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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곡 유튜브 조회수 3000만회… 가수 박인희의 귀환
[월간조선]
"옛 노래 부르는 흘러간 가수로 남지 않겠다"
"'유기농 음악'에 공감해 50여 년간 성원 보내주신 팬들께 감사"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
입력 2024.10.03. 09:44업데이트 2024.10.03. 09:51
‘한국 포크의 전설’ 박인희(朴麟姬·78)씨는 가수, 시인, 방송인이란 세 가지 타이틀을 갖고 있다. 1970년 혼성듀엣 ‘뚜와 에 무와(프랑스어 ‘너와 나’)’로 데뷔했고, 1972년 솔로로 독립한 후 ‘모닥불’ ‘봄이 오는 길’ ‘방랑자’ ‘목마와 숙녀’ ‘그리운 사람끼리’ ‘끝이 없는 길’ 등 시적 가사와 맑은 목소리로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그녀가 1965년 쓴 시 ‘얼굴’은 김소월의 ' 진달래꽃’, 윤동주의 ‘서시’, 노천명의 ‘사슴’ 등과 함께 《세계명시선집》에 이름을 올렸다.
1세대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잘나가는 음악 프로 DJ였으나, 1981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이랬던 그녀가, 2016년 35년 만에 컴백해 전국투어 공연을 하고, 8년 만에 다시 귀국해 지난 6월 14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단독 콘서트를 가져 성황리에 마쳤다. 오는 9월 21일 같은 장소에서 앙코르 공연을 준비 중인 박인희씨를 지난 8월 말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모닥불’과 ‘재회’
박인희씨는 “2016년 전국투어 콘서트와 팬미팅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이래, 자고 일어나면 유튜브 조회수가 1만 회씩 쑥쑥 늘어나는 현상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했다. 공연기획사 비전컴퍼니에 따르면, ‘봄이 오는 길’ ‘모닥불’ ‘하얀 조가비’ ‘방랑자’ 등 1970년대 발표된 히트곡 모음이 현재 유튜브 총 조회수 3000만 회에 육박하고 있다. 특히 KBS가 제작한 유튜브 단일 영상 <불후의 명곡-박인희, 35년 만의 첫 무대, 끝이 없는 길>은 1000만 명 조회를 넘어 2021만 회(9월 8일 현재)를 기록 중이다.
이렇게 열광적 호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저도 믿기지 않는다니까요. 기획자분께 농반진반으로 제가 예쁘길 하냐, 젊기를 하냐고 이야기를 해요. 예전의 맑고 고운 걸 찾으시는 분들은 지금의 제 목소리에 조금 섭섭해하시지만, 연륜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는 분들도 있어요. 옛 노래를 부른 가수를 ‘현재 진행형 가수’로 만들어주는 팬들께 감사하는 마음뿐이죠. 음악이 연극보다 생명력이 길다는 걸 실감합니다.”
1970년대 이후에 ‘모닥불’은 대학가 MT에서 수건 돌리면서 불렀던 노래인데요, 수많은 히트곡 중에서 가장 아끼는 곡은요?
“아무래도 ‘뚜와 에 무와’로 듀엣 활동하다 솔로로 처음 발표한 자작곡이 ‘모닥불’이라 애착이 가지요. 그런데 정말 좋아하는 노래는 ‘재회’라는 곡이에요. ‘그날이 언제일까/ 우리 다시 만나는 날/ 가슴에 문을 열고 너를 반겨줄 것을…/ 비바람 몰아쳐도 나는 너에게 가리/ 어여쁜 모습으로/ 너도 내게로 오라….’ 이 구절을 가장 사랑해요.”
‘단짝 동창’ 이해인 수녀
박인희씨는 기자에게 최근 재출간한 《박인희 컬렉션》 (마음의숲)을 펼쳐 보이며 “옅은 하늘색 책 표지를 보니, 마치 잃어버린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설렌다”며 “아직도 비닐 포장을 뜯지 않은 채 집에 보관해두고 있다”고 했다. 책은 풍문여중 동창인 이해인(李海仁) 수녀와 주고받은 편지부터 1980년대 한국과 미국에서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하며 차곡차곡 적어둔 시까지 솔직 담백한 글들로 가득하다. 《박인희 컬렉션》에는 박인희의 산문집 《우리 둘이는》(1987년)과 시집 《소망의 강가로》(1989년), 《지구의 끝에 있더라도》(1993년) 등 세 권의 책이 들어 있다.
