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메스너(Reinhold Messner, 1944~ )
현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고산등반가인 라인홀드 메스너는 사정없이 가능성의
한계를 추구하여 지나친 기술적인 보조수단에 물든 이 분야를 정화하면서 지난 반 세기 동안
등반분야에서 이루어진 모든 진보들의 결실을 맺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그의 전성기 동안, 그는 점진적으로 어려운 루트들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진보적인 스트립 다운 스타일로 그 루트들을 완등하면서 등반이라는 게임에서 끊임없이
분담금의 액수를 올렸다.
장비와 식량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산소통이나 볼트 같은 인공보조물을 거부한 메스너는 알프스에
속공 자유등반의 시대와 고소에선 알파인 스타일 등반과 단독등반 시대를 안내했다.
그의 등반들은 모든 다른 등반들의 판단기준이 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새롭고 보다 어려운 도전들에 대한
이러한 집념어린 추구로 인해 메스너는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해와 비난도 받았다.
그는 몇 번이나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등반들은 무모하지 않으며,
세밀하게 계산된 엄청난 자기확신감을 지니고서 대담하게 실행된 것들이다.
이러한 증거는 그가 생존해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한계를 끊임없이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한계상황 넘어에 있었던 일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기 위해 살아돌아온 몇 안되는 극한 고소등반가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생존재능을 산에서 평생 살며 산을 등반하면서 얻게 된 경험 덕택이라 여긴다.
메스너는 이태리 남부 티롤 지역의 한 소도시 브리센에서 1944년에 태어났다.
그는 거기서 멀지 않은, 인상적인 침봉들에 둘러싸인 산골마을 빌료스에서 자랐다.
걸음마를 배운지 몇 년 되지 않아 등반을 시작한 그는 처음엔 근처의 샤쓰 리가이스 봉에서
부모님들과 올랐으며, 그 후 크래이내 퍼매다 동벽 같은 보다 기술적인 루트들에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등반했다. 마침내 그는 알프스에서 가장 어려운 등반들을 행하기 위해
그의 동생 균터와 몇몇 친구들과 팀을 이루었다.
1965년, 그와 균터는 서부 알프스에 위치한 트리올랫 북벽 직등과 래스 코우태스 북벽 직등 루트를
재등했으며, 1966년에는 그와 헤인니 홀저가 돌로미테의 치베타에서 암명 높은 필립 프램 루트 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시험적인 대상들을 등반했다. 그리고 1969년에 그는 래스 드로이태 북벽,
치베타의 필립 프램 루트, 말모라다 남벽 등에서 새로운 루트을 단독등반했다.
또한 1969년에 그는 에리흐 랙크너와 함께 몽블랑 프레네 중앙능을 하루만에 등정하여 1974년에
그와 패터 하벨러가 아이거 북벽에서 10시간 만에 등반한거와 같은 그런 속도등정에의 길을 열었다.
25세가 되었을 무렵, 그는 알프스에서 가장 어려운 대부분의 루트들을 등반했으며, 그것들 중에는
많은 단독등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그는 보다 높은 대상들을 추구할 준비가 되었다.
1969년에 그는 고소등반을 처음으로 맛보았는데, 그 때 그는 한 티롤 원정대의 일원으로서
예루파자 그란데(2,1759피트)를 등반했다. 그 다음해 그는 칼 헬리그코퍼 박사가 이끈 원정대와 함께
낭가파르밧으로 향했다. 거기서 그와 동생 균터는 루팔 벽을 등반하는덴 성공했지만, 하산 중 동생이
눈사태에 침몰되어 실종됨으로써 그 승리는 비극으로 뒤바뀠다. 슬픔으로 인해 거의 미칠지경이
되었던 메스너는 겨우 하산하여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비탄에 잠긴 가족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한 비극으로부터(그는 동상으로 인해 발가락 여섯 개를 잃었다) 정신적, 육체적 회복을 위한
시간을 가진 후, 그는 티롤의 한 원정대와 함께 마나슬루 남벽을 등반하기 위해 1972년에 히말라야로
돌아갔다. 하산 중, 프란즈 재거와 앤디 쉬릭크는 캠프를 찾지 못한 채 악천후 속으로 사라졌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유럽의 몇몇 언론인들은 메스너가 그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좀더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비록 메스너는 그러한 비난을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상처받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한 비난에 상심하고 대규모 원정대에 시달린 그는 작고 경험있으며 응집력있는 등반대를
선호하여 대규모 원정을 멀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방향에서의 그의 첫번째 시도는 1974년에
행해졌다. 아르헨티나에 위치한 아콩캉구아 남벽의 단독등반이었다. 그는 잠시 대규모 원정등반으로
되돌아왔는데, 1975년의 로체 남벽에 대한 리카르도 캐신의 이태리 원정이었다.
