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려우냐 하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시작할 때에 선악과와 인간을 처음부터 맞닥뜨리게 해서 인간 속에 선악과가 스며들어가는 식으로, 선악과를 인간 속에 집어넣는 식으로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인간에게서 떠나버리고 인간 속에 선악과의 과실이 개입되면서 인간은 인간 그 자체가 선악적인 존재가 되었어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 자체가 유혹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그것이 처음에는 인간 따로 선악과 따로 있었지만 그것이 일체를 이뤘습니다. 이렇게 되니 너는 나의 유혹이 되고, 나는 너의 유혹이 되었습니다. 서로 서로 유혹이 되어 그렇게 해서 뭉쳐진 것이 도시이고 사회라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관계없어요. 선악과의 유혹 받아서 유혹자들이 되어버린 그 사람들끼리 거대한 하나의 유혹으로 자리 잡는 거지요. 제가 이 말을 왜 하는가 하면, 인간 자체가 선악과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을 말할 때, 죄악부터 시작이 되어야 이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설명할 때 악으로부터 시작하느냐 하는 점을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설명하겠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선악과와 인간을 맞닥뜨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혹의 선악과가 인간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선악에 대해서 앎으로 말미암아 인간 속에 선악과가 살아있는 그런, 인간 자체가 선악과 노릇을 하게 된 그런 입장이 되고, 생명나무는 우리와 무관하게 딴 동네로 가 버렸습니다.
선악과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은, 내가 너에게 유혹자가 되고 너도 나에게 유혹자가 되고 이런 유혹과 유혹이 모였을 때, 영원을 그리워하고, 도시가 되고, 사회가 형성되고, 자기 이름을 하늘까지 높이려 하고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을 규명할 때는, 선악부터 규명을 해 줘야, 선악과 먹는 것이 왜 죄냐 하는 것부터 규명을 해야 이야기가 풀리고, 악이 풀려야 하나님이 원하는 의가 나와요. 악을 제가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이 악이 드러나는 것이 언제인가 하면, 꼭 악이 아닌 의로움이 들어가서 악이 민감하게 이것을 공격할 때, 의가 고난 받을 때, 서러움 받을 때, 억울하게 죽임 당할 때 비로소 악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이 악으로써의 제 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생명나무 과에 속하는(여자의 후손) 자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능력으로 등장되고, 그 다음에 악이 이쪽에 대해서 공격을 해 댈 때 비로소 악은 자기의 정체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시나리오를 짜 놓으셨습니다.
그리니까 절대 선이신 예수님께서 오기 전까지는 절대 악은 역사 속에 얼굴을 내 민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더 엄청난 이야기를 해요. 악이 갇혀있는 그 옥의 열쇠를 누가 열었느냐 하면 어린양 되시는 분이 풀어주셨어요. 갇혀있는 악을 풀어주어 온 천지를 악의 세상으로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 중의 하나가 악으로 하여금 악의 본래 모습을 공개하도록 조치하는 그 역할까지 하십니다.
여기에서 ‘주님’(혹은 ‘주’)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다른 분들은 잘 모르지 싶어서 ‘주’에 대해 좀 설명하겠습니다. ‘주’가 무엇이냐 하면,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어떤 분이 ‘주’가 아니냐 하면, 착한 분은 주님이 아닙니다. 악한 분도 주님이 아니에요. 선과 악을 전부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루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즉, “우리 주님은 자비롭고, 착하고, 사랑이 많으시고 --” 이런 주님은 안 계십니다. 그러면 어떤 주님이 계신가 하면, 지옥을 만드시고, 지옥에서 울며 통곡하도록 조치하시는 주님이 진짜 주님입니다. 시편 136편에 보면 ‘바로의 군대들을 바다에 몰살시킨 그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하라’고 하지요. 참 엽기적인 하나님 아닙니까? 여러분, 잔인하지 않습니까?