이해인 수녀는 풍문여중 시절 단짝이다. 특히 산문집 《우리 둘이는》에는 이해인(세례명 클라우디아) 수녀와의 각별한 우정을 다룬 글이 여럿 담겨 있다. 박인희씨는 “출판할 생각도 없이 일기처럼 써놓은 글을 이사 갈 때 버리지 않고 고이 모아서 책으로 냈다”며 “처음 발간했을 때도 써놓은 글을 읽으면 부끄러운 마음이 들까 봐 고치는 작업조차 거치지 않았다”고 했다.
박인희의 솔로 앨범에 실은 ‘얼굴’은 박인희가 친구 이해인을 떠올리며 직접 쓴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풍문여중에 입학하면서 이해인(본명 李明淑)과 박인희(본명 朴春湖)는 처음 만났다. 박인희씨는 “입학 무렵, 교장 선생님 훈화 때 강당에서 머리를 양갈래로 딴 해인이를 보고 한 반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쪽지 편지를 책상에 넣었다”며 “해인이와 저는 부모님께도 말하지 못할 속마음을 쪽지 편지로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했고, 해인이를 만나고 나서 나의 장난꾸러기 성격이 차분하고 사색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박인희씨는 “해인이는 저를 봄호수(춘호)라고 불렀고, 제 목소리를 들으면 어린 시절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빛깔로 되살아나곤 한다며 좋아했다”면서 “해인이와 함께한 풍문여중 시절의 유일한 사진도 제 생일(3월 15일)을 기념해 해인이가 ‘소월 시집’을 선물하면서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라고 했다.
절판됐던 산문집과 시집을 모아 재출간을 한 이유가 있나요?
“예전 산문집이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였는데, 시중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희귀본이라는 말을 듣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재출간을 결심했어요. 그런데 저도 책이 없었고, 옛 단행본을 찾으려 중고 서점을 헤매는데 한 팬이 나타나 고이 간직하고 있던 책을 저에게 선물했어요. 수십 년 전 미국에서 제가 보낸 시집 원고를 편집했던 담당 직원이 세월이 흘러 출판사 대표가 되고 제 책을 재출간하니, 인연이라는 것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극배우를 꿈꾸던 소녀
박인희는 고교(풍문여고)에선 문예반과 신문반장, 대학(숙명여대 불문과)에서는 초대 방송국장을 지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내성적이라 중·고교 내내 수학여행도 가지 않았다”면서 “그런데도 마이크 앞에만 서면 말이 술술 나왔다”고 했다.
처음부터 가수를 꿈꾸었나요.
“전혀 아니었어요. 한때는 연극인이 될까 생각했죠. 여고 2학년 방송반 때인데, 전국 연극 경연대회에 학교 대표이자 <춘향전> 주인공을 뽑는데, 누군지 모르지만 참 좋겠다 생각했죠. 김성옥(金聲玉) 선생님(전 극단 신협 대표)이 총연출을 맡았는데, 두 번의 오디션 끝에 춘향이 적임자를 찾지 못하다가 국어 선생님의 추천으로 절 보신 거예요. 제가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역할 테스트를 하기도 전에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하셨어요. 긴 산문(散文)을 읽어도 시처럼 느껴지는 연극배우 최상현(崔相鉉)을 떠올리면서 저를 ‘여자 최상현’이라 생각하셨대요.”
그렇게 춘향 역을 맡게 됐군요.
“당시 고3 선배이던 배우 김을동(金乙東) 선배가 방자 역할을 했고, 훗날 김성옥 선생님과 결혼한 손숙(孫淑) 선배(전 예술의전당 이사장)가 조연출을 했어요. 나중에 손숙 선배가 그때 춘향 역을 하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디션에 참석하지 않은 게 한이 됐대요(웃음).”
풍문여중·고 출신 연예계 선배는 누가 있나요.
“풍문여고 문예반엔 반효정(본명 潘蔓姬) 선배님도 계셨고, ‘대머리 총각’을 부른 가수 김상희(金相姬) 선배 등 쟁쟁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3년 선배인 김상희 선배는 규율반장으로 엄하고 무서운 선배였어요. 그 선배는 반에서 지휘를 했고, 나는 피아노를 쳤죠. 교내 음악경연대회 때 그 선배는 개인상을 받았고, 나는 피아노 반주상을 탔어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이 연예계 활동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 했어요.”
