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류 위의 나뭇잎
― 모더니티, 대중문화사회, 시
황지우(시인)
단테가 지옥편에서 피렌체 사람들에게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자들이여" 라고 꾸짖을 때 나는 뜨끔했다. 결코 평탄하다라고 할 수 없는 삶의 행로를 지나왔지만 과연 내가 내 삶을 살았던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붙들린 삶이었고 무엇엔가 끌려다닌 삶이었고 그냥 살아진 삶이 아니었던가. 나는 내 삶을 생각할 때 내 욕망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내 삶 이전에, 그리고 바깥에 무엇인가가 그것을 끌어당기고 빨아들이고 유혹하고 있었다고 느낀다. 결코 존재가 선행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일까?
연혁
내가 태어난 것은 1952년, 그러니까 아직 한국전쟁이 한참 진행중인 때에, "가난이 하나의 오랜 관례"였던 반도의 최남단 바닷가 마을에서였다. 전쟁이 전국토를 써래질하고 지나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바다에 나가 숭어떼를 몰아 마을 어구로 들어오고, 때마침 놀란 청동오리들이 갈대밭을 흔들면서 보라빛 저녁 하늘로 사라지는 그런 외진 시골의 사립문 앞에서 어머니는 만삭의 배에 나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미구에 나갈 외부는 일제 식민지 강점에 이어 두 지배 이데올로기의 난류가 만나는 비등점에서 사상 유례없는 동족간의 자해 행위로 피범벅이 된, 완전히 망가진 세계였다. 유럽 중부권에서 발생한 세계전쟁의 비극적 피날레를 알리는 커튼이 그 책임과는 아무 관계없는 '머나먼 동쪽 끝'의 나라 한반도의 허리에 내려진 것이다. 그 비극의 강제력으로부터 내 삶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낮은 구릉의 솔밭들과 붉은 황토가 멀리 바다로 빠져드는 남단의 초록빛 수면에 한나절 햇살이 반사되어 눈부신 다도해 섬들이 둥둥 떠다니는, 한없이 나른한 풍경을 나는 토방 마루에 혼자 앉아 발을 앞뒤로 흔들면서 바라보았다. 자연 속에 정지된 어떤 영원감 같은 것을 뒤흔들어 깨운 것은 이따금씩 집 앞을 지나가는 버스였다. 버스가 뒤꽁무니에 달고 가는 기다란 황토 먼지 띠는 아스라하게 내륙으로 들어가는 외줄기 신작로를 가느다란 실핏줄처럼 드러나게 했다. 그 길은 "땅에 붙어 괴로워하는 풀잎 같은 삶들"에게 강력하게 <이동>을 명령하는 기호였다. 아니, 유혹하는 손짓이었다.
기차
50년대 말 우리 집은 손바닥만한 땅떼기를 팔아치우고 솥단지와 이불 보따리만 싸가지고 광주로 이사했다. 향후 전국토에 불게 될 離農 러시의 첫 물결을 탄 것이다. 비로소 우리는 땅으로부터 떨어졌다. 그러나 전후의 폐허를 미국 원조물자들로 간신히 땜질하려 든 이승만 정권의 복구 프로젝트도 부폐한 관료 조직 때문에 완전히 누수되어 버렸으며, 백성들은 보편적 가난에 속수무책으로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그 도시에는 어디 노동을 팔 공장마저 없었다.