이런 주님에 대해서 공격하고 비방하고 욕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주께서 의도적으로 나로 하여금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내 주위에 배치하신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서 길을 가는데 여기에 대해 도저히 참지 못하는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이 누구냐 하면, 모압 왕 발락입니다. 발락이 발람 선지자에게 뇌물을 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요청을 하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여러 길 가운데 하필 모압 땅을 지나게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요? 모압 왕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을 막을 수밖에 없어요. 길도 많은데 왜 하필 자기 땅을 통과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주님은 의도적으로 모압 왕을 화나게 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시고, 그 일로 그 나라의 악을 들춰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절대적인 의, 하나님의 언약의 의해서 나타난 의가 아닌, 그 외에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을 가지고 윤리라고 합니다. 혹은 도덕이라고 하지요. 엄격히 구분하면 윤리와 도덕이 다른데 여기서는 같은 것으로 보고 합시다. 그러니까 복음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방민족 자체적인 양심(자연법)으로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이 윤리, 도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나타나기 이전에는 윤리, 도덕을 선한 것으로 간주했지요.
교재를 좀 봅시다.
13페이지 [사례 1] 봅시다.
수사(修士) 베티의 연옥 간증(AD 824년 11월 4일)
“베티는 병이 나서 자기 방에서 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는 것은 아니었다. 사탄이 성직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 얼굴이 하도 검고 추해서 어디가 눈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탄은 고문 도구들과 한 떼의 마귀로 그를 위협하면서 고문실 같은 곳에 가두었다. 그러나 신적인 자비로 단정하고 당당히 수사복을 입고 라틴어를 말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졌고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주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한 천사가 자색 옷을 입고 나타나 그의 머리맡에서 다정히 말해주었다.
이런 것이 이상의 첫 번째 부분이다. 수도원의 수석수사와 또 다른 한 형제가 환자를 보러왔다. 환자는 그들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말하고 그의 죄를 위해 중보를 드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수도원의 참회 자세대로 팔을 십자로 벌려 엎드렸다. 두 형제는 회죄(悔罪) 시편들을 노래했고, 환자는 다시 누워 그레고리우스의 [대화]를 청했다. 그 책을 9, 10페이지 가량 읽은 뒤, 그는 방문자들에게 가서 쉬라고 말했고, 자기도 쉴 준비를 했다. 아까 자색 옷을 입고 나타났던 천사가 다시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희고 빛나는 옷을 입고 있었으며 환자에게 그가 방금 한 일에 대해 칭찬해주었다.
그는 특히 시편 제 118편을 거듭 읽으라고 권면했다. 그러고 나서 천사는 한 길로 그를 인도하여 굉장히 높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산으로 데려갔다. 산들은 대리석으로 된 듯 했으며 그 둘레에는 큰 강이 있었는데 그 강에는 무수히 많은 저주받은 자들이 붙잡혀 벌을 받고 있었다. 그 중에는 그가 아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다른 곳들에는 많은 신부들과 그들이 유혹한 여자들이 수없이 다양한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녀들은 성기까지 불에 잠겨 있었다. 나무와 돌로 된 아주 이상한 모양의 성에서 연기가 새오나오고 있었는데, 천사가 그에게 일러준 바에 따르면 그곳에는 수도사들이 자신들의 정화를 위해 모여 사는 것이었다.”
하늘나라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조금의 죄도 섞이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사소한 죄를 씻어주는 중간 지옥이 있어야 되요. 여기서는 사소한 죄를 어떻게 씻는가 하면, 불로서 고문해서 죄를 씻습니다. 그러니까 신체적인 고통을 가해서 죄를 자백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죄를 씻어 천국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연옥을 만든 이유가, 사람이 법 조항을 다 외울 수 없어서 자기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나중에 죽고 보니 법 조항을 다 못 지켜서 빼먹은 것이 있어요. 이것 해결하지 않으면 거룩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래서 중간 연옥에 가서 잘못했다고 꿇어앉아 빌고 하는데, 그 중간지대인 연옥에서 천국으로 빼내는 방법이 4-5가지 있는데, 이것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요. 첫째는 미사를 잘 드리고 자기 아는 친척이나 친지를 위해 기도하면 가능해요. 둘째는 보시(구제)를 하면 선이 증가되어서 사소한 죄로 연옥에 간 사람을 건져줄 수 있는 효과가 있어요. 셋째는 교황의 일반사면입니다. 교황이 기도하면 연옥에서 풀려나 천국 갈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통고(중보기도)가 있습니다. 간절히 대신 기도하면 됩니다. 다섯 번째는 나중에 첨가된 것인데 그것은 헌금입니다.
