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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9. 큐티
마태복음 27:1 ~ 10
피밭이 된 은 삼십
관찰 :
1)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종교 지도자들
- 1절.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통곡이 이어지는 그 때에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최후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장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했습니다. 이들은 원래 이번 명절에는 말자는 의견 합의를 본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생기자 예수를 죽이는 것으로 다시 번복해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 2절.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 그들 종교지도자들은 그 새벽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결박한 예수를 넘겨 주었습니다. 행정적으로 자신들에게는 예수를 공식적으로 죽일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든 일들이 빨리 처리되어 눈엣가시 같은 예수를 죽이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 생각한 듯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이들에게 시간도, 장소도, 원수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공식적인 사형의 권한은 로마의 집정관인 빌라도에게 있었습니다. 이들은 잠시 후를 참지 못하고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문을 두들기고 잠자는 일들을 깨워서 재판을 하고자 했습니다. 비상식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 가룟 유다의 최후
- 3절.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 이렇게 일들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가룟 유다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알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팔 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가룟 유다가 고작 은 삽십이 갖고 싶어서 예수님을 판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까이에서 보아온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범상치 않은 존재이기에 자신이 이 예수를 팔아버리면 다른 형태의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각성시켜서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이끌게 되던지, 예수님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어필하고자 하였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가룟 유다가 의도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딴판으로 사건이 흐르게 되자 가룟 유다도 스스로 뉘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아닌데...”
- 가룟 유다는 은 삽십을 다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지고 와서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설마 그렇게 하면 예수님을 이들이 돌려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그렇게라도 하지 안으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가룟 유다의 행동을 이끌어 낸 것일 것입니다.
- 4절.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이것이 가룟 유다의 진솔한 고백이었습니다. 그가 의도한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이러한 고백에 대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반응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네가 예수의 죽음의 핏값을 치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는 응답입니다. 이들은 가룟 유다에게 그 핏 값을 전가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자기 모순을 보여줍니다.
-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 가룟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 은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은 후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받다가 고통 중에 마지막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 본문의 바로 앞에 나오는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하고 통곡하는 장면과 대조를 이룹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완악함을 보였지만 그는 회개하는 것을 택하고 통곡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냉철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판단에 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아버린 제자로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함으로만 살 길을 얻을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움직였기에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선택은 역사상 최악의 선택입니다. 그도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발도 씻기셨고, 떡과 포도주도 주셨던 분이십니다. 가룟 유다의 모든 행위를 이미 다 아셨음에도 그렇게 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주님께 용서를 구했다면 사함을 얻고 그 역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더욱 큰 존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치고, 그 모든 법적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바울도 사용하신 주님이시기에 가룟 유다 역시 사용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 모든 것들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아닌 자신의 고통을 제거하는 길로, 스스로 목을 매는 길을 갔고, 지금도 음부에서 후회하고 후회하고 후회하고 영원히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3) 은 삽십의 행방
- 6절.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가 던지 예수님을 판 값 은 삼십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핏 값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판 핏 값이자 그것을 후회한 자의 핏 값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 그 은 삽십을 성전고에 넣어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성전고는 ‘코르바나스’로 ‘코르반’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헌물을 보관하는 성전 창고 내지는 성전 금고입니다. 부정한 수단으로 마련된 돈은 성전 창고에 보관할 수 없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대제사장들이 이 돈이 부정한 방법으로 모아진 것이라 스스로 인정을 하면서 그 돈을 성전고에 넣어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의 행위가 부정한 것이었음을 증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너무나 뻔뻔스럽습니다.
- 7절.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 대제사장들은 의논을 거쳐 이 은 삽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예수의 죽음도, 가룟 유다의 핏 값에 대한 처분도 모두 자신들이 컨트롤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의 죽음으로 말하는 진실에 대해서도 외면하는 자들입니다.
- 8절. “그러므로 오늘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 은 삼십은 그렇게 피밭이 되었습니다.
- 9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 10절.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 이 모든 상황은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모두 응하게 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즉 가룟 유다나 대제사장들의 결정에 의해 컨트롤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의해 컨트롤 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집고 넘어가는 것이 됩니다.
가르침 :
1) 이 때의 종교지도자들은 뭔가에 홀린 듯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상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온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회복 외의 다른 것을 말하거나 주장하면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습니다. 자신들의 가치에 하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존재마저도 마음대로 조작하는 이들의 무서운 완악함을 보게 됩니다.
2) 가룟 유다 역시 결국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생각을, 혹은 스스로의 방식으로 회피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통곡을 하며 뻔뻔하게도 세 번이나 배신하고 부인한 예수님께 나아왔다면 가룟 유다는 고통 중에 자신의 죗값을 스스로 치루겠다고 목을 매어 자살을 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가룟 유다가 더 책임감이 있고, 쿨해 보이는 듯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지 자신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았던 모든 상황과 방식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 회개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 나아와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3) 가룟 유다에게도 살 길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에게도 동일하게 발을 씻고 떡과 포도주를 주었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것이 불과 몇 시간 전입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아닌 자신의 길을 걷습니다. 마치 가인의 제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가인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였듯이 가룟 유다의 책임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방식이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방식, 주님께로 나아오는 방식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고 죄사함의 은혜를 입는 방식입니다. 다른 종교나 선행을 통해서는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4)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과 행동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죽이고자 끝끝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고선을 스스로 규정해 놓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모두 악으로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말씀을 곡해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구조적인 모순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한 우를 범하는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스스로 규정한 최고선은 성경에 의해 다 깨져야 합니다. 남북통일도, 물질의 공평한 분배도, 노동자의 인권도, 창조질서의 회복도, 자연의 보호도 다 중요한 것이지만 그 모든 것 어느 것도 절대 선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이 기독교의 절대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부차적인 선이 다른 가치들로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용 :
1) 내가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절대선에 대한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일, 예수 그리스도의 일, 성령의 일이 절대 선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주님의 큰 그림 속에서 작은 부분을 감당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늘 그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이 생각나거든, 누가 가르쳐주거든 즉각적으로 주님 앞에 나의 죄를 아뢰고 통곡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변명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갈 길이 아닙니다.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이 갈 길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반드시 스스로의 길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길, 자신의 발을 닦아주신 스승의 길, 자신의 살과 피를 찢고 따라 나누어주신 예수님의 길로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설령 그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였다 하더라도 모두 용서받고 살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 잘못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태도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나의 태도가 내 속에 존재하는 어떤 고집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에 순종하고,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흔쾌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