왜 연극계로 나가지 않았나요.
“KBS에서 주관한 전국대학 라디오 드라마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탔어요. 졸업할 무렵, 연극인들이 텔레비전으로 진출하면서 공백이 생기니까 실험극단에서 대졸 출신 신인 전문 연극배우를 선발했는데, 《동아일보》에 제가 수석(首席)으로 합격했다는 기사가 원형 사진과 함께 실린 거예요. 여학교 때 꿈이 연극배우는 아니었지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나니 연극을 미래의 꿈으로 생각하게 됐죠. 그런데 집에서 그 사진이 난 기사를 보고 반대하셨어요. 고민 끝에 순종했지만, 하고 싶은 것을 못 하는 몸과 마음은 점점 야위기만 했지요. 연극 포스터만 보아도 가슴이 내려앉아 애써 얼굴을 돌렸으니까요.”
혼성 듀엣 ‘뚜와 에 무아’ 결성
대학 졸업 후 1970년대 음악 인재들의 집합소인 명동 ‘미도파 살롱’에서 박인희의 운명이 바뀌었다. 미도파 살롱은 미도파 백화점 맨 위층을 빌려 DBS, CBS 등이 공개방송 홀처럼 쓰던 곳이었고, 단골 방문객이던 이해성(DBS 3시의 다이얼), 조용호(TBC 쇼쇼쇼), 김진성(CBS 세븐틴) 등 엘리트 PD들이 출연자 스카우트를 하던 곳이었다. 박인희는 이곳에서 노래 행사 MC를 맡아 ‘Let it be me(에벌리 브라더스)’ ‘summer wine(리 헤이즐우드와 낸시 시나트라)’을 부른 것을 계기로 보컬가수 이필원의 듀엣 제의를 받았다. 쎄시봉이 무명시절의 윤형주(尹亨柱), 이장희(李章熙) 등이 드나든 통기타 본진이었다면, 미도파는 윤항기(尹恒基), 최헌(崔憲), 신중현(申重鉉) 등 록그룹 본진이었다. 이필원도 전언수, 이태원 등과 록그룹을 하고 있었다. 박인희씨는 “노래는 연극을 할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나날들에서 내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한 가닥의 밧줄”이었다며 “가슴에 고인 한숨에 멜로디를 붙인 것이 나의 노래가 됐다”고 했다.
박인희는 1969년 혼성 듀엣 ‘뚜와 에 무아’로 데뷔했다. 박인희는 이필원과 ‘약속’이란 노래를 TBC(프로듀서 이백천)에서 노래하며 가수라는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박인희가 쓴 서정적인 가사에 이필원이 붙인 멜로디가 호평을 받았다. 1집 ‘약속’은 국내 최초로 창작 포크송을 앨범에 실은 사례다.
제가 얼마 전 일산 고서점에서 박 선생님의 솔로 1집 앨범을 구했습니다.
“《조선일보》 ‘나의 현대사 보물’ 코너와 인터뷰하면서 첫 음반으로 나왔던 ‘뚜와 에 무아’ 1집과 ‘모닥불’ ‘목마와 숙녀’ 등으로 인기를 끌었던 ‘박인희 1집’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 꼽았다고 했지요. 사진작가인 주명덕(朱明德)씨가 비원(苑)에서 자켓 사진을 찍어 줬는데, 이 앨범엔 1970년대 학생들 소풍 때 부르던 단골 노래들이 삽입됐죠. 솔로 1집 앨범은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데 용케도 구하셨네요.”
박건호와의 만남으로 ‘모닥불’ 탄생
1972년 박인희는 뚜와 에 무아를 떠나 솔로로 데뷔했다. 혼성 듀엣을 연인 사이로 오해하는 소문이 퍼지면서 팀 해체를 맞았고, 1년 동안 독집 4~5매를 낼 정도로 연습에 매진했다. 그 후 1976년까지 앨범 6장을 냈다. 솔로 1집에서 직접 멜로디를 붙인 ‘모닥불’과 ‘돌밥’ ‘얼굴’을 비롯해 2집에선 ‘방랑자’ ‘봄이 오는 길’ 등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솔로 1집에 실린 ‘모닥불’은 박건호(朴建浩)씨가 작사를 했더군요.
