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성탄제>(1969)-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회상적, 문명비판적, 서정적, 전통적, 감각적
◆ 표현
* 색채의 대조(어두운 방 ↔ 바알간 숯불, 눈 ↔ 붉은 산수유 열매)
* 과거와 현재, 시골과 도시라는 배경의 대칭 구조가 나타남.
* 상징적인 시어를 통한 시상의 집약적 표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어두운 방안 → 우울한 분위기(黑)
* 빠알간 숯불 →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赤)
* 어린 목숨 → 유년기의 화자
* 눈 → 고난과 시련의 의미를 지니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매개체의 역할을 함.
* 산수유 열매(약) → 아버지의 사랑(자식을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도 감수하겠다는 부성애)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 유약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해 주는 표현
* 서느런 옷자락 → 촉각적 심상, 눈을 헤치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시켜 줌.
*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마지막 밤이었을 지도 모른다
→ 시적 근거 : 고난을 무릅쓰고 산수유 열매를 구해다가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
점에서 아버지는 나에게 구세주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구세주의 탄생일인 성탄제를
떠올리고 혈연적인 사랑을 인류에의 보편적 사랑으로 확대 · 승화시키고 있다.
* 어느 새 나도 /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 시상의 전환(과거에서 현실로)
* 옛 것 → '붉은 산수유 열매'에서 느껴지던 감동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지탱시켜주는 끈끈한 정
* 반가운 그 옛날의 것
→ 눈. 눈은 붉은 산수유 열매와 색채감 있게 대조되면서 과거의 시간을 선명하게 떠올려
고난 속에서도 아들을 위해 열매를 따 오던 아버지의 사랑을 부각시킨다.
* 서러운 서른 살
→ 현대 문명의 이기 속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찾아 볼 수 없는 삭막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나의 모습(모든 인간관계에 우선하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잃어 버린
시적 자아의 삶은 쓸쓸하고 서럽게만 여겨짐)
* 서느런 옷자락 →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
* 10연
→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시간의 연속성과 아버지의 사랑이 영원함을 깨달음.
황폐해진 현재의 삶에 대한 거부감과 전통적인 인간 관계에의 향수를 담고 있음.
*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아버지의 사랑이 시간을 넘어 영원함을
의미함.
◆ 주제 ⇒ 아버지로 회상되는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황량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따뜻한 애정의 기
[시상의 흐름(짜임)]
◆ 1∼ 6연 : 과거 어린 시절에 느꼈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회상
◆ 7∼10연 : 삭막한 현실 속에서 그 옛날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 함.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서른 살 중년 사내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성탄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성탄제의 상징인 '사랑'의 의미만 차용하고 있을 뿐 실상은 한국의 전통적 복고적인 정서를 주조로 하고 있다.
이 시는 열 개의 연이 시간적 추이 과정에 따라 전개되고 있으며, 1∼6연의 유년 시절의 체험과 7∼10연의 어른이 된 화자의 체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서도 4연과 6연은 그 시간적 전개에서 제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이 '산수유 열매'와 '눈'을 대비시켜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고도의 시적 장치로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화자는 열병을 앓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 붉은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통해 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 어른으로서의 화자는 이제 어린 시절에 앓던 열병이 아니라 열병을 앓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어린 시절 화자의 가슴에 서려 있던 열병이 지금에 와서는 그리움이 대신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열병과 그리움이 대칭적 관계를 갖게 된다. 또한,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은 '엄부자모(嚴父慈母)'로 대변되는 유교적 전통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한편, 차가운 옷자락만큼 아버지의 사랑이 깊고 뜨거움을 상징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전반부의 시적 공간은 시골이며, 후반부의 공간은 도시이다. 시골의 방에는 '바알간 숯불'이 피어 있고,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도 역시 '눈'이 내리고 있지만, 방이 제시되지 않는 대신 '내 혈액'이라는 독특한 공간이 나타나 있다. '내 혈액'과 '숯불'은 동일한 붉은빛으로 서로 상관 관계를 가지며 시의 깊이를 더해 줌은 물론, 이러한 공간 구조는 '산수유 붉은 열매'에 의해 내적 통일성을 얻게 된다.
이 시의 시간은 전·후반부 모두 '성탄제 가까운 밤'이다. 성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이지만, 여기서는 성탄제의 그런 피상적 의미를 벗어나 화자와 아버지의 새로운 만남을 촉진시키고 조명하는 기능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성탄제는 서구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축제로서의 의미가 아닌, 한국의 전통적·복고적 정서로 전이되어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의 정점을 보여 주는 한편, 그 분위기에 싸여 가족간의 사랑을 한 차원 상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부자자효(父慈子孝)의 윤리관으로 대표되는 관습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한 차원 더 깊어진 애정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눈'은 고요한 회상의 분위기와 함께 춥고 쓸쓸한 겨울 장면을 조성하는 기능을 갖는다. 또한, 그 눈을 헤치고 아버지가 따오신 '산수유 열매'가 화자의 혈액 속에 녹아 흐른다는 것은 육친간의 순수하고도 근원적인 사랑이 늘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수유 붉은 알알'은 화자의 내부에 생명의 원소처럼 살아 있는 사랑의 상징이 됨으로써 거룩한 '성탄제'의 본질적 의미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 '열병'에서 '그리움'으로
어린 시절의 시적 화자는 열병을 앓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눈을 따 오신 / 붉은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통해 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 어른으로서의 화자는 이제 열병을 앓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 하고 있다. 즉, 어린 시절 화자의 가슴에 서려 있던 열병이 지금에 와서는 그리움이 대신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열병과 그리움이 대칭적 관계를 갖게 된다. 또한,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은 '엄부자모(嚴父慈母)'로 대변되는 유교적 전통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한편, 차가운 옷자락만큼 아버지의 사랑이 깊고 뜨거움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 '성탄제'에 나타난 유가적(儒家的) 전통
김종길 시의 뿌리를 이루는 것은 유가적 전통이다. 그의 시의 특성인 절제된 감정과 시어, 명징한 이미지와 고전적 품격 등은 모두 유가적 덕목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보여 주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결국 그의 이런 근본에서 자라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른 살의 나이에 이른 화자는 눈을 매개로 하여, 어린 시절 병든 자신을 위해 눈속을 헤쳐 산수유 열매를 따 오시던 아버지를 회상하고 있다. 따라서, 그 아버지는 부모의 은덕을 효로 보답해야 한다는 효제(孝悌)의 원리를 절로 떠오르게 하는 아버지이며, 화자는 그런 아버지로 표상되는 애정 넘치는 과거의 생활상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소개]
김종길 : 시인, 전 예술기관단체인
출생 : 1926. 11. 5. 경상북도 안동
사망 : 2017. 4. 1.
데뷔 : 1955년 시 '성탄제'
수상 : 2011년 제1회 이설주문학상, 2009년 제13회 만해대상 문학부문,
2007년 제8회 청마문학상
경력 : 2013.12~2007.12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199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작품 : 도서 28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