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는데요, 누구 댁도 누구 댁도 오고, 그런 분위기가 가능하겠습니까, 오늘 저녁에 촬영할라 카거든요.”
“그거야, 우리가 늘 하는 건데요, 뭐!”
피디가 오늘 저녁에는 대본에 있는 대로 마을 사람들이 정답게 모여 저녁을 함께 먹는 장면을 촬영하고 싶은데 그런 장면을 찍을 수 있겠느냐고 하자, 정자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이웃끼리 자주 하는 일이라 어려울 게 없다고 했다.
며칠 전, 방송국에서 이장에게 전화가 왔다고 했다. 동네 아무개 분이 신문에 쓴 ‘대문을 괜히 달았다’라는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아, 그 글처럼 이웃끼리 정답게 사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은데 협조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묻더라고 했다.
그 글이란 내가 중앙지 J일보 에세이란에 기고한 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제2의 인생을 조용한 한촌에서 살기로 하고 이 마을에 담장이며 대문까지 잘 갖추어진 집을 짓고 사는데, 이웃들이 서로 나누고 정답게 오가며 살고 있어서 대문이 필요가 없더라고 했다.
그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동네의 정겹게 사는 모습에 대하여 전화로 서신으로 인터넷 댓글로 많은 관심을 보내오고, 심지어는 직접 찾아와 사는 모습을 보고 가기도 했다. 급기야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으로 제작하고 싶다며, 내 글을 대본으로 삼아 촬영을 하러 나온 것이다. 농촌 사람들의 정겨운 삶의 이야기를 그려 매주 금요일 오후 5시40분에 방영하는 <고향 에세이 ‘사노라면’>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할 것이라 했다.
방송국에서 나온다고 한 날, 이장은 마을 회관에 동네 사람들을 다 모이라고 했다.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며 우리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자고 마을 사람들을 독려했다.
점심을 먹던 참에 방송국 사람들이 왔다. 동네 앞 냇물에서 고기를 잡아 끓인 매운탕으로 점심을 함께 먹고 촬영에 들어갔다. 먼저 마을 정자에 함께 모여 동네의 여러 가지 사정이며 서로 정을 나누고 사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사람들은 한결 같이 ‘우리 마을은 네 것 내 것 별로 가리지 않고 서로 나누며 돕고 살고 있다’고 했다. 이 마을에 조상 대대로 살면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어느 할아버지 이야기며, 이 동네가 좋아 찾아와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엮어졌다.
공직을 은퇴하면서 이 마을에 또 한 생애를 의탁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성 씨와 내가 등장했다.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듯한 아늑한 지형이며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앞내가 좋아 자리를 잡고 보니, 그런 산천 탓인지 인심도 좋아 이웃들과 정답고 의좋게 잘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피디는 내일 아침까지 마을에 머물면서 촬영할 스케줄을 알려주고 잘 도와 달라며 카메라를 옮겼다. 열심히 일하는 분의 모습을 찍고 싶다며 조 씨의 과수원을 찾았다. 과수원에서는 마침 조 씨와 부인 그리고 한 이웃이 힘을 합쳐 사과 봉지 씌우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피디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 소출이 어떨 것 같으냐, 농부에게 시집와 사는 게 어떠냐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쓰면서 여러 각도의 장면들을 찍어나갔다. 일하는 사람들은 웃기도 하고 푸념도 하며 일손을 이어나갔다.
우리 집으로 왔다. 내 글의 배경과 무대가 된 대문이며,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놀았던 원탁을 보고 싶다고 했다.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대문을 보여주고, 마을사람들과 모여앉아 삽겹살을 구우며 정담을 나누던 탁자며 그 자리서 상추를 뜯어 먹던 텃밭을 찍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데 마침 앞마을 먼갓할매가 다듬어서 삶아 먹으라며 머위줄기 한 줌을 들고 왔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글 속에 산나물이며 푸성귀를 이웃과 서로 나누어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마치 연출이라도 한 듯, 촬영 현장에 들고 나타난 것이다.
“보시다시피 우린 이렇게 삽니다. 하하하!” 나도 피디도 유쾌하게 웃었다.