“유난히 추웠던 1972년 겨울로 기억해요. DBS <3시의 다이얼> 진행을 마치고 현관 앞을 막 나서는데, 청년 둘이 찾아와 조심스레 복도 의자에서 일어섰어요. 박건호 작사가와의 첫 만남이었죠. 시집 한 권하고 악보를 가져와 음반을 만들어달라 하는데,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라는 가사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예요. 제가 작곡하고, 박건호가 시를 붙여 ‘모닥불’로 탄생한 거지요.”
솔로 2집 앨범에 ‘봄이 오는 길’이 실렸는데,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죠. 이 노래를 들어야 봄을 맞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요.
“유튜브 쇼츠에 ‘봄이 오는 길’ 영상이 정말 수백 가지가 올려져 있더라고요. 이번 가을 공연에도 팬들이 ‘봄이 오는 길’을 불러달라 아우성이라, 계절에 맞지 않는데 어쩌나 고민이에요(웃음).”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6년 8월, 3집 앨범에 실린 ‘방랑자’를 부르던 모습을 흑백텔레비전으로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나, 그러셨어요? 이태리 가수 니콜라 디바리(Nicola Di Bari)가 부른 노래를 번안해서 불렀는데, 많은 분이 사랑해주셨어요. 이태리 노래 칸초네(canzone)가 우리 가요와 비슷한 정서가 있어요.”
방송사 누비며 DJ로 활동
가수보다 방송 진행자로 더 활발하게 활동했는데요.
“이름 석 자가 알려지고 나니 노래는 더 부를 수가 없었어요. 유명세를 치르기 위해 똑같은 노래를 이곳저곳에서 몇 번이고 되뇌는 앵무새는 결코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노래를 부르기보다 남의 노래를 듣는 쪽이 훨씬 좋았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골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게 더 보람으로 느껴졌어요.”
1971년 ‘뚜와 에 무아’가 TBC 가요대상을 받던 당시, 국내 1호 라디오 DJ로 이름을 날리던 최동욱(崔東旭) 프로듀서를 둘러싼 경쟁이 벌어졌다. 결국 TBC에서 그를 데려갔고, DBS는 그의 간판 프로이던 <0시의 다이얼>엔 윤형주를, <3시의 다이얼>엔 박인희를 급히 섭외해 진행자로 내세웠다. 이 와중에 ‘뚜와 에 무아’ 해체 기사가 났다. 박인희씨는 “여러 차례 주변에서 재결성 제의를 받았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남는 게 아름답다 생각했다”면서 “그 무렵, 최동욱 DJ가 TBC로 옮기기 전 DBS에서 <3시의 다이얼> 더블 DJ를 제안하기도 했었다”고 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박인희는 가수보다 CBS의 <세븐틴>을 시작으로 DBS의 <3시의 다이얼> 등 라디오 DJ로 더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녀는 “이전 ‘뚜와 에 무아’ 시절부터 방송을 했고, 듀엣 해체 후 솔로 활동보다 방송 진행에 재미를 붙였다”면서 “CBS의 <세븐틴>을 할 때는 문공부 장관을 지내신 오재경(吳在璟) 이사장이 스튜디오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직관’하고 퇴근하는 바람에 프로듀서들이 진땀을 흘렸다”며 웃었다.
KBS 쪽에서도 프로그램을 많이 했지요?
“MBC는 유명한 임국희(林菊姬) 아나운서가 하셨고, TBC는 황인용(黃仁龍) 아나운서와 탤런트 강부자(姜富子)씨, KBS는 갓 결혼한 나를 픽업해서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일을 맡기셨어요.”
노래만 한 게 아니라 연기면 연기, 시 창작에다 낭송, 그리고 라디오 진행자… 팔방미인 아닙니까.
“전 뚜와 에 무아 시절부터 라디오 MC와 DJ를 했어요. 정말 염치없게도 방송 DJ나 가수 시절 모두 무명 시절이 없었어요. 종로5가에 있던 CBS의 <세븐틴>을 시작으로 DJ를 하게 됐어요. 가수 활동을 하면서도 레코드사와 특별한 계약조건을 맺었는데,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출연은 하지 않겠다고 계약했습니다.”
시 ‘얼굴’은 이해인 수녀가 모델
시 낭송 말고도 직접 시(詩)를 썼죠?