옛날 왕건 시대에는 아내를 구박해도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아내를 구박하면 큰 죄악입니다. 그래서 왕건 시대에는 죄가 아니었지만 후대에 새로운 법에 의해 과거 죄 아니었던 것이 죄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죄악들은 후손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보시를 하고 헌금을 하면 후손들의 정성으로 조상들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연옥을 거쳐 천국에 가든 바로 천국에 가든 천국 간 사람은 나름대로의 자기 의가 있어요. 본인의 선행으로든 후손의 덕을 보았든.
그리고 죽은 자가 산자를 위해 기도하는 절기가 또 있어요.
현재 개신교의 역사가 짧아서 그렇지 개신교도 천주교처럼 수 천 년의 역사를 가지면 이런 것이 보편화 됩니다. 개신교도 벌써 [중보기도]가 등장했지요. 그리고 개척교회에서는 [헌금]도 효과를 본다고 설교하지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충족시켜 주므로 반대급부로 커미션 받아먹겠다는 것이 교회고 종교단체입니다. 이것을 좀 더 규명해 보면, 이미 이전 시대에 선배들이 그렇게 했어요.
성인들의 기도 위력은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큽니다. 성인들이지요. 이렇게 차별을 두어야 열심히 성인의 반열에 들이 위해 노력하지요. 만약 죽도록 기도하고 금식하는 사람과 TV보면서 노는 사람과 같이 은혜를 주고 구원을 얻는다면 누가 노력하겠습니까. 그래서 천주교의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교리들이 생성되고 연옥 등의 교리들도 만들어졌어요.
이런 것들을 위해서 천주교는 자연법으로 윤리를 만들었어요.
천주교의 자연법은 우리가 평소에 가졌든 상식과 얼마나 일치되는지 참으로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감탄하기 전에 교재를 좀 봅시다.
13페이지에 [맹자]가 있지요.
“인간의 마음은 타고난 착하고, 어질고, 의로운 양심을 바탕으로 하여 이로 인하여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양능(선한 능력)과 생각지 않고 알고 있는 양지(선한 지식)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양심과 양능과 양지를 근거로 인간의 성선설을 주장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천주교에서는 이 양능과 양지 두 개를 합쳐서 양심이라고 공식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맹자는 예수님 태어나기 이전 사람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에서 양심을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이 4단인데, ‘측은지심’이란 것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불쌍한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고 타고난 것이에요. ‘수오지심’이란 아무리 강도라도 자기가 나쁜 짓 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사양지심’이란 아무리 건방진 놈이라도 어른 앞에서는 예의를 차릴 줄 아는 것입니다. ‘시비지심’은 조폭들 사이에도 의리가 있고, 그들 세계에서도 옳고 그런 것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교육과 상관없이, 환경이라든지 출신과 관계없이 인간들에게 있다는 말은, 인간 속에는 신이 주신 기본적인 신의 법이 박혀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이 맹자의 성선설입니다.
맹자가 4단을 주장하면서 이런 것들은 인간 심성에 박혀있다고 한 것에 대해 반대한 사람들이 현대 윤리학자들입니다.
프로이드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이런 것들에 대해 모든 인간들이 이런 심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개 같은 아버지를 안 만나고 사람 같은 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에 그런 성품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속에 이런 마음이 들어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텅 빈 마음에 아버지, 엄마가 잔소리를 해대니까 그 잔소리가 누적되어 생긴 것이라고 봅니다.
어린 얘가 6-18개월 정도 되면, 이 때를 ‘거울단계’라고 하는데, 거울을 보면서 “내가 저기 있네.” 하고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바나나를 갖고 있으면 자기도 가지고 있는데 거울 속의 것을 자기가 빼앗으려고 하지요. 이 때는 아직 자기 마음속에 자기 동일성만 있지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의식이 없어요.
