥 배만 불리는 데 사용됩니다.
그래서 그 양식은 그 무리에 살게 하는 힘은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빵으로 배가 부른 이들은 예수님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찾으려는 이유는 그분을 ‘세속적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루마니아의 ‘요람’이라는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질 좋은 음식이 제공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아이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양식을 먹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의도하는 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양식을 먹을 때는 그 양식을 통해 엄마를 찾기 위함입니다. 엄마를 찾아야 세상에 나아가
살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참 생명입니다.
저도 음식을 통해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의심되기 시작하면서 그분이 주시는 음식에 당신 피가 섞여 있는지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단팥빵과 흰우유를 주셨지만, 그것을 당신이 드시지 않고 주셨음을 알았을 때 조금 더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들이 이뤄지지 않으면 자신이 존귀한 존재임을 믿지 못하게 되어 사회 부적응자가 됩니다.
이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그분이 우리 어머니이심을 믿으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어머니처럼, 또 하느님이 아버지처럼 믿어질 때 우리는 천국에 가서 살 자존감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잃게 됩니다. 끊임없이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심을 믿으려는 의도가 있어야 조금씩 믿어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자칫 뻐꾸기나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존재처럼 하느님만 먹고 그 효과는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에일리언에서 에일리언 새끼는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가 그 영양분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나 결국 그 숙주가 어미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 성장하면 그 숙주를 죽여버립니다.
그런 식으로는 결코 인간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 의해 멸종되거나 아니면 따로 살아야 합니다.
성체를 영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이 이와 같습니다.
만약 아이 대학이나 직장에 취직하게 해 달라거나 집이 팔리거나 남편이 승진하게 해 달라는 목적으로 성체를 영한다면, 그 잘못된 의도 때문에 성체가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올바른 지향으로 성체를 영합시다.
그 의도가 중요한데 그 주시는 분을 믿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어머니로 믿기를 원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도 성체를 영하면서 어머니를 찾는 게 아니라 숙주를 찾는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4월 16일 화요일 ~ 19일 금요일까지 연피정 관계로 복음묵상을 쉬도록 하겠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5일 [부활 제 3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6,22-29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이 지나면 지고 맙니다!
중국 남송의 시인이 남긴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화무십일홍권불십년(花無十日紅權不十年)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이 지나면 지고 만다는 것,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쥐었더라도 십 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우리네 인생의 자명한 진리를 잘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찰나, 한순간입니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동안 지천으로 피어나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던 꽃들이 겨우 열흘 만에 속절없이 떨어져 내립니다.
대자연 속에 거듭 반복되는 순환의 리듬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겸손의 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속절없이 떨어져내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아, 또 이렇게 세월이 가는구나. 또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이렇게 허무하게 내 인생이 저무는구나, 하고 슬퍼하거나 우울해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선을?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구나. 이 세상과 더불어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조금씩 소멸되어 가는구나.
그래서 더욱 필요한 노력은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가치있는 대상, 불멸과 지속 가능한 대상을
찾는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동일한 맥락으로 우리에게 간단하지만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건네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조금씩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끌어당기던 그 좋은 것들도 조금씩 색깔이 바래가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더 백방으로 찾고 추구하고 얻기 워해 노력해야 할 불멸의 양식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3주간 월요일 강론>
(2024. 4. 15. 월)(요한 6,22-29)
<생명의 빵>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 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요한 6,22-25).”
1) 사람들이 예수님을 애타게 찾아다닌 모습에서
그들의 ‘간절함’이 보입니다.
왜, 무엇이 그렇게 간절했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배고픔의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떠나버렸을 것이고, 남아 있다가 예수님을 찾아다닌 사람들은 배고픔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기적의 빵’을 받아먹은 그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던’(요한 6,12)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강렬한 체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힘들고 비참한 심정이 됩니다.
그 심정이 어떤지는 직접 겪어 본 사람들은 압니다.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그 심정을 모르는 자들이 그 간절함을 함부로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자비도 없고 사랑도 없는 태도입니다.>
2)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활동 초기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녔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35-37).”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루카 4,42).”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닌 이유는, 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든 이유는, ‘병고’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바랐기 때문입니다(마르 1,32; 루카 4,40).
그 간절함도 무시하거나 비웃을 수 없습니다.
‘병고’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한 고통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웃 고을들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마르 1,38-39; 루카 4,43-44), 카파르나움을 떠나시긴 했지만 다른 고을에서도 병자들을 많이 고쳐 주셨습니다.
<사실 ‘빵의 기적’도 ‘병자들을 고쳐 주신 기적’에
바로 이어져 있는 기적입니다(마태 14,14; 루카 9,11).>
3) ‘예수님을 찾다.’ 라는 말에서 ‘겟세마니’에서 있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요한 18,4-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요한 18,7-8)”
군인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배가 고파서도 아니었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찾는 일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왜 찾느냐?’, 즉 찾는 이유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6-29)”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으셨지만, 배불리 먹는 것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는
“내가 너희를 배불리 먹였기 때문이다.”입니다.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들이 당신을 찾아다니게 만든 원인 제공자도 예수님입니다.>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내가 일으킨 기적이 표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라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몸의 배부름’을 위한 빵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빵도 필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 빵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빵의 기적’은 그냥 한 끼 배불리 먹은 식사였고, 그 빵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빵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체험한 일이 되고, 그 빵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향해서 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