“제가 여고 시절부터 습작(習作)을 했고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면서 국문학과 김남조(金南祚)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얼굴’이라는 시도 대학 재학 중 국문학과 주최 시화전(詩畫展)을 통해 발표한 겁니다. 이후 노래하고 방송하고, 틈틈이 떠오르는 시상(詩想) 같은 걸 조금 정리해서 시화 수필집 1권, 그다음에 순수 시집이 2권 합해서 3권을 냈습니다. 시 ‘얼굴’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서시’, 노천명의 ‘사슴’ 등과 함께 출판사에서 펴낸 《세계명시선집》에 올랐어요.”
‘얼굴’은 박인환(朴寅煥) 시인의 시라고 알려졌던데요?
“제가 대학 때 1965년에 썼던 시인데, 제가 ‘세월이 가면’과 ‘목마와 숙녀’ 등 박인환의 시를 많이 노래하고 낭송하다 보니 ‘얼굴’도 당연히 박인환의 시를 낭송한 것으로 와전된 거예요. 2005년 문학사상사에서 출판된 《한국 대표시인 101인 선집-박인환 편》 등 ‘얼굴’이 박인환의 작품으로 소개돼 있는 책도 시중에 여럿 나와 있었는데, 사실을 알고는 출판사에서도 바로잡았어요. 연출가 김성옥 선생님이 여학교 시절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를 제 노트에 써주셨는데,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박인환 시인의 시가 너무나 좋았던 거예요.”
친구 이해인 수녀도 ‘얼굴’이 자신을 그리워하며 쓴 시라는 걸 몰랐나요?
“한번은 해인이가 ‘성우 김세원(金世媛)씨가 MBC 음악 프로에서 얼굴 시를 낭송하는데 너무 좋더라, 너도 한번 낭송해봐라’고 해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그때 해인이가 그 ‘얼굴’의 주인공이 자신인 줄 몰랐다는 거예요. 해인이가 KBS 라디오에 연락해 ‘얼굴’이 박인희의 시라고 정정을 해주었답니다.”
박인희가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등에 멜로디를 붙인 ‘시 낭송 곡’들도 큰 인기를 누렸다. 미국 《타임》지나 시집 한 권은 옆구리에 꼭 끼고 다니고, 시 하나쯤은 외워야 하던 시절이었다.
학창 시절 박인환의 시를 줄줄 외우고 다니는 학생이 많았지요. 어떤 계기로 박인환 선생님 시를 낭송하실 생각을 했나요.
“제가 스튜디오에서 노래 12곡 취입을 마치고 스튜디오 불을 끌 때였어요. 스튜디오를 나가려다 감정이 좀 잡혀서 여고 시절 좋아하던 시를 배경음악 없이 외워서 낭송했어요. 그것을 들은 ‘봄이 오는 길’의 작곡가 김기웅(金基雄) 선생님(KBS관현악단장 역임)이 ‘너무 좋다’면서 작곡해 ‘목마와 숙녀’ 배경음악으로 입혔죠.”
지금 당시의 ‘목마와 숙녀’ 낭송을 들으시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감수성이 예민한 20대의 박인희가 낭독한 거잖아요? 지금은 세월이 흘러 모나고 둥글고, 비틀비틀한 박인희가 낭독을 하잖아요? 전 이 시가 이제 가슴으로 다가와요.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는 시구가 정말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전성기에 훌훌 털고 미국행
1970년 혼성 듀엣 ‘뚜와 에 무아’로 데뷔한 박인희는 ‘모닥불’ 등 히트곡으로 활동하며 예술인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았으나 1981년 가수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떠났다. ‘노래하는 시인’이란 타이틀도 뒤로한 채 미국행을 택했다. 그녀가 사라지자 온갖 억측이 난무했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노래와 라디오 진행으로 잘나가던 분이 왜 갑자기 미국으로 떠날 생각을 했나요?
“하루 6시간씩 세 군데 라디오 생방송을 혼자 해낼 만큼 일에 빠져 살았죠. 방송 진행이 천직(天職)이라고까지 생각했어요. 크리스마스도, 새해도, 주말도, 일요일도, 국경일도 없이 오직 생방송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죠.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을 들어도 가슴만 조여들 뿐, 기쁨이 없었어요. 방송 도중 스튜디오를 박차고 그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느니 재충전을 위해서라도 그만하라는 사인이 나오기 전에 제 발로 나가자 생각했죠.”
금방 재충전하고 돌아오셔야 하는데 왜 돌아오지 않았나요?