여기에서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상징계’에 들어가게 되면, 부모가 “이러면 안 돼!” 하고 때리게 되면, 어린 아이는 ‘수오지심’이 있어서 그런 행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맞으면 아프니까 그런 행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맹자와 프로이드 이 두 사람의 주장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현대 심리학은 어른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어른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자질이 어디서부터 구체화되고 있는지 어릴 때부터 따집니다. 이렇게 따져 보니까 어릴 때는 ‘수오지심’ ‘측은지심’ 이런 것이 없어요. 이런 것이 없는데 맹자는 거짓말을 해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고 사기를 치느냔 말이지요.
현대 심리학에서는 그냥 뭔가를 말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실험을 해요. 그래서 그 결과를 가지고 말을 하지요. 이렇게 실험을 해 보면 심어지 동물들도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행동을 해요.
맞으면 아프니까 안 아픈 쪽으로 행동을 해요. 존 듀이 이론에 의하면 행동이 아니고 이것을 충동이라도 하는데, 충동에서 맞는다는 경험을 하게 되면 여기에서 반성을 하게 됩니다. 반성을 하면 반성한 그것이 생각이 되고, 이것이 이성이 되고, 습관이 되면 이것이 성격이 되고, 이 성격에서 나온 것이 행동이라고 봅니다. 야고보서 2장 ‘행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행한다.’ 할 때 ‘행해라’하고 끝내지만, 존 듀이나 이런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안 봐요. 따져보니까 ‘행함’ 이전에 충동이 먼저 있어요. 옆에서 때리고 잔소리하고 하는 충동을 주게 되면 반드시 ‘반성’을 하게 됩니다. 이 반성에서부터 짐승과 사람이 달라져요. 여기서 반성하는 것을 가지고 칸트는 ‘이성’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술이 취해 교회에 왔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술 취하지 말라. 성령에 취해라고 합니다. 그 소리 듣고 술을 안 먹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안 먹으니까 이게 습관이 되어 술 안 먹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습관이지 성령의 능력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방 종교에서 말하는 자체 내에서의 선과 악의 윤리이지 이것이 무슨 성령의 역사입니까?
이렇게 해서 술 끊은 사람이 또 자기의 전철을 밟는 사람에게 ‘나도 했는데 너도 할 수 있다. 내가 이런 절차를 밟아 성공했기 때문에 너도 똑같이 그 과정을 거치면 된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은 그 방법을 배우려 하고, 그 방법들을 종합해서 그것으로 구원되는 단체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흔히 목사들이 말하는 [목회]라는 것입니다.
[목회]가 뭐냐 하면, ‘나도 했으니 너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택]은 뭡니까? ‘나는 선택 받았지만 너는 모르겠다.’ 이렇게 되니 무슨 재미로 교회 나옵니까?
‘내가 이렇게 했더니 됐다. 너도 나처럼 하면 된다.’ 이렇게 해야 부흥,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마련되지요.
이방 종교에서 말하는 윤리, 도덕을 말하면 여러분들은 “야, 맞다 맞아. 내 상식과 딱 일치하네.”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천주교 신부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사람 끌어 모을까에 대해 밤잠 안자고 연구한 사람들입니다. 이것도 혼자 한 것이 아니지요. 그 많은 반성을 거쳐서 그것이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데 조직에서 이런 행동들을 가지고 ‘법’이라고 합니다.
교재에 나오는 “자연법이 자연에 있는 질서가 우리 마음에 법이 되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자꾸 오래 살다보면 자연히 도가 터이게 되어 있다. 수오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 측은지심 이런 것에 대해 도가 터인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너에게 준 양심의 법인데, 그 양심대로 살면 구원 받는 거야. 만약 완벽하게 살지 못하면 연옥을 거쳐서 천국가면 된다. 이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인생관을 심어주겠다는 것이 바로 천주교의 윤리관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이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연옥이 필요합니다.