아버지는 땅 판 돈으로 장사한다고 집 나가 돌아오지 않고, 우리 가족은 기찻길 옆 오막집에서 허망한 날들을 살았다. 우리가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 착륙한 곳은 도시 한 가운데가 아니라 외곽 변두리, 여전히 황토 언덕과 논과 밭이 펼쳐진 또 하나의 농촌이었다. 행정명으로는 제법 동양화적인 기품마저 어린 山水洞이었지만 우리는 거기서 땅 없는 촌사람으로서, 도시 변두리의 절대적 무산자로서 멀리 도시의 불빛을, 굶어서 멀미나는 눈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도시의 빛에 홀려, 집어등에 홀린 물고기떼처럼, 땅을 떠난 우리 가족은 어느 역사에서나 하나의 수난으로서 체험되었던 근대에로의 이행에 있어서 '뿌리뽑힌 삶'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근대! 그렇다, 내가 이 글에서 쓰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근대라는 것이 우리의, 나의 삶을 가로질러 가면서 찍어놓고 간 캐터필러 자국 같은 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내가 그 도시에서 첫 번째로 목격한 근대의 표정은 기차였다. 검은 거품을 게우며 꽥꽥 고성을 지르면서 질주해 오는 검은 쇳덩어리는 너무너무 무시무시했다. 작은 형과 나는 질겁을 하고 보리밭으로 도망가 숨어버렸다. 그것이 철교를 다 지나간 뒤에도 형과 나는 귀에서 손바닥을 때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채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중공업적인 무거움과 속도를 동시에 갖고 있는 이 낯선 물체가 상징하는 근대의 '파워'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 물체는 꼭 가난한 동네로만 지나갔다. 그리고 폭력적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고 지나갔다. 어느 도시에서나 빈민의 영원한 게토 지역인, 시끄럽고 사나운 철도변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내 버릇 중의 하나; 기차가 지나가면 나는 차렷자세를 하고 경례를 부쳤다. 사람들이 답례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차 자체에 대한 나의 경의였다. 나는 주로 혼자 놀았다. 못이나 돌맹이를 철로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간 다음 납작해진 그것들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철로에 귀 대고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기차바퀴 소리를 듣기도 하고, 석탄 주우러 철교 너머까지 갔다가 지열로 흔들리고 있는 가물가물한 소실점 끝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오곤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가는 그 끝에 서울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기차에 대한 정신분석적 잔여물 3:
1) 요즘도 기적 소리를 들으면 푸른 새벽의 급격한 공복감을 느낀다.
2) 침목의 콜타르 냄새를 내 코는 향기로 바꾼다.
3) 기관차를 보면,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내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을 자제시키느라 심리적
으로 상당히 긴장하는 편이다.
학교
국가는 보통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나를 학교로 끌고 갔다. 이 지점에서 아버지는 국가와 대립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학교에 가느니 일 나가서 돈 벌어오는 것을 원했다. 아버지는 형들의 교과서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두 권위 가운데 국가의 그것이 더 셌다. 나는 학교에 갔다. 그 학교는 근대에 마주친 놀란 눈에 기차 다음으로 공포를 자아냈다.
기차는 삶을 방해하면서 옆으로 지나가는 힘일 뿐이며, 그것은 불가불 線的이다.
반면에 학교는 운동장, 강당, 교무실과 수많은 교실들에 의해 수직적으로 포개져 있는 레벨들의 공간이었다. 그것은 질서의 입체이자 시간 순으로 등위를 자동화하는 조직체였다. 레벨들을 공간화하는 방식에 의해 '다루고 쉬운' 조직을 만드는 근대의 기지라는 점에서 학교는 내가 나중에 가게 될 교도소와 군대와 상동기관이다는 것을 18년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이런 초등적 사회화 모델은 무관심과 방목으로 베풀어지는 자유, 無爲라고 하는 빈민적 본성을 괴롭혔고, 그것은 나를 공포스럽게 했다.
학교는 매를 때렸다. 반별로 열을 맞춰야 했고 분단별로 줄을 맞춰야 했으며 날마다 숙제를 해다 바쳐야 했다. 특히 학교에다 갖다 바치는 지식의 공물인 숙제에 대한 공포는 교사의 검사에 의해 더 가중된다. 학교는 그 밖에도 여러 레벨의 검사를 했다. 복장 검사, 손톱 검사, 심지어는 이빨 검사까지 있었다. 공포는 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겨드랑이에 끼여 있는 매의 둘레에 있었다. 집에서도 수시로 얻어맞는 거였지만 학교에서 맞는 매는 통증 이상의 어떤 수치심을 동반하는 형벌이었다.
그렇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지식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다. 그 수치심을 자극하고 강박하는 학교의 가학적인 코드 세가지; 1) 시간 지키기 2) 위생 관념 3) 표준어. 그것들은 나에게, 나의 집에 부재한 것들이었다. 또한 학교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학생들의 생활 정도를 조사했다. 삶의 레벨을 측정하는 눈금들이 뜻밖에도 물질적인 것으로서의 근대성의 도구들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기 다리미, 시계, 라디오, 전화, 전축, 피아노 따위들이 그것인데, 조사표에 내가 동그라미 칠 만한 그런 것들이 우리 집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러한 근대적 지침이나 목록들이 부재한 자연 상태의 그늘, 이를테면 우리 집 '정게'나 '칙간'에 떠도는 독특한 냄새에 대한 계급적 경멸에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나는 내 집과 내 가족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는 내가 끝까지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다. 학교로부터 끊임없이 공포와 수치심을 주입받는 피학적인 상황에서, 푸코식으로 말한다면, 억압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근대의 규율을 내면화시키고 있었다고 할까. 나는 내 계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