“처음에 샌프란시스코로 갔다가 로스앤젤레스로 갔는데, 그곳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인 박인희’가 너무 좋았어요. 다른 분들의 노래를 듣는 그 기쁨으로 살았죠. KBS와 MBC에선 돌아오라고 난리여서 가을 개편 때 6개월 만에 돌아왔죠. 그 이후로 KBS에서 6개월 만에 한 번씩 재충전의 기회를 주셔서 방송을 이어갈 수 있었어요. 청취자분들은 제가 1981년도에 떠나서 2016년 콘서트 때까지 미국에 계속 머문 줄로 아시는데, 1994년 귀국해 KBS에서 <박인희의 음악앨범> 프로를 진행하기도 했고요, 1998년에는 KBS의 <저녁의 클래식>을 진행했었죠.”
미국에서 LA 한인방송 개국에도 참여했다면서요?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방송국 개국 움직임이 일었고, 로스앤젤레스에 한인방송이 생겼죠. 개국 때 소설가 최인호씨의 동생 최영호(崔英浩)씨와 아나운서, 프로듀서, 기자 인선 작업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당시에 당대의 방송장이들이 다 모여들었어요.”
LA 한인방송 개국엔 가수 이장희씨, DBS에서 일한 김병우 프로듀서(뉴월드스카이미디어 대표 역임), 왕년의 최고 DJ 최동욱 프로듀서(미주한인방송 사장 역임), MBC 라디오 <여성시대>를 진행한 이종환(李鍾煥)씨가 합류했다.
“최동욱 PD가 <3시의 다이얼>을 맡으셨고, 전 아침 10시 주부 시간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이역만리에 사는 동포들이 1970년대를 풍미했던 두 라디오 진행자의 방송을 현지에서 듣게 되니 ‘귀 호강’을 한 거죠.”
2016년 35년 만에 다시 고국을 찾아 가수 송창식(宋昌植)과 듀엣으로 콘서트를 연 것도 한 팬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1994년 미국에 있을 때, 새벽 시장에서 마주쳤던 한 팬이 어느 날 위암으로 사망했단 소식을 들었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그 친구가 내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던 사람이고, 그때의 엽서가 아직도 남아 있었어요. 생전 내 노래를 다시 못 들려준 게 어찌나 안타깝던지, 고국의 팬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유기농 노래’
2016년 콘서트로 한국 활동을 재개한 박인희는 지난 6월 연세대 단독 콘서트에 이어 KBS 추석 특집 프로그램 <콘서트 7080 플러스>로 팬들을 다시 만났다. 박인희는 오는 9월 21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앙코르 콘서트를 연다. 당시 1600 객석이 한 시간 만에 매진되는 바람에 박인희씨는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9월 연세대 대강당에서 앙코르 공연을 갖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지난 8월 29일 제주 KBS가 추석 특집으로 녹화한 <7080플러스>의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 특집 콘서트에서 그녀는 내일모레 팔순을 앞둔 가수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역’의 포스를 뿜어냈다. 박인희씨는 “오랜 벗을 만나는 느낌으로 무장을 해제한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니까 관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분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걸 보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KBS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데 담당 PD가 저 몰래 받아온 해인이의 영상 편지를 틀어줘 깜짝 놀라기도 했다”며 “’섬 아기’ 등 에메랄드와 다크블루 제주 바닷가를 연상시키는 노래들로 꾸며 행복한 시간이 됐다”고 했다.
박인희는 오는 9월 21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단독 콘서트를 연 뒤 한국에 머무르며 곡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1978년 이후 음반 활동이 멈췄으니 새로운 음반을 낸다면 거의 50년 만입니다. 시간의 공백을 돌려주신 팬분들께 감사하고, 단 한 사람만이 내 노래를 기다린다 해도 그를 위해 저의 세월에 숙성된 ‘유기농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가수로, 방송인으로, 시인으로 살아왔다는 박인희씨는 앞으로도 “더 이상 흘러간 옛 노래, 옛 가수로만 머물러 있지 않겠다. 20~30대 젊은 층에도 어필하는 감성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에 새로운 자작곡을 공개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관객들이 왜 가수 박인희에게 열광하는가를 생각했다. 한 방송 진행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수 박인희는 각박하고 혼탁한 세상에 산소 같은 목소리다. 20대의 그녀가 청아한 목소리로 ‘봄이 오는 길’을 불렀다면, 팔순을 눈앞에 둔 박인희가 부르는 ‘봄이 오는 길’은 그 청아한 목소리에 인생의 깊이 한 방울을 더한 것이다. 그 소리에 우리 모두가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