왜 연옥이 필요한가 하면, 지옥 간 사람과 천국 간 사람,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부터 천국, 지옥 갈라지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을 동안에는 아직 시간이 모자라서 죽은 후에 과외수업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가는 여정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뒤에 특별 과외수업을 받아서 ---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지옥은 만들어 놓고, 진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부하는 사람 같으면 지옥 보내겠지만 그렇지 않고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한 사람들은 과외수업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조치라고 보는 것이 천주교의 윤리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천주교 다니면서 “그러면 좋다. 내가 이 땅에서는 마음대로 살다가 나중에 연옥 가서 해결보자.” 이렇게 하지만 이런 점을 방지하기 위해서 ‘연옥에서 훈련 받는 것이 좀 세다(많이 힘들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힘든가 하면 찬물에도 집어넣고 뜨거운 물에도 집어넣어요. 맨발로 송곳같이 뾰족한 길을 걸어요.
어떤 성도가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연옥에 고문 기술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고. 그랬더니 신부가 답하기를 “혀를 4개 가진 사람이 400년 동안 말해도 연옥의 고문에 대해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어요.
또 어떤 설에 보면, 144,000가지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게 우리들이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천주교가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 모든 인간들이 이미 그러한 하나님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체가 선악과를 따 먹은 자들이기에 자체적으로 선과 악을 어떻게 해소를 해야 돼요. 악이 있는 것은 선을 증가시켜서 없애고, 선이 모자라면 선을 더 부추기고, 그래서 이 땅에 살면서 연옥에서 그것을 보충해서 완벽한 절대선인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그것이 바로 교회의 활동이라고 한 것이 그동안의 2,000년 천주교 역사입니다.
이런 천주교의 연옥에 대해 세세히 들은바가 없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설명을 하면 ‘아, 그런 교리가 있구나.’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개신교 신자라는 사람들이 복음 전하는 교회 설교를 들으면서도 설교 듣는 것 따로, 내가 만든 연옥 따로 각자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맹자 같은 착한 사람은 천국 갑니까, 지옥 갑니까, 연옥에 갑니까?
맹자는 무슨 법을 몰랐는가 하면, 예수님 오시기 전의 사람이기에 복음에 대해서 몰랐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착하게 살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의가 없으면 천국 못 가잖아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일단 연옥에 가면 예수님이 하강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을 받아들이면 천국으로 가고, 거절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거예요.
이 근거를 어디에서 드는가 하면, 누가복음 16장, 거지 나사로는 십자가 지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품에 가서 그 품에서 예수님 만나 복음 믿고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품은 아직은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강도가 낙원에 갔지만 천국에는 아직 못 갔다. 이렇게 낙원과 천국을 달리 봐요. 낙원은 서늘한 곳, 청량소라고 해요. 반면에 부자가 간 지옥은 뜨거운 곳이에요. 왜 뜨거운가 하면, 뜨거운 불로 죄를 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가 불로서 씻어집니까? 불은 태우는 것이지 깨끗하게 씻는 것은 아니지요.
그들의 사고방식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3장에서 나왔습니다. 12절에 보면,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공력을 불로 태워서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고 되 있거든요.
이들은 이 구절을, ‘아무리 심한 죄라도 불로 태우면 다 태워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죄는 물로도 못 씻고, 불로도 못 태우고,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어린양의 피로만 죄가 씻어집니다. 이게 성경에 나와요. 어린양의 피로써 씻어 하얀 옷을 입고 그들은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따지지요. 어떻게 어린양의 피가 우리의 무서운 죄를 씻을 수 있는가? 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씻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잘못된 양심을 고치면, 그 고쳐진 양심 가지고 착한 행실 하도록 하는 것이지, 어떻게 직접 우리의 죄를 다 씻어버리느냐?’ 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이게 이 사실을 믿으라고, 천주교 주장 믿지 말고 예수님의 피를 믿으라고 강요할 문제가 아니고 ---
인간들은 성경을 보더라도 자기가 갖고 있는 상식과 양심 등을 어떻게 잘 조합하는가 하는 실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재 1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그 전에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예수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는 이유가 ‘너 자신이 스스로 개과천선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속해 있는 영역이 다른 영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 개인에게 당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그 영역, 그 세계에서 우리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다른 의의 세계(예수 안)로 그분께서 옮겼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 결과로서 예수 안의 영역으로 들어온 자는 예수의 피가 모든 더러운 죄를 아예 없애버린 거예요. 다시는 기억지도 아니하겠다고 했지요.