피디는 온갖 사연이 어려 있을 듯한 할머니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나물을 전해주고 가는 할머니 뒤를 따랐다. 논두렁길을 따라 할머니 집으로 갔다. 마당에는 감자가 자라고 할머니는 빨래를 하기 위해 수돗가에 앉았다. 피디는 일찍이 홀로되어 어렵게 남매를 키워 다 성가시키면서 꿋꿋하고도 힘겹게 살아온 인생역정을 그려내게 했다. 고되고 힘든 삶의 과정을 소탈하게 엮어내는 할머니의 이야기도 뭉클했지만, 화제를 이끌어내는 피디의 솜씨도 놀라웠다.
할머니 집을 나와 골목길을 지나다가 읍내에 다녀오는 오천할머니를 만났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멋쟁이 할머니라 소개했다. 읍내 노래교실에 가서 노래를 배우고 오는 길이라 했다. 피디는 고샅에 멈춰 선 할머니에게 기어이 배운 노래를 부르게 했다. 할머니는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피디는 박자를 맞추었다. 피디의 자연스런 연출 솜씨가 감탄스러웠다.
아내와 부인네 몇 사람이 조 씨 집 대문간에 모여 앉았다. 먼갓할매가 갖다 준 머위줄기며 파와 상추를 다듬고 있었다. 저녁에 조 씨 집에서 함께 먹을 저녁상의 찬거리를 장만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부인네들이 둘러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는데, 뒷집 조합댁이 “형님들 뭐하시니껴?”하고 나타나 함께 다듬어 집 안으로 가져간다. 피디는 멀리서 혹은 아주 가까이서 카메라 앵글을 고르며 손 모아 정성스럽게 다듬는 손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조 씨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는 부인네들이 나물을 무치고, 된장을 끓이고 생선을 굽고, 거실에서는 남정네들이 술잔을 나누며 오늘 한 일이며 내일 할 일들을 이야기한다. 뒷집 안 씨 부부도 아랫마을 천 씨 부부도 찾아왔다. 모두들 어서 오라고 반기며 자리를 내어준다. 부엌에서는 나물이 주물러지고 된장이 끓고 있다. 카메라는 나물 무치는 손매와 함께 보글보글 끓는 된장을 클로즈업 시킨다.
부인네들이 상을 내온다. 남정네들이 앉은 탁자 위에 나물 반찬으로 그득한 상이 차려지고, 부인네들은 큰 양푼에 밥을 부어 갖은 나물을 넣어 비벼댄다. 웃음소리도 함께 비벼 둘러 앉아 먹기 시작한다. 피디는 순간순간들과 장면장면들을 남김없이 카메라 속으로 챙겨 넣는다. 카메라는 의식하지 말라고, 하는 대로 하라고 당부하기도 잊지 않는다.
피디도 촬영을 마치고 함께 앉았다. 찍으면서 보니까 함께 비벼서 먹는 밥이 너무 맛있어 보이더라며, 큰 그릇을 하나 달라고 하더니 밥을 부어 쓱쓱 비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촬영 무대가 된 집 주인 조 씨가 말했다.
“사노라면 이런 일도 있다 아입니까!”
피디가 술 크게 밥을 떠서 먹으며 웃었다.
취기에 젖은 이 씨의 홍소가 터졌다.
“얼매나 존노! 아하하!”
“하하하-!” 모두 웃음보를 터뜨렸다.
어둠살 짙은 창 너머 총총한 별이 웃음 쏟아지는 창 안으로 빛 밝은 조명을 쏘아댔다.
고향 에세이 한 편이 여물어 가고 있었다.♣(2012.6.8.)
※ 위 내용은 2012. 6. 15. 17:40 KBS1(대구) TV로 방송될 예정입니다. |
첫댓글 아주 특별한 경험의 에피소드입니다. 촬영하시는 내내 얼마나
즐거우셨을까요? 그 날은 모두가 주인공이 되셨겠네요.
아주 재미있게 촬영장(?)을 엮어주신 교장 선생님, 특별한 독자가
되어 읽고 가는 듯 합니다. 방송 너무 기대가 됩니다.
재미있게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제 글의 반향이 여기에까지
이르리라 저도 상상을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서로
인정 있게 살아나가는 일을 동경하는가 봅니다.
님의 따뜻한 성원에 감사드리며, 더욱 즐겁고 따뜻한
한촌생활이 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