눈사태로 인해 그 원정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 해말 메스너는 패터 하벨러와 힘을 합쳐 히든 피크
북벽을 고정캠프와 산소통, 아니면 대규모 인원에 의한 지원과 안전망없이 한 번만의 긴 시도로
등반해냈다. 1978년에 그 둘은 심지어 더 대담한 계획을 실행하여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반
(사우스 콜을 경유하여)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메스너는 1979년에는 무산소로 K2를 등정했으며,
그 다음해는 그의 궁극적인 등반목표들 중 하나인 에베레스트 북벽의 단독 무산소 등정을 이루어냈다.
또다른 놀랄만한 등반업적들이 뒤를 따랐다. 1982년에 그는 한스 캐머랜더와 함께 가셔브롬 I, II봉을
횡단했으며, 1986년엔 그와 함께 로체 서벽을 등반함으로써 8000미터 봉 14좌를 모두 등정하는
업적을 이루어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한 메스너는 고소등반에 대한 그의 관심을 극지방의 탐험과
같은 그런 색다른 대상들로 돌렸다. 1989년에 그는 알베드 퓨츠와 함께 주로 오지의 봉우리들에서
새로운 루트를 택하면서 계속 등반하고 있다.
메스너는 1972년에 우쉬 데메터와 결혼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1977년에 이혼했다.
그것은 메스너가 "결국, 산에 사로잡힌 내 진정한 관념이 우리 결혼생활에 비해 너무 크단 말이야."
라고 밝한거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981년에 그의 여자친구 네나 홀귄이 그에게 딸아이 하나를
안겨주었다. 그는 지금 사비내 스태흐래와 함께 티롤 남부의 한 작은 성에서 살고 있으며 두 아이를
두고 있다.
1979년 이래 줄곧 메스너는 강연하고, 많은 책을 저술하며, 가이드하고, 교육하고, 그리고 여러
상품들을 홍보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그리고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 정상급 영화배우에 가까운 명성을 얻었다. 메스너는 많은 수염과
텁수룩한 갈색 머리카락을 소유한 마르고도 강인한 체격의 인물이었으며 그의 눈에는 야생적인
광채가 흘러나왔다. 예외적인 강건한 사람임에 덧붙여 그는 등산에서 자연보호에까지 그리고
철학에서 영화제작에까지 다방면에 걸친 그의 아이디어와 견해, 그리고 의견을 긍정적으로 마음껏
토론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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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의 진정한 예술은 살아남는 것이며, 가장 어려운 시점은 그 때까지 전형적인 등반업적으로
여겨졌던 것을 이루어내면서 자신이 한 단계 더 전진하려고 시도할 때이다. 그 전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던 곳으로, 어느 누구도 따르고 싶지 않은 곳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전진하는 것이거나 심지어
자신이 하고자 노력하는 바가 도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한 미지의 지역에선,
"잘 길들여진" 땅으로부터의 어떠한 감동과 감각, 경험보다도 단연 더 큰 긴장과 집중을 가져다 준다.
라인홀드 메스너 (Reinhold Messner)
-8000미터봉 14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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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온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알고 싶고 또 새롭게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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