사람들이 이런 영역을 생각지 못하고, 내가 얼마나 괜찮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서 자기 솜씨를 발휘해 보려고 해요.
이번에 박지성 선수가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지요. 신형 엔진 박지성. 영국에서 난리입니다. 신형 엔진이 들어왔다고.
그런데 만약 주님께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에 들어가면요 그 팀을 불 싸질러서 팀 자체가 해체됩니다. 신형 엔진이고 뭐고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는 축구팀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들어가면 거기는 하늘나라가 되지 괜찮은 축구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죽어버리고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 그런 대상이 되지 우리가 새로운 양심을 가지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양심이란 말이 서른 군데 정도 나와요. 여기에서 양심이 뭔가 하면, 헬라인들이(유대인들은 양심이란 말이 없습니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기호, 단어를 가지고 그것을 복음화 시키는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양심은 무엇인가 하면, 마음이에요. ‘네 마음이 이제는 딴 마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양심이라고 할 때, 이 양심이 다른 것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영향을 준다는 것이 헬라인들의 인간구조인데 이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 110층이다.’ 고 했을 때 이것이 틀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110층이 있다는 것이 하늘나라와는 상관 없잖아요.
‘110층이라도 주께서 심판하실 날에는 불타버린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사도바울이 표현을 쓸 때, 양심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할 수 있지만 그 양심이란 것은 원래 있는 양심으로는 되지를 않고 새로운 양심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양심껏 말하는데 내가 생각키에 너희들에게 책잡힐 일은 하지 않았다.’ 혹은 ‘ 내 양심이 증거하노니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 이런 이야기 하거든요. 여기에서 양심은 마음이란 뜻으로 해석하면 다 풀이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양심하나 괜찮아서 이 양심 잘 굴려서 나머지 불건전한 죄악된 것이 점차 변화되어 간다는 이런 사고방식은 도무지 성경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선악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양심이고 뭐고 몽땅 예수님의 새로운 영역 속에 퐁당 빠지게 되어 있어요. 심지어 머리카락도 세시고 발걸음도 세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전체가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교재 12페이지를 봅시다.
[소크라테스]
“그들이 불성실하고 간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양심에 찔림을 받을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미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신적인 요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데모크리투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란 죽을 운명을 갖고 있기에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면서 악행을 의식하기 때문에 한평생 처참한 고통에 시달리고 사후 세계에 대해 그릇된 추측을 한다. 양심이 대중의 마음속에서는 사후에 신의 손에 달려 있을 징벌과 관계있다.”
네가 하는 행동에 대해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양심이 고발한다. 이미 데모크리투스라는 사람은 소크라테스 훨씬 이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미 신적인 기능인 양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 구원 받습니까? 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입니까?
인간은 알아요. 뭘 압니까?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어찌했건 악은 억누르고 선을 추구하려는 것을 양심이란 말로 그들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주체의 절대성으로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양심이 있고, 이렇게 무엇이 착하고 무엇이 악한가를 알기 때문에 신께서 나의 주체를 영원불사의 존재로 만들 것이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이방인들의 종교성입니다.
종교성은 나를 영원불사의 존재로 만듭니다. 영원불멸의 종교. 양심이 있는 주체는 영원히 살아야 하지 않는가. 영원불멸설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너의 영원불멸이 아니고 주 예수의 나라의 영원불멸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영원불멸해요. 왜냐하면, 악인들도 지옥에서 불멸해요. 따라서 영원불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위한 영원불멸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비품, 어떠한 장치로서 영원불멸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참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양하기 위해서 천국과 지옥에서 한쪽에서는 영원한 형벌에, 한쪽은 영원한 복락을 누려야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주님의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쓸데없이 우리가 천당 가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 안에 있으면 그것이 천국으로 부름 받은 하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려운 것을 제가 나름대로 쉽게 한다고 했는데, 다음 시간에는 천주교의 윤리관에 대해서 좀더 체계 있는 논리를 공부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