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거나, 생령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기 전 우리는 ‘사람’이요, 생기를 호흡하였으면 우리는 ‘생령’입니다. ‘사람’은 흙뭉치로 만든 정교한 환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걸작이라 해도 조각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은 아름답지만 정교한 조각상보다 더 정교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창조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람’은 ‘생령’이 되기 전엔 미완성 작입니다. ‘생령’이어야 완성작입니다. ‘사람’입니까, ‘생령’입니까. 생기를 머금고 있는 생령입니까, 생기를 호흡하지 않은 먼지뭉치입니까. 둘 사이에 중간은 없습니다. 생령과 먼지뭉치 사이에 제3의 존재방식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령’이거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먼지뭉치 혹은 조각상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기, 즉 하나님의 숨은 성령을 뜻합니다. “예수께서...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1~22) 하나님의 생기를 머금는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육적 존재가 영적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육을 찌우기 위해 열매를 취하던 존재가, 영을 살피기 위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 즉, 하나님의 생기를 머금은 ‘생령’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경은 열매 맺는 나무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표현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3) 하나님의 생기를 머금은 ‘생령’은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는 나무 같아야 ‘생령’입니다. 생령이 되어 열매를 맺는 것, 이것이 ‘복’입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만 받으면 좋은데,
하나님은 복도 내리시고, 저주도 내리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신28:2~16) ‘복’도 있고, ‘저주’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잎은 무성한데, 열매 없는 나무를 보셨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에게 저주의 말씀을 하십니다.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21:19) ‘열매 없는 나무’는 예수께서 직전에 들어가셨던 ‘거룩함이 없는 성전’입니다.(마21:12) 성전을 찾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사람이 지닌 제물에 집중하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이 ‘열매 없는 나무’같습니다. 나무는 자신이 맺은 열매를 먹는 게 아니지요. 성전도 나무처럼 열매를 맺어 사람들로 먹고 마시게 하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열매를 빼앗는 강도가 되었으니, ‘열매 없는 나무’인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맺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인적·물적 자산도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 밖,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지 못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교회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열매를 맺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나무가 되어 열매를 주는 것, 이것이 교회의 복입니다.
열매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어, 희락의 열매를 맺어, 화평의 열매를 맺어, 오래참음의 열매를 맺어, 자비의 열매를 맺어, 양선의 열매를 맺어, 충성의 열매를 맺어, 온유의 열매를 맺어, 절제의 열매를 맺어 다른 사람을 주는 것이라면, 굳이 열매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광합성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잎사귀를 맺을 뿐, 열매가 없는 이유입니다. 또, 유실수는 대개 수령이 짧습니다. 큰 열매를 맺는 나무일수록 수령이 짧습니다. 나무가 사람이나 짐승이 먹을 만한 열매를 맺는 건, 자기 수령을 단축하는 행위입니다. 유실수처럼 열매를 맺는 수고를 하다가 생명마저 단축될 수 있다면 굳이 열매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정원수처럼 열매 없이 오래도록 울울창창하고자 하는 것, 이것은 교회의 저주입니다.
햇빛을 독점하려는 양 잎의 무성함을 자랑할 뿐 열매를 맺지 않는 성전 때문에, 배고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골짜기 같은 바닥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골짜기 바닥은 늪처럼, 딛고 선 발을 삼키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가장 낮은 땅보다 더 낮은 골짜기입니다.(사11:9)
바다의 바닥에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있고, 너도 있습니다. 바닥에 있는 ‘나와 너’를 하나님께서 그저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산에게 명하여 바다의 바닥을 메우려 하십니다. 산을 떠다가 바다를 메우고자 하십니다.(마21:21) 산을 떠 바다를 메워, 늪 같은 골짜기에 있는 사람을 끌어올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맺은 열매를 누군가가 먹고, 열매 속 씨앗이 골짜기보다 낮은 바닥, 바다에서 나무가 되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열매를 맺어 먹이는 나무에겐 복이 있고, 제물을 빼앗는 강도처럼 열매를 삼키는 성전에겐 저주가 있습니다. 열매를 먹어 저주를 받겠습니까, 열매를 맺어 복을 받겠습니까. 다시, 인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