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품으로 도약한 달항아리와 변기
〈76〉일상용품의 아름다움
조선 후기 달항아리 백자. 사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달항아리는 아름다운 예술품이라기보다 실용적인 일상용품이었다. 1920년이 돼서야 일본인 수집가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그 아름다움이 뒤늦게 조명되었다. 동아일보DB
“따뜻한 순백의 색깔, 너그러운 형태미, 부정형의 정형이 보여주는 어질고 선한 맛과 넉넉함, 그 모두가 어우러지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정녕 한국인의 마음, 한국인의 정서, 한국인의 삶에서만 빚어질 수 있는 한국미의 극치.” 이것은 달항아리(민무늬 백자대호)에 대한 전(前) 문화재청장의 찬사다.
이처럼 달항아리는 한국미를 대표하게 되어 버렸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석학이라는 프랑스의 기 소르망은 2015년 강연에서 “백자 달항아리는 어떤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만의 미적, 기술적 결정체”라며 프랑스의 모나리자에 견줄 만한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로 달항아리를 추천했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평창 겨울올림픽 성화대를 달항아리가 장식했으며, 유명 연예인들은 달항아리 옆에서 홍보용 사진을 찍고, 수백 명의 도예가들은 오늘도 달항아리를 만든다.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라는 점에서, 달항아리는 한국미를 운운하거나 민족 감정에 호소할 만하다. “하늘에 순응하는 민족이 아니고는 낳을 수 없는” 예술품이다. “조선은 공예 왕국이었고, 조선 공예를 대표하는 것은 백자이며, 백자의 제왕은 달항아리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왕조의 상징이며 나아가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달항아리가 조선 후기에 제작되어 유통되었을 때, 조선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의식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도자 연구자 김규림에 따르면 달항아리라는 명칭은 물론이고 그에 해당하는 다른 명칭조차 조선 후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즉 조선시대에 달항아리가 하나의 독립적인 백자 유형으로 인지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료가 부족해서 확언하기 어렵지만, 연구자들은 대체로 달항아리가 조선시대에 보관 용기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즉 달항아리는 식재료나 액체류를 담던 일상 용기였지 심미적 완상(玩賞) 대상으로서 예술품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이 달항아리는 심미적 완상 대상이 되었나. 알다시피, 달항아리는 (고려청자에 비해) 저평가되어 오다가 1920년에 이르러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 등 일본인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없이 덤덤한 색상과 기형(器形)만으로 아름다움을 표출해 낸 조선백자의 조형 의식은 식민지 미술 사관 아래 묻혀 버렸다”는 단언은 적어도 달항아리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렇게 회고한다. “(달항아리를 사들이는 나에게) 조선 물건 따위를 모으는 짓을 하는, 보는 눈이 없는 놈이라고 험담을 했다. 당시 고려자기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고, 조선은 말기의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홍기대,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 즉 20세기 초만 해도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달항아리가 가진 아름다움의 핵심은 무엇인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대로, 달항아리는 동양사상의 핵심인 무(無)나 공(空)이 구현된 것인가. 혹은 한국의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역의 태극(太極)이 구현된 것인가. 그러나 달항아리와 같은 백자가 철학적 개념을 구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화여대 박물관이 소장 중인 철화백자매죽문시형 항아리(17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적혀 있다. “中虛足容物(속이 비어 있어서 물건을 담을 수 있네).” 교토 국립박물관이 소장 중인 청화백자시명팔각병에는 “宏其量容於物也(용량이 커서 물건을 담네)”라고 적혀 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그보다 더 단순하고 큰 달항아리의 부피는 철학적 상징으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이 담을 수 있는 실용성 때문에 중요하다. 달항아리의 비어 있음은 철학적 비어 있음이 아니라 도구적 비어 있음이다.
도구면 어떤가,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되지!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라는 고유섭은 달항아리에서 “무계획의 계획”을 발견하고, “구수한 맛”을 느끼고, 화가 김환기는 도공의 무심(無心)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형태와 빛깔에 감동했다. 실로 달항아리는 고려청자나 동시대 이웃 나라 자기와 비교해서 계획이 없는 듯하고, 거친 듯하고, 그리하여 구수한 듯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조차도 오늘날의 미감(美感)이다. 달항아리가 유통되던 시대를 살았던 학자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중국과 일본 자기에 비해 조선 자기가 거칠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그 거친 면모는 조선의 순박한 마음과 연결되는 게 아니라 거친 마음과 거친 풍속, 거친 일 처리와 관련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 달항아리는 아름답지 않단 말인가? 나 역시 옛 달항아리가 실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깊이 있는 백자의 살결”이나 “둥근 맛” 같은 데서만 오지 않는다.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원래 예술품이 아니라 그저 기능에 충실한 일상 용기였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거친 일상 용기가 정교함에 질린 감식가의 눈을 자극하고 말았다는 아이러니에서 온다. 그리하여 결국 무엇을 반드시 담아야 하는 노역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나 쉬게 된 달항아리의 생애에서 온다.
미국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의 변기 사진도 일상용품이 예술품으로 도약한 사례다. 사진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미국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캔’ 그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따라서 김환기의 달항아리 그림을 볼 때 나는 민족 문화뿐 아니라 일상용품에서 예술품으로 도약한 사례들도 떠올린다. 이를테면 부엌 일상 용기를 그린 네덜란드 정물화를 떠올린다. 꿀이나 기름을 무겁게 안고 있던 달항아리도 이제 정물화 속 용기들처럼 쉬게 된 것이다. 달항아리의 비어 있음은 이제 도구적 비어 있음에서 심미적 비어 있음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하여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볼 때 나는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캔’ 그림이나 에드워드 웨스턴의 ‘변기’ 사진을 떠올린다. 희고 낡은 달항아리나 낡은 수프캔이나 흰 변기나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의 정수’이기에 아름다움으로의 도약이 가능했다. 타고난 귀중품들은 이미 아름다울 거라는 기대가 있기에 그런 심미적 도약이 불가능하다. 옥션에서 수십억의 고가에 팔려 나가는 귀중품이 되면서, 달항아리 역시 자기 아름다움의 바탕이던 ‘아무것도 아니었던’ 상태를 빠르게 잃어가는 중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